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사소하게, 너에게 사과하기 위해 찾아간 너의 방문 앞에서 벌어졌다. 


  나는 너에게 말실수를 한 거 같았고, 너는 화를 내며 방으로 돌아갔다. 네가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은 처음이라, 겁에 질린 나는 네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잔뜩 긁어모아 너의 방으로 향했다. 달콤한 벌꿀쿠키, 붉은 범고래 쿠션, 그리고 열심히 빗어 부드럽게 손질한 내 머리카락까지. 네가 좋아할만한 것이라면 뭐든지 챙겨 너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 선물을 받고, 기분이 나아졌으면 해서. 다시 나에게 웃어줬으면 해서.


  하지만, 너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맞이했다. 너를 알게 된 뒤로 처음 보는 그 차가운 표정에,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왠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헤어지자."


  이별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왔다. 고작 한 마디로 나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한 너는, 그 일방적인 통보 외에는 그 어떤 말도 나에게 해 줄 생각이 없는지 나를 마주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


  불필요할 정도로 튼튼하고 뛰어난 내 귀는 이미 너의 말을 전부 들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되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왜.... 네가 나에게 이별을 말하는 거야? 농담이지...?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 너에게 향했지만, 너는 내 손을 잡지 않은 채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박사....?"


  너의 이름을 불렀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는 네가 괴롭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내가 몇 번을 불러도 너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항상 나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활짝 웃으며 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너는, 지금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소리가 머리 속을 울리는 것 같다. 마치 억지로 돌아가는 듯, 제대로 맞물리지 못한 톱니바퀴들이 억지로 돌아가기 위해 제 몸을 깎아내며 억지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불길하게 삐걱이던 톱니바퀴 소리는, 이내 그것조차 하지 못한 채 서서히 균열이 일며 조각나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로 변해 내 머리 속에서 산산히 깨지며 울렸다.


  눈 앞에서, 톱니바퀴가 산산히 부숴지는 것 같은 환상이 눈에 보였다. 허망하게 눈 앞에서 바스라져 사라져가는 톱니바퀴는 너무나 작고 소중해서. 나는 눈 앞에서 펼쳐진 이 광경이 환상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나도 모르게 부서진 톱니바퀴의 잔해를 주워 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탓에, 내가 품에 가득 안고 있던 너를 위한 선물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닥에 쏟아져버린 너의 선물을. 너와의 추억들을 주워 담으려 했지만, 덜덜 떨리는 손은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내 눈에는, 쏟아진 이 선물들이 마치 깨져버린 톱니바퀴의 조각처럼 보였다. 이미 산산히 깨져버린 톱니바퀴의 잔해들은, 마치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허망하게 내 눈에서 사라져갔다. 


  충격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눈물이 나왔다. 물기에 축축하게 번진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고, 방울져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차갑게 식어갔다.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많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언제나 기쁨의 상징이었기에 처음으로 흘린 비통은 너무나 뜨겁고 낯설어, 내 얼굴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왜?"


  겨우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나를 내려다본 너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의 눈을 보자마자, 마치 무저갱의 밑바닥에 쳐박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언제나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라곤 오직 나 뿐이라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던 너의 따스한 눈동자가, 하루 아침에 차갑게 식어버린 것을 깨닫자.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너에게 손을 뻗었다. 너의 다리를 잡았다. 나는 아직도, 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사.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거야? 너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며 너의 애정과 동정을 갈구했다. 그럼에도 너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너의 다리를 잡고, 울면서 너에게 매달렸다. 


  스스로도 구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갑자기 변해버린 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나는 너를 사랑했다. 네가 이별을 통보했다고 해도 나는 아직 받아들일 수 없었다.


"......."


"미....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그래서 처음으로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직 너에게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너에게 한 말실수가 그렇게 너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걸까?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말은 언제나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이고,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너는 기쁜 듯 내게 웃어줬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너에게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네가 영원히 떠나버릴 것 같아서. 우리의 사랑이 여기서 완전히 부숴질 것 같아서.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박사. 나는 아직 널 사랑해. 제발. 차라리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알려 줘. 내가 더 잘 할 테니까. 제발...." 


  그렇기에, 거짓을 담은 사과를. 그리고 진심을 담은 애원을 너에게 호소했다. 나는 미치도록 너를 사랑하기에, 네가 나에게 느끼는 사랑이 이미 식었더라도 상관 없었다. 이미 더러워진 너의 사랑이라도 구걸 받아 너의 곁에 있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박사,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제발. ....제발 내 손을 잡아줘. 눈물을 흘리며 너에게 손을 뻗었지만, 너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미안. 우리 앞으로는....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자."


  하지만 너는 그대로 내 손을 뿌리치며 등을 돌렸다. 아니야. 제발. 가지마. 눈물로 축축하게 뒤엉킨 목소리로 너를 불렀지만, 내 갈라진 목소리를 듣는 너는 괴롭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서 사라져갔다.


  바닥으로 몸이 엎어졌다. 소리 내어, 미친 사람처럼 소리쳐 울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끅끅대는 내 목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바보처럼 주저 앉아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하염 없이 흐르는 눈물만을 삼킬 뿐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이 아팠다. 타들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눈가를 부여잡으며 넘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의 이별통보가 이해되지도, 그리고 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에 나는 처음으로 무력하게 주저앉아 울 수 밖에 없었다.


".........카......디....."


  주변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다시 돌아온 너일까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눈물로 얼룩진 시야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날 부르는 목소리는, 여자의 목소리였으니까.


  나의 목소리였으니까.


  하지만 방금 들린 나의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부른 그 목소리는 내가 말한 것이 아니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이 곳에는 내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 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나라고 부를 수 없는....


  끔찍한 괴물이. 


