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https://arca.live/b/arknights/62906893

2화 - https://arca.live/b/arknights/63074367

3화 - https://arca.live/b/arknights/63837106


25일차. '실험' 종료까지 5일.


"당신이 이걸 만들었다고요?"


아이린이 저번에 지나가듯이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오늘은 햄버거를 직접 만들어왔다.

평소에도 나를 위해서 고생해주고, 본인도 모르게 '실험'에 협조를 해주니 당연한 대가겠지.

점심 시간이 되자 내가 내민 햄버거를 보고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치켜 뜬 아이린은 먹고 싶긴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더니 웃으면서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그렇게 크게 한 입 베어 문 아이린은 이거 맛있네요! 그렇게 말하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고, 목이 막히는지 조금 눈물이 맺힌 채 숨을 몰아쉬었다.

재빨리 가져 온 딸기 주스를 내밀자, 켁켁 하고 기침을 하면서도 아이린은 순식간에 햄버거 하나를 완전히 먹어치웠다...단 30초 만에.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만든건가요?"


어떻게냐고 물어도...그냥 소스와 쇠고기를 사서 만들었다고 말하자, 눈을 빛낸 아이린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하나 더 주세요!"


...어쩌다보니 내가 먹을 것까지 그녀에게 다 줘버렸다.

그렇게 한참 냠냠 소리를 내면서 먹는 아이린의 입가를 보니, 소스가 흥건히 묻은게 나일 강도 그 소스로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손가락을 내밀어서 입가의 소스를 닦아주자, 당황한듯 허둥지둥하던 아이린은 손수건을 꺼내서 입가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소스의 배합은 괜찮으려나.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먹자 어째선지 당황한 아이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당신...그걸 먹으면..."


뭐 때문에? 그렇게 되묻자, 하아...하고 한숨을 내쉰 아이린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체념한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당신은 여심을 너무 몰라요. 둔하다고 해야할지...거리감이 좀 이상하다고 해야할지....앞으로 당신도 배워야 할 게 많네요."


그래도 제가 당신 곁에 계속 있을테니 괜찮아요. 그렇게 쭈뼛거리며 말한 아이린은 손을 닦으러 나갔다.

잠시 뒤 손을 다 씻었는지, 말끔한 얼굴과 손으로 돌아온 아이린은 소파에 앉은 내 무릎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오더니 오른팔을 내 목에 두르며 말했다.


"잘 먹었어요. 다음엔 제가 요리해줄게요."


...생각해보면 그녀는 최근엔 내 얼굴이 보고 싶은지 마주보면서 앉거나, 옆으로 앉아서 공주님 안기를 요구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도 변화일까.

어쨌든 왼팔로 그녀의 등을 받쳐주며, 어쨌든 너도 배워야 할 것이 있어. 그렇게 말하자 음...하고 양 미간을 찌푸린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야기 말인가요? 하기사, 저도 아직 미숙하니까요. 앞으로 갈 길이 멀죠."


네가 지치지 않게, 너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것도 중요해.

그렇게 말하자, 아이린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내 턱을 왼손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런 당신도 최근 서류로 인해서 휴식을 거의 안 하고 있잖아요? 당신의 휴일은 대체 언제인가요?"


...이거 한 방 먹었는데. 아무래도 표정에서 드러난 건지 쿡쿡 웃은 아이린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그녀가 원하는대로 내버려두자, 다 즐겼는지 미소를 띄며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저희 둘 다에겐...휴식이 필요할 것 같네요...맞아요. 당신도 당신의 일로, 저도 저의 일로...앞으로 나아갈 길이 먼데 때로는 쉬어가기도 해야죠."

"그러니까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무게가 무겁다면, 함께 들면 괜찮아요."

"누군가가 무너지려고 하면, 받쳐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같은 길을 걷는...가족이에요. 우린."


가족이란 말은...처음 듣는 것 같다.

내 기억으론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진 않았다.

...잊혀진 과거에서 나에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조금 울적한 기분이 든다.

...실험이 끝난다면 이 가족도...

더 생각하지 말자.

애써 표정을 감추며 그녀의 이마를 늘 그랬듯이 오른손으로 쓰다듬었지만, 그럼에도 돌 같이 무거운 무언가가 나의 마음을 누르기 시작했다.

아니다, 기분 탓이다.

로렌티나가 이제부터는 댄스 교습을 하지 않고 각자 자율 연습을 해도 괜찮을거라고 보증해주었다.


...이제 5일 남았다.



