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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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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정유재란
壬辰倭亂 · 丁酉再亂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 (Imjin War)
기간
임진왜란 1592년 5월 23일 ~ 1598년 12월 16일[1]

정유재란 1597년 8월 27일 ~ 1598년 12월 16일[2]
지역
평안도를 제외한 한반도, 만주 용정시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
결과
선·명연합군의 승리
영향
조선의 정치적 혼란 가속·사회경제적 기반 초토화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성장
도요토미 정권 붕괴 및 에도 막부 수립
주요 세력
교전국
지지 세력
지휘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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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선조
왕세자 광해군
영의정/도체찰사 류성룡
도원수 권율
삼도순변사 신립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권율
강화전라절도사 최원
경기도순찰사 권징
창의사 김천일
의병장 우성전
양주방어사 고언백
양근군의병장 이일
여주경기순찰사 성영
안성군조방장 홍계남
직산절도사 이옥
경상좌안동부순찰사 한효순
창녕현의병장 성안
영산현의병장 신갑
경상우진주순찰사 김성일
창원부절도사 김시민
합천군의병장 정인홍
의령현의병장 곽재우
거창현의병장 김면
함흥절도사 성윤문
경성평사 정문부
안변부별장 김우고
조방장 김신원
인제순찰사 강신
순안절도사 이일
평안좌방어사 정희운
의병장 이주
소모관 조호익
용강현우방어사 김응서
조방장이사명
대동수군장 김억추
황주좌방어사 이시언
재령군우방어사 김경로
연안부순찰사 이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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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백 도요토미 히데쓰구
1군대장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스미하루
2군대장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
제3군대장 구로다 나가마사
오토모 요시무네
제4군대장 모리 요시나리
시마즈 요시히로
아키즈키 다네나가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누로
다카하시 모토타네
시마즈 다다토요
5군대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다 카츠타카
쵸소카베 모토치카
이코마 치카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6군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나오쓰구
츠쿠시 히로카도
7군대장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제8군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나카가와 히데마사
우키다 타데이에
제9군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
호소카와 타다오키
수군대장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마치후사
구와야마 마사하루
스가이 에몬쇼
호리우치 요지오사
스기와카 덴사부로
와키자카 사헤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마나베 사마노조


이하 예비대
10군대장 난쵸 모토키요
오오타니 요시츠쿠
기무라 시게코레
오오다 카즈노리
11군대장 아사노 나가요시
오오타니 요시츠쿠
기무라 시게코레
12군대장 마에다 토시이에
마에다 도시나가
13번대 오카모토 시게마사
히토츠야나기 가유
하토리 카즈타다
오다 노부카네
14군대장 하시바 히데카츠
이토 모리카게
이바나 가즈마사
센코쿠 히데하사
16군대장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사타케 요시노부
난부 도시나오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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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병력
조선 188,000여 명
명 220,000여 명

임진왜란 참전 병력
조선 190,000여 명
명 92,100여 명

정유재란 참전 병력
조선 : 37,600여 명
명 : 117,00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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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병력
470,000여 명

임진왜란 침공 병력
158,700여 명

정유재란 침공 병력
141,400여 명
피해[4]
조선 : 최대 1,000,000명[5]

