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시아드 바레

최근 수정 시각:


시아드 바레
Maxamed Siyaad Barre
프로필

1. 개요2. 집권 이전의 일생3. 시아드 바레 정부
3.1. 집권 이전3.2. 정치적 성향 및 행보3.3. 권위주의 정책과 군사 독재
4. 오가덴 전쟁5. 소말리아 내전과 몰락6. 최후7. 평가
7.1. 긍정적인 평가7.2. 부정적인 평가7.3. 총평
8. 비판
8.1. 1975 이슬람 학자 사법살인 사건8.2. 1988 하르게이사-부라오 학살
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1. 개요 [편집]

대통령 재임 시기
노년의 모습
시아드 바레
Siad Barre
잘레 마하메드 시야드 바레 (Jaale Maxamed Siyaad Barre, ? ~ 1995년 1월 2일)란, 소말리아를 21년간 지배한 소말리아의 군인 출신 독재자로, 소말리아 전역을 온전히 통치한 마지막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슬람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인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로 소련의 지원과 악랄한 통치를 통해 소말리아를 지배했다. 임기 도중 '대소말리아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벌였으나 소련 등의 개입으로 전쟁에서 패배한 건 물론 외교적으로 고립당하게 된다.

이후 반(反) 바레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다 이게 내전으로까지 번지며 끝내 반군 세력에게 수도를 상실당하며 21년간의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내전이 계속되며 소말리아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린다.[1] 상세한 내용은 소말리아 내전 문서 참조.

2. 집권 이전의 일생 [편집]

1910년대에 에티오피아 제국 오가덴에 있는 마을 실라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가딘족이었고, 아버지는 다롯족의 일파 중 하나인 마레한족이었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불명이다.

집권 이전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모순되는 주장도 많아서 정확한 바레의 젊은 시절을 알기는 힘들다.

확실하게 여겨지는 것은 젊은 시절 바레가 부친을 여의었고, 양치기로써 살다가 자프티에에 보조원으로 입대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이탈리아군을 무찌른 영국군 산하의 경찰에 입대한 후, 영국령 케냐에서 훈련을 받아 영국 식민지 경찰의 특별 지부에 합류했고, 모가디슈로 가서 중등교육을 이수받은 후 토착민으로서 경찰에서 가능한 가장 높은 직위인 경감에 도달했다.

1952년부터는 이탈리아 사관학교로 유학을 가 정치와 행정을 공부했으며, 1954년에 수석으로 학위를 마쳤을 때에는 중위로 승진했고, 1955년에는 모가디슈의 경찰서장직이 되었으며, 1958년에는 이탈리아 정책의 전무를 포함한 보안군의 수장, 소령에 등극한다. 1960년에 소말리아가 독립한 후에는 소말리아 육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65년에는 육군 사령관에 등극한다.

1960년대 초, 합동 훈련에서 소련 장교들과 시간을 보낸 후 바레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이슬람 사회주의 정부와 소말리아 민족주의의 신봉자가 되었다. 당시 부패와 족벌주의가 만연했던 소말리아에서 바레 준장이 이끌던 군대는 유일하게 청렴한 조직으로 꼽혔는데, 바레가 이끌던 소말리아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고,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훈련받은 부대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면서 대중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3. 시아드 바레 정부 [편집]

3.1. 집권 이전 [편집]

당시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내에서 가장 선진적으로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던 국가 중 하나였는데, 자신들의 씨족만 중요시하는 씨족주의 때문에 종종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고는 했다. 당시 소말리아군 장교였던 바레는 이 씨족주의를 타파하겠다며 압디라시드 알리 샤르마르케 대통령을 암살하고 집권했다.

3.2. 정치적 성향 및 행보 [편집]

1969년부터 91년까지 소말리아 군사 정권을 이끈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 대통령 (1977년 11월 27일 촬영)
군의 개입은 불가피했다. 더 이상 부패, 뇌물 수수, 족벌주의, 공금 횡령, 종교와 국가 법률에 대한 불의와 무례와 같은 악랄한 일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법은 제쳐두고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했다.