26일차. '실험' 종료까지 4일.


오늘은 평소보다 서류가 적다. 아무래도 곧 새해라서 그런지, 다들 일을 안하고 싶겠지.

앞으로 5일 정도는 사실 손을 놔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아이린에게 말하자, 음음...하고 마지막 서류에 X를 그리며 내려놓은 아이린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럼, 오늘은 휴식을 하러 가요.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잖아요?"


어디로 갈까? 그렇게 묻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했다.

지나가면서 오퍼레이터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도착한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해요."


...나의 방문 앞이였다.

왜냐고 물었지만 빨리 문이나 열라고 재촉하는 아이린에게 떠밀려서 문을 열자, 그녀는 순식간에 방으로 들어가더니 슬리퍼를 꺼내서 신었다.

누가보면 네 방으로 알겠다, 이 귀여운 삐약아.

조금 황당한 탓에 움직임을 멈추자, 그녀는 현관에서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당신."

...다녀왔어, 삐약아.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이 내민 손을 잡았다.

뭔가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그렇게 별다른 것은 하지 않고 그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무릎 위에 올라온 그녀를 옆으로 껴안은 채로 텔레비전을 보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내 방은 볼 것이 거의 없고, 벽지도 그냥 기본으로 쓰이는 하얀색 벽지지만, 그래도 아이린은 만족한듯 귀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이 방은 안심이 되네요...당신으로 둘러싸인 기분이 들어요."


조금 부끄러워져서 그녀를 조금 더 힘을 줘서 끌어안자, 쿡쿡하고 웃은 아이린은 뺨을 내 가슴에 비비며 말했다.


"당신도 요새는 저를 공주님처럼 안아주는 게 능숙해졌네요. 이젠 아프지도 않고...편안해요."


앞으로도 이 자리는 제 특등석이며, 오로지 저를 위한 자리에요.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에게 가볍게 딱밤을 먹이자, 삐약! 하고 소리를 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흥! 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 저녁에 햄버거를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고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가족이 생긴다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이제 4일 밖에 안 남았다.

남은 시간을 후회없...


실험에는 감정을 넣지 않는다. 그저 관찰하고, 통제하고, 결과를 기록할 뿐.

...이제 4일 남았다.



27일차. '실험' 종료까지 3일.


"오늘도 쉬어도 괜찮잖아요? 그럼 오늘은 어디로 갈지, 당신이 정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의 손을 잡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곳으로 인도했다.

가면 갈 수록 이 길은 분명...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이린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당연히 '그 장소'였다.


"...제 방이네요."


어제는 내 방이니, 오늘은 네 방이여야지. 그렇게 말하자 아이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말, 한 번을 안 지려고 한다니까요...다행히 이럴 줄 알고 미리 정리는 해뒀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문을 열고 재빠르게 먼저 들어갔다.

...다 정리를 했다면 저런 억지로 쑤셔넣는 소리는 나면 안 될텐데.

이래서 정말 귀엽다.


저번엔 로렌티나가 내쫓아서 방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들어간 투룸은 마치 내 방처럼 의외로 검소했다. 

벽지는...헤엄치는 상어가 그려진 하늘색 벽지에, 조명은...우리에게 샹들리에 같은 물건이 있었나.

거실 한 켠에 세워진 축음기, 그 옆에 쌓인 레코드판들.

그리고 대부분 비워진 책장에는 몇 가지 책들과 잡지와 장식품들이 있었다.

한 쪽에는...어째서 저게 여기에 있는거지?


"아, 그거 로렌티나 언니가 저번에 두고갔어요. 정작 저는 쓰지도 못할텐데."


...왜 네 무기를 여기에 두고 간거니, 상어야.

그리고...저 뼈 표본은 대체 뭐지?


"아, 그거는 스카디가 두고 갔어요. 선물이래요...대체 왜 이런걸..."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아이린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소파에 앉았더니 엉덩이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큐브는...또 뭐지?


"아, 그거는 글래디아씨가 심심하면 맞춰보라고 두고 갔어요...그런데 너무 어려워서 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럼 다른 방도 좀 볼까...그렇게 발걸음을 옮기자, 아이린은 왼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방은 제 침실이니까 열지 마세요.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해도...지금은 안 되니까 이해해주세요."


생각보다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안 되는 모양이다.

하기사 저번에 내 방에 왔을 때도, 굳이 다른 방을 보려고 하진 않았지.

이것이 그녀만의 룰일까.