: 약 30,000여 명

조선인 피랍자 : 약 100,000여 명
20,000~17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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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
2.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열도 통일2.2. 일본군의 준비2.3. 조선군의 준비
3. 전개
3.1. 한양 공세
3.1.1. 부산진성 공방전3.1.2. 다대포성 공방전3.1.3. 김해성 공방전3.1.4. 상주 전투3.1.5. 탄금대 전투3.1.6. 선조의 빤스런과 한강 전투3.1.7. 1차 울산성 공방전
3.2. 하삼도-남해 전역
3.2.1. 조선 수군의 1차 출격
3.2.1.1. 옥포 해전3.2.1.2. 합포 해전3.2.1.3. 적진포 해전
3.2.2. 해유령 전투3.2.3. 임진강 전투3.2.4. 기강 전투3.2.5. 정암진 전투3.2.6. 조선 수군의 2차 출격
3.2.6.1. 사천 해전3.2.6.2. 당포 해전3.2.6.3. 1차 당항포 해전3.2.6.4. 율포 해전
3.2.7. 용인 전투3.2.8. 무계 전투3.2.9. 여주-금화 전투3.2.10. 1차 평양성 공방전3.2.11. 웅치-이치 전투3.2.12. 전주성 공방전3.2.13. 조선 수군의 3차 출격
3.2.13.1. 한산도 대첩3.2.13.2. 안골포 해전
3.2.14. 1차 금산성 공방전3.2.15. 우척현 전투3.2.16. 2차 평양성 공방전3.2.17. 영천성 공방전3.2.18. 3차 평양성 공방전3.2.19. 청주성 공방전3.2.20. 2차 금산성 공방전3.2.21. 조선 수군의 4차 출격
3.2.21.1. 장림포 해전3.2.21.2. 화준구미 해전3.2.21.3. 서평포 해전3.2.21.4. 다대포 해전3.2.21.5. 절영도 해전3.2.21.6. 초량목 해전3.2.21.7. 부산포 해전
3.2.22. 연안성 공방전3.2.23. 진주 대첩
3.3. 함경도 전역
3.3.1. 회령 공방전3.3.2. 명천 공방전3.3.3. 석성령-장덕산 전투3.3.4. 북관 대첩
3.4. 조명연합군의 결성과 반격
3.4.1. 4차 평양성 공방전3.4.2. 성주성 공방전3.4.3. 벽제관 전투3.4.4. 조선 수군의 5차 출격
3.4.4.1. 웅포 상륙작전3.4.4.2. 2차 웅포 전투 기록에 대한 의문
3.4.5. 행주대첩
3.5. 명-일 교섭
3.5.1. 진주성 공방전
3.5.1.1. 비거?
3.5.2. 조선 수군의 6차 출격
3.5.2.1. 어선포 해전3.5.2.2. 읍전포 해전3.5.2.3. 자구미포 해전3.5.2.4. 당항포 해전
3.5.3. 심유경과 고니시의 국제 사기극3.5.4. 파탄
3.6. 하삼도 섬멸전
3.6.1. 이순신의 좌천3.6.2. 조선 수군의 7차 출격
3.6.2.1. 기문포-칠천량 해전
3.6.3. 황석산성 공방전3.6.4. 남원성 공방전3.6.5. 어란포-벽파진 해전3.6.6. 직산 전투3.6.7. 조선 수군의 8차 출격
3.6.7.1. 명량 해전
3.6.8. 조선 수군의 수습과 9차 출격
3.6.8.1. 절이도 해전
3.6.9. 2차 울산성 공방전
3.6.9.1. 경상좌병영 공방전3.6.9.2. 울산성 공방전
3.7. 전쟁의 종결
3.7.1. 사천왜성 공방전3.7.2. 순천왜성 공방전3.7.3. 조선 수군의 10차 출격
3.7.3.1. 노량 해전
4. 전쟁의 결과
4.1. 조선4.2. 명4.3. 후금4.4. 일본

1. 개요 [편집]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의 침략을 병행하여 이루어진 일본 도요토미 정권의 조선 침공. ???: 한국은 일본에게 침략당한 적 없어

푸가놈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원조. 모든 것을 얻은 새끼가 남의 땅에 쳐들어갔다가 자기 정권도 말아먹었다.

사실상 조선 역사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총력전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좆이 돔황을 너무 못 친 나머지 하도 빨리 끝나 총력을 쓰기도 못했고, 개화기에는 고좆새끼와 민가놈들이 총력을 다해 나라를 팔아먹었다.

2. 발단 [편집]

2.1.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열도 통일 [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열도를 통일했다. 이 새끼는 일본 열도를 통일하기 전부터 치매가 왔는지 1585년 관백 취임 시점부터 "우리는 앞으로 매년 여름을 조선에서, 매년 겨울을 명나라에서 보낼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좆됐다 싶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6] 자신이 조선에 통보하여 직접 통신사를 파견토록 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했고, 조선이 그뭔씹을 시전하자 조선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을 모두 잡아 보내는 노력을 보여 마침내 조선으로부터 통신사를 받아냈다.

근데 히데요시 이 새끼는 통신사들이 항복 사절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심지어 항복 사절이래도 사신인데 얘들 있는 앞에서 애기 기저귀 갈고 옷 갈아입고 관종짓을 했다.

