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수스 국경 근처의 어딘가.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와 살을 찢는 바람이 굉음이 모든 것을 덮고 있다. 


이 땅의 겨울은 자비가 없다. 마치 제국의 이름을 딴 자손들에게 내리는 가르침이기라도 하듯이. 


수많은 생명이 냉혹한 제국의 가르침 아래에 이지러졌고, 적지 않은 생명이 그것을 극복하고 자랑스런 제국의 자손으로 거듭났다.


지면에 닿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희미한 달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이 혹한의 땅을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천천히 가로지르고 있다.


금새 눈으로 지워지긴 했지만 그것의 궤적엔 한치 흐트러짐도 없다. 올곧게 나아가는 그것에게 제국의 가르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난 제국의 칼바람 사이로 잊혀진 옛 노래가 드문드문 들려온다.



 "...꿈에서 출발해... 금빛의 이상향으로... 향하네..♪"


 붉은 미늘 갑주를 입고, 치켜든 월도를 길동무 삼아 걷고 있는 그의 노랫가락은 카시미어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다.


나이츠모라. 카간이라 불리는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케식들이 온 대지를 짓밟고 다니던 영광스런 공포의 군단의 후손. 


이제는 기록도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전에 사라진 유목 민족의 전통은, 사라질듯 희미하게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천도.


진정한 케식으로 거듭나기 위해 거쳐야하는 나이츠모라의 영광스런 성인식. 추구하는 무언가를 찾아 홀로 기나긴 행군을 이어가는 전통이었다.


이제 테라에 남은 나이츠모라는 몇명 되지도 않지만 이런 먼지 쌓인 전통을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홀로 걸을 용기를 지닌 자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 붉은 케식을 제외하고는. 


그는 홀로 이 차가운 대지를 짓밟는다. 확신에 찬 그 걸음에 흔들림이 없다.


어디로 어떻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채, 나이츠모라는 하늘로 간다.




 -지상함 로도스 아일랜드의 집무실.



 "어떤 작전인지 이해했어?"


 새카만 후드와 얼굴을 통째로 가리는 바이저가 달린 코트로 온몸을 꽁꽁 싸맨 작은 체구의 인물이 화이트 보드를 톡톡 치며 앞에 앉은 쿠란타에게 물었다.


황금의 광택이 생명을 얻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금발 쿠란타의 화사함은 앞에 선 검은 인물과 무척이나 대비되고 있었다. 그녀는 탁자에 잔뜩 놓인 자료와 화이트 보드를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몸에 잘 맞게 조정된 은빛 갑옷도, 소녀의 앳됨을 털어내지 못한 얼굴을 한껏 뒤덮은 당황도 이 쿠란타의 황금빛 화사함을 다 감추지 못했다.


 "마리아?"


 박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마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더니 멋쩍은듯 헤헤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응, 이해는 했어. 우르수스 외곽의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공학 기술 밀거래와 관련된 작전... 이잖아?"


 "음. 그렇지. 그런데?"


 박사는 마리아가 말끝을 흐리는걸 놓치지 않았다. 마리아는 이런점 때문에 그와 대화하는 것이 편했다. 


 "내가 의문인 부분은 두가지야. 왜 '적절한 대처'의 추천 방식에 제압이나 탈취가 들어있는지, 그리고 이 작전의 책임자가 어째서 나인지."


 박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정보원에 따르면 이 기술이 오리지늄과 관련된 무기 제조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 네 말처럼 제약회사인 우리가 제국의 병기 산업에 관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국이 벌이는 싸움의 규모는 항상 우리의 예상을 넘어섰어. 큰 파장을 막을 수 있거나, 적어도 대처법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면 약간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이라도 사용해야 한다는게 켈시 선생의 의견이야. 나도 일부 동의했고."


 "그리고 네가 책임자인 이유는, 바로 오퍼레이터 블레미샤인이 이 작전에 가장 적임자이기 때문이지."


 "뭐?"


 마리아는 다시한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채 되물었다. 그녀가 로도스에 입사한 이후로 꽤 다양한 작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작전의 책임자로써 나갔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 실수도 많았고 수행능력이 뛰어났다고도 자평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해보이는 작전이라니..


 "전혀 대답이 되지 않잖아!"


 "부연 설명이 부족했나? 그래. 이 로도스에 무기제조와 관련된 지식을 갖고 있는 오퍼레이터도 많겠지. 하지만 모두들 각자의 지식이 한정되어 있어. 그런데 내게 들어온 참관 신청서들에 따르면, 니어 가문의 한 아가씨가 다른 기술자들이 질려서 거부할 때까지 온갖 분야의 지식을 탐독했었다고 해. 어떤 병기인지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너라면 그 기술의 가치와 위험성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을거야. 그리고 어떤 스포츠 기사 출신 교관에 따르면 최근 오퍼레이터 블레미샤인의 작전능력이 전반적으로 매우 향상되었으니 편성에 충분히 고려해 줄 것을 몇번이나 당부했었지. 너라면 작전중에 벌어지는 다양한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도 있고, 만에 하나 벌어질 위기상황에서 동료들을 구해낼 수 있을거야. 이정도라면 어때, 납득할 수 있겠어?"