오른쪽 방을 열어보자 거기에는 저번에 본 드레스를 포함한 옷들이 몇 벌 걸려 있었다.

...별로 옷이 많진 않은데 좀 사줘야하려나.


"어차피 내일 오퍼레이터 바이비크에게서 옷이 올테니까 괜찮아요."


표정에서 다 보였는지 쿡쿡하고 웃은 그녀는 그럼 지금부터 이거나 같이 맞춰 볼래요? 그렇게 말하며 큐브를 들어 올렸다.

얌전히 소파로 가서 앉자, 그녀는 평소처럼 내 무릎 위에 올라오려다가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축음기로 가더니 레코드판을 올렸다.


"음악이 있는 삶, 좋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며 축음기를 튼 아이린은 내 무릎 위에 올라와서 큐브를 잡고 열심히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끙끙거리면서 돌리던 아이린은 당신도 한 번 해볼래요? 그렇게 말하며 큐브를 나에게 건네더니 내 옆으로 내려와서 앉았다.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데, 그래도 이렇게 하면 될 것 같다.

그렇게 몇 번 더 돌리고, 돌리고, 뒤집고, 그런 과정의 끝에 마침내 큐브를 완성하자 큐브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어, 어라...?"


당황한 우리의 앞에서 큐브는 한동안 빛나더니...그냥 꺼졌다.


"전 혹시 폭발이라도 하려나 싶었어요...다행히 그런 건 아니네요."


...잠시, 큐브가 어딘가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자, 그녀도 큐브를 들여다보더니...에엥? 하고 의문에 가득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까 맞춘 큐브는 어느새 랜덤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이것이 에기르의 기술인가요...좀 신기하긴 신기하네요."


진짜 쓸데없는 것에서 장인 정신이 넘치는 동네다.



그렇게 큐브를 맞추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1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렇게 오늘도 하루가 지나갔네요. 아쉬워요."


아쉬운지, 창문 밖으로 컴컴해진 하늘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아이린은 나를 보며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면 안 되나요?"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그래. 라고 대답하자 환하게 웃은 그녀는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이 순간을 조금만 더 즐기고 싶...

아니, 그런 생각은 안 된다.


"아, 맞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늘 하던대로 아이린을 무릎에 올리고 이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은 아이를 좋아하나요? 몇 명이 좋나요? 그리고 딸이 좋나요, 아들이 좋나요?"


얼굴을 붉히며 말한 그녀는,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런거에요 그냥 그런거니까요. 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그런 생각은 딱히 한 적은 없지만, 지금 당장 생각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명에 딱히 성별은 상관이 없다. 우연이네요. 저도 두 명 정도가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셋은 좀 곤란할 것 같고, 하나는 외로울지도 모르잖아요?"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아이린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이 일치한 것이 그리 좋은건가...잘 모르겠다.

...알아도 모르는 것이 좋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렇게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이린을 조금 강하게 껴안았다.


...이제 3일 남았다.



28일차. '실험' 종료까지 2일.


「오늘은 사진 찍을 준비를 해야해서 갈 수가 없어요. 20시에 제 방으로 오세요.」


아이린의 문자에 따라 정확히 19시 59분에 그녀의 방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노크를 하자, 문은 열려있으니 들어오세요! 라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방은 어제와는 다르게 약간 어두컴컴했고, 조명이 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암실과도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사진관이다.


"아, 당신. 어서와요. 잠시만요...음..."


조명을 조작하던 아이린이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마지막으로 조명을 이리저리 비추다가 어쩌다보니 자신의 이마에 조명을 비춰버렸다.

...저 반사각을 보아하니 이마로 등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하하. 아무래도 처음이라 영 익숙하진 않네요."


어색하게 웃은 아이린이 조명을 끄고는 벽으로 다가가더니 스위치를 올렸다.

그제서야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방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한 켠에 치워놓은 물건들, 그리고 상어 모양의 커다란 인형? 그런데 로렌티나의 무기가 없어졌다. 의문을 말하자 아이린은 뺨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건 아까 로렌티나 언니가 무기는 다시 들고 가니까 이거라도 줄게, 라고 하면서 준거에요. 밤에 껴안고 자면 좋을거라고...전 아이가 아닌데...그래도 되게 푹신하긴 하더라고요."


언니가 세팅을 많이 도와줬어요. 여튼 어제와는 다를거니까 가죠.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내 손을 잡고 드레스룸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인 것은...엄청난 양의 옷들이다. 아니...이미 옷이라고 하기엔 무더기 그 자체였다. 좀 과한게 아닐까.