시아드 바레, 쿠데타 직후 연설에서


초반에는 아랍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며 소련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산업화 시켰고, 비록 철권 통치를 동원하긴 했지만 사회를 안정화 시켰다.

바레는 '노동과 사회 정의에 기초한 사회'를 목표로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했는데, 대규모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무상교육으로 도시와 농촌의 문맹 퇴치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문맹률을 낮췄고, 무상의료도 실시했으며, 집단농장을 만들고 산업과 토지, 은행을 국유화하면서 제분소, 사탕수수와 육류 가공 공장들을 건설하는 등 산업화도 시도했다. 이에 첫 6년 동안 소말리아의 경공업은 크게 발전했다.

또한 바레는 집권 후 통일된 국가 문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1970년대 중반부터 소말리어를 교육의 공식 언어로 삼았으며, 이탈리아어와 영어만 써야 했던 공무원들에게 소말리어를 배울 것을 권장했고, 소말리어의 라틴어 표기도 1972년에 도입되었다. 그는 산림녹화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971년부터 1988년까지 전국 각지에 대규모 식목 캠페인을 벌여 목표한 336헥타르 중 265헥타르에 나무를 심는 데에 성공했으며, 39개의 방목지 보호 구역과 36개의 산림 조림지가 조성되었다.

그는 이슬람 사회주의자답게 남녀평등 문제에도 신경을 썼는데, 당시 여성 인권이 낮았던 소말리아의 여성 인권을 상승시켰다.

하지만 그는 집권 중반기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3. 권위주의 정책과 군사 독재 [편집]

그는 이슬람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며 소말리아를 개혁하는 한편, 반대파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탄압을 이어갔는데, 집권 중반기부터는 권위주의 정책과 우상화 정책도 확대하며 군사 독재를 이어나갔다.

바레는 스스로를 '승리의 지도자(Guulwade)' '선생님' '지혜의 아버지'로 칭하며, 거리 곳곳에 마르크스레닌,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를 걸게 했고, 국영 언론을 제외한 모든 언론을 폐지, 시위는 당연히 금지당했으며, 편지와 전화 등 국민 사생활에도 정부가 개입했고, 모든 정치와 종교 활동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국가안보국(NSS)을 창설했는데, 국가안보국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로 의심되는 사람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되었고, '국가의 독립, 통일 또는 안전에 반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그러한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져야 했다. 동년 9월에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54호를 도입하여 국가보안법에 비판적 견해를 표명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무기한 체포·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NSS 요원들은 무제한의 체포 및 구금, 수색, 재산 몰수 권한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몸을 설 수도 펼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지하의 독방에서 하루를 빵 한 조각과 물로만 버티면서 살아가야 했다. 이들은 체포된 사람들을 뒤틀린 자세로 묶고는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양동이나 물탱크에 머리를 담그거나,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거나, 살해 위협을 가하거나, 칼로 찌르거나, 굶기거나, 철제 침대에 눕힌 채 침대에 전류를 가하거나, '남녀 가리지 않고' 수감자를 강간하거나, 모의 처형을 가하거나, 여성 수감자들을 나체로 행진시키는 등 다양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는 손과 발을 묶은 뒤 물탱크에 던지거나 자루에 사람을 넣고는 자루를 묶은 후 바다에 던진 뒤 익사 직전에야 건져내거나 고환을 손으로 비틀기도 했다.