 박사가 준비라도 한 것처럼 쏟아내는 설명을 들으며 마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특히나 조피아 고모의 평가는 더더욱 그녀를 부끄럽게 했다. 당장 어제의 훈련에서도 고모는 마리아의 움직임에 수도 없이 많은 지적을 했었다.


 "아... 그건.."


 "만약 힘들다면 거절해도 돼. 그리고 덧붙여서 적절한 대처는 네가 판단해서 결정하면 돼." 


 땅을 쳐다보며 눈알을 굴리던 마리아가 이내 결심한듯 고개를 치켜들고 박사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예의 당황한 소녀는 온데간데 없었고, 홀로 기사 경기에 뛰어들었던 용감한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흘러넘칠 듯한 금빛 광채만이 이 쿠란타가 아까와 동일인물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니야, 할게. 박사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좋아, 그럼 바로 작전 세부 내용과 편성으로 넘어가볼까."






 - 우르수스 국경 근처의 설원.



 마리아는 세명의 오퍼레이터와 한대의 의료 로봇과 함께 거친 눈을 맞으며 밤의 설원을 지나고 있었다. 2주 전 작전설명을 듣던 따스한 집무실의 온기가 추억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리아는 우르수스 대지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나 잦은 야간 행군의 좁은 시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 따위는 불평거리도 못되었다. 마리아를 진정 긴장시키는건 자신에게 달린 세명과 한대의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오늘 밤에는 꼭 목적지에 닿았으면 좋겠네. 작전일도 코앞이고, Lancet-2 씨의 배터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두터운 방한복 사이로 눈만 내놓은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일행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구하나 혹한에 익숙한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불만없이 묵묵히 자신을 따라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정은 꽤 순조로웠고, 곧 목적지 마을에 다다를 것이다. 작전이 바로 이어지겠지만 적어도 눈밭에서 객사할 걱정에선 해방될 것이란 생각이 마리아의 의지를 조금 북돋았다. 


 "목적지가 가까우니 다들 힘..흡!"


 조용히 격려의 말을 건네려던 마리아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눈 쌓인 숲에는 돌이든 돌출된 나무 뿌리든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방심하고 걷다가는 균형을 잃는게 다반사였다. 그래도 몇주 간의 밀입국 생활 덕분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틀어막는게 버릇이 되어 있었다. 마리아의 뒤를 따라오던 피디아가 재빠르게 꼬리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감사합니다, 유넥티스 씨."


 유넥티스는 대답 대신 꼬리의 눈을 털었다. 정글 출신의 그녀는 누구보다 혹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박사가 여러번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Lancet-2가 가는 작전에 자기가 빠질 수 없다며 기어이 따라왔다. 


 "다들 발조심하세요, 뭔가.."


 장애물은 거의 종아리 높이의 꽤 큰 것이었다. 돌일 수도 있었지만 무언가 이물감이 들었다. 마리아는 장애물을 확인하기 위해 눈더미를 조금 헤쳤다. 얼마지 않아 그녀는 다시 한번 비명이 새는걸 막기 위해 이를 꽉 물어야 했다. 눈 아래에 깔린 것은 돌이나 나무 같은게 아니었다. 그것은 척봐도 건장한 체구의 사람이 앞으로 고꾸라진 형태였다.


'어쩌지? 살아있는 건가? 어떻게 해야하지?'


 이 눈의 나라에서는 다양한 생명이 수많은 형태로 피고지기 마련이다. 혹한은 무고한 생명을 쉬이 앗아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악의를 쉽게 감춰주기도 하니까. 피해자의 신분이나 사건 배후에 따라 무척 골치아픈 일이 될 수도 있었고, 작전의 책임자로써 마리아는 동료들의 안위를 우선해야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면서도 그녀는 손을 쉬지 않았다. 눈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장비가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걸까? 연고없는 땅에서 쓰러져 있을만한 사람을 마리아는 알지 못했다. 찝찝했지만 기억해낼 틈이 없었다. 뒤따라온 오퍼레이터들의 도움으로 눈 속에 쓰러진 사람을 완전히 끌어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마리아는 왜 장비가 익숙했는지 알아챘다.


'네가 왜 여기에..!'


 저 미늘 갑옷과 기이한 뿔이 달린 투구를 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테라에 단벌 갑주 하나만 입고 눈 밭을 걷다 쓰러져 있을 나이츠모라가 둘이나 있을리 없다. 마리아는 장갑을 벗고 그의 목덜미에 손을 대어 맥이 뛰는지 확인했다. 