평범한 정장과 드레스, 동물 옷의 잠옷, 그리고 뭔가 특이해보이는 의상도 있었고, 이건...교복인가? 이건 또 뭐지?

...심지어 속옷도 세트로 존재했다. 하기사 복장에 알맞은 속옷을 입어야겠지.


"대체 이걸 어떻게 다 만든건지...신기하네요. 그쵸?"


흐응...하면서 눈을 살며시 찌푸린 아이린은 옷 더미에서 체육복을 꺼내서 나한테 건넸다.


"우선 이것부터 입어 볼래요? 뭐든 간에 기본은 체육복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니...어디서 갈아입지?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이린은 얼굴을 살며시 붉히더니 말했다.


"...그, 그냥 여기서 갈아입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저희 둘 뿐이니까요...그리고..."


뭐라고 더 말하려던 아이린은 에잇! 하고 귀여운 기합 소리를 내더니 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벗을게! 벗는다고!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벗은 결과, 나는 결국 티셔츠와 팬티 하나만 입은 차림이 되었다.


"그동안 춤도 연습하고...그래서 그런지 당신 몸도 제법 괜찮아졌네요. 앞으로 저랑 매일 운동하죠."


정말 괜찮아진걸까...어쨌든 아이린이 건넨 체육복을 입자, 나름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인 아이린은 다음은 이거에요! 라고 말하며 교복을 건넸다.


"저도 그럼 이걸 입어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도 겉옷을 벗으려다가...손을 멈추었다.


"...아...그 일단 이쪽 보지 마세요...다만...조금 보는 건 허락해줄게요. 당신에게만 보여주는거니까...아시겠죠?"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한 아이린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맹세코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진짜다.

그건 그렇고...하얀색 란제리는 아직 네게는 조금 이른 게 아닐까, 삐약아.


"자, 어때요?"


이제 다 입었으니 봐도 좋아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을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검은 색 치마와 하얀 색 와이셔츠, 그리고 노란 넥타이를 거꾸로 멘 그녀가 보였다.


"제법 잘 어울리죠?"


넥타이를 잘못 멘 것만 빼면 제법 귀여웠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 넥타이를 풀어서 다시 묶어주자, 얼굴을 붉힌 아이린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 고마워요. 오빠..."


...인정하자. 이건 좀 강력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어떤게 어울릴지 고민하다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고, 깨달음도 몇 가지 얻을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코르셋은 혼자서도 입을 수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마침내 우리가 고른 의상은 이거였다.


"이 하얀색 드레스는...웨딩드레스 같네요. 당신이 입은 옷도 마침 턱시도..."


순백의 베일, 그리고 흰색 망사 장갑, 긴 치마까지...이건 확실히 웨딩드레스다.

평소의 어린애 같은 느낌이 조금 언밸런스했지만, 확실히 아름다웠다.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면서 치맛 자락을 잡은 아이린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그럼, 제 손을 잡아주시겠나요? 제 운명의 사람."


이럴 땐 어울려주도록 할까.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너무 길어서 끌릴 것 같은 치마를 뒤에서 살며시 들어올려서 함께 거실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23시 55분...곧 29일차가 될 것 같다.

그렇게 미리 준비해둔 의자에 아이린이 앉고, 내가 뒤에 선 뒤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요즘 카메라는 참 좋아졌네요. 이 버튼을 누르면 5초의 카운트다운 뒤에 찍힌다고 해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에게 리모컨을 건네받아서 누르고, 재빨리 주머니에 집어넣자마자 플래시가 몇 번 터지더니 삐삑, 하고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찍힌건가? 드레스 때문에 걷기 불편한 아이린을 대신해서 카메라를 갖고 와서 둘이서 함께 들여다본 결과는 참으로...한심했다.


"아하하, 당신 눈 감았네요!"


너도 감았잖니, 이 삐약아. 심술을 담아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이자, 삐약! 하고 소리를 낸 아이린이 눈을 흘겼다.


"정말 못된 사람 같으니...여튼 10장을 다 봐도 영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몇 번 더 하죠."


내가 말한 이상 어쨌든 끝까지 어울려줘야겠지. 그렇게 다시 카메라를 삼각대위에 올리고 다시 한 번 포즈를 잡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적이였다.

그렇게 한동안 이런 저런 포즈로 사진을 찍자, 그녀도 슬슬 지쳐가는지 표정에서 보일 정도로 피곤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좋은 시간은 너무 금방 지나가네요...그럼 마지막으로 한 컷만 더 찍죠."


