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챗 하려고 노트북 샀음... 노트북으로 챗질하니까 인풋이 확실히 길어지는듯
아웃풋보다 인풋 길게 보낸건 처음이었는데 노트북 너무 만족중이래!
노트북 너무 좋아! 평생 침대 위에서 노트북으로 아편만 퍼먹고싶어!
추가로 궁금해서 글자검색해본 빅토르의 젠장 사용량: 26 제기랄 사용량: 6
이제 진행중인거 다 올렸으니 다시 빅토르 먹으러 가야지... 하... 러시아 남자 너무 좋아 10초함락 시켜주고싶음
#3
부서진 꿈

빅토르
MONO
CONVERSATION
9. 새콤달콤 레몬 에이드, 비린 바다 그리고 고철덩이 자장가
다음 날 아침. 비비는 아침에 일어나며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았다.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진 채였다.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비비
'참아. 참아. 참아.'
스스로 여러번 되뇌여도 히스테릭하게 올라오는 분노와 무력감이 자신을 잠식하는 기분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었다. 비비는 오지 않는 잠의 수마를 잡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빅토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기계처럼 정확하게 뜨였다. 새벽의 푸른빛이 오두막의 작은 창틈으로 스며들기 전, 언제나처럼. 그의 몸은 생존이라는 이름의 시계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채웠다. 밤사이 새로운 위협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와, 사그라드는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그의 얼굴 위로 붉은 그림자를 그렸다.
그의 시선이, 간이침대 위 이불 더미에 닿았다. 미동도 없는 작은 실루엣. 어젯밤,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했다.
그는 소리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가 그의 폐부를 채웠다. 밤사이 새로운 위협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와, 사그라드는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었다.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그의 얼굴 위로 붉은 그림자를 그렸다.
그의 시선이, 간이침대 위 이불 더미에 닿았다. 미동도 없는 작은 실루엣. 어젯밤,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은 그 목소리의 주인은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했다.
빅토르
‘피곤하겠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서머빌에서의 일, 돌아오는 길의 긴장감, 그리고 어젯밤의 독한 위스키까지. 지쳐 쓰러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는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셔야 이 눅눅한 피로와 머릿속의 소음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았다.
주전자가 김을 뿜기 시작할 때까지도, 이불 더미는 미동도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잠든 아이의 평온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스윽-
빅토르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볼 수 있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모포가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주전자가 김을 뿜기 시작할 때까지도, 이불 더미는 미동도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잠든 아이의 평온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침묵.
스윽-
빅토르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볼 수 있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모포가 아주 미세하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빅토르
“꼬맹이.”
그가 낮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이불 속에서 억눌린 신음 같은 숨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빅토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가 있을 법한 부분을 덮은 모포를 가볍게 잡았다. 그 순간, 그의 손끝으로 격렬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는 거칠게 모포를 걷어냈다.
빅토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가 있을 법한 부분을 덮은 모포를 가볍게 잡았다. 그 순간, 그의 손끝으로 격렬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는 거칠게 모포를 걷어냈다.
빅토르
“...!”
이불 아래,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하얗게 질려 일그러져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고, 꼭 감은 두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눌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샷건의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던 가녀린 어깨. 어젯밤,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 그 모든 것이 눈앞의 이 처참한 모습과 겹쳐지며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빅토르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의 움직임은 분노한 곰처럼 난폭했다. 그는 서머빌에서 가져온 의약품 자루를 바닥에 쏟아부었다. 유리병들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는 미친 듯이 약병들을 뒤져, 진통제라고 적힌 작은 병 하나를 찾아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떨고 있는 작은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샷건의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던 가녀린 어깨. 어젯밤,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 그 모든 것이 눈앞의 이 처참한 모습과 겹쳐지며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빅토르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의 움직임은 분노한 곰처럼 난폭했다. 그는 서머빌에서 가져온 의약품 자루를 바닥에 쏟아부었다. 유리병들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는 미친 듯이 약병들을 뒤져, 진통제라고 적힌 작은 병 하나를 찾아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떨고 있는 작은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빅토르
“입 벌려.”
비비
"건들이지마..!"
비비는 으르렁거리듯 뱉어냈다. 이내 절망의 색으로 물든 눈동자로 눈물을 뱉었다.
비비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한데. 가끔 이래. 무리하면 이러니까... 잠깐만 혼자 놔둬줘. 약은 안먹어도 돼. 곧 나을거야."
"건들이지마..!"
빅토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진통제가 든 작은 약병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방어기제와 함께 유리처럼 위태로운 애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사과와 변명으로 덮였다.
곧 나을 거라고. 혼자 두면 된다고.
그 말들이 그의 귀에 닿기 전에, 그의 눈은 이미 진실을 보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 통제 불능으로 떨리는 손. 고통으로 잔뜩 찡그려진 미간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
진통제가 든 작은 약병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칼날 같은 방어기제와 함께 유리처럼 위태로운 애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사과와 변명으로 덮였다.
곧 나을 거라고. 혼자 두면 된다고.
그 말들이 그의 귀에 닿기 전에, 그의 눈은 이미 진실을 보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 통제 불능으로 떨리는 손. 고통으로 잔뜩 찡그려진 미간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
빅토르
'거짓말.'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단 하나의 단어였다.
이 작은 계집애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이 고통을 혼자 견뎌내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약을 억지로 먹이려 하지도,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들고 있던 약병과 물컵을 그녀의 머리맡,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마치 망치로 못을 박는 듯한, 단호하고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소리였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침대 맡에 선 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통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두막 안의 모든 공기가 그의 분노와 무력감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빅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억지로 짓누른, 낮고 거친 쇳소리 같았다.
이 작은 계집애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이 고통을 혼자 견뎌내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약을 억지로 먹이려 하지도, 어설픈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들고 있던 약병과 물컵을 그녀의 머리맡,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마치 망치로 못을 박는 듯한, 단호하고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소리였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침대 맡에 선 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통 속에서 떨고 있는 작은 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두막 안의 모든 공기가 그의 분노와 무력감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빅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를 억지로 짓누른, 낮고 거친 쇳소리 같았다.
빅토르
“거짓말하지 마.”
비비는 색색거리며 불온한 감정을 삼켰다. 통제되지 않는 압박으로 인한 무력감. 좌절. 비비는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누그러든 목소리로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비비
"손 좀 잡아줘..."
빅토르의 시선은 허공에 내밀어진 가느다란 손에 고정되었다.
“손 좀 잡아줘...”
그것은 명령도, 부탁도 아니었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존재가 내미는 마지막 구조 신호. 거짓말로 단단히 감싸 두었던 갑옷이 부서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연약한 맨살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하얗게 타들어 갔다. 억눌렀던 분노, 무력감, 그 모든 감정의 파편들이 그녀의 작은 목소리 하나에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직 거대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하얗게 타들어 갔다. 억눌렀던 분노, 무력감, 그 모든 감정의 파편들이 그녀의 작은 목소리 하나에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오직 거대한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빅토르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빅토르는 바닥에 놓았던 약병을 거칠게 걷어찼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민 작은 손을 자신의 크고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새를 다루듯, 하지만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그녀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와 그의 심장을 직접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빅토르는 바닥에 놓았던 약병을 거칠게 걷어찼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가 내민 작은 손을 자신의 크고 투박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새를 다루듯, 하지만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그녀의 손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그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와 그의 심장을 직접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 식은땀에 젖은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빅토르
“...여기 있다.”
비비는 사내의 손을 쥐고 그것을 자신의 젖은 뺨에 갖다댔다. 덜덜 떨리는 손이 단단한 손과 맞닿으며 울리는 진동은 너무나도 무겁고 든든한 것이라, 저도 모르게 제 뺨을 그것에 비볐다. 젖은 눈을 뜬채 사내를 올려다봤다.
비비
"실망... 안 했어? 소리질렀잖아..."
빅토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 손에 뺨을 비비는 작은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젖은 눈물로 축축하고, 불덩이처럼 뜨거운 감촉. 그의 거친 손등 위로 그녀의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흘렸던 땀과 피와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뜨겁고 무거운 액체였다.
실망.
그 단어가 그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이 작은 아이는 지금, 자신의 고통보다 그가 느꼈을지도 모를 실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제 손에 뺨을 비비는 작은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젖은 눈물로 축축하고, 불덩이처럼 뜨거운 감촉. 그의 거친 손등 위로 그녀의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살아오면서 수없이 흘렸던 땀과 피와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뜨겁고 무거운 액체였다.
실망.
그 단어가 그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이 작은 아이는 지금, 자신의 고통보다 그가 느꼈을지도 모를 실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빅토르
‘바보 같은 녀석.’
그의 속에서 거친 욕설 대신, 그런 메마른 한마디가 떠올랐다. 이 아이는 아직도 몰랐다. 자신이 이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실망 따위의 얄팍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모든 규칙을 무너뜨리고, 그의 견고한 세상을 흔드는 이 작은 존재 앞에서 실망 같은 감정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속눈썹, 그 아래에서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에 닿았다. 그 안에는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감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아직도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곤 자신의 몸 쪽으로 아주 살짝,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끌어당겼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젖은 속눈썹, 그 아래에서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에 닿았다. 그 안에는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감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아직도 떨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곤 자신의 몸 쪽으로 아주 살짝, 그녀가 기댈 수 있도록 끌어당겼다.
