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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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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자치군
부여군
扶餘郡
Buyeo County
군청 소재지
부여읍 사비로 33 (동남리 725)
광역자치단체
하위 행정구역
1 15
면적
624.53㎢
인구
65,039명[1]
인구밀도
105.06명/㎢
7석
4석
도의원
1석
1석
상징
군화
군목
군조
마스코트

금동이
브랜드
지역전화
041
홈페이지
SNS

1. 개요2. 역사

1. 개요 [편집]

충청남도 남부에 있는 . 동쪽으로 논산시, 서쪽으로 보령시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군산시와 접한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가 있었기에 백제문화단지,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이 지역에 있다.

'부여'라는 이름은 한국사에 등장하는 부여에서 나온 것이 맞다. 이 지역은 부여라는 나라가 실존했던 위치와 전혀 무관하지만 과거 백제는 시조 온조왕이 부여 왕족에서 나왔고, 성씨도 부여씨였다. 한때는 백제 성왕이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꿨을 정도로 부여 계승의식을 가졌으며 그 백제수도였던 사비가 이곳이었기에 이후 지명이 부여가 되었다. 공주시(백제 때의 웅진)와 함께 백제문화제를 개회식과 폐막식을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고 있으며, 2010년에 전 군수 이용우의 노력으로 공주와 합쳐져서 세계대백제전을 진행하였다.

2. 역사 [편집]

기원전에는 진국, 이후 삼한 중 마한 고포국의 영역이었다가 같은 마한의 백제국으로 복속되었다. 이후 소부리(所夫里), 소우리, 사비 등의 지명으로 불렸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이미 5세기 말인 동성왕 시기부터 왕이 자주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부터 정치적 중요성이 수도 웅진성(현재의 공주시) 다음으로 큰 도시가 아니었나 추측하거나 혹은 동성왕대부터 의도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도시일 것이라 추측한다.[2]

백제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538년 웅진성(지금의 공주시)에서 부여로 천도한 이래로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6대 122년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다. 결국 부여가 도시개발이 안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고 말았다.[3] 660년에 백제가 멸망해 궁성을 비롯한 많은 문물이 소실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한 백제인이 금동대향로를 땅 속에 묻은 것이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의 전국 지명 한화정책 때 부여군으로 개칭했고 그 아래로 석산현(石山縣, 석성면), 열성현(悅城縣, 청양군 정산면) 2개 속현을 두었다.

고려시대 때 감무가 설치되었고 조선시대 때는 부여현으로 재편되는 등 '부여'란 이름을 간직해왔다.

1914년 조선총독부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석성군 일부, 홍산군, 임천군을 통합하여 현재의 부여군 영역이 되었다. 1960년 부여면이 부여읍으로 승격하였다.

일제시대 말기인 1939년에, 일본이 '내선일체'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일환으로 부여 부소산 일대(지금의 삼충사 위치)에 관폐대사[4] 부여신궁을 건축하고자 공사를 시작하였다. 진구 황후를 비롯하여 백제와 관계 있는 일본의 옛 천황들의 신령 4위를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물을 완공되기 전에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광복하자, 만들다 만 부여신궁 건물을 부여청년동맹원들이 파괴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부여신궁을 세우는데 너무 시골이라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아예 부여를 신도(神都)라 칭하며 대대적으로 도시화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여 내의 시가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는데 그 영향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몇해 전 충남도청 이전에 든 비용이 당시 돈으로 16만 원이었는데, 부여신궁의 총 공사비는 24만 원이었다. 더군다나 히로히토 천황이 직접 공사 계획을 발표했다('충청남도 인터넷 신문' 인용).

당시 신궁에 모시려던 이가 임나일본부설에도 나오는 진구 황후 등이었던 점과 부여가 고대 일본과 관계가 깊은 옛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란 점 등을 드는 얘기가 있다. 부여신궁을 개발하면서 이 일대의 도로나 도시 정비 계획까지 잡혀있었으니 이때 개발이 진척되었더라면 금세 '부여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 료타로의 '한나라(한국) 기행'에서, '일제가 망한 건 좋은데, 부여 일대 개발때까지는 버텼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의 인터뷰가 소개된다.[5] 실제로 현재 부여군은 발전 상태에 비해서 읍내의 도로가 굉장히 잘 되었다. 도로정비까지 가다가 일본이 패망해서 그만...

1960~1970년대까지 금강 내륙수운이 원활히 돌아갈 때 인근의 강경과 더불어 상당한 발전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부여에는 꽤 오랫동안 철도는 물론이거니와 고속도로도 없었던 데다, 1960년대~199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경부선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충청 내륙 지역들과 달리 부여군을 비롯한 충남 서부 지역들은 인구 유출을 겪게 되었으며, 1990년 금강하구둑의 완공으로 금강 내륙수운이 완전히 정지됨에 따라 부여의 발전 역시 정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군의 인구도 계속하여 감소하는 추세이다.

그래도 아직 부여읍이 인구 2만 선은 유지했고[6], 규암면도 인구 1만이 넘고 코아루휴엔하임 등이 지어질 정도이므로, 군 치고는 그래도 아직 심각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1] 2021년 2월 주민등록인구[2] 이러한 점은 고구려 마지막 수도인 평양성과 매우 흡사하다. 평양 역시 313년 미천왕의 수복 이후 고구려령으로 편입되었고 장수왕 시기 이전부터 제 2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국원왕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소도 평양이고 광개토대왕대에 이미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지었다는 기사나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했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평양 역시 427년 장수왕의 천도 이전부터 완성되어있던 도시라고 볼 수 있겠다.[3] 이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시도 마찬가지이다.[4] 지금은 폐지된 최고위 신사의 등급으로 관폐대사 – 국폐대사 – 관폐중사 – 국폐중사 – 관폐소사 – 국폐소사 순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서울 남산에 있었던 조선신궁이 실제로 완공되어 종교시설로 기능하던 유일한 관폐대사였다.[5] 물론, 친일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부여가 개발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나온 대화.[6] 2021년 3월에 딱 3명 차이로 2만 선이 붕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