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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탐색은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끝났음.

휩노스 병의 원인이 전파라는 것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보는 진즉 죽은 에바의 자료에서 습득해뒀던 것이니 그리 큰 의미는 없었지.

기존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라면 블랙리버가 멸망 전에 휩노스 병에 대한 대부분의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나, FAN 전파가 발생하는 해구의 좌표 정도일까.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직접 알려줘도 되었을 텐데 에바는 굳이 빙 돌게 하는 방식을 택했구나.

어쩌면 사령관이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뇌피셜이라고도 하기 힘들 만큼 모호한 추측에 불과했고.


아무튼 현재 위치에서 그리 멀지도 않겠다, 이미 시작한 이상 어정쩡하게 돌아가는 것도 이상하겠다.

오르카 호는 큰 이견 없이 그대로 북마리아나 제도를 향해 출발했음.

그리고 상륙 후보지를 찾아 행해진 정찰은-


- 아아, 정말! 그 녀석 진-짜 짜증나!


원작대로 스피커의 방해에 의해 제대로 된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했고.


스피커에 대한 블랙하운드의 설명 - 이상한 연설을 하는 것 같다는 - 을 들은 사령관의 안색이 변하는 상황에, 리제는 문득 사령관이 철충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어.

5지역에서 트릭스터의 유언을 들은 사령관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철충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에둘러 전했으니까.

그때는 사령관이 두통을 비롯한 심적 압박에 시달리는 게 측은해서 신경 쓸 거리를 줄여주려고 했던 건데, 이제와 밝히는 것도 조금 뜬금없고.

그래도 사령관이 오르카 내에서 받는 인망을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 …….

- …….


잠깐.

어째 라비아타랑 사령관이 서로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마주친 다음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무리 원작보다 훨씬 친해졌기로서니, 이미 밝혔다고?

그것도 둘만?


사실 나도 안다며 끼어들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 답답함과 소외감 사이의 애매한 무언가에 초조해하는 리제는 어찌되었든, 두 명은 정면에서의 화력 승부로 돌파해 보자는 제안을 함.

전초기지로서의 사용도 고려해야 하니까 둠브링어의 광범위한 포격은 해안에서 주력군을 줄여내는 것에만 사용하고, 그 후에는 캐노니어를 중심으로 화력을 집중해 격파하며 나아가는 것으로.


- 이번에는 나도 동행할게.


라는 제안에는 역시 반대가 많았지만, 공중 정찰이 불가능하니 지상에서 은엄폐에 능한 전투원 - 팬텀이나 쉐이드 같은 - 을 동원해 보충하더라도 정보력에 한계는 있고, 그런 상황에서 돌발적인 일에 대처하려면 현장에 있을 필요가 있다는 정론 앞에 무마되었음.

그 대신 라비아타, 블랙 리리스에 포트리스까지 동원하겠다는 다짐을 모두에게서 받긴 했지만.


- 이 정도 호위면 리제도 같이 가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반쯤은 농담 섞인 제안에 답지 않게 동의한 건, 순전히 (방금 느낀 소외감 때문에) 살짝 삐졌기 때문이었음.

사령관은 리제가 토라졌다는 걸 눈치채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딱히 만류하지는 않았고.


- 그래. 마침 세이렌의 함선도 가까웠지?


*   *   *


현장에 있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 라는 생각도 의미가 없을 만큼, 리제가 기억하는 전장과 지금의 전장은 완전히 달랐지.


- 싹 쓸어버려!


플로팅 아머리에서 쏟아지는 탄약을 캐노니어가 받기 무섭게 쏘아대고, 그렇게 구성된 화망이 새카만 철충의 파도를 짓이기는 광경은 정말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거든.

가위질 같은 건 정말 낄 자리도 없구나.

그렇게 포성과 연기로 뒤덮인 전선이 유지된 끝에- 밀려나는 건 저항군 쪽이었어.

캐노니어의 화력이 직사포 중에선 수위를 다툰다고 해도 철충의 숫자가 그보다 많았거든.


- 하하. 알고는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개떼같군.

- 아머드 메이든은 동원하지도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럼에도 포트리스 너머에 자리잡은 지휘부는 태연했지만.

아스널과 사령관이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다렸다는 듯 통신 콘솔이 떠올랐음.


- 여기는 팬텀 이하 정찰조. 퇴각 완료했습니다. 지형 정보는 첨부한 대로입니다.

- 수고 많았어. 전송… 완료.

 좋아. 그럼 우리도 물러날까?

- 좋아! 자매들! 전탄 발사다! 마지막으로 빅엿을 먹여주자고!


아스널의 호령에 맞춰서 마지막으로 - 이번엔 에밀리의 레일건까지 더해져서 - 포격을 쏟아붓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일시적인 소강 상태가 벌어졌음.

여러모로 상황은 다르지만, 원작이랑 비슷하긴 하구나.

이 다음에 있던게 그 문제의 배북 장면이었던가.

그건 참 대단했지, 마냥 태평하던 리제의 생각이 '그런데 이쪽에서는 사령관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인 게 나 말고 없지 않아?'라는 원초적인 의문에 닿은 것은 안타깝게도 아스널이 씩 웃으며 리제의 코앞에 당도한 직후였어.


- 사령관. 잠깐 부관을 빌리겠다.

- 꺅?!

- 아스널?!

- 모두의 전의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다! 믿어다오!


말리려던 사령관이 아스널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멈칫한 순간 이미 모든 것은 늦어도 너무 늦어 있었고.

어질어질하던 머리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구체화하는 것에 성공했을 즈음 해서는, 이미 리제는 포트리스가 만들어낸 성벽 위에서 아스널과 나란히 서 있었음.


- 자, 보이냐? 철충 놈들아!


탁, 탁.

이 소리가 왜 내 배에서 나고 있는 걸까요.


- 너희들이 아무리 많아도 여기에서 끝없는 인간이 나와서 너희들을 모두 죽일 거다!

 알아 들었냐?!

 너희가 아무리 지랄 맞아도 우리 의지가 있는 한 우릴 이길 순 없어!


사령부는 물론이거니와 전선에 서 있던 다른 캐노니어, 하다못해 철충들조차 얼어붙어버린 것 같은 기묘한 침묵 이후.


- 아아아아아아 - 셀주크 기갑사단, 포격을 개시한다! 아아아아아!!!!


시뻘건 얼굴로 리제가 내지른 비명은 건네받은 지형 정보로 단번에 최적의 배치를 계산한 알바트로스의 호령과, 그에 맞춰 캐노니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의 포격을 쏟아붓기 시작한 셀주크의 굉음, 겸사겸사 듣는 사람도 상쾌해질 만큼 호탕한 아스널의 웃음소리에 묻혀서 들리지도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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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아르망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전개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었스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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