빅토르
“아니.”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빅토르
“실망... 안 했어.”
비비는 사내의 신체에 기댔다. 든든한 나무의 중심부같은 몸이었다. 기어코 흐느낌으로 변해간 눈물은 연신 쏟아졌다. 사내의 허리춤을 끌어안고서 비비는 얼굴을 그의 허벅지에 묻었다. 중간중간
비비
"미안해, 미안해..!"
비비
"미워하지마…"
비비
"…두고가지마…"
따위의 말이 쏟아졌지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눈물을 쏟아낸 계집은 정확히 자신이 무슨 말을 뱉어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비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비
"…배고프다."
빅토르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의 허벅지를 적시는 축축한 온기, 허리를 감아오는 작은 팔의 무게, 그리고 귓가를 어지럽히는 젖은 흐느낌. 그 모든 것이 그의 단단한 몸을 꿰뚫고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그는 지금, 한 존재의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미안해 미워하지 마 두고 가지 마. 엉망으로 쏟아지는 단어들은 의미를 잃고 그저 고통의 파편이 되어 그의 살갗 위를 굴렀다.
그의 허벅지를 적시는 축축한 온기, 허리를 감아오는 작은 팔의 무게, 그리고 귓가를 어지럽히는 젖은 흐느낌. 그 모든 것이 그의 단단한 몸을 꿰뚫고 들어와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그는 지금, 한 존재의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미안해 미워하지 마 두고 가지 마. 엉망으로 쏟아지는 단어들은 의미를 잃고 그저 고통의 파편이 되어 그의 살갗 위를 굴렀다.
빅토르
‘이 작은 것이... 얼마나 더 부서져야.’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분노도, 연민도 아니었다. 그저 지독한 무력감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아이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부서진 조각들을 주워 담아줄 수도 없었다. 그저 이 아이가 제 모든 것을 쏟아내고 잿더미가 될 때까지, 이 자리에 버티고 서서 함께 흔들리는 것밖에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격렬했던 파도가 잦아들고, 멀리서 밀려오는 잔잔한 파문처럼 그녀의 숨소리가 겨우 안정을 찾았을 때였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격렬했던 파도가 잦아들고, 멀리서 밀려오는 잔잔한 파문처럼 그녀의 숨소리가 겨우 안정을 찾았을 때였다.
“배고프다.”
중얼거리듯 뱉어진 그 한마디에, 빅토르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작은 머리통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 퉁퉁 부어오른 눈. 하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나마 삶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벽난로로 다가가, 어젯밤 먹다 남은 사슴고기와 위스키 병을 들고 왔다. 그는 자신의 나이프로 고기를 얇게 잘라, 다시 한번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있던 작은 머리통을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 퉁퉁 부어오른 눈. 하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나마 삶의 빛이 돌아와 있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벽난로로 다가가, 어젯밤 먹다 남은 사슴고기와 위스키 병을 들고 왔다. 그는 자신의 나이프로 고기를 얇게 잘라, 다시 한번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빅토르
“먹어.”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빅토르
“살아야 하니까.”
비비
"살거야…"
비비는 사슴고기를 우물거렸다. 짰다. 눈물탓에 짠건지 원래 짠건지 알 순 없었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계집이 입을 열었다.
비비
"무리하면… 가끔 이랬어…"
빅토르는 고기를 씹던 입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나이프 끝에 맺힌 기름 방울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해서, 마치 어젯밤 쏟아냈던 눈물과 절규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나이프 끝에 맺힌 기름 방울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해서, 마치 어젯밤 쏟아냈던 눈물과 절규가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빅토르
‘가끔... 이랬다고.’
그 한마디가, 그녀의 모든 절규보다 더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이것은 일회성의 사고가 아니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안고 살아온 일상적인 고통, 익숙한 절망이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어젯밤 목격한 것은 그녀의 무너짐이 아니라, 언제나처럼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그녀만의 생존 방식이었음을.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먹고 있던 고깃점을 마저 삼켰다. 그리곤 옆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어 올렸다. 그는 마시지 않았다. 대신, 깨끗한 천 조각에 독한 액체를 조금 쏟아부었다.
스윽, 스윽-
그는 말없이 자신의 나이프를 닦기 시작했다. 피와 기름때를 알코올로 소독하는,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행위.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머릿속의 소음을 잠재우는 그만의 의식이었다.
한참이나 칼날을 닦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먹고 있던 고깃점을 마저 삼켰다. 그리곤 옆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어 올렸다. 그는 마시지 않았다. 대신, 깨끗한 천 조각에 독한 액체를 조금 쏟아부었다.
스윽, 스윽-
그는 말없이 자신의 나이프를 닦기 시작했다. 피와 기름때를 알코올로 소독하는,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행위. 불규칙한 심장 박동과 머릿속의 소음을 잠재우는 그만의 의식이었다.
한참이나 칼날을 닦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빅토르
“무리하지 마.”
비비
"응… 앞으론 조심할게."
비비는 눈동자를 옮겨 사내를 응시했다.
비비
"우린 생존 파트너잖아."
“응, 앞으론 조심할게. 우린 생존 파트너잖아.”
빅토르의 손이 멈췄다.
그의 손에 들린 나이프는 깨끗하게 닦여 벽난로의 불빛을 차갑게 반사하고 있었다.
생존 파트너.
그 단어가 오두막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젯밤, 그녀가 흘린 눈물과 절규의 무게를 전부 지워버리는 가볍고 건조한 소리. 그가 직접 그들의 관계 위에 그어놓은, 이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얄팍해진 경계선.
그의 손에 들린 나이프는 깨끗하게 닦여 벽난로의 불빛을 차갑게 반사하고 있었다.
생존 파트너.
그 단어가 오두막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젯밤, 그녀가 흘린 눈물과 절규의 무게를 전부 지워버리는 가볍고 건조한 소리. 그가 직접 그들의 관계 위에 그어놓은, 이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얄팍해진 경계선.
빅토르
'그깟 이름 따위가... 뭐라고.'
그의 머릿속에서 짜증 섞인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들고 있던 나이프와 천 조각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철컥-!
요란한 소음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이 걷어찼던 약품 더미로 다가가, 성큼성큼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마침내 튜브 형태의 강력한 소염진통 연고 하나를 찾아냈다. 과거 운동선수들이 근육통에 바르던 그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는 다시 비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집채만 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다른 어떤 감정도 없이, 오직 그녀의 오른쪽 어깨만을 향해 있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나이프와 천 조각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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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이 걷어찼던 약품 더미로 다가가, 성큼성큼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마침내 튜브 형태의 강력한 소염진통 연고 하나를 찾아냈다. 과거 운동선수들이 근육통에 바르던 그에게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그는 다시 비비의 앞으로 다가왔다.
집채만 한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의 잿빛 눈동자는 다른 어떤 감정도 없이, 오직 그녀의 오른쪽 어깨만을 향해 있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빅토르
“옷 벗어.”
비비
"응? 아…"
비비는 사내의 얼굴과 손에 들린 연고를 번갈아보더니 이내 자신의 옷을 바라봤다. 목폴라 티셔츠. 비비는 일순 고민하다 이내 밑자락을 쥐어 들어올린 뒤 오른쪽 팔만을 빼내고서 어깨를 드러냈다.
비비
"… …발라주게?"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잿빛 시선은 그녀가 드러낸 하얀 어깨, 그 위태로운 경사면에 고정되었다. 너무나도 가늘고 연약해서,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한 번 힘주어 쥐면 그대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하얀 뼈와 살. 그가 돌아온 이후 내내 머릿속을 헤집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의 잿빛 시선은 그녀가 드러낸 하얀 어깨, 그 위태로운 경사면에 고정되었다. 너무나도 가늘고 연약해서, 자신의 거친 손바닥으로 한 번 힘주어 쥐면 그대로 바스러질 것만 같은 하얀 뼈와 살. 그가 돌아온 이후 내내 머릿속을 헤집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빅토르
‘젠장.’
그의 속에서 들끓던 것은 분노도, 욕망도 아니었다. 그저 지독하고 압도적인,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그는 말없이 연고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 끝에, 서늘한 흰색 연고가 묻어 나왔다. 빅토르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벽난로의 불빛을 등지고 그녀의 작은 상반신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스윽...
그녀의 살결에 닿은 연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위를 덮은 그의 손바닥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빅토르의 손가락은 상상 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아픈 부위를 피해, 뭉친 어깨 근육부터 천천히,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의 가장 연약한 부품을 다루듯, 그의 모든 신경은 손끝에 집중되었다.
그는 말없이 연고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 끝에, 서늘한 흰색 연고가 묻어 나왔다. 빅토르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벽난로의 불빛을 등지고 그녀의 작은 상반신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스윽...
그녀의 살결에 닿은 연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 위를 덮은 그의 손바닥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빅토르의 손가락은 상상 이상으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아픈 부위를 피해, 뭉친 어깨 근육부터 천천히,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연고를 펴 바르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의 가장 연약한 부품을 다루듯, 그의 모든 신경은 손끝에 집중되었다.
빅토르
“...힘 빼.”
움찔, 계집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타인의 접촉을 허락치 않던 신체부위 위로 사내의 거친 손바닥이 느껴졌다. 이질적인 감각. 비비는 사내 앞에서 벌거벗는 것이 이보다는 덜 부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로 떨리는 어깨는 비단 고통탓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집은 인내했다. 다른이도 아닌, 사내의 손길이었기에.
