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다. 지금 눈을 감은 것인지, 뜬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방이 어둡다. 들고 다니는 단말기로 시간을 확인해볼까 싶다가 관뒀다. 굳이 시계를 확인하지 않아도, 아직 밤은 깊다. 굳이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다시 누워 잠을 청해야지. 오랜만에 휴가를 냈으니 간만에 푹 잠을 자고 싶기도 했고, 옆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깰 수도 있으니 굳이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나. 


"....으응...."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가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몽롱한 표정과 새초롬하게 다물어진 입. 그리고, 쫑긋거리는 은색 귀. 이제 막 연인이 된 사랑스러운 나의 하얀 늑대, 라플란드다.  


"미안해요. 깼어요?"


".....응."


  잠에서 깬 그녀가 나에게 몸을 기댔다. 잠에 취해 무게를 실은 그녀 덕분에, 이를 길게 견디지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지듯 다시 누웠다. 그녀가 내 가슴 위로 누웠다. 다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 든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깊게 잠든걸까, 아님 내 손길을 편하게 여기는걸까. 어쨌건 부정적인 반응은 아니라 조금만 더 그녀의 머릿결의 감촉을 즐기다, 이대로 다시 같이 잠에 들기로 했다. 괜히 움직여서 그녀를 깨우는 것도 미안했으니까.


  잠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딱히, 잠을 설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다. 이대로 푹 잠들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녀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다시 한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기를. 


  나도 눈을 감았다. 그녀가 내 몸을 배게 삼아 잠들고 있으니, 기꺼이 이 한 몸 희생해서 그녀의 숙면을 도와주는 수 밖에. 그녀도 나도 코를 골지는 않으니 그냥 편하게 잠을 청했다. 일단은 자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은, 이 달콤한 순간을 꿈처럼 만끽하고 싶다. 내가 달콤한 꿈을 꾸건, 악몽을 꾸건. 내일부터는 반드시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라플란드의 방에 있다.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하고, 승낙의 의미로 그녀와 입을 맞춘 것이 바로 3일 전. 그것도 그 날 일과 중에 도망친 그녀를 쫓아 이 곳으로 왔으니 사실상 3일 내내 무단으로 결근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휴가를 냈다고는 했지만 켈시에게 통보하듯 말한 것이 전부라서, 아마 내일 출근하면 아미야나 켈시에게 한 소리 들을 것이 틀림 없었다.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은데, 그 망할 녹색 고양이가 트집 잡기 딱 좋은 건덕지를 제공해줬다. 아마 내일 출근하면 난리가 나겠지. 그 망할 녹색 고양이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 자동으로 재생됐다. '잘 하는 짓이군.'. '명색이 로도스의 중진이라는 자가 고작 사랑놀음에 빠져 할 일을 져버리다니' 등등. 내일 얼마나 시달릴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원래 나는 내가 행복해지는 만큼,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동해왔다. 사실 지금도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예전에는 그 우선순위가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레드와 아미야에게는 아버지처럼, 텍사스에겐 좋은 친구로, 켈시에게는.... 악우로. 그들에게 나쁘지 않은 관계를 쌓았다. 로도스의 모든 오퍼레이터들과 원만한 관계를 쌓으려 노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라플란드에게도 똑같이 행동했다. 시라쿠사의 달빛 아래, 붉은 호수에서 춤을 추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분명 나는 마음을 빼앗겼고, 이 곳에 입사한 그녀를 보며 일종의 운명이라는 생각마저 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한 눈에 반했다. 솔직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감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녀는 반드시 행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진심으로 그녀가 원하는 사랑을 하며,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했다. 설령 그 상대가 내가 아니라 할 지라도.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면서도 겁이 나 그녀의 곁을 겉돌았고, 그녀의 마음을 강요하는 것 같아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작 그녀가 나를 무서워하고 나를 피하자 내가 어떻게 행동했었지? 약해진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내 곁에 묶어 두고 싶은 추악한 독점욕에 수치스러워했고, 그녀가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벌벌 떨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다. 나는 내가 플라토닉하고 헌신적인. 그런 고차원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내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능력도 없는 멍청이였다. 심지어 나는 연애 경험이 풍부하기는 커녕 제대로 된 짝사랑도 이번이 처음인 숙맥이자 멍청이였다. 그런 내가, 무슨 수로 상대의 행복만을 바라는 고차원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서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서 솔직하게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처음으로, 연인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생겼고,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그래서, 원래는 내 모든 것이라 생각했던 일도 팽개치고 그녀의 곁에 남았다. 그녀의 곁에 있노라면, 내가 로도스의 박사라는 사실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전부 잊고 그녀에게 몰두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그녀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지금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되어 떨고 있는 그녀를 홀로 놔둘 수 없을 정도로 가녀린 그녀의 모습에 동정심 역시 솟았다. 한낱 동정심으로 이렇게 행동하냐고 누군가 따진다면, 솔직히 항변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가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내가 선물하고자 했던 행복이 오히려 독이 되어 어떻게 그녀를 망쳐갔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헤실거리는 바보였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3일 동안, 나는 라플란드의 방에서 나가지 않고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제 막 연인이 된 참이니 뜨겁고 끈적한 연애를 시작했다고 하면 차라리 기분이라도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아직, 나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러고 싶다는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성급하니까. 나는 그녀의 곁에 머물며,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그녀의 곁에 있어줬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직 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아직 모른다. 내가 그녀에게 안겨주고자 노력했던 평범한 일상과 행복이 그녀에게 어떠한 악영향을 끼쳤는지, 그녀의 과거 중 정확히 어떤 부분이 지금의 그녀를 괴롭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텍사스에게 들었던 말이 있어 대략 짐작은 갔지만, 이를 그녀에게 말하거나 반대로 강제로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것을 라플란드가 직접 말해줄 때 까지,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그녀를 보듬어 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조금 호전되는 기미라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잠들기 전에 내 손으로 라플란드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짓은 이제 그만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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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OB.347]

