어제 집앞에서 있었던 사건이 일단락 된 다음날. 벨은 어김없이 와이즈에게 찾아가기 위해 방부들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루미나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저번에 사건에 휘말렸던 잔돈은 어떻게든 잘 이야기가 됐는지 여전히 잡화점 141에서 형제들과 함께 일하는 중이었다. 비록, 저번 일이 자꾸 신경쓰여 꿀꿀한 모습이긴 했지만, 구매와 문의가 그를 잘 다독여주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면회증을 카운터에서 받고 와이즈가 있는 병실로 다가갔다.
"오빠, 나 왔어!"
그리고, 그녀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선 다음 순간-
"왔구나."
"...어?"
눈에 보이는 풍경은 다름아닌 환자복에서 평소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짐을 챙기고 있는 와이즈였다. 좀 전부터 준비 중이었는듯 병실의 물건들은 대부분 정리가 끝난 뒤였고, 그의 가방은 뚱뚱하게 채워진 상태였다.
그 모습에 벨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당황한 눈빛을 보내니, 와이즈가 설명해준다.
"오늘 퇴원이야. 짐 싸서 가래."
"엥?! 갑자기 퇴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저번에 2주는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아직 일주일도 안 지났잖아! 왜 갑자기 퇴원이래?"
"담당의랑 이야기해서 조기 퇴원을 받아냈어. 심심해서 못 틀어박혀 있겠더라."
"그게 말도 안되는 소리야!?", 벨이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짐을 챙기고 있던 그 손을 붙잡고 그와 눈을 마주친 벨은 말을 이어나갔다.
"오빠 머리 다쳤잖아, 그런데 이렇게 일찍 퇴원하면 안돼!"
"난 괜찮아, 벨. 엑스레이 막 찍고오던 참인데 머리에 금 간게 아물기 시작했데. 각서를 쓰긴 했다만, 아무튼 상태가 괜찮아졌으니 퇴원을 받아낼 수 있었던 거고."
"보통 금 간게 다 나으면 퇴원이나 하지 이렇게 불쑥 나갈 수 있을리 없잖아!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을 한거야!?"
"아무 일 없어.", 와이즈가 덤덤하게 말했지만 벨은 믿지 않았다.
"거짓말 하지 마! 더 이상 숨기는 거 없을거라고 했잖아, 말해줘!"
"벨... 제발-"
"만약 말 안해주면 병실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할거야!"
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에서 사랑스러운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벨의 말을 들은 와이즈는 얼척없다는 표정으로 벨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벨에게 다가서고, 그 모습에 당황한 벨이 떨리는 눈동자를 지으니 그는 말 없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붙잡아 하늘로 들어올렸다.
마치 깃털 들듯 가볍게 들린 벨의 몸. 벨은 허공에 띄워진 채 그 가녀린 다리를 버둥거렸고, 와이즈와 눈을 마주쳤다.
"...못 나가게 한다라... 이렇게 약한데?"
"오, 오빠...!"
벨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와이즈는 벨을 놓아주기 짐을 마저 챙겼다. 그리곤 재빨리 병실을 떠났고, 벨은 그런 와이즈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와이즈는 이미 복도 너머로 사라진 뒤였고, 그녀는 곧바로 1층의 카운터로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에서 퇴원 수속을 마치며 결국 병원 바깥으로 나가는 와이즈가 보였고, 벨은 그런 와이즈의 앞을 다시 한번 가로막으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인지 빨리 말해!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무서운 짓을 할거냐는 듯, 와이즈가 조용히 눈동자를 게슴츠레 떴다. 후드와 복면 아래로 반짝이는 초록 벽안이 그녀를 떨게 만들었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하, 한동안 집에 안 돌아올거야! 가게 일도 안 할거고! 이아스랑 06호, 18호 전부 데리고 나가서 니콜네에 있다가 오빠가 울며불며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오빠 얼굴 안 볼거야!"
"지, 진짜야!", 이 무슨 괴상한 농담인가 싶겠지만, 벨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와이즈를 압박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와이즈가 자신과 방부들을 포함한 가족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얼마나 외로움을 잘 타는지 알기에 그런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비록 그렇다 한들 여전히 농담처럼 들리지만.
"장난 아니야, 오빠가 무슨 일 하는지 제대로 말 안하면-"
"마침 잘 됐네. 니콜네에 일주일 정도 있다 와."
"...어?"
망설임 없는 와이즈의 대답에 벨이 넋이 나간 듯 소리냈다.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시는 듯 했고,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온몸으로 뻗어나갔다. 오빠가 뭐라고 한거지? 그녀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와이즈는 그런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았고, 잠시의 침묵 후 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 무슨 말이야, 오빠...?"