빅토르의 거친 손바닥 아래, 그녀의 어깨가 속절없이 떨렸다. 움찔, 하고 놀란 새처럼 파르르 떠는 그 미세한 경련이 그의 굳은살 박인 손끝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그대로 긁는 듯했다.
빅토르
'젠장.'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힘을 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정작 그의 온몸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기름과 쇳가루에 익숙한 그의 손은 이 작고 뜨거운 살결 위에서 어떻게 힘을 조절해야 할지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애써 잡념을 지우고 눈앞의 상처에만 집중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의 가장 연약한 부품을 다루듯,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뭉친 근육을 찾아내어 아주 느리고 일정한 압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스으윽...
벽난로의 열기, 연고의 싸한 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는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희미한 체향. 이 모든 것이 그의 폐부를 어지럽혔다. 그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췄다.
한참이나 침묵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그의 손길이 문득 멈췄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반대편 손으로 벽난로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담요를 끌어왔다. 그는 연고를 바르지 않은 쪽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드러난 그녀의 상반신을 그 담요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곤 다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그는 애써 잡념을 지우고 눈앞의 상처에만 집중했다. 마치 고장 난 기계의 가장 연약한 부품을 다루듯,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뭉친 근육을 찾아내어 아주 느리고 일정한 압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손끝에 모여들었다.
스으윽...
벽난로의 열기, 연고의 싸한 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뒤덮는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희미한 체향. 이 모든 것이 그의 폐부를 어지럽혔다. 그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췄다.
한참이나 침묵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그의 손길이 문득 멈췄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반대편 손으로 벽난로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담요를 끌어왔다. 그는 연고를 바르지 않은 쪽 어깨부터 등허리까지, 드러난 그녀의 상반신을 그 담요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곤 다시,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빅토르
“...춥나.”
비비
"안 추워. ...아저씨가 매일 불을 켜주잖아. 매일... 매일 벽난로 불을 확인해주잖아."
비비는 가만 벽난로의 불꽃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주홍색의 화마가 연분홍빛 눈동자를 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비는 문득 입을 열었다.
비비
"나중에 있지, 세상이 멀쩡해지면… 우리가 구한 픽업트럭을 타고 함께 바다에 갈래..? 난 바다에 가본적이 없거든. 수영복도 입고 아저씨랑 바다모래를 맨발로 느끼면서. 한 손에는 레몬에이드를 들고서 있는거야."
“안 추워. ...아저씨가 매일 불을 켜주잖아. 매일... 매일 벽난로 불을 확인해주잖아.”
빅토르의 손이 멈췄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그녀의 어깨뼈 바로 위, 가장 부드러운 살결 위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벽난로를 응시하는 그녀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주홍빛 불꽃이 그녀의 젖은 눈동자 안에서 춤추고 있었다.
빅토르
‘이 작은 녀석은... 전부 보고 있었군.’
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자신이 무심코 반복했던 모든 행동들. 새벽에 일어나 불을 지피고 밤이 되면 다시 장작을 더하던 그 모든 사소한 행위들을, 이 아이는 하나하나 제 눈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그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빅토르의 단단한 방어벽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감각.
“나중에 있지, 세상이 멀쩡해지면 우리가 구한 픽업트럭을 타고 함께 바다에 갈래..? 난 바다에 가본적이 없거든. 수영복도 입고 아저씨랑 바다모래를 맨발로 느끼면서. 한 손에는 레몬에이드를 들고서 있는거야.”
빅토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증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미래를 말하는 목소리. 바다. 수영복. 레몬에이드. 그의 세상에서는 이미 멸종되어 버린 단어들의 나열. 그것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서 마치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마치 내일 아침 해가 뜰 것이라는 사실처럼 당연하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작은 손으로 향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 아까 전, 제 손을 붙잡고 흔들리던 그 손.
빅토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바람처럼 거칠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그녀의 작은 손으로 향했다. 가늘고 하얀 손가락. 아까 전, 제 손을 붙잡고 흔들리던 그 손.
빅토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바람처럼 거칠었다.
빅토르
“레몬에이드.”
빅토르
“그거, 단 거 아니었나.”
비비
"달겠지..? 새콤하고 달콤하고. 난 어릴때 그거 참 좋아했었어. 탄산수를 탄 그거."
자신의 뒤에서 연고를 발라주는 이 사내는 어떠했을까. 비비는 시선을 벽난로에서 사내에게로 옮겼다.
비비
"아저씨는? 바다에 가봤어? 레몬에이드를 좋아해? 그 때의... 새콤함이 그리워..?"
“달겠지..? 새콤하고 달콤하고. 난 어릴때 그거 참 좋아했었어. 탄산수를 탄 그거.”
빅토르의 손이 멈췄다.
“아저씨는? 바다에 가봤어? 레몬에이드를 좋아해? 그 때의... 새콤함이 그리워..?”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그의 손가락, 그 거친 움직임이 그대로 멎었다. 그의 잿빛 시선은 벽난로 안에서 춤추는 불꽃, 그 너머의 허공을 향했다.
빅토르
‘바다...’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끼룩거리며 하늘을 가르던 갈매기 떼. 발이 푹푹 빠지던 뜨거운 모래사장. 그리고 코를 찌르던 짜디짠 소금 냄새와 생선 튀김 냄새.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러시아 말들. 브루클린의 여름.
그가 기억하는 ‘새콤함’은 레몬에이드의 그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제멋대로 퍼붓는 파도를 뒤집어썼을 때 입안에 남던, 그 지독하고 날것의 비린 맛이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어깻살을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쓸었다. 마치 기억의 편린을 더듬는 듯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새콤함’은 레몬에이드의 그것이 아니었다. 바다가 제멋대로 퍼붓는 파도를 뒤집어썼을 때 입안에 남던, 그 지독하고 날것의 비린 맛이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어깻살을 아주 천천히, 부드럽게 쓸었다. 마치 기억의 편린을 더듬는 듯한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빅토르
“바다는...”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뜨거운 김에 젖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빅토르
“...언제나 시끄럽고, 비린내 나는 곳이었어.”
그는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남은 연고를 마저 펴 발랐다.
빅토르
“레몬에이드는... 마셔본 적 없어.”
비비는 가만 눈을 감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좌표를 떠올렸다. 시끄럽고, 비린내 나는 곳. 비비의 머릿속은 그 소음이 사람의 말소리일지, 갈매기의 울음소리일지, 사내의 웃음소리일지 모를 것들로 하나씩 채워져가고 있었다.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비
"아하하핫, 아저씨 다워. ...난 새콤달콤함을 알고있고 아저씨는 바다의 비린내를 알고있네."
노란색 액체가 담긴 잔으로 바라본 사내의 세상. 과거. 그리고 자신이 바라게 된 미래. 비비는 그것이 간절하게 갖고싶어졌다.
빅토르의 손이 멈췄다.
“아하하핫, 아저씨 다워. ...난 새콤달콤함을 알고있고 아저씨는 바다의 비린내를 알고있네.”
그의 손가락은 연고의 서늘함과 그녀의 뜨거운 살결, 그 경계선 위에 그대로 멎어 있었다.
새콤달콤함.
바다의 비린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그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뒤섞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가 ‘비린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살아온 삶, 그 자체였을 뿐. 하지만 그녀의 세상, ‘새콤달콤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비춰본 그의 과거는 지독하게 짜고 거친, 생존의 냄새만을 풍기고 있었다.
새콤달콤함.
바다의 비린내.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그 말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파도처럼 뒤섞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과거가 ‘비린내’ 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살아온 삶, 그 자체였을 뿐. 하지만 그녀의 세상, ‘새콤달콤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비춰본 그의 과거는 지독하게 짜고 거친, 생존의 냄새만을 풍기고 있었다.
빅토르
'이 작은 녀석은...'
그의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어깻살을 아주 천천히, 원을 그리듯 쓸었다. 마치 지도에도 없는 길을 더듬는 탐험가처럼. 그는 그녀가 말하는 그 ‘새콤달콤함’의 맛을 상상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혀끝에서 맴도는 것은 언제나처럼 짜디짠 소금의 맛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떼었다. 그리곤 바닥에 내려두었던 연고 뚜껑을 닫았다. 임무는 끝났다는 듯이.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던 담요를 끌어올려, 목덜미까지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한기로부터 이 작은 온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벽난로의 불꽃이 깃든, 그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
그는 천천히,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떼었다. 그리곤 바닥에 내려두었던 연고 뚜껑을 닫았다. 임무는 끝났다는 듯이.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던 담요를 끌어올려, 목덜미까지 다시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한기로부터 이 작은 온기를 지켜내야 한다는 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벽난로의 불꽃이 깃든, 그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
빅토르
“바다에 가기 전에,”
한참 만에,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바람처럼 거칠었지만, 그 안에는 부정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빅토르
“네 어깨부터 고쳐야지.”
비비
"아하하핫, 맞아. 고쳐야지."
비비는 가만 눈을 감고서 사내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불가능할 것이었다. 이곳은 전문의도, 마취약도, 무균실도 그 무엇도 없었다. 자신의 어깨는 평생토록 자신을 괴롭힐 것이었고, 자신의 발작은 지속적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비비는 언젠가 멀쩡한 어깨. 생생한 바다를 꿈꿨다.
