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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기일전, 다시 첫걸음부터


0.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


 카시미어의 진짜 모습은 낮이 아닌 밤에 있다고.


 언뜻 듣기엔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일단 밤거리로 나와 보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된다.


 낮에는 멀끔했던 고층 빌딩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그 밑에 있는 전광판에선 수십 명쯤은 되어 보이는 기사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중엔 실용성 따윈 개나 줘버린 듯 화려하고 가볍기 그지없는 차림새로 노래나 부르는 아이돌 기사단이 있는가 하면, 정말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자태 하나만으로도 뭇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고고한 여신도 있다.


 그래, 예를 들면 양초의 기사, 비비아나 드로스테 같은.


 “저것 봐, 양초의 기사야! 노바 기사단도!”


 다른 광고들보다도 명확하게 짧고, 광고라고 해봤자 옆얼굴 잠깐에 화장품 로고가 뜨는 게 전부였지만, 그 파급력은 앞서 있었던 수십 개의 광고를 합친 것보다도 더 컸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꿈이라도 꾼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진짜 예쁘긴 예쁘다……. 저 외모에 대기사 작위라니……. 실력에 외모에 인품에……. 와, 무슨 기사단원들도 외모 보고 뽑나. 어지간한 아이돌 기사 그룹보다 훨씬 낫다 야.”


 “오피셜로는 외모보단 인성과 실력이라던데? 지원자가 아무리 많아도 양초의 기사가 하나하나 직접 본대.”


 “에이, 그냥 하는 말이겠지. 노바 기사단이면 지원자만 따져서 세 자릿수는 거뜬히 넘기고도 남을 텐데 그걸 어떻게 다 봐?”


 “그런데 양초의 기사라면 다 볼 거 같지 않아? 저렇게나 우아하고 예쁜데……. 저번에 인터뷰하는 거 경기장 가서 직접 봤는데, 햐, 진짜 목소리도 녹아내리더라.”


 “그거 다 마케팅인지 어떻게 알아. 있잖아, 이건 내가 노바 기사단 취재 갔던 기자 친구한테 살짝 들은 얘긴데…….”


 그 드높은 노바 기사단과 양초의 기사라 해도 어차피 그들에겐 하늘의 별이나 마찬가지인 존재. 없는 자리에선 나랏님도 씹는다는 마당에 하물며 일개 기사단 정도야 말해서 무엇하랴. 그들의 얘기 주제는 곧 노바 기사단과 비비안나 드로스테를 싸고도는 가십거리로 옮겨갔다. 


 기사에 대한 동경과 흠모, 관심.


 그리고 그에 지지 않을 정도로 음습한 뒷소문.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어쩌면 카시미어의 일면을 가장 잘 드러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앞에서는 감탄해 마지않는 대기사라 해도 일면으로는 제발 그녀가 추락하길 바라는 추악한 마음.


 밤하늘을 밝힐 정도로 불야성을 이룬 거리와, 조금만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면 흐느낌과 비명이 들려오는 어두운 뒷골목.


 한쪽에선 사람들이 기사 경기를 관람하며 탄식과 환성을 내지른다. 그런 그들의 앞엔 기름진 안주와 시원한 맥주가 있고, 벽 한쪽을 다 차지하는 커다란 수신기에선 오늘 기사 경기의 하이라이트가 연신 흘러나온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한쪽에선 그저 감염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빈곤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잊힌 채 모멸과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철저한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의 도시. 그게 카시미어의 실체다. 기사의 명예니 하는 것들은 과거 귀족 귀사의 몰락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고, 기사의 근간이 된 출정 기사들은 이미 사람들에게서 머나먼 존재가 됐다.


 지금 카시미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향락과 기사 스포츠에 취해서, 눈앞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하, 이제 와서 누가 그런 걸 입에나 담으랴. 다들 기사 스포츠가 주는 환상에 빠져 하루하루를 타성에 젖어가고 있는데.


 “…기사 스포츠 따위, 정말 싫어.”


 로즈 미디어 산하의 하청의 하청, 한 너댓 다리쯤은 건너야 겨우 이름이 나오는 작은 광고 회사. 그 회사의 직원으로 있는 비비엔은 그리 중얼거리며 밤거리를 가로질렀다. 물론 그 혼잣말은 크지 않았다. 혹여나 누구에게 들릴세라 아주 작게 중얼거린 것뿐.