마음 한켠에서 더이상 이자와 엮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길 바라는 나쁜 마음이 드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맥박은 느리지만 일정하게 뛰고 있었다. 미약했지만 사라지기 직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해야하지?'


 시간은 없었고, 동료들의 안전도 확보해야 했으며 작전도 이행해야 했다. 그런데 이 나이츠모라는? 언니와 포 스승님에게 칼을 들이댄 미치광이다. 경기가 끝난 이후 더이상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포 스승님은 끝까지 이 사내에 대해 이야기 하기를 꺼렸고, 모두들 하나같이 이상한 놈, 위험한 자라고 했다. 왜 악몽의 기사가 여기에 있는걸까? 이게 그의 인생의 종착점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닐까? 무엇보다 더이상 우리와, 나와는 상관도 없는 인물인데.

 

'그게 기사가 할 일이야?'


 마리아의 내면에서 툭하고 정론이 튀어나왔다. 기사가 스러지지 않은 생명을 버려두고 갈만큼 비열한 존재였던가. 카시미어 기사의 명예는 더럽혀졌지만, 정신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언니를 통해 배우지 않았나. 이게 하나의 고난이라면, 다시금 극복하면 된다. 마리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언니도 미지의 고난에 두려움 없이 맞섰어. 언제까지고 밝혀진 길로만 가서는 안돼, 마리아!'


 "이 사람 카시미어의...기사에요.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아직 살아있어요. 안전 가옥이 머지 않으니 일단 그곳으로 옮겨요. 제가 이 사람을 업고 갈게요."


 "혹시.. 이 사람.. 악몽의 기사 아니에요?"


 기술직 오퍼레이터가 나이츠모라를 알아본듯 했다. 눈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그가 품은 불안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불안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어야 했다.


 "네. 맞아요... 하지만 결코 작전에 폐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만약 방해가 된다면.."


 "그때 가서 때려눕히면 된다. 어서 가자. 나 지금 엄청 추워."


 유넥티스가 쓰러진 그를 집어들고 가볍게 어깨에 걸터올리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도 한숨을 푹 쉬고는 더이상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마리아는 악몽의 기사를 어떻게 업어야 걸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던 자신이 멋쩍어졌다. 그녀는 Lancet-2가 출발해야 한다고 할 때까지 일행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렇죠. 어서 가요."


 마리아가 급히 걸음을 옮기는데 뭔가 또 발에 걸렸다. 긴 자루의 월도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것도 집어들고 서둘러 일행의 뒤를 쫓았다. 악몽의 기사의 월도는 자루도, 날도 무척 해져있었다. 이정도면 적은 커녕 나무 하나 벨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우르수스 변경 마을 포름의 외딴 가옥.



 깡. 깡.


 쇠들이 부딪치는 소리. 허나 그것에 적의가 없다. 기이하다.


나이츠모라는 눈을 떴다. 부자연스러운 목조가 하늘을 가린다. 그리고 땔감 타는 소리와 온기.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자신이 가져선 안될 것들이다.


안락함에 안주하려는 나약함을 몰아낸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지막 기억이 어디서 끝났는지 되짚어 본다. 


걸었다. 선조들의 대지를 향해. 눈, 바람 소리. 또 눈.


그게 다였다. 천도의 노래를 다 부르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천도.


아직 갈길이 남았다.


거짓 온기에 안주해선 안된다. 


천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톨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외상은 없었고, 기력은 충분히 회복됐다.



 작전 대기겸 톨라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가옥 내에 있던 기술직 오퍼레이터가 톨라가 일어나는 것을 보더니 자리에서 펄쩍 일어났다. 그는 허둥대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봐, 잠깐 기다려! 블레미샤인 씨! 기사가 깨어났어요!"


 그는 아랫층 계단 밑을 향해 크게 소리치면서도 곁눈질로 계속해서 톨라를 살폈다. 마치 달려들기 직전의 야수를 경계하기라도 하듯.


반면, 톨라는 그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곁에 놓인 자신의 투구를 집어들고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말없이 그것을 착용하고 일어났다.


마침 지하에서도 누군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뛰어올라왔다. 흐르는 땀을 채 닦지도 못한 마리아였다. 그녀의 한손에는 대장망치가, 다른 한손에는 키에 맞지 않는 기다란 월도가 들려 있었다.


 "깨어났군요! 상태는 좀 어떤가요?"


 요란법석에도 눈길 한번 안주던 톨라가 익숙한 목소리에 갑주를 착용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렸다. 투구 안쪽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마리아 니어!"


 그의 시선은 마리아에서 손에 쥔 월도로 옮겨갔다. 마리아도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감사, 반가움 따위의 호의적인 감정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급작스레 화를 살 거라고도 예상하지 않았었다.