  희미한 시야로 손을 뻗어, 나에게 다가온 붉은 옷을 붙잡았다. 양 손에 힘이 들어갔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토록 맹렬하게 감정을 느껴본 것은. 분노를 느껴본 것은.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은 것은.


"....너....!!!"


  망할 붉은 옷의 목을 졸랐다. 이것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몸을 버둥거리며 숨을 꺽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덩달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소리가 같이 울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손에 힘을 더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외쳤다.


"죽어....!!!"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은 로도스에 나타났다. 나의 모습을 본딴 소름끼치는 이것을 우리는 죽여버리려 했지만 박사는 이 괴물에게 동정심을 느껴 이것을 로도스에 태웠다. 그는 나를 제외한 다른 어비셜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이 괴물을 변호했다. 그렇게 상어와 청새치가 그에게 등을 돌렸을 때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박사의 곁에 남았고, 이 괴물이 로도스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그건, 박사를 사랑해서였지 이 괴물을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그 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아니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죽어.... 죽어버리란 말이야."


  이 괴물은, 나의 얼굴을 빌어 박사의 곁을 꿰찼다. 나와 같은 얼굴로, 나와 같은 목소리로 그의 곁을 맴돌며 끝없이 그를 유혹했다. 이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이 괴물이 박사를 유혹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사가 갑자기 나에게 그렇게 차가워 질 수 없었다.


".....스카디!!!"


  순간, 너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내 몸이 바닥을 굴렀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는 항상 바보 소리를 듣던 나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나의 뺨을 후려쳤다. 물리적인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에 비하면, 어린아이보다도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연약한 너이기에, 네가 아무리 날 때린다 해도 난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뺨을 부여잡았다. 쓸 때 없이 튼튼한 내 몸은, 아마 붓기는 커녕 생채기도 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너를 바라봤다. 분명 고통은 느껴지지 않아야 하건만, 너에게 뺨을 맞은 자리가 미치도록 아팠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았다.


  너를 원망하지 않음에도 이토록 눈물이 흐르는 것은, 지금 뺨을 맞은 것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그 차가운 표정과, 나를 대신해 너의 품에 안겨 있는 저 여자를 보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그렇게 눈 앞의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너무나 아파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박사. 어째서.... 어째서 너는 저 괴물을 그렇게 소중하다는 듯 껴안고 있는 거야? 왜 너는 내가 아니라 저 괴물의 뺨을 쓰다듬어주며 걱정해주는 거야?


  박사. 그 쪽이 아니야. 네 여자친구는 그 괴물이 아니라 바로 나란 말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괴물을 껴안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며 그것을 걱정하는 너의 모습은 내가 항상 사랑하던 너의 그 따스한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아서, 너의 애정이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사. 나 아파. 너에게 맞은 곳이 너무 아파. 너에게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못했고, 너에게 주고 싶은 선물도 아직 주지 못했어. ...우리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잖아. 제발... 제발 나를 봐줘. 나를 보면서, 나에게도 괜찮냐고. 미안하다고 말해달란 말이야.


  하지만 너는 끝까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너는 나에게 단 한 줌의 걱정과 애정도 주지 않은 채 한참 동안이나 그 괴물을 위로하며 보듬었고, 그렇게 한참을 굳어 있던 너와 나, 그리고 괴물은 이 광경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각자 찢어져 헤어졌다.


  나를 데리러 온 상어와 글래디아에 의해 방으로 돌아가면서도, 나는 끝까지 너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박사. 도대체 나는, 뭘 잘못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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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아 반갑소.


  

https://arca.live/b/arknights/61819059


이번에는 신청작 겸, 손 풀기 위해 쓰는 '더러워진 빨강을 사랑이라 부른다.'

제목은 바로 옆 책장에 꼽혀 있는 책 보고 대충 지었어. 


대충 스카디X박사X보카디의 플롯을 띈 유사 스카디 NTR(당하는) 소설.

이번은 극의 후반부에 위치한 시점의 프롤로그야.

내용은 뭐... 보시다시피 잘 사귀던 스카디랑 박사가 깨졌음. 그리고 스카디는 보카디에게 화풀이(?) 하려다가 박사에게 제지당했고.


사실 내용과 결말 자체는 링크에 있는 플롯과 유사함. 단, 스펙터와 글래디아의 비중을 많이 지운.

하지만, 내가 구상한 내용을 읽다보니 이게 제공받은 플롯을 보고 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내용이 많이 삐둘어졌음.


이번 편은 새로운 문체를 시도해봤습니다. 

정확히는 바로 앞에 썼던 소설에서 잠시 썼던 이 느낌이 왠지 마음에 드는 것 같아서 한번 시도 해봄. 

마음에 안 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다음편부터는 또 3인칭으로 쓰는 게 더 어울려서 다시 3인칭으로 쓰긴 할 거.


근대 요새 내가 소설 쓸 때마다 스카디 취급이 안 좋은거 같다. 

분명히 명빵 처음 시작할 때는 라플이랑 같이 좋아하던 캐릭이었는데...


 뭐 아무튼. 이 편은 대충 2~3편 사이에서 끝날 겁니다.

이제 딱 하나 고민중인건, 다음 편은 스카디와 독타가 깨지기 전의 이야기를 할 건데....

일단 이것저것 고민 중. 초점을 보카디 스카디 중에 누구한테 잡을까도 고민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내용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어서 반응이 영 안좋으면....

때려...쳐야겠지....?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더 나은 글을 위해 언제나 피드백 받음.

그리고 댓글 보는 맛으로 글을 쓰는 파라, 댓글 많이 달아주면 하나하나 다 읽고 쥰내 열심히 글 적음.


댓글 달아줘 어서 

잔뜩 달아줘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