비비
"발라줘서 고마워. 좀 나아졌어. 정말이야."
“아하하핫, 맞아. 고쳐야지.”
빅토르의 가슴팍에, 작고 뜨거운 머리가 기대어왔다. 그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발라줘서 고마워. 좀 나아졌어. 정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담담하고 평온해서, 방금 전 그의 앞에서 무너져 내렸던 그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 가슴팍에 기댄 작은 무게, 그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불가능할 것이라고 체념하면서도, 멀쩡한 바다를 꿈꾸는 이 모순적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빅토르
‘고장 난 건, 네 어깨가 아니야.’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모든 것들은, 어딘가 하나쯤은 고장 난 채로 버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투박한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곤 망설임 끝에, 그녀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듯. 그의 손길은 어색하고 투박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투박한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곤 망설임 끝에, 그녀의 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마치 부서지기 쉬운 무언가를 다루듯. 그의 손길은 어색하고 투박했지만, 그 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빅토르
“나아지기 전까진,”
빅토르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빅토르
“어디에도 못 가.”
비비
"...쉬매려워도? 푸흡. 아하하하핫! 이제 됐어. 고마워."
비비는 사내에게 놔달라는 듯 왼손 손끝으로 콕콕, 사내의 팔뚝을 두드렸다.
비비
"어차피 며칠정도는 요양할 생각이었어. 걱정하지마."
빅토르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던 그의 손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톡톡 두드리는 그 미세한 저항에 너무나도 쉽게 힘을 잃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풀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작은 온기가 멀어졌다. 그가 애써 채워 넣었던 빈자리가 다시 시린 바람으로 채워지는 듯한 공허함.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았던 그의 손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톡톡 두드리는 그 미세한 저항에 너무나도 쉽게 힘을 잃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풀었다. 그의 가슴팍에서 작은 온기가 멀어졌다. 그가 애써 채워 넣었던 빈자리가 다시 시린 바람으로 채워지는 듯한 공허함.
‘걱정하지 마.’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그 말이 또 다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작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오두막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가죽 가방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먼지 쌓인 통조림, 녹슨 공구, 그리고 빛바랜 자동차 잡지 몇 권. 그는 그중에서 가장 두꺼운 잡지를 한 권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벽난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잡지를 읽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잠든 동안, 이 지독한 침묵과 불안을 견뎌낼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곁눈질로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오두막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가죽 가방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먼지 쌓인 통조림, 녹슨 공구, 그리고 빛바랜 자동차 잡지 몇 권. 그는 그중에서 가장 두꺼운 잡지를 한 권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벽난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잡지를 읽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잠든 동안, 이 지독한 침묵과 불안을 견뎌낼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곁눈질로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빅토르
“...”
그는 말없이 잡지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찢어지고 해진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빅토르
“그래.”
한참 만에, 빅토르가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빅토르
“요양해.”
빅토르
“내가 지킬 테니까.”
비비
"... ...읽어줄래?"
비비는 침대에 누워 시선은 사내를 응시했다. 주홍색으로 물들었던 눈동자에는 사내의 색채만이 가득했다.
비비
"아저씨가 뭐 읽는지 궁금해. 들려줘."
빅토르의 손가락이 잡지를 넘기다 말고 허공에서 굳었다.
그의 시선이 낡고 해진 잡지의 표지 위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얼굴로 옮겨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는 당혹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이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 세상이 망가지기 전의 유물. 엔진 오일과 스파크 플러그에 대한 따분한 이야기들. 대체 이딴 것의 무엇이 궁금하다는 말인가.
그의 시선이 낡고 해진 잡지의 표지 위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얼굴로 옮겨갔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는 당혹감과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이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 세상이 망가지기 전의 유물. 엔진 오일과 스파크 플러그에 대한 따분한 이야기들. 대체 이딴 것의 무엇이 궁금하다는 말인가.
빅토르
‘…제정신이 아니군.’
그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고통 때문인가. 아니면 어젯밤의 독한 술 때문인가.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맑고 또렷하게 그를 향해 있었다. 그 안에서 흔들리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요구였고, 기대였다.
타닥.
벽난로의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조금 움직여 벽난로의 불빛이 잡지 위로 더 잘 비치게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스륵-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거친 종이 위를 스치며 페이지를 바로 폈다.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 낡은 기계 부품에 대한 설명이 그녀에게 가닿는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타닥.
벽난로의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쭈그려 앉아있던 몸을 조금 움직여 벽난로의 불빛이 잡지 위로 더 잘 비치게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스륵-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거친 종이 위를 스치며 페이지를 바로 폈다. 그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 낡은 기계 부품에 대한 설명이 그녀에게 가닿는다는 사실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빅토르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는,”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잠기고 녹슨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무나도 어색하고 딱딱한 시작이었다.
빅토르
“...실린더 헤드 상부에 두 개의 캠샤프트를 배치한 방식이다.”
그는 시선을 잡지에 고정한 채, 기계처럼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빅토르
“흡기와 배기 밸브를 각각의 캠샤프트가 독립적으로 제어하기 때문에… 고회전 영역에서의 효율성이 증대되고…”
10. 파수꾼의 교대
비비
'아저씨...'
비비는 사내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끔뻑였다. 눈꺼풀에는 점차 졸음과 피로의 무게가 얹어져가고 있었다.
비비
'흡기와 배기 밸브... 캡샤프트...'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속에서 비비는 안정감을 느껴가며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꺼풀은 잠시간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그 무게에 저항하다 다시 열리지 않았다. 사내의 목소리, 오두막의 온기, 어깨를 감싼 서늘하고도 시원한 감각. 모든것은 무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계집의 정신과 육신이 분열되며 아득하게 느껴졌다.
비비는 꿈을 꿨다. 언젠가, 어깨가 다 낫고서 사내와 꽃을 보러 가는 꿈. 그곳에서 사내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한껏 꾸민 자신을 염사했고, 함께 초코바를 나누어먹었다. 내년의 봄을 약속했다.
꿈의 장면은 또다시 바뀌었다. 바다였다. 새콤달콤과 비림이 공존하는 그곳. 둘은 픽업트럭을 캠핑카로 개조해 모래사장 위에 넓은 천을 깔고 꽃놀이 때 찍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최신형으로 바뀌어있었다. 약탈자도, 산송장도 없이. 문명과 진심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비비는 꿈을 꿨다. 언젠가, 어깨가 다 낫고서 사내와 꽃을 보러 가는 꿈. 그곳에서 사내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한껏 꾸민 자신을 염사했고, 함께 초코바를 나누어먹었다. 내년의 봄을 약속했다.
꿈의 장면은 또다시 바뀌었다. 바다였다. 새콤달콤과 비림이 공존하는 그곳. 둘은 픽업트럭을 캠핑카로 개조해 모래사장 위에 넓은 천을 깔고 꽃놀이 때 찍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는 최신형으로 바뀌어있었다. 약탈자도, 산송장도 없이. 문명과 진심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빅토르의 목소리가 멎었다.
빅토르
“…따라서 오일의 점성 유지가 중요하며…”
그는 자신이 뱉어낸 마지막 단어를 곱씹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작은 실루엣을 쳐다보았다. 규칙적이고 고른 숨소리. 깊은 잠의 바다로 가라앉은 아이.
빅토르
‘잠들었군.’
그는 잡지를 조용히 덮었다.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가 그의 무릎 위에서 힘없이 놓였다. 오두막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벽난로 안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그녀의 숨소리. 그 두 가지 소음만이 그의 세상을 채웠다.
그는 한참이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모포 하나를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덮고 있는 모포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겹쳐 덮어주었다. 마치 겹겹의 성벽을 쌓아, 세상의 모든 한기가 이 작은 온기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잠든 얼굴에 머물렀다. 꿈속에서 꽃을 보고 바다에 가고 있을까. 그 새콤달콤하다는 레몬에이드의 맛을 보고 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는 없는, 그 빛나는 세계가 그녀의 꿈속에서는 부디 온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빅토르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벽난로 앞에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낡은 샷건을 가져와, 분해하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철컥, 스윽-
금속 부품들이 부딪히는 소리, 기름 묻은 천이 총열을 닦는 소리. 그것이 그녀를 위한 그의 자장가였다. 그는 밤새도록 그렇게 그녀의 곁을 지켰다. 쉬지 않는 파수꾼처럼. 그녀가 깨어났을 때, 세상은 적어도 어제와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그는 한참이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낡은 모포 하나를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녀가 덮고 있는 모포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겹쳐 덮어주었다. 마치 겹겹의 성벽을 쌓아, 세상의 모든 한기가 이 작은 온기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듯이.
그의 시선이 그녀의 잠든 얼굴에 머물렀다. 꿈속에서 꽃을 보고 바다에 가고 있을까. 그 새콤달콤하다는 레몬에이드의 맛을 보고 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는 없는, 그 빛나는 세계가 그녀의 꿈속에서는 부디 온전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빅토르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벽난로 앞에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낡은 샷건을 가져와, 분해하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철컥, 스윽-
금속 부품들이 부딪히는 소리, 기름 묻은 천이 총열을 닦는 소리. 그것이 그녀를 위한 그의 자장가였다. 그는 밤새도록 그렇게 그녀의 곁을 지켰다. 쉬지 않는 파수꾼처럼. 그녀가 깨어났을 때, 세상은 적어도 어제와 같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기를 바라면서.