리모컨 이리 건네고 당신이 앉아봐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이린의 말대로 의자에 앉자, 그녀는 왼쪽으로 돌아서서 영차, 하고 나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붙이더니 그대로 등을 뒤로 뉘였다.

이대로 가면 분명 자빠진다. 그렇게 오른팔을 뻗어 아이린의 등을 받치자, 그녀는 나의 목을 양팔로 두른채 껴안았다.

...그렇게 공주님 안기에 한이 맺혔나. 미안하다니까...


"이걸로 마지막이에요...제 무릎도 받쳐줘야죠?"


그렇게 말한 그녀의 무릎 쪽에 왼팔을 뻗어서 있는 힘껏 지탱하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고는 안 보이도록 휙 던져버렸다.

5...솔직히 조금 힘들다.

4...그녀를 내려다보자, 어느새 얼굴이 나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3...솔직히 좀 위험한 거리 아닐까?

2...이대로라면...

1...아이린이 나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플래시가 여러 번 터졌다.


"조금은 놀라줬으면 했는데, 이미 대충 눈치챘군요?"




그렇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함께 보았다.

눈빛만 봐도 사랑이 가득 담긴 채, 홍조를 띈 채로 내 뺨에 입을 맞추는 아이린.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편안하고도 자연스러운 웃음을 띄고 있는 나.

내가 봐도 질투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가족...

아니다. 그런 생각은 그만두자.

하지만 그녀는 아닌 모양이다.


"...이 사진은 반드시 액자에 걸어둬야겠어요."


그렇게 방긋방긋 웃으며 카메라를 소중하게 가방에 넣은 아이린은 자! 하고 박수를 치며 일어나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같이 치우도록 해요. 아니면 제가 잠을 잘 공간도 없을 거에요."


...그냥 로렌티나에게 가서 재워달라고 하면 안 되나? 그렇게 묻자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쉰 그녀가 말했다.


"저번에 이야기 하다가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한 번 같이 잤었는데...너무 꼭 껴안아서 숨막혀서 죽을 뻔했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아이린이 먼저 불을 켜고 설치해둔 조명들을 방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간만에 힘 좀 써볼까.



29일차, '실험' 종료까지 앞으로 1일.


...낯선 천장이다.

이 말을 해보고 싶었던 적이 물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절대 아니다.


침착하게 지금 상황을 정리해보자.

ㅡ우선 내 옆에는 아이린이 누워있다. 그것도 내 왼팔을 배게 삼은 채로. 심지어 나에게 아주 딱 달라붙어있다.

ㅡ이 천장은 분명 어제 사진을 찍은 거실이다.

ㅡ이불은 어디서 갖고 온 건지 모르겠다. 언제 갖고 온 걸까.

ㅡ다행히 우리 둘 다 알몸은 아니지만, 속옷 차림이다.

ㅡ어제 입은 옷은...바로 머리 위에 있다...난방이라도 틀었는지 좀 덥긴 한데...이거 때문인가?


어쨌든 이 상황은 여러모로 심장에 좋지 않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이렇게 있고 싶었다.

커튼 사이로 햇볕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옆에서 새근거리면서 자는 아이린의 온기를 느끼다보니, 해가 중천에 도달했는지 그녀의 감은 눈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으응..."


잠투정을 하며 칭얼거리는 아이린의 눈 위에 오른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덮어주자 그녀는 만족스러운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랑 숨소리가 미묘하게 다른 걸 보면 이미 깬 것 같지만.

그렇게 한동안 약속이나 한듯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던 도중,

결국 아이린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울었다.


"으...으음...음..."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삐약아.

그렇게 말하며 필사적으로 다시 자는 척을 하는 아이린의 이마를 쓰다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쿡쿡 하고 웃은 그녀는 눈을 덮은 내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더니, 힘차게 일어났다.


"...앞으로 기회는 많을테니까 상관은 없겠죠...안녕히 주무셨나요?"


...저기, 그런데 코르셋이 다 보이는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주섬주섬 이불을 덮으려던 아이린은 마음을 바꿨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함께할 사이라면...알몸도 아니고 속옷차림 정도는...괜찮을 거에요...아마도..."


그렇게 얼굴을 붉힌 그녀는 그래도 좀 부끄러웠는지 머리 맡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도 어찌어찌 옷을 입고 나서 시계를 보니, 벌써 14시였다...많이도 잤네.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고 있는 동안, 아이린은 꼬르륵 소리가 나온 배를 쓰다듬더니 나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맞다...식사를 하셔야죠. 음...이전의 약속대로 제가 만들게 해주세요."