'으.. 역시 실수였나봐. 언니, 박사, 어쩌지? ...아냐, 이건 내가 벌인 일이야.'


 톨라도 눈치채가 힘들 정도의 찰나의 순간에 기사 마리아는 자기 안의 어리광쟁이를 걷어찼다. 


 "당신의 무기가 많이 낡았기에 수리를 좀 해뒀어요. 물자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것이고, 작전도 임박해서 언니의 장비처럼 완벽히는 고치지 못했지만.."


 "네년이 감히..!"


 톨라가 성큼걸음으로 마리아에게 다가와 월도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월도를 든 손을 뒤로 빼버렸고, 톨라의 성난 손짓은 허공을 세게 갈랐다. 


씩씩대는 톨라와는 달리 마리아의 얼굴은 감정의 요동없이 다부졌다. 둘은 잠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침묵했다. 마리아의 이마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땀방울이 흐르지 않았다면 시간이 멈췄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무구는 기사의 혼. 당신들의 세상에서도 다르지 않겠죠. 기사가 검조차 똑바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무슨 뜻을 이루겠단 거에요?"


 마리아가 침묵을 깨고 쏘아붙였다. 톨라는 여전히 대꾸 없이 부동자세였고, 마리아는 그제서야 천천히 월도를 그에게 건넸다.


 "언니의 검창처럼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D32강과 중합제를 충분히 사용했고, 약식이지만 검사도 끝마쳤으니 이전보다 사용감이 좋아졌을 거에요."


 톨라는 마리아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월도를 그녀의 손에서 잡아채려고 했다. 그 힘에 마리아가 휘청거리며 딸려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루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해야할 말이 있지 않나요?"


 "놔라."


 마리아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더이상 말꼬리를 잡지 않고 무기에서 손을 놓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기술직 오퍼레이터는 아랫층으로 달아난 후였고, 이 층계엔 두사람 외엔 아무도 없었다. 마리아는 한손으로 땀을 훔치며 사람 좋은 웃음을 헤헤 흘렸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 좋네요. 지난 몇주간 어찌나 추웠는지..."


 마리아가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지만 톨라는 듣지 않았다.


불쾌했다.


이 월도를 수천 수만번도 더 휘둘러온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저 페가수스의 말대로였다. 무기의 균형은 잘 잡혀 있었고, 닳고 이 빠졌던 날과 자루는 새로 뽑은 것 마냥 벼려져 있었다.


가짜 기사가 기사의 혼 운운하는 것은 웃기는 소리였지만 케식의 천도를 위한 장비는 부모가 내려주는 것. 내 신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어떤 변명을 달던 여지없는 본인의 과실이다.


불쾌했다.


이토록 소홀했던 스스로가 불쾌했고, 자기 길도 찾지 못하던 나약한 페가수스에게 그 치부를 보인 것이 불쾌했다.


 "이걸로.."


 톨라가 월도를 휘둘렀다. 좁은 방에서 시연하기에 적합한 무기는 아니었기에, 궤적에 닿은 가구에 깊은 상흔이 났다. 중후한 소리를 내던 월도는 마리아의 뺨 곁에서 멈췄다. 차가운 칼날이 창밖에서 스며든 빛줄기를 받아 마리아의 금빛 머리칼 만큼이나 빛났다.


 "네가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은 하지 않았나?"


 "그럼요."


 마리아는 투구 안의 톨라의 눈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그곳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미치광이지만 비겁자는 아니야."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페가수스."


 "집 안에서 무기나 함부로 휘두르지마, 나이츠모라."


 분하지만, 마리아 니어의 말이 일부는 맞았다. 톨라는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명분이 없었다.


케식으로써 톨라는 천도를 가로막는 모든 시련을 베어넘길 테지만, 이 페가수스를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한손으로 쥐어 으깰 수 있을만큼 약했고, 입김으로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한 신념을 가진 자다.


분명 가능성은 있다. 허나 지금은 아니다.


기분 상한다고 무기를 휘두르는 것은 화풀이다. 어리석은 자나 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톨라는 천천히 검을 거두어 세웠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가로 걸었다. 더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


 "어딜 가는 거에요?"


 "북쪽."


 톨라는 쌀쌀맞게 대답하며 마리아를 지나쳤다.


 "우리 메딕 오퍼레이터가 당신 몸상태가 엉망이라고 했어요. 안정을 더.."


 "필요없다."


 "또 몸도 못가누고 쓰러져서 이름모를 사람에게 도움받길 기다릴 건가요?"


 마리아의 말에 톨라는 몸을 돌려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리아의 얼굴과 태도가 조롱하는 자의 것이 아니고, 그를 꾀어내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고 만 것이다.