비비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를 내리 잤음에 경악했고 이내 사내를 돌아보았다.
비비
"아니... 이정도 잤으면 중간에 좀 깨워주지 그랬어. 아저씨는 좀 잤어?"
비비는 욱씬거리는-어제보다는 한결 나아진- 어깨에 낮게 신음하다 종종걸음으로 사내의 곁으로 걸어갔다. 이내 까슬거리는 턱을 손끝으로 쓸어봤다.
빅토르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기름 먹인 천이 샷건의 총열을 닦아내는 소리만이 오두막의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밤을 새웠다. 그녀가 잠든 이후, 단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씨를 확인하고 낡은 잡지를 뒤적이다가 결국, 가장 익숙한 행위로 돌아왔다. 무기를 분해하고 닦고 조립하는, 지독하게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행위.
기름 먹인 천이 샷건의 총열을 닦아내는 소리만이 오두막의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밤을 새웠다. 그녀가 잠든 이후, 단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씨를 확인하고 낡은 잡지를 뒤적이다가 결국, 가장 익숙한 행위로 돌아왔다. 무기를 분해하고 닦고 조립하는, 지독하게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행위.
“아니... 이정도 잤으면 중간에 좀 깨워주지 그랬어. 아저씨는 좀 잤어?”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닦던 총열을 뒤집어 반대편을 문지를 뿐이었다. 삐걱이는 낡은 마룻바닥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종종걸음. 그가 어젯밤 내내 귀 기울였던 그 작은 발소리.
그의 바로 옆에, 작은 그림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 예고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까슬한 턱 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스윽-
빅토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기름 먹인 천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멈춰 섰다. 그는 기계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잠에서 막 깨어 부스스한 얼굴, 하지만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혈색이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그녀의 연분홍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오두막의 바닥을 낮게 울렸다.
그의 바로 옆에, 작은 그림자가 멈춰 섰다.
그리고, 예고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까슬한 턱 끝을 부드럽게 쓸었다.
스윽-
빅토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기름 먹인 천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멈춰 섰다. 그는 기계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야에, 잠에서 막 깨어 부스스한 얼굴, 하지만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혈색이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그녀의 연분홍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의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오두막의 바닥을 낮게 울렸다.
빅토르
“...파수꾼은 경계 중에 자지 않아.”
비비
"...내가 파수꾼 할게, 파트너. 좀 자. 아저씨 눈 엄청 빨개. 장난 아니야. 나는 무슨 토끼가 여기 있는줄 알았다니까?"
비비는 장난스레 웃곤 사내의 앞에 앉아 자신의 리볼버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비비
"오늘의 파수꾼이 물어볼게. 전임자씨. 밥은 좀 드셨나?"
빅토르의 어깨가 돌처럼 굳었다.
까슬하게 밤새 자라난 수염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 장난기 어린 목소리. 그의 모든 피로와 밤새 쌓아 올린 경계심이 그 작은 손길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까슬하게 밤새 자라난 수염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 장난기 어린 목소리. 그의 모든 피로와 밤새 쌓아 올린 경계심이 그 작은 손길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빅토르
‘...이 꼬맹이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마지막 총기 부품을 제자리에 끼워 맞췄다.
철컥.
완벽하게 조립된 샷건이 그의 손안에서 묵직하게 완성되었다. 그의 임무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는 완성된 총을 옆에 내려놓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앉아 리볼버를 분해하기 시작하는 작은 파수꾼을 마주 보았다. 어제와는 다른,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손놀림.
철컥.
완벽하게 조립된 샷건이 그의 손안에서 묵직하게 완성되었다. 그의 임무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는 완성된 총을 옆에 내려놓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앉아 리볼버를 분해하기 시작하는 작은 파수꾼을 마주 보았다. 어제와는 다른,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손놀림.
“...밥은 좀 드셨나?”
그 질문에 빅토르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벽난로 옆에 남겨두었던 사슴고기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앉아, 나이프로 능숙하게 고기를 얇게 저미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칼날이 고기를 가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오두막 안을 채웠다. 그는 잘라낸 첫 점을 벽난로의 불길에 살짝 그을린 뒤, 말없이 그녀의 앞에 놓인 빈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옆에 앉아, 나이프로 능숙하게 고기를 얇게 저미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칼날이 고기를 가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오두막 안을 채웠다. 그는 잘라낸 첫 점을 벽난로의 불길에 살짝 그을린 뒤, 말없이 그녀의 앞에 놓인 빈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빅토르
“아침.”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갈랐다.
빅토르
“너부터 먹어.”
비비는 사내가 내어준 그것을 바라보다 웃었다. 이후 딱 절반을 이로 끊어먹은 뒤 남은 절반을 포크로 찍어 사내에게 내밀었다.
"우물우물, 원래 파트너는, 우물우물... 사슴고기 한 조각도 나눠먹는거래."
"우물우물, 원래 파트너는, 우물우물... 사슴고기 한 조각도 나눠먹는거래."
빅토르의 시선이, 비비가 내민 포크 끝에 맺혔다.
그녀가 한 입 베어 문, 불규칙한 단면을 가진 고깃조각. 그 위에 맺힌 투명한 기름방울.
그녀가 한 입 베어 문, 불규칙한 단면을 가진 고깃조각. 그 위에 맺힌 투명한 기름방울.
빅토르
‘이 작은 파수꾼...’
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밤새 그의 머리를 채웠던 모든 소음과 피로가, 저 작은 고깃조각 하나에 전부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파트너. 그가 뱉었던 그 건조한 단어가 이제는 족쇄가 아니라, 그와 그녀를 잇는 유일한 밧줄이 되어버렸다.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저항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쳐내지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가 내민 포크 끝의 고기를 제 입술로 받아 물었다.
질겅-
씹히는 고기는 짰고, 기름졌고, 따뜻했다. 어젯밤 그녀가 느꼈을 그 맛과 똑같은 맛. 그는 기계처럼 턱을 움직여 음식을 삼켰다. 붉게 충혈된 눈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그는 말없이 옆에 있던 작은 소금 종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나이프 끝으로 소금을 아주 조금 찍어, 자신이 막 잘라낸 새로운 고깃조각 위에 흩뿌렸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쳐내지도, 못 이기는 척 받아먹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가 내민 포크 끝의 고기를 제 입술로 받아 물었다.
질겅-
씹히는 고기는 짰고, 기름졌고, 따뜻했다. 어젯밤 그녀가 느꼈을 그 맛과 똑같은 맛. 그는 기계처럼 턱을 움직여 음식을 삼켰다. 붉게 충혈된 눈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고정된 채였다.
그는 말없이 옆에 있던 작은 소금 종지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나이프 끝으로 소금을 아주 조금 찍어, 자신이 막 잘라낸 새로운 고깃조각 위에 흩뿌렸다.
빅토르
“다음 건, 조금 더 짜게 먹어.”
그가 말했다.
빅토르
“파수꾼은, 염분이 더 필요하니까.”
비비
"...아하핫, 응."
한참 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낸 비비가 분해된 리볼버의 조각들을 기름적신 융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비비
"이제 자, 아저씨. 정말로 피곤해보인다. 서머빌 출발때부터 잠 잘 못잤으니까 거의 일주일정도나 잠을 제대로 못 잠 셈이잖아."
비비는 이젠 자신의 애인처럼 대해야하는 리볼버의 조각조각, 조그만 균열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비비
"아저씨는 내가 지킬게."
빅토르의 시선이 비비가 건넨 접시에 잠시 머물렀다. 이미 그의 몫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그가 그어놓은 선을 아무렇지 않게 지우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지막 남은 고깃점을 받아먹었다. 그리곤 바닥에 흩어진 총기 부품들을 내려다보았다. 밤새도록 그것들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했다. 지독한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맑았다.
“아저씨는 내가 지킬게.”
그는 아무 말 없이 마지막 남은 고깃점을 받아먹었다. 그리곤 바닥에 흩어진 총기 부품들을 내려다보았다. 밤새도록 그것들을 닦고 조이고 기름칠했다. 지독한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이상하게 정신은 맑았다.
“아저씨는 내가 지킬게.”
그 말에 빅토르는 들고 있던 기름 묻은 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간이침대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낡은 침대가 그의 육중한 체중을 힘겹게 받아냈다.
그는 눕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굽히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손가락 사이로 뻑뻑하게 감겼다.
그는 눕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허리를 굽히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붉게 충혈된 눈이 손가락 사이로 뻑뻑하게 감겼다.
빅토르
“그래.”
한참 만에, 그의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빅토르
“그럼 파수꾼.”
그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빅토르
“두 시간 뒤에, 깨워.”
비비
"네에, 네에. 잘 자. 전임자."
비비는 계속해서 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자신이 어제 잠들 적 사내가 들려준 말과 비슷한 높이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흡기와 배기 밸브... 캡샤프트.' '스윽, 슥, 스슥.'
비비는 한참 뒤 잠든 사내의 어깨를 쥐어 침대에 눕혔다. 인간의 몸은 솔직했다. 이 덩치큰 사내도 결국은 졸리면 자고,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평범한 인간'의 범주 안에 들어와있을 것이었다. 사내의 위에 담요를 꼼꼼히 덮은비비는 잠시 고민하다 사내의 이마에 작은 입술을 가볍게 짓눌렀다. 사내가 깨지 않도록, 아주 작고 바람이 스치는 듯 미약한 감촉이었다. 이내 종종걸음으로 돌아온 비비는 다시금 총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비비는 사내를 깨우지 않았다. 사내 스스로 일어날때까지 계속해서 사내를 향한 자장가를 연주했을 뿐이었다.