아무튼 통신사는 일본을 잠시 둘러보고 히데요시를 만난 후 돌아왔는데, 황윤길 등 대다수의 인원들이 "히데요시는 무서운 인물이다"라고 했으나 부사 김성일이 "히데요시는 이명박(쥐)과 같아서 큰 그릇이 못 된다"고 했고, 이에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대깨문이었는지 그 말을 믿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고 설득하여 임진왜란의 예비대로 대비시켰으나[7] 결과적으로는 뻘짓이 되었다.

2.2. 일본군의 준비 [편집]

일본군은 본토에서 도합 16개 군, 총병력 47만 2천 명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이 중 규슈, 시코쿠, 주코쿠의 8개 군이 먼저 상륙할 예정이었고, 간토와 추부 등의 8개 군은 예비대로서 본토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당시 명나라가 명목상 군적에 올려놓은 병졸이 60만 명이었고[8], 동시기 지중해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오스만 튀르크가 온 나라를 쥐어짜도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 한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일본은 정말 당대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 대군을 모은 것이다.

수군으로는 1척의 니혼마루[9]와 최소 30척 이상의 아타케부네(안택선), 그리고 2,300척 이상의 대소 세키부네와 고바야부네를 동원하였다. 이는 단순히 배의 숫자로만 본다면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해군이었으며[10][11] 배의 배수량으로 보면 에스파냐 아르마다의 6~10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또한 이 47만 명의 대군 가운데에는 최대 5만 명의 조총병도 포함되어 있었으며[12], 동시에 1만 5천 기 이상의 각종 기병도 포함되어 있었다[13]. 공성병기를 다루는 특수부대 5만여 명도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군수물자를 나르고 길을 내고 선박을 건조하는 데 투입된 인력은 수백만 명[14]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군이 집결시킨 군대는 과장 없이 고구려-수 전쟁 이래 동아시아 사상 최강, 최대의 군대였으며, 만약 예정대로 이 병력이 정상적으로 투입되었더라면 조선은 전토가 초토화되는 것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제해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후방부대는 반도 못 건너갔다.

2.3. 조선군의 준비 [편집]

조선도 나름대로 준비는 했다. 성축을 보수했고, 병선을 개수했으며, 유능한 장수들을 낙하산 급으로 빠르게 특진시켜 요직에 배치시켰다. 이때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도 그중 하나다. 또한 군사훈련을 재개했고 병력 명부를 재검토했으며, 그동안 관례상 눈감아주던 허위로 기록된 것들을 철저하게 찾아내어 고쳤다.

이순신, 이억기, 박홍 등은 고작 10여 척에서 많아야 40여 척이던 각 수영의 판옥선들을 개수하고 화포 발사를 훈련시켰으며, 임전태세에 준하여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근데 수군 전력의 중핵인 경상우수영은 그만 원균[15]에 감염되는 대재앙을 맞아 100여 척의 판옥선을 훈련도 안 시키고 놀았다.

또한 기병 전력을 확충하여 2만여필 정도의 군마를 확보했으며, 무기고를 수리하고, 전라도에서는 군량미를 수습했다.

아무튼 전운을 감지한 조선도 나름대로 착실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조선에게는 세 가지 엄청나게 큰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는 일본의 침략이란 을묘왜변이나 삼포왜란에서 겪었던 "조직화된 왜구의 침략"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전력이라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정도는 차단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이 생각하는 조선에 대한 침략은 이제까지 도요토미가 다른 곳의 봉주들을 쓰러뜨린 것처럼 "정복전쟁"이었다.

둘째는, 조선의 대전략은 대부분 북방의 여진족을 대적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고구려 때부터 이어져 온 주력부대인 중장기병을 중심으로 적들의 주력은 산성에서 회피하고 기동대를 움직여 적들을 거점 단위로 타격해 무력화하는 기동전을 선호했는데, 문제는 이게 "완전한 침략군"인 일본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중장기병이 조총 앞에 맥을 못 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당시 전국시대로 담금질된 일본의 국력이 이미 조선을 너무나 까마득하게 초월하고 있어서 절대적인 체급의 차이가 노력이나 현명한 대처 따위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16]

물론 일본군에게도 상당히 큰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첫째는, 분명 일본의 국력이 조선을 압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섬과 반도가 바다로 갈려 있다는 한계상 그 국력을 100% 온전하게 투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간 기착지라도 좋으면 모를까, 그 중간 기착지라는 놈이 험준한 산맥에 항구 만들기도 엿같고 쌀은 5천 석도 안 나오는 대마도였으니...

