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10·26 사태

최근 수정 시각:

[ 펼치기 · 접기 ]

10·26 사태
十·二(十)六 事態 | Assassination of Park Chung Hee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심장을 쏘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기간
1979년 10월 29일 금요일 오후 7시 40분
지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 나동 건물 2층 연회장
원인
불명
종류
쿠데타암살 사건
결과
10월 유신 체제 붕괴
박정희 대통령 사망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사망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체포

계엄포고 제1호 발령
최규하 총리의 대통령 권한 대행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육참총장, 10·26 사태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임명
영향
주요 세력
주요 세력
대한민국 제4공화국

• 대통령경호실
중앙정보부 친 김재규 세력
주요 인물
대한민국 제4공화국
- 대통령
박정희
-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
- 중앙정보부 수행비서
박흥주
피해
사망자 6명[1]
부상자 3명

1. 개요2. 배경3. 타임라인
3.1. 10월 26일, 그날3.2. 조사 및 재판
4. 가해자 정보5. 범행 동기
5.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5.1.1. 그렇다5.1.2. 아니다
5.2. 권력 싸움 끝의 참극
5.2.1. 우발적인 살인이다5.2.2. 철저한 계획 속에 벌어졌다
5.3. CIA 개입설
6. 반응
6.1. 국내6.2. 국외
7. 여파
7.1. 비상 계엄 선포7.2. 12·12 군사 반란
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2. 배경 [편집]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 YH 사건 당시 연설.
박정희가 그가 바라는 대로 추가 6년의 임기를 더할 경우, 그는 아마도 살아서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이다.

도널드 그레그 전직 CIA 한국지부장, 1976년 텍사스대 연설에서.

3. 타임라인 [편집]

3.1. 10월 26일, 그날 [편집]

3.2. 조사 및 재판 [편집]

4. 가해자 정보 [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재규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범행 동기 [편집]

관련자들이 모두 사망한 현 시점에서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살해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문서에서는 사건의 배경, 김재규의 언행과 동태 등으로 파악한, 살해 동기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5.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편집]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와 최후변론에 따르면, 그는 유신을 끝내고 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그 심장과 같았던 박정희를 저격해 살해했다. 본인은 10.26혁명 외에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회복의 대안이 없었고,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유신 체제 그 자체였던' 박정희를 죽이기 위해 총을 들었다고 한다. 과연, 김재규는 박정희의 제7대 대선 출마 당시, 국민들에게 '이번이 마지막이다'라고 약속하라고 그에게 권유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집에서 '자유민주', '대의' 등의 글귀를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나, 이는 그가 '독재 체제 종식을 위해 살해하였다'던 박정희 역시 연설에서 자주 언급했던 단어들이고, 결정적으로 박정희 군부 체제 당시의 집권여당이 민주공화당이었던 만큼, 이것만으로 김재규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주장했다고 보기엔 성급한 감이 있다.
만약 김재규의 주장대로 그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이 일을 벌였다면, 그의 이 '10.26 혁명'은 정말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필연적이었고, 또 최선의 결정이었을까? 그리고 그 혁명은 성공하였을까?

5.1.1. 그렇다 [편집]

실제로, 70년대로 접어들며 박정희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독재행각 역시 점점 대담해졌다. 정권의 반항자들을 탄압하고,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한편, 10월 유신을 통하여 영구 집권을 꾀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이들을 최대한 유하게 대하고자 하였으나, 박정희는 번번이 강경책을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3] 특히 1979년, 김재규는 부마항쟁의 수습을 놓고 강경파인 차지철과 갈등을 벌였는데, 이 때 박정희 역시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시사하는 것을 보며 그 폭압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4]. 결국 10월 유신을 끝내고 자유민주주의를 불러오기 위하여는 박정희를 죽이는 수밖에는 없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5]. 결국 그의 말마따나 박정희를 죽이며 유신 체제도 끝이 났고, 결과적으론 자유민주주의를 다시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니 성공이라는 것이다.

5.1.2. 아니다 [편집]

김재규의 말대로, '유신 체제 출범과 자유민주주의 말살의 장본인이자 그 자체로 유신 체제'였던 박정희 역시 총탄 앞에서는 사람이었고, 그가 죽으면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후사에 대한 그의 계획은 미흡했고, 결과적으로는 그가 감추고자 했던 박정희 살해가 국무총리(후 대통령 권한대행) 앞에 탄로가 나면서 체포당하고, 혁명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나 최후 진술에서 유신을 쓰러뜨리고도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박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을 아쉬워한다[6]. 또한 박정희의 암살로 인해 발생한 권력 공백을 비집고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가 새로운 권력으로 떠오르며, 제5공화국 신군부 독재가 열리게 된다. 결국 김재규의 10.26사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5.2. 권력 싸움 끝의 참극 [편집]