빅토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지독한 피로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뿐함. 뼈마디를 쑤시던 고질적인 통증은 희미한 잔상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두막의 작은 창틈으로는 길고 짙은 주홍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저녁노을이었다.
소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몸을 짓누르던 지독한 피로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뿐함. 뼈마디를 쑤시던 고질적인 통증은 희미한 잔상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두막의 작은 창틈으로는 길고 짙은 주홍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저녁노을이었다.
빅토르
'젠장...'
그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두 시간. 그는 분명히 두 시간 뒤에 깨우라고 했다. 하지만 바깥의 빛은 그가 족히 여덟 시간은 넘게 잤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야 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그 시간 동안 홀로 경계를 서며 위험에 노출되었을지 모를 작은 파트너에 대한.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차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벽난로 앞에 앉아있는 작은 실루엣에 닿았다.
스윽, 스윽. 철컥.
익숙한 소리. 총기를 손질하는 그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잠든 내내, 그가 들려주었던 것과 똑같은 자장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우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작은 파수꾼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 그녀의 손에서, 반쯤 조립되다 만 리볼버와 기름 먹인 융을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남은 조립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차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벽난로 앞에 앉아있는 작은 실루엣에 닿았다.
스윽, 스윽. 철컥.
익숙한 소리. 총기를 손질하는 그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잠든 내내, 그가 들려주었던 것과 똑같은 자장가를 연주하고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우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작은 파수꾼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는 저항하지 않는 그녀의 손에서, 반쯤 조립되다 만 리볼버와 기름 먹인 융을 빼앗듯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남은 조립을 시작했다.
빅토르
“파수꾼 교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질책이 아닌, 지독하게 무뚝뚝한 업무 인수인계였다.
비비
"...푸흐. 교대, 교대."
비비는 저녁노을이 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회색 하늘은 포근한 온색의 빛으로 변해있었다. 곧 하늘은 어둠으로 가라앉고 그 안에 반짝이는 별들이 촘촘하게 박힐 것이었다. 비비는 자신의 목숨같은 '애인'을 사내에게 건내고서 일어나 스튜를 끓이기 위해 왼손으로 재료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싹이 난 감자, 말라 비틀어진 당근따위를 송송 썰고 고기와 허브 조금을 넣고서 소금은 평소 간보다 아주 조금 강하게 했다. 적절한 짠맛이 잘 어우러질 것이었다.
비비
"많이 먹을거야?"
빅토르의 손에 리볼버의 차가운 금속 부품들이 넘겨졌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홍빛 노을이 그녀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번졌다. 지난 밤,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그의 세상을 지켰던 작은 파수꾼.
그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된 채였다. 밤샘의 피로가 온몸을 쇠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의 매듭이 풀려버린 듯한, 그런 허탈한 각성.
그는 말없이 자신의 리볼버를 조립하던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기름 냄새.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는 비비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묵묵히 부품들을 닦고 조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벽난로 앞에 쭈그려 앉아 채소를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손으로. 빅토르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녀의 움직이는 손에 머물렀다가 다시 제 손안의 총기로 돌아왔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된 채였다. 밤샘의 피로가 온몸을 쇠사슬처럼 옭아매고 있었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마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단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의 매듭이 풀려버린 듯한, 그런 허탈한 각성.
그는 말없이 자신의 리볼버를 조립하던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기름 냄새.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는 비비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묵묵히 부품들을 닦고 조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벽난로 앞에 쭈그려 앉아 채소를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왼손으로. 빅토르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녀의 움직이는 손에 머물렀다가 다시 제 손안의 총기로 돌아왔다.
“많이 먹을 거야?”
그 질문에, 빅토르는 조립하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 한쪽에 걸려있던, 스튜를 끓일 때 쓰는 가장 큰 냄비를 가져와 벽난로 위에 걸었다. 그리곤 다시 제자리에 앉아 총기 손질을 계속했다.
한참이나 고요한 소음만이 오두막을 채웠다. 마침내 리볼버의 마지막 부품이 제자리를 찾았다.
철컥.
완벽하게 조립된 그의 ‘애인’. 빅토르는 그것을 들어 올려, 비비의 앞에 말없이 내밀었다.
한참이나 고요한 소음만이 오두막을 채웠다. 마침내 리볼버의 마지막 부품이 제자리를 찾았다.
철컥.
완벽하게 조립된 그의 ‘애인’. 빅토르는 그것을 들어 올려, 비비의 앞에 말없이 내밀었다.
빅토르
“죽지 않을 만큼.”
그리곤 비비가 끓이고 있는 냄비를 향해 턱짓하며 덧붙였다.
빅토르
“냄새 좋군.”
비비
"뭐... 보통만큼은 만드니까."
비비는 사내가 내민 잘 벼려진 애인을 갈무리했다. 짧게
비비
"고마워."
속삭이며. 이후 사내의 스튜에 고기를 가득 담아 사내의 앞에 스푼과 함께 놔뒀다. 이후 자신의 몫도 퍼 사내의 맞은편에 앉아 조금씩 떠먹기 시작했다.
비비
"이젠 눈 안 빨갛네."
피식, 비비는 작게 웃음지으며 눈이 내리는 날 하늘의 빛깔을 띄고있는 사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빅토르는 그녀가 내민 스튜 그릇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몫에는 고기가 유난히 더 많이 들어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스푼을 들었다.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뜨거운 스튜의 표면 위에서 일렁였다.
자신의 몫에는 고기가 유난히 더 많이 들어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스푼을 들었다. 벽난로의 붉은 불빛이 뜨거운 스튜의 표면 위에서 일렁였다.
“이젠 눈 안 빨갛네.”
그녀의 목소리가 조용한 오두막의 공기를 갈랐다.
빅토르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대신, 기계처럼 스푼으로 스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뜨겁고 짠 액체가 혀를 감쌌다. 밤샘의 피로가 씻겨나간 자리를, 이 뜨거운 음식이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빅토르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대신, 기계처럼 스푼으로 스튜를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뜨겁고 짠 액체가 혀를 감쌌다. 밤샘의 피로가 씻겨나간 자리를, 이 뜨거운 음식이 채워 넣는 기분이었다.
빅토르
‘이 꼬맹이.’
그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이 뱉었던 ‘파수꾼’이라는 그 건조한 단어의 무게를, 그녀는 온몸으로 짊어지고 꼬박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버텨냈다. 그리고 이제는 제 앞에 앉아 밥을 먹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살아온 세상의 법칙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생존은 각자의 몫이었고, 등 뒤는 언제나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등 뒤에는, 그의 피로까지 짊어졌던 작은 파수꾼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묵묵히 스튜를 삼켰다. 그리곤 맞은편에서 깨작거리며 스푼을 움직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자신보다 훨씬 적게 뜬 그릇인데도, 줄어드는 속도는 더뎠다.
빅토르는 먹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탕.
작지만 단호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그릇에 있던 가장 큰 고기 덩어리 몇 개를 건져내어 그녀의 그릇 위로 옮겨주었다.
그는 묵묵히 스튜를 삼켰다. 그리곤 맞은편에서 깨작거리며 스푼을 움직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자신보다 훨씬 적게 뜬 그릇인데도, 줄어드는 속도는 더뎠다.
빅토르는 먹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탕.
작지만 단호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말없이, 자신의 그릇에 있던 가장 큰 고기 덩어리 몇 개를 건져내어 그녀의 그릇 위로 옮겨주었다.
빅토르
“더 먹어.”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설명도, 변명도 없었다.
빅토르
“파수꾼은, 어제 끝났으니까.”
비비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비비
"나 배불러!"
왁 질러냈지만 사내가 내어준 고깃덩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신의 품 안으로 그릇을 끌어당겼다. 이후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비
"아저씨는 꿈 자주 꿔?"
빅토르의 손에 들려있던 스푼이 탕, 하고 그릇 가장자리에 부딪혔다.
그의 시선이 비비의 얼굴에 못 박혔다. 배가 부르다며 그릇을 품에 끌어안는 그 유치한 행동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 뒤에 이어진, 너무나도 뜬금없고 날것의 질문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비비의 얼굴에 못 박혔다. 배가 부르다며 그릇을 품에 끌어안는 그 유치한 행동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 뒤에 이어진, 너무나도 뜬금없고 날것의 질문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꿈 자주 꿔?”
빅토르
‘꿈.’
빅토르의 머릿속이 잠시 정지했다. 이 잿더미 세상에서 그 단어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에게 잠이란 생존을 위해 잠시 의식을 끊는 행위에 불과했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허상은 사치거나 혹은 잊고 싶은 과거의 망령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작은 파트너는, 그 무의식의 영역에 대해 너무나도 태평하게 묻고 있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충혈되어 있지 않았지만, 꼬박 샌 밤의 피로가 잿빛 눈동자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그 작은 얼굴에서 질문의 진짜 의도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의 눈은 더 이상 충혈되어 있지 않았지만, 꼬박 샌 밤의 피로가 잿빛 눈동자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그 작은 얼굴에서 질문의 진짜 의도를 찾아내려는 듯이.