 "화가 나나요? 부정도 못하고 화낼거면 충분히 쉬고 기력을 회복해요. 우리도 바쁘고 당신에게 쏟을 시간이 부족하니, 오래 있으라곤 안하겠어요. 그래요, 밥이나 먹고 떠나요."


 톨라는 또 묵묵부답이었다. 마리아가 힘을 잔뜩 준 얼굴이 풀리려고 할 때까지 그는 가만히 서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마리아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포 스승님은 정말 상냥하고 좋은 분이셨는데 어떻게 저렇게 다르지?'


 마리아는 나이츠모라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인상을 잔뜩 썼다. 제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뒤에 눈이 달리지 않고서야 이게 보이진 않겠지.


'다른 분들은 엄청 싫어하시겠지? 으.. 또 멋대로 일을 키워버렸네.. 미리 사과를 해둘까?'


 마리아가 몸을 일으켜 밑에 있는 두명과 한대의 오퍼레이터에게 향했다. 톨라는 뒤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었고, 그저 문가 바닥에 굳은 것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공방겸 지하실에서 마리아가 자신의 감정적인 행동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을 무렵, 사전 정보수집을 나갔던 오퍼레이터가 가옥에 복귀했다가 입구에 놓인 거대한 형상에 놀라 소리를 꺅 질렀다.


톨라는 소리 지르는 필라인에게도 무관심했다. 필라인은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닫고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톨라가 갑자기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 부술 기세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조심스레 옆을 지나치던 필라인이 다시한번 꺅 소리를 질렀다.





 안전가옥의 외부로 나오고 나서야 나이츠모라는 목을 조르는 듯한 답답함에서 조금 해방됐다. 안락함이 그를 감정적으로 만든다. 톨라는 심호흡하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반쯤 깎인 언덕에 토굴 형태로 만들어진 가옥의 근처에는 눈 덮힌 밭 뿐이었다. 작은 마을의 입구가 저 멀리 보였다. 이동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일까. 카시미어의 대도시들 만큼의 불쾌감은 들지 않았다. 만일 지금 눈앞에 펼쳐진게 이동도시였다면 그는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톨라는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지에서 냉기가 직접 전해지자, 머리가 아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페가수스를 만났기 때문일까, 카시미어에서의 싸움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꺾이지 않는 의지를, 넘어설 수 없던 힘을. 그리고 작고 불안한,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고결함을.


토너먼트에서 겪은 실패들이 그를 오늘의 이자리까지 이끌었다. 


두 영웅들과의 대결이 준 교훈을 다시금 되새긴다.


진정으로 나를 마주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톨라의 명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가옥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금발의 쿠란타가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아! 뭐에요, 멀리 가지 않았군요."


 톨라는 명상의 방해물을 짜증스레 흘겼다.


 "뭐냐."


 "뭐냐니, 당신이 멋대로 떠났을까봐 그랬죠! 겨우 동료분들에게 설명을 마친 참인데!"


 "놈들 따윈 내 알바 아니다."


 마리아도 불쾌감을 딱히 감추지 않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요! 그러면 왜 안가고 있는건데요?"


 "천도는 긴 여정이다. 그 끝은 모호하고, 기약이 없지. 케식의 공포는 육신에서 나오는 것, 보강할 기회를 마다치 않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결국 밥 준다니까 먹고 간다는 뜻이잖아요?"


 어이없다는 듯 웃는 마리아에게 톨라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온실 화초가 야생을 이해할 리가 만무하니.


 "추워요. 들어오세요."


 "쿠란타는 무릇 초원을 누벼야 한다."


 "여긴 설원이에요. 저 하얀 것들은 초목이 아니라 눈이라고 해요."


 "언젠가 카간에게 정복당할 대초원의 일부일 뿐."


 "그 카간이 어디있는데요?"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다. 톨라는 훗 하고 웃음을 흘릴뻔 했다.


무척 익숙치 않은 감정. 그리움과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스스로를 카간이라 칭하던 애송이는 그날 버렸다.


톨라는 설원 저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다.


 "..어두운 밤이 눈을 가릴 때까지..♪"






 - 몇시간 후, 포름의 안전가옥.



 해가 떨어질 때까지 나이츠모라는 가옥의 바깥 공터에서 요지부동으로 앉아있었다. 마리아는 그런 그를 실내로 불러들이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신경쓰는 것 외에도 저 인상적인 형체가 괜시리 우르수스 국경대의 시선이라도 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큰일이니까. 악감정 밖에 없는 사람 때문에 작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박사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런 초조함에 내던진 도발도, 부탁도, 설명도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톨라는 조용히 고대의 노래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결국 그렇게 식사시간까지 제자리에서 버티고야 말았다.




 "춥지 않나요?"


 "모른다."


 마리아는 그릇에 가득 담긴 스튜를 톨라에게 건넸다. 밤의 장막에 건물 그림자까지 더해져 그릇에서 나는 김이 더욱 선명했다. 톨라는 말없이 그릇을 받아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뭣 좀 물어봐도 돼요?"