정말 미안하지만, 오늘까지 해서 3일동안 휴가 좀 쓸게. 부탁한다. 

진짜 미안하다. 급한 일은 처리할 수 있으니까,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메일로 부탁해.


[첨부파일: 휴가 신청서 양식.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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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SOB.2021]

네가 휴가라니 별 일이군.

휴가 잘 보내라 박사. 돌아오면 여러모로 바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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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송 중단된 메일-사유:발신자의 취소]

참 도움 되는 소리다, 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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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a.live/b/arknights/57706592

전편 링크


예아 반갑소.

거의 한달만에 하얀 늑대 길들이기. 


이걸로 사실상 마지막 챕터인 챕터 3에 돌입한다. 이 편은 챕터 3의 사실상 프롤로그.

그래서 조금 짧다.


챕터1은 메일로 가볍게 스킵한 프롤로그고 챕터2는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 전, 서로의 트라우마나 기타 설명

이제 챕터 3부터 독타라플의 무지성 연애 + 그로 인해 생기는 몇몇 갈등 정도.


다음 편, 라플란드의 방 밖으로 나선 두사람이 겪는 문제와 여러 데이트부터가 챕터 3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물론 치정싸움은 없을 거고, 아마 로도스의 중진인 박사가 겪어야하는 워러벨이랑, 라플란드의 트라우마 극복 정도일듯 싶다.


아 그리고 라플란드의 모습은 박사 옆에서는 원래의 본질인 ■■와 라플란드가 섞인 모습을, 밖에서는 라플란드일 수 있게 노력한다는 느낌. '노력' 한다고.


뭐 아무튼 그래서, 보고 싶은 순애 장면 있으면 추천 받음. 없으면 간만에 로맨스 정독 해야 됨.


그리고 단편 신청 다시 받음. 일단 받은 건


1)박사에게 춤 신청하는 글래디아


밖에 없음. 그라벨 순애는...? 글쎄 좀 더 고민좀 해보고. 

그래서 다음 편은 박사에게 춤 신청하는 글래디아로 할 예정, 마침 시도해보고 싶은 양식이 하나 있어서.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