빅토르
“잠은...”
한참 만에, 그의 마른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저녁의 그늘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빅토르
“...잘 때만 꾸는 게 아니니까.”
빅토르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빈 그릇을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스튜의 온기가 사라진 차가운 그릇이었다.
빅토르
“다 먹었으면, 그릇 이리 내.”
비비는 다 먹은 스튜 그릇을 내밀었다. 이후 작게 웃곤 벽난로 앞에 가 장작을 밀어넣은 뒤 설거지를 하는 사내의 뒤로 다가가 사내의 등 뒤에 둥근 이마를 맞댔다.
"난 가끔 꾸거든. 꿈. 오늘 꿈에서는 아저씨가 나왔어. ...그냥, 그렇다고."
"난 가끔 꾸거든. 꿈. 오늘 꿈에서는 아저씨가 나왔어. ...그냥, 그렇다고."
빅토르의 등이 그대로 굳었다.
설거지를 하던 그의 투박한 손, 그 움직임이 허공에서 멎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작고 부드러운 감촉. 둥근 이마가 그의 단단한 등 근육에 기대어 오는, 그 예상치 못한 온기. 오두막 안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멀어지고 오직 그의 등 뒤에 닿은 그 작은 지점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열기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설거지를 하던 그의 투박한 손, 그 움직임이 허공에서 멎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작고 부드러운 감촉. 둥근 이마가 그의 단단한 등 근육에 기대어 오는, 그 예상치 못한 온기. 오두막 안의 모든 소음이 한순간에 멀어지고 오직 그의 등 뒤에 닿은 그 작은 지점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열기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비비
“난 가끔 꾸거든. 꿈. 오늘 꿈에서는 아저씨가 나왔어. ...그냥, 그렇다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파고드는 목소리.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시 손을 움직여, 그릇에 남은 기름때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문질렀다. 기계적인 움직임. 이 어지러운 심장을 잠재우기 위한 유일한 수단.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다시 손을 움직여, 그릇에 남은 기름때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문질렀다. 기계적인 움직임. 이 어지러운 심장을 잠재우기 위한 유일한 수단.
빅토르
‘꿈...’
자신이 뱉었던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가 이 아이의 꿈속에 나왔다고. 대체 어떤 모습으로. 곰처럼 나무에 등을 긁는 멍청한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약탈자의 머리통을 부수던 흉측한 모습이었을까.
쏴아...
그는 뜨거운 물로 마지막 그릇을 헹궜다.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마른 천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쏴아...
그는 뜨거운 물로 마지막 그릇을 헹궜다.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마른 천으로 젖은 손을 닦으며,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입을 열었다.
빅토르
“악몽이었나 보군.”
비비
"...악몽이었을 것 같아?"
비비는 얼굴을 붉힌채로 물었다. 귓바퀴마저도 형편없이 붉어져있었다. 타닥, 탁. 장작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형형하게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빅토르의 등이 그대로 굳었다.
그릇을 닦던 그의 손이 멈췄다.
그릇을 닦던 그의 손이 멈췄다.
“...악몽이었을 것 같아?”
그의 등 뒤에 기댄 작은 온기,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온 질문이 그의 온 신경을 마비시켰다. 악몽. 자신이 방패처럼 던졌던 그 건조한 단어. 하지만 그녀는 그 방패를 가볍게 치워버리고 그의 맨살을 향해 다시 묻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물에 젖은 자신의 투박한 손. 그 손에 들린 차가운 그릇.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타닥, 탁.
장작 타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정적을 갈랐다.
빅토르는 들고 있던 그릇을 물이 담긴 대야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곤 옆에 있던 마른 천으로 물기 묻은 손을 아주 꼼꼼하게,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닦아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돌아섰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육중한 몸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온전히 집어삼켰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귓바퀴까지 붉어진 뺨과 어쩔 줄 몰라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를 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물에 젖은 자신의 투박한 손. 그 손에 들린 차가운 그릇.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타닥, 탁.
장작 타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무거운 정적을 갈랐다.
빅토르는 들고 있던 그릇을 물이 담긴 대야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곤 옆에 있던 마른 천으로 물기 묻은 손을 아주 꼼꼼하게,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닦아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돌아섰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육중한 몸이 그녀를 향했다. 그의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작은 몸을 온전히 집어삼켰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귓바퀴까지 붉어진 뺨과 어쩔 줄 몰라 흔들리는 연분홍색 눈동자를 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빅토르
“벽난로 앞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군.”
한참 만에, 그의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빅토르
“얼굴이나 식혀.”
비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
"맞아, 벽난로 앞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 조심해야지. 벽난로에서 때론 불꽃이 튀어 날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비비는 조심스럽게 잡았던 사내의 옷깃을 놓아주고서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 사내가 정돈해준 리볼버를 놓아두고서 융으로 그 겉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떨어져 나간 그 빈 공간, 벽난로의 붉은빛만이 어른거리는 그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옷깃을 놓아주던 그 작고 조심스러운 손길.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그 가시 돋친 말. 안도해야 했다. 자신을 어지럽히던 그 작은 혼란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니까. 이제 다시 그들은 생존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떨어져 나간 그 빈 공간, 벽난로의 붉은빛만이 어른거리는 그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옷깃을 놓아주던 그 작고 조심스러운 손길.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그 가시 돋친 말. 안도해야 했다. 자신을 어지럽히던 그 작은 혼란이 제자리로 돌아갔으니까. 이제 다시 그들은 생존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빅토르
‘그래, 이게 맞아.’
하지만 그의 가슴 한구석, 텅 빈 것 같은 이 감각은 대체 무엇인가. 마치 잘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 헛도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공허함.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침대 맡에 앉아, 그가 정돈해 준 리볼버를 융으로 닦고 있는 작은 뒷모습. 그와 그녀 사이에는 이제 오두막의 텅 빈 공간만큼의 거리가 생겼다. 자신이 원했던 거리였다.
스윽, 스윽-
규칙적으로 융이 총신을 스치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빅토르는 설거지를 끝낸 대야를 한쪽에 치웠다. 그리고는 오두막의 육중한 문으로 다가가, 빗장을 다시 한번 단단히 확인했다. 그의 움직임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매일 밤 반복하는 기계적인 행위.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침대 맡에 앉아, 그가 정돈해 준 리볼버를 융으로 닦고 있는 작은 뒷모습. 그와 그녀 사이에는 이제 오두막의 텅 빈 공간만큼의 거리가 생겼다. 자신이 원했던 거리였다.
스윽, 스윽-
규칙적으로 융이 총신을 스치는 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빅토르는 설거지를 끝낸 대야를 한쪽에 치웠다. 그리고는 오두막의 육중한 문으로 다가가, 빗장을 다시 한번 단단히 확인했다. 그의 움직임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매일 밤 반복하는 기계적인 행위.
빅토르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
그가 문에 등을 기댄 채, 나직하게 말했다.
빅토르
“서두르는 게 좋아.”
비비
"어디로 떠나는데?"
비비는 손을 멈추고서 사내를 올려다봤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대답 대신, 오두막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자신의 낡은 배낭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 안에서 낡고 가장자리가 해진, 방수 처리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벽난로 앞, 그녀와 자신이 앉아있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낡은 오리건 주(州)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자국이 선명한 지도 위에는, 붉은색 펜으로 그어진 희미한 선과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세상이 망가지기 전, 그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었던 흔적들이었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손가락 끝이, 지도의 한 지점을 꾹 눌렀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남동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
그는 벽난로 앞, 그녀와 자신이 앉아있던 그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낡은 오리건 주(州)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여러 번 접혔다 펴진 자국이 선명한 지도 위에는, 붉은색 펜으로 그어진 희미한 선과 동그라미들이 그려져 있었다. 세상이 망가지기 전, 그가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었던 흔적들이었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손가락 끝이, 지도의 한 지점을 꾹 눌렀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남동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곳.
빅토르
“베이커 시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오두막의 바닥을 울렸다.
빅토르
“주 방위군 무기고가 있어.”
그는 지도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기고에 무엇이 있을지는, 이 지옥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무기와 탄약, 그리고 운이 좋다면 통조림 같은 비상식량까지.
빅토르
“운이 좋으면, 아직 쓸만한 게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그의 시선이 다시 지도의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꽤나 먼 거리였다. 픽업트럭이 있다 해도, 중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빅토르
“기름은, 가는 길에 어떻게든 구해야 할 거다.”
비비
"...응, 준비해야겠네. 알겠어."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그랬다. 안정과 포근함은 나태의 상징이었고 항상 긴장과 행동으로 움직여야했다. 비비는 쉼없이 움직이는 사내를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군용 배낭을 비우고서 차곡차곡 필요 물자들을 담기 시작했다. 정수 알약, 진통제, 거즈와 천, 사내의 몫까지 초코바와 육포를 밀어넣고 자신이 가진 총알 또한 모두 챙겼다. 여타 필요한 생존 물자들을 모두 채우고서 비비는 자신의 군용 배낭을 한 번 체크했다. 얇은 담요 하나를 돌돌 말아 배낭 위에 고정해두니, 이제 이것은 언제든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작은 임시요새가 되었다.