배가 고프시겠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방에 딸린 자그마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요리를 할 줄 알던가?

조금 뒤, 요리랑은 조금 거리가 먼, 콰직, 우지끈, 뽀드득, 빠직, 쾅쾅, 삐약! 소리가 울리고 연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 부엌 앞에서 나는 그저 공포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그...조금 이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한 번 드셔보시면 괜찮을 거에요."


필사적으로 내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막은 아이린이 왼손으로 접시를 들고 나온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이거 혹시 딥컬러가 그린 그림에 나오는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인...그런건가.

색깔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요리가 무엇인지 아이린에게 묻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고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베리아식 스테이크와...파스타 샐러드에요. 크림 스튜 포함이죠."


앞은 그렇다쳐도, 뒤는 시라쿠사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히비스커스의 영양식보다는 분명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푼으로 한 입 먹자 입 안에 퍼지는 맛은...




셋 중 어느 하나도 정답이 아니었다는 점만 빼자면...생각보단 괜찮았다.

치킨 맛 같기도 하고, 자세히 먹다보니 돼지고기 같기도 하고, 마지막 맛은 빵...? 이건 빵인가.

맛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양손으로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죠? 괜찮죠? 다들 먹어보고 괜찮다고 했다니까요."


맛의 비결은 역시 M으로 시작해서 G로 시작하는 그것이죠. 자랑스럽게 말한 그녀는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더 먹으라는 듯 눈을 찡긋하고 윙크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뒷짐을 진 저 손이 신경 쓰인다.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 아이린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오른손을 뻗자, 그녀는 왼손으로 나의 손을 붙잡더니, 왜 그래요?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손을 잡은 채로 왼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오른손을 나에게 감추려는 듯 조금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이럴 줄 알긴 했는데...괜찮아요.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아요."


맞잡은 손으로 아이린을 잡아당기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품으로 들어오더니 결국 끝까지 감추려고 했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에는 베인 상처가 조금 있었다. 

확실히 작은 상처긴 하지만 소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타이르자, 그녀는 입을 삐죽이더니 오른손을 나의 입가로 내밀었다.


"그럼, 당신이 소독해주세요. 숙녀를 부끄럽게 만든 죄는 그걸로 대신할게요."


...아이린은 아무래도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 것 같다.

서로 속옷까지 봐버리고, 같이 잠도 잤는데 이 정도는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른을 놀린 죄로 조금 혼내줘야겠다.

그렇게 나는 도망가지 못하게 오른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꽉 껴안고, 왼손으로 그녀의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잡아서 내 입에 넣었다.


"...에엣...진짜로요...? 더러울텐데..."


뭐라고 웅얼거리는 아이린을 무시하고 혀로 검지손가락을 핥자, 그녀는 몸서리치더니 얼굴을 감추려는 듯 내 오른쪽 어깨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많이 불편한 자세일텐데,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혀로 사탕을 핥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자, 아이린은 히익, 하고 몸을 떨더니 왼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럼에도 몸이 더 밀착한 탓에 내 귀에는 아이린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참는 듯한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으응...하아...아앗..."


조금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무렵, 이제 슬슬 위험해진 게 아닐까 싶어서 손가락을 입에서 빼냈다.

투명한 실선이 가느다랗게 그녀의 손가락과 내 입술을 잇는 것을 보니...너무 많이 나간게 아닌가 싶다.

역시 아이린은 놀리는 맛이 있어서 사랑...아니다. 이것도 분명 실험의 일환이다.

다 됐다고, 아이린의 등을 왼손으로 토닥여주자, 그녀는 빠르게 나에게서 떨어졌다.


"...저, 저는...그러니까...하지만...결혼 전에는..."


빨갛게 물든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아이린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아까까지 내가 입에 넣은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자신의 손가락을 아기처럼 빨던 아이린은 마음을 진정시켰는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거면 충분하겠죠...내일도 있으니..."


하지만 당신, 오늘은 너무 짖궃었으니 제 이마를 오늘은 허락해주지 않을거에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의 표정은 평소와 같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래도 열렬한 사과를 통해 오늘도 그녀의 이마를 어떻게든 쓰다듬는 것에는 성공했다.

다만 어제 입은 내 옷을 줘야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같은 옷은 많으니까.


이제 하루인가.

...뭔가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파헤쳐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다.

...그저 실험일 뿐이다.