박정희는 그 밑에 2인자를 여럿 두고 그들이 이른바 '충성 경쟁'을 벌이게 하며, 자신은 그 위의 압도적 1인자로 군림하며 권력 기반을 유지했다. 그런데, 70년대 후반 터진 1,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하여 민중 사이에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점차 식어가고, 결정적으로 박정희가 그 권력 유지의 축이던 2인자들 중 차지철에게 과한 신임을 실어주면서 그 기반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또한 박정희 정권 하에서 온갖 정보전을 담당하며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던 중앙정보부장의 권력도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처럼 짧았고, 실제로 그간 중정부장을 맡았던 이들은 모두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김형욱의 경우처럼 아예 정권에 의해 제거당하기도 했다. 이에 축출의 공포를 느낀 김재규는 차지철을 제거하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 결과가 바로 10.26 사태로 폭발했다는 것이 이 가설이다.

5.2.1. 우발적인 살인이다 [편집]

당시 김재규는 차지철의 팔을 쏴 맞춘 후,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저격했다. 이후 총기 고장이 나자 박흥주에게서 총을 받아들고 확인 사살을 한 뒤, 정승화와 함께 차를 타고 사건 현장에서 도망치는데, 자신의 근거지인 중정을 두고 정승화의 권유에 따라 육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결국 이로써 그는 스스로 덫으로 들어간 것인데, 이러한 사후 대처의 미흡함을 볼 때, 10.26 사건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분노에 찬 김재규가 차지철을 살해하고 우발적으로 박정희까지 죽이며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이다.

5.2.2. 철저한 계획 속에 벌어졌다 [편집]

사실 김재규는 이전부터 차지철을 못 미더워했다. 하기야 그는 박정희와 육사를 같이 나왔고, 별을 세 개나 단 중장이었는데, 차지철은 고작 중령 출신인데다, 이마저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쾌속 진급하여 중장인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김재규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김재규가 차지철에 대한 분노를 자주 터뜨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게다가 10.26 사태가 벌어진 당일, 그러니까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쏴 죽이기 전, 그는 김계원과 차지철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김계원이 차지철의 월권 행위를 문제삼는 발언을 하자, 크게 맞장구를 치며 "그 놈 오늘 해치워 버리겠다"라는 말까지 했다. 사전에 총기까지 숨겨두고, 자신의 측근 박흥주와 박선호에게 차지철에 더해 박정희까지 암살하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미리 계획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3. CIA 개입설 [편집]

6. 반응 [편집]

6.1. 국내 [편집]

그분이 그렇게 빨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인생도 허무하고 정치도 무상한 거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10.26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에서.
인간 박정희가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6.2. 국외 [편집]

  • 지미 카터 대통령은 조문을 보내며 "한국 경제를 놀랄 만큼 발전시킨 역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다.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꺾인 것 같은.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

7. 여파 [편집]

7.1. 비상 계엄 선포 [편집]

7.2. 12·12 군사 반란 [편집]

  자세한 내용은 12·12 군사 반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8. 관련 문서 [편집]

9. 둘러보기 [편집]

[ 펼치기 · 접기 ]
일생
활동 내역
가족
아내 이순자 · 아들 전재국 · 아들 전재용 · 아들 전재만 · 딸 전효선
비판 및 사건사고
개인 처신 (하나회 · 전두환 회고록 명예훼손 피소 · 알츠하이머 치매 논란 · 골프 논란) · 발언 관련 (광주는 폭동이야 ·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아놓고 논란) · 부정 부패 (전두환 노태우 구속 사건 ·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 명성그룹 사건 · 대규모 비자금 조성 · 평화의 댐 · 범양상선 금융부정 사건)
기타
[1]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경호실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2] 추후 김재규 외 6인에 사형 선고, 유석술 외 1인에 징역 3년 선고[3] "본인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구속된 사람을 많이 풀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는 학생의 수는 늘어만 갔읍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읍니다." "...그러나 백번 잘못을 저지른 국민을 백한 번 용서하는 것이 정부의 태도여야 한다고 믿은 본인은 당시 박찬현 문교부장관에게 먼 훗날 우리가 어떤 심판을 받겠느냐면서(...)세 번씩이나 간곡하게 애소도 해본 일이 있었읍니다만 복교시킨 뒤에 학생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지르면 자기가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을 당한 일도 있었읍니다."[4]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5] "...박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유신체제를 출범시키고 이를 유지하여 온 장본인입니다. 박대통령이 바로 유신체제라고 보아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신체제를 깨기 위하여는 그 심장을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였읍니다.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보전할 책임은 있을지언정 이를 말살할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 "유신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읍니다. 다만 본인이 혁명 후에 완수하려던 혁명과업, 즉 유신기간 동안 사회에 쌓여온 많은 쓰레기들을 설거지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지켜주는 일은 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고 이 점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