그럼에도 바레는 이에도 만족하지 못해 '행가시(Hangash)'라고 불리는 국방안보국을 설치했는데, 1978년 쿠데타 미수 사건 후 소말리아 군대와 NSS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가시는 점차 NSS와 유사한 권한을 얻었고, 역시 법적 권한 없이 운영되어 NSS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 준군사 조직이자 비밀 경찰 부대인 '승리의 개척자들(Guulwadayal)'도 직장, 학교, 모스크, 개인 저택 등 모든 도시와 마을에 존재했으며, 심지어 바레는 이도 모자라 또 다른 군사경찰인 '백브레이커(Dhabar Jabinta)', 바레의 경호원들이자 정예 부대인 '붉은 베레모(Red Berets)', 여당에 소속된 SRSP 수사국 등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도록 했다. 이도 모자라 바레는 야당 무장 세력과 관련 민간인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군사법원(MMC)까지 만들며 사법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당시 '반사회적', '반혁명적'인 행동과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1969년부터 1980년까지 공개처형된 사람만 무려 61명에 달했다고 하며, 재판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는 경우도 많았다. 반군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한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반정부 활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도 야당 조직원과 혈통을 공유했던 사람도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이 국가안보국은 바레 몰락 이후에도 해산만 당했을 뿐 제대로 업보의 대가를 치루지 않았는데, 국가안보국 소속 인물들은 처벌받긴 커녕 내전 시기에도 요직을 차지했고, 소말리아의 재무부장관과 총리, 심지어는 소말리아와 소말릴란드 대통령까지 배출한데 이어,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 멜레스 제나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등 주변국의 지도자들도 NSS와의 연관성이 제기되고 있다.

4. 오가덴 전쟁 [편집]

  자세한 내용은 오가덴 전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그는 집권 중반기부터 '대소말리아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을 소말리아에 편입시키기 위해 오가덴 전쟁을 발발시켰지만, 소련쿠바 등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했고, 그 결과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5. 소말리아 내전과 몰락 [편집]

축출되기 8개월 전의 시아드 바레 대통령
오가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부터 정권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는데, 소련에게 거하게 통수 맞은 바레는 미국 응디에 달라붙었지만 정권의 몰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1981년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정도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바레도 약간 맛이 갔는지 반정부 세력이 힘을 얻자 본인이 타파하겠다고 했던 씨족주의를 들고 와서 갈라치기를 시전했고,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부터 점차 바레 정권 시절 소외받았던 씨족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반정부 여론이 거세게 물붙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말리아 내에는 수많은 군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먼저 리비아의 지원을 받는 소말리구원민주전선이 등장했고, 모하메드 파라 아이디드 등 소말리아 내부에도 반정부 군벌들이 쏙쏙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레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권력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발악을 하며 저항했고, 급기야는 축구장 관중들이 정부에 야유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축구장에서 대거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국제 사회의 지원도 뚝 끊겼고, 점차 소말리아가 분열하기 시작하며 바레 정권 말기에는 소말리아 정부의 행정력이 닿는 곳이 수도인 모가디슈 근방 말고는 없었을 정도였다.

결국 아이디드 세력이 모가디슈마저 함락하는데 성공하며 실각하고 말았고, 모가디슈를 탈출해 남쪽으로 피신했다.

6. 최후 [편집]

정권 붕괴 이후로는 친바레 반군 세력을 모아 2번씩이나 모가디슈 탈환 및 정권 재장악을 시도했으나 1991년 5월을 끝으로 마지막 바레 정권의 거점지였던 부르두보도 반군에게 함락당하면서 친(親) 바레 잔당들은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이후로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반(反) 바레 정권에게 수배 당하다가 케냐로 망명해 케냐 정부에게 망명 신청을 받아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의 대니얼 아랍 모이 케냐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고, 이에 바레는 나이지리아로 망명해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이어나가다가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한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7. 평가 [편집]

7.1. 긍정적인 평가 [편집]

7.2. 부정적인 평가 [편집]

7.3. 총평 [편집]

8. 비판 [편집]

8.1. 1975 이슬람 학자 사법살인 사건 [편집]

8.2. 1988 하르게이사-부라오 학살 [편집]

9. 관련 문서 [편집]

10. 둘러보기 [편집]

[1] 2022년 기준 취약국가지수 2위. 1위는 예멘 내전이 진행 중인 예멘이다. 원래는 소말리아가 부동의 1위였으나, 예멘 상황이 심각해지며 예멘에게 1위를 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