 "..."


 "또 언니에게 싸움을 걸러 올 건가요?"


 줄곧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어쩌면 언니에게 다가올 위협을 구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모른다."


 톨라의 대답은 마리아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선 이미 괜한짓을 했다는 후회가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마리아는 톨라를 흘겨보고는 돌아섰다. 이제 곧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언니에겐 꼭 경고하고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녀의 등 뒤에서 톨라는 천천히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았다.


 "빛의 기사는 더할나위 없는 훌륭한 상대였다. 나는 전설을 쫓아 그녀가 내 천도의 목표일거라 단정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누가 듣던말던 상관 없다는 듯 먼곳을 응시하면서.


 "간극을 느끼고 있었지만 잡을 수 있다 자만했다. 그녀와 결투를 재개했다 한들, 나는 전설속 카간처럼 영광스런 전투를 치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 강인한 의지를 꺾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잡았던 문고리를 놓고는 다시 톨라를 향했다. 이것도 그녀가 기대했던 대화의 흐름이 아니었다. 나이츠모라는 여전히 청자 없는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광대들의 광장에도 영광과 명예를 기억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내겐 큰 수확이다."


 "내 여정의 끝은 빛의 기사가 아니다. 나를 막아선다면 나는 전력으로 빛의 기사를 무너뜨리겠지만, 내가 닿을 곳은 더 먼 곳에 있다. 나는 나의 천도를 이어가야 한다."


 "천도..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죠?"


 마리아는 이제 톨라가 손을 뻗으면 닿을만큼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다른이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톨라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냐고 화를 냈을 것이다.


 "..과업이다."


 "포 스승님이 당신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지만.. 언젠가 술에 잔뜩 취하셔서는, 당신이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고 했어요. 무척 슬픈 목소리였어요."


 "그는 천도에 대해 모른다. 우리 일족에 대해 잊었다. 누구도 천도에 오른 케식을 걱정하지 않아."


 마리아는 이제 아예 톨라의 곁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톨라는 어두운 설원 저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호의를 받는 법을 모르는군요."

 

 "어린애다운 발상이군.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애 취급 하지 마요. 당신도 성인식도 안끝난 애면서!"


 톨라는 카시미어에서 만난 자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하나같이 자기에게 무언가 화두를 던지고, 해답을 알려주려 했다.


나와 다를바 없다.


 "그럴지도."


 "수긍이란걸 할 줄 아는 사람인줄은 몰랐어요."


 톨라는 하찮은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침묵에 조바심이 난 마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왜 그렇게 혼자 가나요?"


 "천도는.."


 "아니, 난 당신의 천도를 말하는게 아니라 삶을 말하는 거에요."


 온실 속 화초의 발상에 불쾌해진 톨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리도 나약하다니.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짜증을 내고 있음을 어렴풋 느꼈다.


 "그렇게 혼자 걷고 또 걸어서, 어디로 가나요? 친구도 동료도 없는데 누구를 다스리고, 무엇을 지배할건가요?"


 "이건! ...이건,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다. 누구의 간섭도 참견도 허용치 않는다."


 분을 못이긴듯 언성을 높이던 톨라는 금새 평정을 되찾고 말을 마쳤다. 마리아는 그의 대답에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이상한 사람.'


 이것 만큼은 무엇보다 명백했다. 공포를 떨치고 마주한 악몽의 기사는 무척이나 엉성해 보였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뭘 쫓는걸까? 한편으로 마리아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도스나, 어딘가에서 본 사람? 


 "그러면 할 말 없지만요. 하지만 호의 정도는 받아주는게 서로 좋다구요?"


 "너희의 도움따윈 필요없다."


 "조금만 더 그러고 있었으면 아마.."


 "나는 휴식을 더 취하고 일어나 걸을 터였다."


 "윽.."


 이번에는 톨라가 마리아의 말을 가로채서 맺어버렸다. 실제로도 이 인간이라면 정말로 눈 속에서 불쑥 일어나 가던 길을 갈 것 같아서 부정하지도 못했다.


톨라는 다시 음식 그릇 들어올렸고, 가옥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필라인의 얼굴 반쪽이 문 밖으로 슬며시 나타났다.


 "브...블레미샤인 씨, 괜찮으신거죠? 그.. 어제 못주무셨는데 쉬시는게.."


 "아, 네! 괜찮아요. 곧 들어갈게요."


 "조...조심하세요.."


 문은 열렸던 것 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닫혔다.



 "...허물인가."


 "코드네임이요? 네, 맞아요. 전 기사명이 없었으니까.. 제가 지었어요, 하하.."


 톨라가 처음으로 마리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안엔 뭐가 있나."


 "네?"


