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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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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이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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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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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金載圭 | Kim "Jaguar" Jae-kyu
출생
1926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
(現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 80-6)
사망
1980년 5월 24일 (향년 54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現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재임 기간
제11대 건설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5일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6년 12월 6일 ~ 1979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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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김영희[1]
자녀
슬하 1녀
학력
대구농업전문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석사)
한양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석사)
본관
김녕 김씨 중의공파 26대손
종교
무종교 → 불교[2]
신체
164cm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9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3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73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1. 개요2. 일생3. 10·26 사태
3.1. 후속조치3.2. 재판
4. 여담

1. 개요 [편집]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김재규, 사건 이후 공판에서
Jaguar

재규어 (Jaguar)란, 서울특별시 남산에 주로 출몰했던 네임드 포유류로, 대한민국의 전직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民族 文化 暢達을 爲하여 설립된 원조가카의 '중정기획' 사장을 잠시 맡았다.[3]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반인반신' 박정희를 발터 PPK로 살해해 갓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는다.

2. 일생 [편집]

1926년, 경북 선산에서 부유한 쌀집 아들로 태어났다. 안동공립농림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학, 박통과는 2기생 동기로 처음 만나게 된다. 고향도 같은 선산인데다 둘 모두 교사 경력을 갖고 있던 터라 꽤 가까웠다고 한다[4].

졸업 후 상술했듯 김천중에서 잠시 교편을 잡다 복직, 1952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했다. 이후 1970년 한양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육군 제6사단장, 1966년 육군 제6관구사령관, 1968년 육군 보안사령관, 1971년 육군 제3군단장을 역임하고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74년에는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76년, 잘 알려져 있듯이 의원직을 내려놓고 제8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979년 터진 YH사건과 김영삼 총재 국회 제명 사건, 10월 16일 부마항쟁을 겪으며 본인 말마따나 박정희 정권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얻으며 떠오른 2인자 자리의 경쟁자 차지철과 시국의 수습 방향에 있어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3. 10·26 사태 [편집]

"자지털, 이 새끼 너 GUN-BANG져!"

김재규, 차지철을 쏴 죽이며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김재규, 박정희를 쏴 죽이며 [5]
1979년 10월 26일, 끝내 재규어는 궁정동 안가의 연회에서 '대국적'이지 못하단 이유로 박정희차지철을 쏴 죽이고 만다. 이날은 마침 삽교천에서 방조제 준공식이 있었던 날인데, 행사 자리에 김재규는 참석하지 않았다.[6]

행사에서 돌아온 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갖기로 하는데, 김재규는 이 자리에 김계원정승화를 부른다. 다만 정승화는 "각하의 부름이 있었다.", "곧 돌아오겠다"라며 궁정동에 딸린 식당에서 대기를 타게 한다. 그리고 대망의 오후 7시 40분, 김재규는 숨겨뒀던 발터 PPK를 꺼내 "자지철, 너 이 새끼 건방져!"라는 말 한 마디와 함께 자지철을 쏴 죽인 뒤, 뒤이어 박정희를 살해하게 된다[7]. 이후에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승화와 함께 육본으로 향하여 그곳에서 범행이 탄로나 체포를 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10·26 사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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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후속조치 [편집]

김재규는 암살이 끝난 후, 동석한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현장의 수습을 맡기고 정승화의 차에 탄다. 그 자리에서 사탕 하나를 까 먹으며, 정승화에게 박정희의 죽음을 통보한다. 육본과 중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김재규는 '병력동원을 위해서 육본으로 가자'라는 정승화의 권유에 바로 차를 돌려 육본으로 간다. [8] 그렇게 육본으로 향한 정 총장은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그 자리에서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살해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반복 요구한다. 결국 김재규의 배후 세력이 없음을 눈치 챈 김계원은 최규하 당시 총리(후 제10대 대통령)에게 김재규가 살해범임을 털어놓고, 김재규가 체포당하며 10.26 사건은 막을 내린다.

3.2. 재판 [편집]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김재규, 재판 최후진술에서.
김재규는 곧바로 체포되어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면 가족을 가만 두지 않겠다는 협박 때문에 1심 재판에서 변호사 선임을 포기한 채 변호사 없이 재판을 받게 된다. 1, 2심 재판에서는 그에 대한 신속한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3심 재판에서 내란의 여부를 두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전원합의체 판결 후 1980년 5월 20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유신헌법 자체가 주권을 찬탈한 불법적인 범법이거나 민주국가의 정치적 기본조직을 파괴한 것에 해당되어 그 자체가 내란상태라는 주장은 독단에 지나지 않으며 피고인들의 행위는 내란죄의 성립요건인 폭동에 해당된다. 저항권은 실정법에 근거가 없으므로 법관은 이를 재판규범으로 원용할 수 없다"는 다수의견을 받아들이며 김재규의 상고는 기각된다. 그렇게 그는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동년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1심 최후변론에서, 그는 10.26 사태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10.26 사태 이후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 구상대로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사태 수습을 맡으려 했으며, 그 뒷설거지가 끝나면 새 헌법에 따라 차기 대통령으로 출마하려고 했다고도 주장한다.

4. 여담 [편집]

  • 생전 그의 애창곡은 김초향, 이봉룡 작사·작곡, 남인수 노래의 해같은 내 마음이었다고 한다.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에 걸맞는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노래는 후에 '사나이 결심'이라는 제목으로 조용필 9집에 실린 바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 있을소냐
지나고 가는 길 가로막는 고통이
어이 없으랴
큰 희망을 가슴에 움켜안고
떠나 온 정든 고향을
또 다시 돌아갈 때 열 구비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세상을 원망하면서
울던때도 있었건만
나는 새도 눈 위에
발자욱을 남기고
날아가건만
남아 일생을 어이타
연기처럼 헛되이 보내오리까
이 몸은 죽어서
세상을 떠날지라도
이름만은 남겨 놓으리라
[1] 본관은 김해 김씨.[2] 반인반신 박통을 죽인 후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3] 이 중정기획이 땅크 시절 안기부 엔터테인먼트를 거쳐 대중문화의 총본산이자 초거대 연예기획사 NIS 엔터테인먼트가 된다.[4] 다만 김재규의 경우는 부대 내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한 후 교사로 일한 것이다.[5] 다만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이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6] 김재규 역시 행사에 동행하고자 했으나, 차지철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7] 사실 차지철의 팔을 쏘고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저격한 뒤, 둘을 죽이려던 찰나 총기 고장이 발생, 이에 부하였던 박흥주 대령의 총을 받아 재차 연회장에 들어가 둘을 살해했다.[8] 만약 이 때 김재규가 중정으로 향했다면, 현대사가 크게 뒤바뀌었을 것이다. 1인자 박정희와 경쟁자 차지철이 사망한 상황에서, 실권을 가진 사람은 또다른 2인자였던 김재규일 테고, 그랬다면 그는 살해의 범인이 그였음을 감추고 차지철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박정희의 시해 소식을 접한 사람들 중 차지철을 범인으로 의심한 사람이 적잖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