둘째는, 봉건체제라는 한계상 일본이 자신의 국력을 온전하게 뽑아내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부대 단위의 결속력은 뛰어나지만 장수 간의 결속력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우키다 히데이에의 중재와 조선군의 반격으로 인한 위기가 없었다면 아마 가토와 고니시는 조선에서 피를 봤을 것이다.

셋째는, 하늘이 주유를 낳을 때는 항상 공명을 함께 낳는다는 사실이었다.

3. 전개 [편집]

3.1. 한양 공세 [편집]

3.1.1. 부산진성 공방전 [편집]



1592년 4월 13일 오후 8시경,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제1군은 18,700명의 병력과 전투선 700척을 이끌고 절영도에 상륙했다. 이에 부산진성의 정발은 야전기동훈련을 겸한 사냥을 행하던 중, 급히 성으로 돌아가 군민을 수습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동시에 경상좌수사 박홍은 보유하고 있던 판옥선들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혔다. 당시 경상 좌수영이 기동 가능했던 전선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5척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이미 바닷길이 막혀버린 이상 자침시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어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감천을 점령하고 정발에게 항복하라는 전령을 보냈지만, 성 안의 백성들이 매우 노하여 전령을 정발에게 데려다 주지도 않고(...) 죽여서 코와 귀를 베어 돌려보냈다. 이에 4월 14일 오전 5시~6시경 동이 트기 시작하자 고니시는 병력을 움직여 부산진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서문 앞 고지대로 올라가 성을 내려다보면서 조총사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정발은 그 지역을 향해 활과 각종 총포를 쏘게[17]하는 한편, 동시에 서문 앞으로 날카로운 마름쇠와 사금파리를 뿌려 일본군의 공성병기 진입을 어렵게 했다.

이에 일본군은 10시경까지 물러났다가 다시 돌격해왔는데, 전술했듯 조선군이 서문 앞에 마름쇠를 뿌렸기 때문에 일본군은 서문을 우회하여 북문으로 돌진했다. 이때 조선군이 북문에서 어떻게 맞섰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정황을 보면 정오경까지는 일본군이 북문을 깨뜨리고 부산진성 내부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산진성에 있던 조선군의 정규병력은 527명이었고, 징발된 병사나 군민까지 합치면 2,500여 명 정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성문이 깨지고 일본군 1만 8천 명이 내부에 돌입하자 절대적인 숫자에서도 밀렸으며 단병접전에 능한 일본군에 의해 조선군과 군민은 모두 도륙되었다. 정발은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조총을 맞고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사상자 약 140여 명이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고니시는 이 지역에 일본군 항구를 건설하는 한편, 곧바로 근방의 다대포진성으로 진격했다.

3.1.2. 다대포성 공방전 [편집]

3.1.3. 김해성 공방전 [편집]

3.1.4. 상주 전투 [편집]

3.1.5. 탄금대 전투 [편집]

3.1.6. 선조의 빤스런과 한강 전투 [편집]

3.1.7. 1차 울산성 공방전 [편집]

3.2. 하삼도-남해 전역 [편집]

3.2.1. 조선 수군의 1차 출격 [편집]

전라 좌수영 수군절도사 여해 이순신이 일본군의 침입을 파악한 시점은 음력 4월 16일이었다(이하 문단 시간 기록은 전부 음력). 원균놈의 씨발[18]이 이순신에게 "즉시 모든 전라 좌수군을 모아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원래는 이 새끼가 관할하는 경상우수영이 전라좌수영을 돕는 컨트롤타워다.