"잠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거든. 한동안 집에 못 돌아올 것 같으니까, 혼자있지 말고 방부들이랑 같이 니콜네 사무소에 가있어. 니콜한테는 내가 얘기해 둘테니까-"
"하, 할 일이라니! 무슨 일이길래 일주일이나 집에 안 올려는 거야...!?"
벨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며 와이즈에게 달라붙었다. 그의 옷을 붙잡고 끌어당기며 패닉에 빠진 듯 떨리는 눈동자와 목소리를 숨길 수 없는 그녀였다. 와이즈는 그런 벨의 모습에 당황하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떨어트려놓으려 했다.
"벨, 이 일은 네가 알아서 좋을게-"
하지만, 벨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와이즈가 가볍게 힘을 주어 떨어트리려 해도 벨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내듯 그의 옷을 붙잡은 채로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왜, 왜 무슨 일인데 나한테 말 못하는 거야?! 왜 일주일이나, 일주일이나 나한테서 떠나려는 거야...!?"
"벨."
"싫어, 안 떨어질거야, 절대 안 떨어질거야! 오빠가 무슨 일을 하든 나도 그 곁에 있을거야, 절대로 안 떨어져, 더, 더는 떨어져있고 싶지 않단 말이야-!"
"벨...!"
"싫어! 안 들을래, 이제 모두 알잖아...! 서로의 비밀은 전부 알고 있잖아! 내가 하는 일도, 오빠가 하는 일도! 이제 숨기겠다고 하지 않았는데, 근데 왜 내 곁에서 떠나려는거야-!!!"
"벨-!", 와이즈의 짧고 굵은 한마디가 패닉에 빠진 벨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녀가 정신을 다잡고 보니, 병원 입구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벨이 그 시선에 입술을 떨며 어찌할 줄 모르는 중에, 와이즈가 주변을 한번 쓱 살피고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끌고가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병원 부지 안의 어느 벤치, 와이즈는 벨을 앉힌 뒤 주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벨에게 건내주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벨은 고개를 숙인채 침울해져 있었다. 방금까지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와이즈는 그런 벨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벨, 난 네 곁을 떠나겠다는게 아니다. 그냥 예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을 끝내려고 하는 것 뿐이지...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그게 대체 무슨 일인데...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거야...!"
"벨, 난 널 무엇보다 사랑한다.", 와이즈가 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세상 누구보다 널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어. 하지만... 하지만 이 일은 네가 알아서 좋을 게 아니야. 오직 나만이 알고, 나만이 처리해야하는 일이지. 굳이 네가 마음에 담아둬선 안돼."
"마음에 담아둬선 안된다고!?", 벨이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심이 서려 있었다. 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와이즈에게 외쳤다.
"나, 난 오빠 동생이야...! 이제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이고, 나한테도 오빠는 마지막 남은 가족인데, 근데...! 근데 어떻게 내가 신경을 안 써? 오빠는, 오빠는 며칠 전에 나 때문에 죽을 뻔 했잖아, 그런데 다 낫기도 전에 나한테 말해줄 수 없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왜 어떻게 내가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수 있겠어!?"
"벨... 벨!", 와이즈가 벨의 양빰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느새 벨의 눈동자에선 격앙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스스로의 몸을 떨며, 와이즈에게 빌기 시작한다.
"그냥... 그냥 가지 마 오빠... 용병 일 같은 거 이제 그만둬...! 이제... 이제, 오빠가 위험해지는 거 싫단 말이야... 그냥... 그냥 나랑 같이 로프꾼 일이나 하자... 오빠는 나보다 실력도 좋을테니까 금방 적응 할거야...!"
"벨, 그렇겐 안돼."
"왜 안된다는 거야...!?"
"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와이즈가 나직하게, 하지만 절규에 가깝게 말을 내질렀다. 그 말에 벨의 눈동자가 커졌고, 와이즈가 체념이 깃든 눈동자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벨... 난...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내가 이 일을 그만둬버린다면, 내가... 내가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위험해진다고...! 너, 니콜이랑 토끼굴, 벨로보그 중공업 사람들까지 다!"
"난... 난 여기서 내려올 수가 없단 말이야...!", 와이즈의 말에 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려올 수 없다는 걸까, 뉴 에리두 최강최흉의 독립용병 자칼을 그만둘 수가 없다는 걸까. 와이즈는 벨의 눈빛에 침통한 표정을 짓곤, 떨리는 눈동자로 말한다.