 어쩔 수 없다. 불만이 밖으로 삐져나오긴 했지만 그녀는 좀 덤벙거린다 해도 얼간이는 아니었으니까.


 이 기사의 나라에서 기사 스포츠가 싫으니 뭐니 그런 소리나 해대면 일신에 안 좋을 거야 뻔한 일이었다. 그것도 기사 스포츠 광고로 밥 벌어먹고 사는 광고 회사 직원이라면 더더욱 좋을 거 없었다.


 밤거리는 한층 열기로 그득했다. 작건 크건 술집들은 밖으로까지 테이블을 죄다 꺼낸 채 과시라도 하듯 커다란 스크린에 연신 오늘 밤의 경기를 비추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안 그런 술집을 찾는 게 더 힘든지라, 비비엔의 눈엔 좋든 싫든 스크린의 풍경이 들어왔다. 거기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만개하는 꽃의 기사’와 블러드보일 기사단 소속의 ‘약동하는 대지의 기사’가 한창 혈투를 벌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지! 만개하는 꽃! 저 꽃잎 아츠가 아주 또 볼 맛이 난다니까! 거기서 찔……. 하이고, 아니 그러니까 좀 더 빨리 찔렀으면 됐잖아!”


 “그런 이쑤시개 같은 레이피어로 어디 감히 블러드보일의 갑옷을 뚫으려 들어? 찍어눌러 버려, 대지의 기사!”


 사람들의 함성. 환호성. 그것은 야수의 싸움을 관전하는 고대 콜로세움의 관중들을 연상케 한다. 그럼 저 스크린 안에 있는 두 기사는 야수란 말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돈 많이 버는 야수,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야수. 그리고 카시미어는 그런 야수들을 사육해 돈을 번다. 사람들은 거기에 돈을 쓰고, 그렇게 카시미어가 돌아간다.


 하지만 비비엔은 오늘 밤의 열기에 끼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림이라면 다 좋았다. 라이타니엔풍의 고집스런 유화도 좋아했고, 라테라노의 탁 트인 수채화도 좋아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염국풍의 수묵화였다. 한두 가지 색만으로 전체 풍경을 그려내는 그 소박함, 그리고 여백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 그 화풍에 반해 비싼 학비에 교통비까지 마련해가며 용문에 유학까지 다녀왔지 않던가.


 하지만 우습게도 유학을 마치고 온 그녀가 앉아야만 했던 건 캔버스 앞이 아니라 광고 회사의 딱딱한 업무용 의자였다. 그래, 작은 정원이 딸린 소박하고 안락한 화방이 아니라 가축우리인 양 회색의 격자로 답답하기 나뉜 사무실 말이다.


 뭐어, 그거다. 유학비로 인해 저금은 탈탈 털린 지 오래고,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가 급한.


 이른바 생계다. 수많은 예술 지망 학생들이 좌절하듯, 그녀 역시 머나먼 꿈과 생계 사이에서 생계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일개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찾고자 하는 건 기사 스포츠로 시끄럽지 않은 작고 조용한 선술집. 구석질수록 좋다. 그럼 아무런 방해도 안 받고 술 한잔 걸치며 시간을 죽일 수 있을 테니까. 그녀에겐 술이 필요했다. 더불어 조용한 공간도.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수십 차례에 걸친 진상 광고주의 컨펌이 끝이 났기 때문이었다.


 “후……. 그런 데가 있을 리 없지. 편의점이나 들르자.”


 하지만 하필 요즘 가장 뜨거운 기사 경기가 열리는 날 밤에 그런 곳이 있을 리가. 10여 분간, 평소라면 가지도 않을 좀 으슥한 곳의 술집까지 둘러 본 그녀는 별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발길이 어느 지점에서 딱 멈췄다.


 “…음?”


 킁킁,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방금 스쳐 지나간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다 큰 처녀가 채신머리없는 짓이지만 어쩌겠는가, 오랜만에 맡아 보는 그리운 냄새인데. 그녀의 발걸음이 편의점 쪽이 아니라 더 으슥하고 구석진 술집 쪽으로 갔다.


 이건 간장 냄새야. 그리고 어묵 냄새.


 “하아…….”