30일차, '실험종료'.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며 무도회에 아이린을 에스코트하기로 한 날이다.

검은 색 정장을 입고 방 밖으로 나서자 사방에 걸린 장식물들이 보였다.

그렇게 한창 축제 분위기인 로도스 아일랜드의 복도를 지나가면서 다양한 옷을 입고 분장을 한 오퍼레이터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보니, 곧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아, 당신. 안 늦었네요. 마침 좋은 타이밍이에요."


그리고 그 곳에는 어제 입은 것과는 다른 디자인의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이린이 주변 오퍼레이터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손질해서 윤기나는 머리카락과 은은한 화장에서 귀여움과 동시에 어른스러운 매력이 느껴진다. 그렇게 평가해주자 기쁜 듯 웃은 그녀는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보시다시피 제 파트너가 와서요. 그럼, 이만."


아이린의 정중한 말에 주변에서 꺅꺅 거리는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그 환호성을 뒤로 한 채, 손을 잡고 나란히 무도회장에 입장했다.


무도회장에 입장하고 난 뒤 나의 첫 감상은, 여기가 정말 그 강당이 맞나라는 것이였다.

평소에 있던 수많은 의자들은 치워지고 음식과 마실 것이 올려진 파티 테이블들이 넉넉하게 있으며, 단상 위에서는 스카디가 노래하고 글래디아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내 특유의 음색이 무언가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노래하던 스카디와 글래디아가 인사를 하고 내려온 뒤, 무대 위의 스피커에서는 미리 녹음했는지 음악이 흘러나오고 증설 된 무대에선 다양한 오퍼레이터들이 하고 싶은대로 춤을 추는 그야말로 정석적인 무도회장의 분위기에 나는 문득 넋을 잃었다.

손을 잡고 빙빙 도는 엘리시움과 쏜즈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위디.

스카디에게 붙잡혀서 거의 끌려다니듯 춤을 추는 그라니.

생각보다 혼자서도 춤을 잘 추는 마운틴과, 그 옆에서 커플 댄스를 추는 라 플루마와 이스티나. 쟤네는 언제 친해진거지?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는 제이, 그리고...그 옆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저 사나운 우르수스 출신의 빨간 브릿지 곰은 무시하자.

...그 밑에서는 클릭과 씬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실 클릭이 전부 지시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튼 상관 없겠지.

이런 분위기를 본 내 옆의 파트너 또한 생각이 나랑 비슷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게 무도회. 이런 분위기군요. 당신도 이런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나요?"


없다고 고개를 젓자, 그럼 당신과 함께하는 첫 경험이네요. 그렇게 환하게 웃던 아이린은 파티 테이블에 다가가 잔을 두 개 가져와서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렇다면, 우리 둘이서 재밌게 즐겨봐요."


중간에 합류한 로렌티나에게 이런저런 놀림을 받거나, 어째선지 집사복 차림으로 한숨을 내쉬며 음식을 나르는 안드레아나라던가, 주변을 격렬하게 휩쓰는 열정적인 왈츠를 추는 글래디아와 스카디,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날아다니던 그라니라던가.

니엔에게 붙잡힌 채, 볼을 부비적거림을 당하는 라바라던가...그런데 언제 저렇게 키가 큰 거지? 술에 취했나.

중간중간 다른 여성 오퍼레이터들에게 시선을 향할때마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조금씩 강렬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한숨을 내쉬던 찰나 붙잡혀있던 왼팔이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지더니 부드럽고 따스한 것에 감싸진 것이 느껴졌다.


"...한 눈 파시면 안 돼요. 당신은 제 파트너니까요. 저를 더 많이 봐주세요."


질투하는 거니, 삐약아? 그렇게 말하자 읏...하고 얼굴을 붉힌 아이린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예상치 못한 반응인데...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무대 위에 한 자리가 빈 것이 보였다.

마침 아이린에게도 보였는지 그녀는 팔짱을 풀더니 내 왼손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자, 같이 춤을 추도록 해요. 우리의 연습의 성과를 보여주자고요!"


아이린과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가자 갑자기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조금씩 비켜나기 시작하더니 서로에게 무언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건진 모르겠지만, 공간이 좀 넓어졌으니 좋은 것 아닐까.

아이린도 순식간에 관심이 몰린게 느꼈는지 긴장으로 그녀의 몸이 움츠러든게 느껴졌지만, 새로운 곡이 시작되는 순간 그 움츠림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나를 가까이 잡아당긴 그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나, 둘, 셋."