"벨... 넌 내... 내 가치의 증명이야...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내 유일한 증명이지... 너마저 지킬 수 없다면 난... 난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다. 그러니 내가 이 일을 끝낼 수 있게 해주렴..."
"나도 마찬가지야...! 오빠 없이는 나 살 수가 없어... 오빠가 곁에 있어줘야한단 말이야...!"
"돌아갈게. 일이 끝나는대로 돌아갈게... 난 널 영원히 떠나는게 아니니까... 그냥... 부탁이다."
벨과 와이즈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무슨 일이 생기든 숨기지 않겠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한 자책이 그 눈동자에 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선 반드시 끝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벨은 그 눈동자 너머에 서린 강한 결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벨은 양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줘... 반드시... 멀쩡하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할게... 그래, 반드시 돌아갈게."
와이즈의 말에 벨은 그의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자켓 위로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쟁이인 와이즈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벨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그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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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단지 랜덤 플레이로 돌아간 두 사람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들을 반겨주는 방부들을 맞이해야 했다. 특히나 와이즈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방부들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절망했으니, 그의 귀환이 오죽 기쁠까. 와이즈는 자신의 발치에 모여드는 작은 세 방부들을 상대해주어야 했다.
"어이, 꼬맹이들. 나 없는 동안 별 입 없었지?"
"웅나...! 웅나웅나!(와이즈, 걱정했어요...!)"
"웅나! 웅나나, 웅나!(이제 몸은 괜찮은거에요?)"
"웅나, 웅나우나따!(가게는 저희가 보고 있을테니 가서 쉬세요!)"
"그래그래. 고맙다. 이 뒷방 늙은이는 가보마."
자신을 반겨주는 가족들에게 그리 말하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와이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벨의 눈에선 여전히 걱정과 의문이 묻어나왔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방부들은 그런 벨의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와이즈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근처에 던져놓고 자신의 자칼 PDA를 꺼냈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내 스피커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잠잠하길래 죽은 줄 알았다."
"걱정마. 네 최고 고객은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으니 돈줄 마를 날은 없을거다."
들려온 목소리는 그가 애용하는 암시장의 장비상인 반조의 것이었다. 반강제로 며칠 간 쉬었던 그와 달리 오늘도 한창 일이 바쁜 모양인지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제자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반조는 알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그가 이렇게 갑자기 연락하는 건 분명 큰 일이 있다는 것을.
"내가 전화한 이유는 알거야. 우리 사이에 긴말은 필요없을테니 바로 말하지, 옷이 필요해."
"어떤 거."
"좀 묵직한 녀석으로.", 그가 말했다. "군용 소총탄을 막을 수 있을 레벨에, 경량 방탄복이 아니라 상체를 대부분을 감싸는 중량 방탄복으로 준비해줘."
"그리고 폭약에, 사무라이 엣지에 쓸 대용량 드럼 탄창도 필요해. 은신용으로 쓸 망토같은 것도 하나 필요하고. 9mm 하이드라-쇼크 탄도 있는대로 준비해둬. "
"너답지 않네. 속전속결이 네 전투타입인데, 기동성을 버리고 화력과 중장갑에 중점을 준다라... 무슨 일 있었나?"
"나중에 끝나면 말해주지. 아무튼... 오늘 밤까지 준비해 줄 수 있나?"
"네 요구는 항상 까다로웠지만, 오늘은 등골 휘어지게 만드는군. 그러니까, 중량 방탄복에 거리 몇 개는 우습게 날려버릴 정도의 폭약과 산더미같은 탄약을 몇 시간 만에 준비해 달라고?"
반조의 말에 자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불가능한가?"
반조가 말했다.
"긴급 작업이니 추가금을 받도록 하겠어."
자칼이 미소지었다. 그가 반조의 단골이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무리한 요구라서 못 들어줄 듯이 말하다가 추가금을 요구하며 자신의 일정에 맞춰주는 그의 실력, 그 실력에 반하여 암시장에 발을 딛이고 나서는 그의 단골이 되어버린 것이다.
"찾으러 갈테니 준비해둬. 현금으로 전달해주지."
"그래... 아, 자칼?"
"뭐냐."
"단골이니까 말해두는건데, 요즘 왠 여자가 네 뒤를 쫓고 있다고 하던 것 같던데?"
"여자?", 자칼이 의아해한다. "어떤 여잔데?"
"시렌이라는 것 같던데. 쥐 시렌."
