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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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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
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
▲ 우스타샤 당기.
1. 들어가기 전에2. 개요3. 상세4. 이후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이 문서에서 다루는 새끼는 사람을 밥먹듯이 죽여댄 인간 백정 새끼입니다.

이 새끼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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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아야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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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처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 개요 [편집]

크로아티아의 반유고 분리주의, 가톨릭 교권 파시즘 단체. 1929년 안테 파벨리치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우스타샤라는 말은 크로아티아어로 '일어서다', '반란'을 뜻한다. 나치식 경례를 차용했으며, 구호는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이들은 당시 세르비아가 주류 민족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하기 위하여 세르비아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벌였으며, 정교회 신자가 많았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와 손을 잡기까지 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 모두 처형당했다.

3. 상세 [편집]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 이탈리아의 괴뢰국이었던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권을 쥔 정당이었으며, 추축국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완전히 실권을 거머쥔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 영내의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름하여 '1/3론'으로, 세르비아인의 1/3을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내고, 나머지 1/3은 죽인다는 것이었다.

결국 세르비아인만 40만 명에 유대인까지 10만 명이 학살당했는데, 학살 수법 역시 아주 기상천외해서 총을 쏘고 불을 당기는 건 물론, 산 채로 배를 가르기까지 했으며 이를 신병들의 담력시험으로 이용했다. 심지어는 유대인 임산부들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죽이는 등 살육을 수차례 저질렀다. 나치, 이탈리아 파쇼 정부까지 손절치려고 할 정도면 말 다 한 거다.

결국 이들은 빨치산의 저항과 공격에 시달리다 종전 후 숙청당했으며, 안테 파벨리치는 전쟁이 끝나고 이곳 저곳으로 망명하다가 암살 미수 이후 스페인에서 객사했다.

우스타샤의 학살에 보다 못한 세르비아계는 '체트니치'를 조직하여 우스타샤에 맞섰으나 결국 이들도 나치와 손잡고 우스타샤와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벌이다 사이좋게 종전 후 처형당했다.

4. 이후 [편집]

우스타샤가 끔찍한 학살극을 벌이긴 했지만, 그래도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던 탓인지 아직까지 애국자로 빨리기도 하며,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는 발트 3국과 함께 추축국 당시 역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국가로 꼽힌다. 실제로 유로컵 당시 크로아티아 관중들은 "Za dom, Spremni!"를 외치며 나치 경례를 대놓고 했다.

한편, 우스타샤에게 학살을 당했던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아직도 뿌리깊게 박힌 피해의식이 남아 있는데, 그 유명한 'Remove Kebab'도 사실은 우스타샤에 복수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실제로 유고 전쟁 당시 세르비아계 정치인들은 '우스타샤'를 다시 꺼내들며 크로아티아계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써먹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독립에 쥐방울만한 기여를 했지만 피로 얼룩진 역사를 남기기도 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김구 혹은 김원봉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단 김구의 백색 테러도 우스타샤의 학살에 비하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