...결과적으론 제법 훌륭했다.

연습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이미 몸을 많이 움직이는 그녀는 순발력으로 해결했고, 나 또한 어떻게든 맞춰갈 수 있었다.

그렇게 제법 힘든 몇 분이 끝나고 음악이 끝나고 서로에게 밀착한 우리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이것으로 어떻게든 되었겠지. 그렇게 품 안에서 나에게 기댄 아이린에게 잘 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왔다.

나의 시야를 가득 매운 그녀의 얼굴, 그리고 내 입술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딸기향이 나는 부드러운 감촉.

그리고 여태까지의 음악소리가 묻힐 정도의 환호와 비명소리가 주변에서 들려오고, 영겁같은 찰나가 끝난 뒤, 그녀의 얼굴이 나에게서 멀어졌다.

아까까지 맞닿은 부드러움이 이런 소란 속에서도 분명히 그녀의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사랑해요, 당신."



그 소란을 뒤로 한 채 무대에서 내려와 한 켠에 마련 된 의자에 앉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나의 무릎 위에 마주보고 앉더니 그대로 목에 팔을 두르고 이마를 들이밀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이마를 늘 그랬듯이 쓰다듬자니 12시, 해가 넘어가는 종이 쳤다.

사방에서 환호성과 요란한 폭죽소리가 들려오고,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하는 인사들을 다들 나누기 시작했다.


"새해 첫 커플이 여기에 있네! 새해 복 많이 받아! 전우! 그리고 아이린!"

"...엘리시움. 분위기 깨지 마라. 여튼, 박사와 아이린.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박사랑 아이린, 새해 복 많이 받아. 올해는 더더욱 깨끗한 하루를 보내도록 해."


늘 다니는 쏜트와 엘트, 그리고 위디가 손을 흔들었다.


"...박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저로서는 육지의 관습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때로는 이런 것도 좋겠죠."

"박사, 새해 복 많이. 그리고 행복해야 해."

"벌써 둘은 러브러브하네. 부럽기도 해라...아, 작은 새야. 새해 복 많이 받으렴."

"나는...그러고 보니 여기에 왜 끼어있지? 저기, 모니카...아니 인켄데센스 본 적 있...아,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아. 박사."


고풍스럽게 인사하는 어비셜 헌터즈.


"박사~새복많~! 이야~영화 한 편이 뚝딱이네! 우리 귀염둥이 라바도 빨리 짝을 찾아야 할텐데...흑흑."

"야 인마! 왜 그래! 아, 박사. 새해 복 많이 받아."


경박함의 니엔과 진중함의 라바.


"와...정말 대단한데? 박사. 근데 나이는 괜찮은 거 맞지? 그렇지 않다면 이 기마 경찰이 용납하지 못해!"

"...거 됐고, 두목...정말 대단함다...훌륭한 사모님을 만나셨슴다. 두 분 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호들갑 떠는 그라니와, 따봉을 치켜 든 제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박사님. 그리고...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결말을 맺길 빌겠습니다."

"박사...우와...정말 대단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마운틴과, 박수를 치는 라 플루마.


"거...씨X. 연애질이나 하고...X나게 부럽다...앙?! 누구는...우웁...우웨..."

"지마. 괜히 방해하지 말고, 나오기나 하세요. 그나저나 정말 책에서나 나올 법한 고백이였어요. 훌륭합니다."


새해 첫 날부터 보드카에 취해서 한 바가지 욕설을 퍼붓는 우르수스 빨간 브릿지 곰과, 그것을 끌고 나가는 이스티나.


"와...와우! 대단해! 이거 잘 찍어놨거든! 나중에 내가 잘 보정해줄게!"

"씬 아가씨도 협조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무척 부러워하고 계십니다!"

"...부..."


얼굴이 빨갛게 물든 채 열심히 무언가를 조작하는 클릭과 렌즈의 위에 타서 뭐라고 말하려는 씬.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은 내 심정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당혹스러움 그 자체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분명 실험을 위해서...


...단순히 실험만으로 이 작은 아이에게 그랬다고? 내가?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나는 분명 실험만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걸 잊자, 어쨌든 이것으로 30일은 지나갔다.

마지막 날이 그렇게 끝났다.



31일차.


...실험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아이린을 쓰다듬지 않을 것이다.

이 시시한 가족놀이도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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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이 들어갈때마다 써서 은근히 개연성이 걱정되긴 함

어쨌든 다음화는 무조건 나옴 

언제일지는 몰라도 조만간 나올거임

피드백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