이에 이순신은 잠시 망설였는데, 우선 해당 시점 전라좌수영의 실질 전력이 다 합쳐야 25척[19]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라우수군 이억기에게 통보하여 전라우수영 수군을 끌고 와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전라좌수영보다 훨씬 넓은 권역을 관할하는 전라좌수군이 빠르게 집결하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5월 1일이 될 때까지도 이억기는 오지 못했고, 전라좌수영에서는 단독 출정에 대한 갑론을박이 오갔다. 특히 전라좌수영 최고의 맹장이었던 녹도 만호 정운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적들을 막을 수 없다"라며 강력하게 출정을 주장했으나, 경상도 바다는 익숙하지 않으며 지리도 잘 모른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한편 전투가 두려워 황옥천이라는 병사가 탈영을 시도하다가 잡혀 참수되는 등 조선 수군 내부에서는 동요가 시작되었다.

한편 일본군은 시시각각으로 퍼져 나가며 그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개전 당시 부산포에 상륙했던 고니시와 가토의 1,2군에 이어 구로다와 모리의 3,4군이 경남 죽도에 상륙하며 제해권 영역을 2배 가까이 확대했고, 이미 이 시점에 조선에 그 흘수를 내린 왜선은 1천 2백 척을 초과했으므로 그 총합이 이순신 함대의 50배를 넘었고, 수나라군 내호아가 평양성에 상륙한 이래 삼한 땅 역사상 가장 많은 적선이 상륙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5월 초에 접어들며 일본군의 제해권은 경상도 동부를 넘어 사천, 삼천포, 고성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일본군의 최종 목표는 강화도 내지 제물포의 점령이었으며 이를 통해 한양을 보급 기지로 삼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장기적인 보급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5월 4일, 충무공은 출격했다.
3.2.1.1. 옥포 해전 [편집]


이순신 함대는 전라 좌수영(여수)에서 출발하여 남해도의 평산포, 상주포, 미조항을 지나 고성 땅 소비포를 거쳐서 당포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씨발[20] 휘하 경상 우수군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약속과 달리 씨발은 나오지 않았고 이에 따라 반나절이 지체되었다. 원균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1척의 판옥선을 끌고 합류했으며, 와해되었던 경상우수군 소속 판옥선 3척이 이운룡, 이영남, 기효근 등의 지휘로 나타났다.

연합함대는 한산도 북쪽을 지나 거제 도슬포(도장포), 지시포(지세포), 조라포(구조라), 양암(양지암)을 경유하여 옥포로 나아갔다. 이어서 옥포에 도달하자, 사도 첨사 김완의 판옥선에서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21] 이는 적을 발견했다는 뜻이었으며 마침내 충무공 휘하 함대는 일자진을 치고 옥포를 포위했다.

당시 일본군은 옥포 일대의 민가에서 분탕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초기의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의 전투방식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목민족처럼 무차별적으로 민가를 분탕질했을 가능성은 다소 낮다. 아마도 고을 일대에서 조선군을 찾느라 큰 민폐(?)를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전 함대에 동요치 말도록 물영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22]이라 지시했다.



이어서 인류 해전사에 한 획을 긋는 포성이 옥포만을 갈랐다. 당시 옥포만의 지리상 일본 수군은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고 조선 수군은 하나뿐인 퇴로에 거대한 해상 장막을 두른 채 포화와 화살을 퍼부었다. 대장군전, 철환, 석환, 조란탄이 쏟아져 내렸고 일본군의 선박, 군기, 장병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곧이어 조선 수군은 돌입하여 북을 치고 깃발을 휘두르면서 닥치는 대로 일본군 병선을 불사르고 가라앉혔다. 이 날 단 한 번의 해전으로 26척의 왜선이 깨어지고 수천 명 이상의 일본군이 죽었다. 반면 조선군은 1명의 부상자만을 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교환비를 보여주었다.

이 와중에 씨발은 물에 떠다니는 일본군을 건져 올려서 대가리 따기에 바빴는지라 전투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같은 조선군에게 화살을 쏘며 수급을 빼앗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옥포 해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거둔 첫 번째 승리였으며, 전황의 대반전이자 이순신 전승행진의 개막이었다. 동시에 도요토미 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3.2.1.2. 합포 해전 [편집]
옥포를 불사른 연합함대는 영등포에 진을 치고, 병사들을 올려보내 물을 길어 밥을 지으며 쉬었다. 그리고 이 때 척후선 두 척이 합포 인근 해역에서 신기전을 다시 한 번 쏘아 올렸다.