그 말을 듣자 자칼이 말을 잃는다. 수화기 너머로 반조가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의 모습에 당황하며 연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잠깐 멍하니 있다 정신이 돌아온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알아서 처리하지. 아무튼, 오늘 20시 까지 받으러 가겠어. 잘 준비해둬."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왕 나리."
"어이, 긴급 요청이다! 빡세게 움직여!", 반조가 제자들에게 소리쳤고, 그에 따라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여느때보다 더 빠르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반조가 자칼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올 때 미행 없는지만 잘 확인해 줘. 이쪽에서 보자고."
"그래... 부탁하지."
자칼은 전화를 끊는다. 그리곤 주변 침대에 털석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마를 짚었다. 마치 잊혀지지 않는 과거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이윽고 그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인... 대체 왜 날 찾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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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 우리 사무소에서 묵게 해달라고?"
제인을 만나러 가는 길, 니콜은 와이즈의 전화에 그렇게 말한다. 정확히 와이즈가 했던 말은, "벨을 일주일 정도 거기 묵게 해줘." 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길래 벨을 자기 사무소에 묵게 해달라는 말을 하자, 와이즈는 급하게 처리해야할 일이 생겼다며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갑작스러운 거 알아. 하지만,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다, 니콜. 수고비는 챙겨줄게, 일주일만 벨이랑 같이 있어줘."
"어디 출장이라도 가는 거야? 갑자기 일주일이나 가게를 비운다고?"
"최대 일주일이지. 일이 일찍 끝나면 일주일도 안돼서 돌아올 수 있고."
"대체 무슨 일인데? 더 며칠 전에 큰일 날 뻔 했잖아, 그런데 머리가 아물기도 전에 또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너, 이거 벨한테는 말한거야? 네가 멋대로 정한거면 난 못 도와줘."
"벨도 알아, 오늘 퇴원하면서 말했다고. 걱정 마, 일이 일찍 끝나서 돌아온데도 수고비가 줄어들진 않을테니까."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니콜이 언성을 높이자 주변에서 같이 걸어가던 토끼굴의 직원들이 당황스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주변의 시선을 인지했지만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미간을 짚으며 잠시 발걸음을 멈춰세운 니콜은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너 머리 처박고 입원했을때 벨이 얼마나 울며불며 네 침대에 붙어있었는 줄 알아? 네가 거의 죽을 뻔 생각했을때 벨이 얼마나 네 걱정을 한 줄 아냐고! 나도, 우리 토끼굴도 전부 네 걱정 투성이었어, 그런데 또 뭘 숨기고 무슨 일을 할 작정이야?! 너 생각하는 우리 생각은 안 해!?"
"니콜...", 옆에 있던 엔비가 그런 니콜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니콜이 이런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틀 밤 사이에 토끼굴은 그들이 모르고 있던 와이즈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그가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한 여러 위험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또 와이즈가 뭔갈 숨기고 혼자서 일을 해결하려고 하니 그들 입장에선 걱정이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있었냐."
하지만, 그런 감정적인 모습이 와이즈의 날카로운 직감을 건드려버렸다. 니콜이 그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그녀가 평소와는 달라졌음을 눈치챈 와이즈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그녀의 심중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니콜이 당혹스런 눈매로 주변의 직원들을 쳐다보고, 마른 입술을 혀로 햝으며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말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건 바로 너겠지... 그렇지 않으면 2주 동안 입원해 있어야할 녀석이 갑자기 나와서 일주일 동안 자기 가족을 맡겨달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테니까!"
"하... 니콜... 난..."
와이즈의 죄책감을 건드리며 그의 주의를 다른데로 돌려보려고 한 니콜. 비록 임기응변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니콜의 말을 들은 와이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그대로 막혀버린다. 니콜은 그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 마음이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인에게서 이야기의 결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녀와의 만남을 비밀에 부쳐야했다. 만약 와이즈와 제인이 만난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동생한테 뭔가를 또 숨기고 있어. 지옥에서 불탈 거짓말쟁이 새끼라고 해도 난 할 말이 없어. 하지만... 하지만 이 일은 정말 내 개인적인 일이야, 벨이 알아선 안돼! 내 손으로 반드시 끝내야하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부탁이야...!", 와이즈의 말에 니콜은 말하려다 순간 머릿 속에서 무언가가 스쳐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적인 일이라고? 대체 어느정도로 사적인 일이길래 숨기려고 하는거지? 니콜은 위화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단순한 용병 활동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숨기려고하지 않았을텐데. 아니, 애당초 막 퇴원해서 가게를 일주일이나 비울 정도로 긴 임무를 받는다고?