 비비엔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으레 대학 화실에서 늦게까지 있다가 출출할 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게 바로 어묵탕 한 그릇이었다. 가격도 싸고, 맛도 좋고. 무엇보다 양도 많고 따끈하기까지 하다. 주머니에 좀 여유가 있다면 친구들과 어묵탕 한 그릇 시켜놓고 차가운 술 한 병 시켜서 친구들과 나눠 마시지 않았던가.


 독한 화주 한 병이 빌 때쯤이면 기분 좋게 취할 수 있고, 그러면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미술에 대해 토론한다든가, 화풍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든가 했다. 고된 유학 생활이었지만 그때만큼 즐거운 적도 없었다.


 “카시미어에서 어묵 같은 걸 제대로 하는 집은 본 적 없는데……. 새로 생겼나?”


 상업의 도시답게 카시미어에도 염국풍 어묵이라든가 그런 게 있었지만 용문에서 어묵탕 소믈리에로 불릴 정도로(어묵탕에 소믈리에가 있다면 말이지만) 많이 먹어본 비비엔의 성미를 채울 순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그런 것들은 조악한 카피에 불과했다.


 그런데 뭘까, 이 달큰한 장국의 향기는. 그야말로 용문 거리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똑같지 않은가.


 코에 의지해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기던 그녀의 발이 어느 술집 앞에서 딱 멈췄다. 안에서 들려오는 약간의 소란스러움과 진하고 맛있는 냄새. 그래, 그녀가 염국에서 있었던 기억을 그대로 뭉쳐 놓은 듯한 곳이었다.


 “공포의…마틴……?”


 촌스러운 이름하며, 가게 외관. 빈말로라도 염국풍의 건물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카시미어에서 흔해 빠진 고전풍 술집에 가깝다. 뭐랄까, 코로는 분명 이곳에서 염국의 향기가 난다고 하는데, 눈으로는 부정하는 듯한 그런 느낌. 그 감각의 부조화에 문을 열지도 돌아서지도 못하는 비비엔의 눈에 뒤늦게 문에 붙어 있던 포스터 한 장이 들어왔다.


 아니 포스터라기보단, 으음, 아주 싼티나는 수제 전단지에 가까운 무언가를.


 “…용문 횟집 ‘훗카이’가 ‘공포의 마틴’과 콜라보를 진행합니다?”


 조악한 필체의 문구. 그리고 그 밑에 무슨 막대기가 끼워진 듯한 회색의 꾸물거리는 물체까지. 제 딴에는 그림이랍시고 그린 것 같은데……. 이거 그린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끔찍한 그림이었다. 차라리 세 살짜리가 스케치북에 마구잡이로 그린 거라면 귀엽기라도 하지, 은근히 조악한 묘사가 군데군데 들어가 있어서 적어도 세 배는 더 기괴해 보였다. 냄새에 이끌려 온 사람이 이 정체불명의 전단지를 보고 발길을 돌릴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으으…….”


 비비엔은 갈등했다. 그녀에게 있어 태어난 곳은 카시미어였지만, 정신의 고향은 염국의 도시 용문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곳에 대한 아련한 향수까지 불러 일으키고 있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수상하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아, 설마 술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가방 속 호신용 경보기까지 몇 번을 확인한 그녀는, 마치 경기장에 나서는 기사 모양으로 기운차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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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기사의 턴이 돌아왔네요.


이번 편 프롤로그는 비비엔 티그리스 씨가 주연을 맡아주셨습니다. 창작 캐릭터고요, 아쉽게도(?) 단역입니다.


이름은 비비엔 티그리스로 원래 어느 귀족 기사 시종 가문이었지만 몰락하는 바람에 카시미어 변방으로 가게 돼서 간신히 유학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 그런 집안 사정과 그랜드나이트 영지에서 사회 생활을 하는 고충이...왈왈왈...하는 뒷설정이 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엑스트란데.


이번 편에서는 약간 뭐랄까 주인공급이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카시미어 분위기를 보는? 그런 느낌으로 해서 주인공인 제이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그런 흐름으로 짜봤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나오는 비비안나! 어감상으론 촛불의 기사가 더 좋은데 도감을 보니 양초의 기사라고 돼있어서 눈물을 머금고...


언젠간 비비안나도 이 소설에 나오겠죠?


그럼 이번 편도 체크포인트에 도달할 때까지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상 써주시면 다음편 더 빨리 씁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