연합함대는 빠르게 배식과 재출정 준비를 마치고 함대를 끌어 척후선이 신기전을 쏘아 올린 합포 일대로 이동했다. 다섯 척의 왜선이 정박해 있었는데, 수적으로 불리했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땅으로 달아나 조총을 쏘며 응전했다. 우척후장 김완과 향도 어영담이 각자의 배를 끌고 육탄돌파하여 만에 진입한 후, 화살과 총통을 이용해 일본군을 쫒아내고 왜선 다섯 척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여담으로, 이 다섯 척의 전투함은 와키자카군의 수송선들이었다. 이 전투를 시작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이순신의 길고 긴 악연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3.2.1.3. 적진포 해전 [편집]

3.2.2. 해유령 전투 [편집]

3.2.3. 임진강 전투 [편집]

3.2.4. 기강 전투 [편집]

3.2.5. 정암진 전투 [편집]

3.2.6. 조선 수군의 2차 출격 [편집]

3.2.6.1. 사천 해전 [편집]
3.2.6.2. 당포 해전 [편집]
3.2.6.3. 1차 당항포 해전 [편집]
3.2.6.4. 율포 해전 [편집]

3.2.7. 용인 전투 [편집]

3.2.8. 무계 전투 [편집]

3.2.9. 여주-금화 전투 [편집]

3.2.10. 1차 평양성 공방전 [편집]

3.2.11. 웅치-이치 전투 [편집]

3.2.12. 전주성 공방전 [편집]

3.2.13. 조선 수군의 3차 출격 [편집]

3.2.13.1. 한산도 대첩 [편집]
3.2.13.2. 안골포 해전 [편집]

3.2.14. 1차 금산성 공방전 [편집]

3.2.15. 우척현 전투 [편집]

3.2.16. 2차 평양성 공방전 [편집]

3.2.17. 영천성 공방전 [편집]

3.2.18. 3차 평양성 공방전 [편집]

3.2.19. 청주성 공방전 [편집]

3.2.20. 2차 금산성 공방전 [편집]

3.2.21. 조선 수군의 4차 출격 [편집]

3.2.21.1. 장림포 해전 [편집]
3.2.21.2. 화준구미 해전 [편집]
3.2.21.3. 서평포 해전 [편집]
3.2.21.4. 다대포 해전 [편집]
3.2.21.5. 절영도 해전 [편집]
3.2.21.6. 초량목 해전 [편집]
3.2.21.7. 부산포 해전 [편집]

3.2.22. 연안성 공방전 [편집]

3.2.23. 진주 대첩 [편집]

3.3. 함경도 전역 [편집]

3.3.1. 회령 공방전 [편집]

3.3.2. 명천 공방전 [편집]

3.3.3. 석성령-장덕산 전투 [편집]

3.3.4. 북관 대첩 [편집]

3.4. 조명연합군의 결성과 반격 [편집]

3.4.1. 4차 평양성 공방전 [편집]

3.4.2. 성주성 공방전 [편집]

3.4.3. 벽제관 전투 [편집]

3.4.4. 조선 수군의 5차 출격 [편집]

3.4.4.1. 웅포 상륙작전 [편집]
3.4.4.2. 2차 웅포 전투 기록에 대한 의문 [편집]

3.4.5. 행주대첩 [편집]

3.5. 명-일 교섭 [편집]

3.5.1. 진주성 공방전 [편집]

3.5.1.1. 비거? [편집]

3.5.2. 조선 수군의 6차 출격 [편집]

3.5.2.1. 어선포 해전 [편집]
3.5.2.2. 읍전포 해전 [편집]
3.5.2.3. 자구미포 해전 [편집]
3.5.2.4. 당항포 해전 [편집]

3.5.3. 심유경과 고니시의 국제 사기극 [편집]

3.5.4. 파탄 [편집]

3.6. 하삼도 섬멸전 [편집]

3.6.1. 이순신의 좌천 [편집]

3.6.2. 조선 수군의 7차 출격 [편집]

3.6.2.1. 기문포-칠천량 해전 [편집]

3.6.3. 황석산성 공방전 [편집]

3.6.4. 남원성 공방전 [편집]

3.6.5. 어란포-벽파진 해전 [편집]

3.6.6. 직산 전투 [편집]

3.6.7. 조선 수군의 8차 출격 [편집]

3.6.7.1. 명량 해전 [편집]

3.6.8. 조선 수군의 수습과 9차 출격 [편집]