"니콜?",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있자 와이즈가 다시금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곤, 잠시 고민을 하고선 와이즈에게 말했다.
"...일 끝나는대로 바로 토끼굴 사무소로 달려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한테 전부 털어놔. 어디에서 뭘 했는지, 사적인 일이라는게 대체 뭐였는지 전부 다. 아니면... 나도 벨 못 지켜줘."
"...알겠어. 일 끝나면 바로 갈게. 그러니까 벨 좀... 그애 좀 부탁해."
"그래그래, 알겠어. 저녁에 데리러 갈테니까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
스피커 너머로 와이즈의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맙다, 니콜. 네가 벨 친구라서 다행이야.", 그 묘한 말투에 니콜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벨 친구? 난 네 친구도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미안."
다음 순간 끊긴 전화. 니콜은 끊어진 그의 전화를 보고선 마음 속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는 도대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위화감... 그녀가 느낀 그 위화감은 대체 뭐였을까?
"니콜 대장?"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빌리가 걱정됐는지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이마를 짚으며 제인이 있는 호텔로 발걸음을 계속 옮기는 것 밖에 없었다.
얼마안가 토끼굴은 제인이 있는 호텔에 도착했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인지, 가운 차림의 제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니콜이 그녀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그녀의 표정이 그닥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니콜의 말에 제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다름아닌 차량 추돌 사고 때문이었다. 아나운서에 의하면, 차량이 급발진하여 갑자기 앞차를 들이박으면서 연쇄적으로 충돌이 일어났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 뉴스를 본 니콜의 머릿 속에선 자연스럽게 와이즈가 했던 말을, 6단지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을 떠올렸다. 하지만 제인에게 이미 여러번 휘둘린 니콜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가까운 사람이 사고에 휘말리기라도 한거야? 왜 TV만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
"분홍머리 아가씨는 운명을 믿어?"
제인의 말에 니콜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윽고 니콜은 제인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겁고 진지한 눈빛으로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지고, 문에서 가까웠던 빌리가 자연스레 문을 닫아잠궜다.
"무슨 의미야?", 니콜이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사람끼리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던지, 아니면 사람은 각자의 운명이 정해져있고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던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믿냐고 묻고있어."
"네 입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면서? 그럼 당연히 안 믿지."
제인은 말이 없었다. 정작 질문은 한 것은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에 답해주지 않는 모습에 니콜은 짜증이 나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지그래?"
잠시동안의 침묵 후, 제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에는 운명따위 운명론자들의 헛소리라고 믿었어. 신에게만 의지하고, 스스로의 두 발로 일어설 수 없는 자들이 내뱉는 변명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믿었지."
이어서 그녀가 말한다. "근데 오늘 일을 보니까... 진짜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고, 우린 그 신에게 놀아나는 꼭두각시일 뿐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따위로 진지한 표정 짓고 있는건데?! 스무고개 집어치우고 직설적으로 말해보라고, 안 그래도 너한테 이야기 듣는 거 외에도 머리아픈 일이 많단 말이야-!!!"
니콜이 결국 참다못해 언성을 높히자 제인이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던 니콜은 그녀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내 제인이 손깍지를 껴 턱을 괴며 말했다.
"흑기사 씨한테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눈치를 챈 모양이었지만, 니콜도 순순히 물러서진 않았다.
"너부터, 먼저 말해. 대체 저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이랑 운명이 무슨 관계인지, 대체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조리 이 자리에서 다 설명해야 될거야. 아니면 네가 얼마를 주든 절대 그 녀석에 대한 건 입도 뻥긋하지 않을거니까!"
니콜의 말에 토끼굴의 직원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들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서리자, 제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이전처럼 그들에게서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 짓는 자신만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건 더 부드럽고, 따듯한 미소였다. 비유를 하자면, 어머니가 자식에게 든든한 친구가 있음을 알았을 때 짓는 미소와 비슷했다.
"정말 그 사람을 많이 생각하는 모양이네... 질투나지만, 조금 안심되는 걸."
"말해.", 니콜이 강하게 말했다.
"대체, 3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건데...?!"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드디어 그 순간이 다가왔다. 이야기의 결말을 말해야하는 그 순간이. 피하고 싶었지만, 마주해야하는 그날의 진실을.
"...뉴스에 나오는 저 사고를 낸 EMP 장비는 3년 전에 사용된 물건이야.", 제인이 말했다.
"흑기사 씨가 마왕의 자리에 앉기 전... 우리 모두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날로 기억됐던 그 날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향한다. 끝을 마주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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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맥스가 다가옵니다! 모두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