 "아니면 여전히 언니의 신념을 빌려다 쓴, 쓰다 버린 허물인가?"


 마리아는 톨라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로도스에 들어올 때엔 그저, 언니만큼 크진 않더라도 작은 빛으로나마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헌데 지금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름 오퍼레이터로서, 기사로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독불장군에게 당당하게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피하지 마라, 마리아 니어."


 "으.."


 "고개를 들어 마주해라. 네가 네게 내린 그 이름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마리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톨라의 시선은 여전히 마리아에게 똑바로 향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아까와 달리 그의 시선에선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리아는 뭔가 속이 다 까발려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하네요, 당신은."


 "아니."


 "그래요, 당신은 별로 강하지 않지만 적어도 저보단 강할지도 모르겠네요."


 솔직한 심정을 단칼에 부정당하자 심통난 마리아가 쏘아붙였다. 그래도 대답 자체는 의외였다. 분명 카시미어에서 이 사내는 모든걸 쓰러뜨릴 기세의 막무가내였던것 같은데.


 "너는."


 "너는 부러지는 것이 두려운 거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지금의 나는 아니다."


 "지금? 카시미어에서도 그렇게 보였는데요."


 "...그럴지도."


 불과 몇달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이 나이츠모라에게 그 시기는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전 당신처럼 앞길에 확신을 가지지 못해요."


 "나도 모른다."


 "네?"


 "모르기에, 나는 걷는다. 아직 넘어설 실패가 남았다는 것은, 내게 나아갈 길이 더 남아있다는 것. 그 뿐이다."


 마리아는 또 자기도 모르게 톨라의 시선을 피하다가 그의 식사 그릇에 눈이 갔다. 음식이 식어가는지 김이 거의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음식이 다 식겠어요. 어서.."


 "넌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는... 으..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당신 말처럼 허물은 아니에요. 분명 저는 있어요. 마가렛도 아니고 무에나도 아니지만 나도 니어 가문의 기사니까."


 톨라를 마주보는 마리아의 눈에서 생기가 돌았다. 희미해지던 금빛 광채가 다시금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한텐 제 길이 있을.. 아니, 제겐 저만의 길이 있어요!"


 톨라는 카시미어 거리에서 자신을 막아서던 조그마한 빛을 기억해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둘 사이의 눈높이는 달랐지만, 지금 두 사람이 올라선 경치는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니까.. 언젠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어요. 로도스에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했던 말을 잊지마라. 넌 스스로를 옭아매는 미덕을 떨쳐야해."


 "하지만 그것도 나에요."


 "희생은 네 짐을 가중시킬 것이다. 오늘처럼."


 "당신을 구한 것 말인가요? 분명 짐이긴 했죠. 하지만 착각하지 마요. 나는 무언가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기사가 응당 해야했을 일을 한거니까."


 톨라는 말없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마리아는 톨라가 훗 하고 웃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저 바람소리 였을 수도 있지만.. 




 "천도란거, 성공하면 어떻게 되나요?"


 "우문이군. 천도에 성공이나 실패는 없다. 행하느냐와 그렇지 않느냐만이 있을 뿐."


 톨라는 어느새 다 식어버린 음식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들고는 조용히 먹었다. 마리아는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파도에 뛰어든 기사의 이야기를 아나요?"


 모를리가 없다. 전설적인 기사의 소설은 카시미어에서 글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아니까. 하지만 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을 보면서 그 이야기가 생각나요. 기사 경기의 허울을 알게된 후로도 그 기사 만큼은 무척 낭만적이고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다면 좀 감흥이 다를거 같네요."


 "네가 무엇을 투과해서 보건, 그건 내가 아니다."


 "그래요. 맞아요. 안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기사가 이렇게 안하무인이라니."


 톨라는 침묵을 지켰고, 다 비운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나요?"


 톨라는 말없이 옆에 세워둔 월도를 집어들었다. 그림자 밖으로 삐져나간 월도가 옅은 달빛을 받고 빛났다.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아요?"


 별 기대를 하고 한 말은 아니었고, 톨라는 그에 부응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포 스승님이 당신 걱정을 하고 있을 거에요."


 "..."


 "가끔은 호의도 받아봐요. 남들이랑 대화도 하고.."


 "거절한다."


 마리아도 잘가라고 덧붙이려던 것을 삼키기로 했다.


 "그럼 나랑 대화는 왜 했는데요!"


 "그렇군."


 나이츠모라는 그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행군을 시작했다. 


하늘로의 머나먼 여정을. 


또 다시 혼자서.






 - 반년 후, 지상함 로도스 아일랜드. 주갑판.



 함선 내에는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고, 갑판에는 벌써 긴급 대기 오퍼레이터 일곱과 박사, 녹색 머리의 필라인이 경보대상과 대치 중이었다.