3.6.8.1. 절이도 해전 [편집]

3.6.9. 2차 울산성 공방전 [편집]

3.6.9.1. 경상좌병영 공방전 [편집]
3.6.9.2. 울산성 공방전 [편집]

3.7. 전쟁의 종결 [편집]

3.7.1. 사천왜성 공방전 [편집]

3.7.2. 순천왜성 공방전 [편집]

3.7.3. 조선 수군의 10차 출격 [편집]

3.7.3.1. 노량 해전 [편집]

4. 전쟁의 결과 [편집]

4.1. 조선 [편집]

4.2. [편집]

4.3. 후금 [편집]

4.4. 일본 [편집]

[1] 음력 1592년 4월 13일 ~ 1598년 11월 19일[2] 음력 1597년 7월 15일 ~ 1598년 11월 19일[3] †표는 전사, ‡표는 처형 혹은 옥사, +표는 병사. 조선 측 수뇌부의 관등은 개인의 상징적 관등이 있는 이순신, 류성룡, 권율을 제외하면 모두 1593년 1월 올라온 장계의 기준임.[4] 임진왜란의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치는 자료에 따라 조선 측 사상자는 10만에서 100만, 일본 측 사상자는 2만에서 20만 이상으로 차이가 크다. 일반적으로 한국 측 자료에서는 조선의 인명피해를 크게, 일본 측 자료에서는 일본군 사상자를 낮게 잡는 경향이 있다. 자료마다, 심지어는 학자들마다 사상자 수가 다르니 참고할 것. [5] 민간인 포함[6] 대마도는 사실 쌀이 1만 석은커녕 5천 석도 안 나서 다이묘가 못 되는 상황이었는데 징징거려서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이렇게 쌀이 적게 나니 대마도는 인근에서 많이 나는 해물과 소금을 가져다가 조선에 팔고 쌀을 사 먹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전쟁이 나면 대마도는 다 굶어 뒤질 게 뻔했다.[7] 위의 표를 보면 16군 사령관이 도쿠가와이다[8] 다만 여기에는 예비군은 빠져있다[9] 초대형 안택선. 원래 이름은 "키슈우"였으나 도요토미가 자신의 기함으로 삼으며 이름을 고쳤다.[10] 레판토 해전 당시 온 지중해의 군함이 모인 게 450척 남짓이었다[11] 다만 단순 척수로만 본다면 4,500여 척을 동원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이 훨씬 많다.[12] 이 중 1만 5천에서 2만 명 정도가 조선에 투입되었다.[13] 다만 이들 대부분은 예비대에 머물렀고 실제 조선에 투입된 것은 4천 기도 되지 않았다.[14] 히데요시 행장기의 기록상으로는 "모든 사내를 동원했다"고 적었고 숫자는 600만 명인데, 이건 당시 일본 인구 1,500만에서 노인, 어린이, 여자 빼고 다 적은 수치로, 정황상 구라같다. 일본의 당시 조세로 감당 가능했던 군수 인력은 당시 일본 생산 인력의 3분의 1 정도인 100만 명~200만 명 정도가 한계였다.[15] 천연두균, 페스트균과 함께 인류 역사 3대 균이다[16] 멕시코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을 전면전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17] 프로이스의 기록에서는 "조선군이 구리로 된 포를 쏘며 맞섰다"고 적었다.[18] 원균은 씨발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원균과 씨발의 순서를 바꾸어 쓴다고 해서 러시아식 유머는 아니다.[19] 판옥선 24척, 거북선 1척. 해당 시점에 거북선 2호는 아직 건조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17척의 협선은 초계정 수준이었으며, 46척에 이르는 포작선은 수군의 식량 및 자금 확보를 위한 청어잡이배들을 전선으로 꾸민 것에 불과했다. 전투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비정규 왜구를 상대로 소규모 교전능력을 가진 것일 뿐, 당시 일본 정규군에 대해 전면적인 교전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실제로도 2차 출격부터는 포작선을 거의 동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0] 원균[21] 전근대 전투에서 불화살은 주로 신호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말하는 신기전은 문종화차와 같은 다연장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는 뜻이 아니고 총통에 신기전 화살을 매겨 쏘았다는 것으로 보인다.[22] = 개복개복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