그들의 반대편에 서있는건 카시미어 토너먼트 이후 북쪽으로 향했다던 나이츠모라였다. 그가 천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진지 한 해가 넘은 지금, 갑자기 로도스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요구사항은 급작스러운 등장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다시 묻지. 이곳엔 왜 왔나."


 녹색 필라인이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아 니어를 불러라. 이 불쾌한 쇳덩이 때문에 내 인내심은 충분하지 않아."


 필라인의 등에서 검은 결정 같은 물체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괴수의 형상으로 변했다.


 "악몽의 기사가 우리 오퍼레이터에 무슨 용건인지 알아야 불러줄 수 있겠는데? 알다시피 카시미어에서 우리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니까, 서로 조심하자는거지."


 박사가 일촉즉발의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너스레를 떨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의 시선으로 보기엔 저 나이츠모라에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관한 정보를 더듬어 볼 때, 무척 기이한 일이었다.


그만큼 흥미가 당기긴 했지만 지금은 이래저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생을 찾고 있다 들었다, 악몽의 기사." 


 "빛의 기사."


 니어가 카시미어 지부의 업무 상황 보고 및 정기 점검 때문에 함내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몽의 기사는 한사코 그녀와의 결투를 매듭지으려 한 전적이 있었으니, 박사는 예측불허의 사태를 막기 위해 그녀에게 나서지 않을 것을 제안했었다. 듣지 않은듯 했지만.


 "왜 내가 아니라 동생이지?"


 "네게 볼 일은 없다."


 대답을 들을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저자가 동생을 찾을, 그 어떤 호의적인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또한 로도스의 환자들이 저자의 아츠에 휘말리게 해서도 안된다. 빛의 기사의 창 끝은 벌써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면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네게 볼 일이 없다고 했다."

 

 "박사, 마리아와 모두를 부탁하지.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


 "네놈들에게 볼 일은 없다!"


 톨라가 발을 구르며 일갈하자, 충격파에 가까운 파동이 갑판을 덮쳤다. 니어는 이 머리칼이 곤두서는 이 느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빛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톨라도 더이상 인내할 생각이 없는듯 월도를 꼬나쥐고 자세를 취했다. 검은 안개와도 같은 아츠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천도를 막아선다면.."


 "잠깐만요!"


 공방에서 바로 뛰어온듯 반팔 작업복에 땀이 흥건한 마리아가 주갑판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격돌의 순간은 잠시 지연됐다. Mon3ter는 이미 톨라의 뒤에 있었고, 니어도 빛나는 날개를 펼치고 돌격하려는 순간이었다. 


 "늦었군."


 마리아의 모습을 보자 톨라는 다시 월도를 거두어 들었다. 끓어오르던 적의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빛의 기사는 여전히 아츠를 펼친 채로 숨을 몰아쉬는 동생과 악몽의 기사라는 기이한 조합을 번갈아 보았다.


 "마리아, 이게 무슨.."


 "미안, 언니.. 나도.. 잘 모르겠어.. 후, 일단은."


 "아니, 마리아. 저자에게 다가가지 마라."


 "괜찮지 않을까? 헤헤"


 마리아는 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악몽의 기사를 향해 조금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여긴 어떻게, 아니. 왜 온거에요?"


 그녀는 조금전까지 언니에게 보이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인상을 쓰고 톨라에게 소리쳤다.


악몽의 기사가 월도의 자루로 갑판 바닥을 탁 쳤다. 금속이 부딪치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이곳저곳 많이 닳은 갑주에 비해 그의 월도는 그간 손질을 잘 받은듯 밝은 햇살 속에 한껏 빛나고 있었다.


 "호의에, 감사한다."


 "뭐?"


 아무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어지는 정적의 순간에 움직이고 있는 것은 나이츠모라 뿐이었다.


그 한마디를 마치더니 그는 그대로 뒤돌아 함선 밖으로 뛰어내렸다. 마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난간으로 달려가 돌아봤을 때 톨라는 이미 거대한 함선이 만들어내는 모래먼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오퍼레이터 블레미샤인 씨? 나한테 보고 안한 부분이 있는거 같은걸?"


 박사가 호기심에 가득차 다가오며 물었고, 니어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무엇이든, 나라면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이었겠지."

  

 "아..하하. 글쎄.."










----------


있네?


마리아와 톨라의 이야기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음.


둘이 출발점만 다르지 같은 성향의 캐릭터라 무척 매력적이었다. 극중에서 톨라가 직접 언급하기도 하지.


깨진 거울 속의 나는 바깥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그에 대한 희망적인 이미지로 창작해봤음.


선문답을 좋아해서 좀 더 하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지지 않을까 망설이다 보니까 어쩌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지도 모르겠네.


쓸데없이 길다면 미안하고, 엉성하다면 그 또한 미리 사과함.


모두들 두 응애를 좋아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