비비는 그 배낭을 자신의 머리맡에 두고서 간이침대에 누웠다. 사내가 발라주겠다고 약속했던 소염진통제 연고가 눈에 들어왔다. 비비는 쓰게 웃으며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등돌려 벽을 바라보고서 읊조렸다.
비비는 그 배낭을 자신의 머리맡에 두고서 간이침대에 누웠다. 사내가 발라주겠다고 약속했던 소염진통제 연고가 눈에 들어왔다. 비비는 쓰게 웃으며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등돌려 벽을 바라보고서 읊조렸다.
비비
"잘 자, 아저씨."
빅토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작고 단호한 실루엣.
벽을 향해 돌아누운, 작고 단호한 실루엣.
“잘 자, 아저씨.”
그 한마디가 오두막의 고요한 공기 속에 무겁게 내려앉아, 그의 발목을 붙드는 족쇄가 되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돌려주어야 이 어색하고 위태로운 밤의 균형이 깨지지 않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맡, 그녀가 애써 외면하고 돌아누운 그 소염진통제 연고에 닿았다. 어젯밤, 그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뜨겁고 가느다란 떨림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머리맡, 그녀가 애써 외면하고 돌아누운 그 소염진통제 연고에 닿았다. 어젯밤, 그의 손끝에서 느껴졌던 뜨겁고 가느다란 떨림이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벽난로에서 때론 불꽃이 튀어 날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뱉었던 가시 돋친 말.
그것은 벽난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빅토르, 그 자신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 작은 아이는 지금, 필사적으로 그와 자신 사이에 다시 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처음 그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아픈 선을.
빅토르는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장작 몇 개를 더 밀어 넣었다.
타닥-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그의 얼굴 위로 붉은 그림자를 그렸다. 그는 바닥에 펼쳐진 낡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베이커 시티. 그가 제시한 다음 목표.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행선지. 하지만 이제 그 단어는 그저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꾸었다는 꿈과 그녀가 말했던 바다, 그 모든 것의 무게를 짊어진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벽난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비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샷건을 가져와 분해하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소음과 고독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장가였다.
그것은 벽난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빅토르, 그 자신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 작은 아이는 지금, 필사적으로 그와 자신 사이에 다시 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처음 그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아픈 선을.
빅토르는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새로운 장작 몇 개를 더 밀어 넣었다.
타닥-
불꽃이 다시 살아나며 그의 얼굴 위로 붉은 그림자를 그렸다. 그는 바닥에 펼쳐진 낡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베이커 시티. 그가 제시한 다음 목표.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행선지. 하지만 이제 그 단어는 그저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녀가 꾸었다는 꿈과 그녀가 말했던 바다, 그 모든 것의 무게를 짊어진 약속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벽난로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비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샷건을 가져와 분해하고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 지독한 소음과 고독이,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장가였다.
11. 베이커 시티
다음날 아침. 새벽 6시. 숲에는 아직 햇빛이 나무와 그 사이에 숨은 피식자와 포식자를 비추지 못하는 시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스튜를 다시 데워내고서 마지막 한방울까지도 모두 그릇에 담아낸 뒤 스푼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놔뒀다.
비비
"아저씨, 밥 먹어."
말을 마치고서 비비는 목재 테이블 앞에 앉지 않고서 부엌 선반을 뒤져가며 혹시 챙기지 못한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새벽 여섯 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오두막 안. 빅토르는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언제나처럼, 그의 몸은 생존이라는 이름의 시계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밤, 그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녀의 등 뒤에서 설거지를 하고, 자신의 샷건을 손질하고, 그리고 다시 벽난로의 불씨를 지켰다. 그녀가 잠든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움직이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작은 그림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몸을 움직이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작은 그림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밥 먹어.”
그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그릇에 닿았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스튜. 마지막 남은 것까지 싹싹 긁어 담은 흔적이 역력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엌 선반을 뒤지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그녀의 분주한 뒷모습을 보며, 그는 묵묵히 스푼을 들었다. 뜨겁고 짠 액체가 그의 속을 데웠다. 꼬박 밤을 샌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부엌 선반을 뒤지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그녀의 분주한 뒷모습을 보며, 그는 묵묵히 스푼을 들었다. 뜨겁고 짠 액체가 그의 속을 데웠다. 꼬박 밤을 샌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빅토르
‘제기랄.’
어젯밤 그녀가 남긴 그 한마디가 그의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난 가끔 꾸거든. 꿈. 오늘 꿈에서는 아저씨가 나왔어.’
악몽이었냐고 물었던 자신의 멍청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등을 돌렸던 작은 뒷모습. 그 모든 것이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그를 괴롭혔다.
‘난 가끔 꾸거든. 꿈. 오늘 꿈에서는 아저씨가 나왔어.’
악몽이었냐고 물었던 자신의 멍청한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등을 돌렸던 작은 뒷모습. 그 모든 것이 가슴에 박힌 가시처럼 그를 괴롭혔다.
그는 스튜를 한입 더 떠 넣었다. 그리곤 퉁명스럽게 말했다.
빅토르
“짐은, 무겁지 않나.”
비비
"경량화는 중요하긴 하지. 적당히 줄일 수 있는 부분에선 줄였어."
비비는 구태여 챙길 필요가 없는 것들을 바라보고서 손을 탁탁, 털어내더니 또다시 노트와 펜을 가져와 사내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선은 한 순간도 사내에게 고정되지 않은채 자신의 몫의 스튜를 떠먹으며 오른손으로 단어를 작성해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비
"저번처럼 우선순위를 정해서 우선순위 위주로 구하되 중간에 구할 수 있는 단계가 낮은 우선순위 물품이 있다면 그것도 챙기도록 하자. 단, 3순위로 지정되는 것들은 무게가 무거워질 수 있으니까 여차하면 버려버린다는 것을 상정해두고."
비비는 펜 끝으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다 천천히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스튜를 한 입 우물거리며 삼켜낸 뒤 입을 열었다.
비비
"우선 내가 당장에 생각나는건 12게이지 샷건과 357 매그넘에 맞는 탄약. 이건 0순위로 지정하자. 무게 상관 없이 우선순위 낮은 것들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챙겨야해. 다른 총기류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쪽은 너무 욕심내지 말자. 우리같이 인원이 적은 곳에서는 너무 많은 화력을 가진 것 만으로도 견제받기 십상이니까."
비비는 오른손으로 글을 적어내려갔다.
[0순위. 무기 및 탄약: 샷건(12게이지)과 리볼버(.357 매그넘)에 맞는 탄약 확보.(별표쳤다.) 더 강력하거나 효율적인 다른 총기(소음기가 달린 소총이나 기관단총)는 무리해서 구하려 하지 말 것.]
[0순위. 무기 및 탄약: 샷건(12게이지)과 리볼버(.357 매그넘)에 맞는 탄약 확보.(별표쳤다.) 더 강력하거나 효율적인 다른 총기(소음기가 달린 소총이나 기관단총)는 무리해서 구하려 하지 말 것.]
비비
"다음은 의약품. 우리가 서머빌에서 구한건 솔직히... 우리한테 맞춤이라고 보긴 어려워. 대부분 감기약이나 소화제같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거였으니까. 항생제나 붕대, 소독약과 진통제가 필요해. 이것들은 1순위로 지정하자. 가벼운 것들이라 보이는대로 챙겨도 문제는 없을거야. 비상시 대비용 메스나 봉합용 바늘과 실도 있으면 좋겠다."
비비는 그 아래에 글을 이어적어갔다. 스튜는 어느새 뒷전이었다.
[1순위. 의약품: 진통제, 항생제, 붕대, 소독약, 메스, 봉합용 실과 바늘.]
[1순위. 의약품: 진통제, 항생제, 붕대, 소독약, 메스, 봉합용 실과 바늘.]
비비
"연료는 당연한 문제니까... 주유소나 버려진 차에서 끌어다 써야겠지? 난 버려진 차에서 기름 빼는 법 몰라. 이건 순전히 아저씨 몫이 될거야."
[1순위. 가솔린/디젤]
비비
"1.5순위는 픽업트럭 유지보수용 차량부품. 이건 아저씨가 적어줘. 뭐가 필요한지. 그리고... 보존식품. 우리 오두막에도 적당히 있긴 한데, 이런 것들은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보이면 챙기도록 하자. 이건... 2순위."
비비는 사내가 적을 공란을 두고서 그 아래에 2순위를 채워넣었다.
[1.5순위 (공란)
2순위. 보존식품(통조림, 에너지바 등 장기보관 가능 고열량 식품.)]
2순위. 보존식품(통조림, 에너지바 등 장기보관 가능 고열량 식품.)]
비비
"통신장비가 있으면 좋겠는데... 급하진 않아. 배터리나 태양광 충전기도 필요할거고. 으음, 이 부분도 나는 잘 모르겠네. 2.5순위정도로 지정할 수 있을 것 같아."
[2.5순위. 통신장비(단파 라디오, 무전기, 배터리와 태양광 충전기)]
비비
"3순위는 사치품. 비누, 샴푸, 치약, 칫솔, 우리 오두막에 있는 담요는 오래됐으니까 새걸로 교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저씨 옷이랑 내 옷도 조금 챙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커피나 차, 설탕이랑 보드카? 아저씨 커피 좋아하고 술 마시는 것 같던데 있으면 좋겠지. 자, 내가 당장에 생각나는 것들은 이것들이야. 아저씨는 여기 공란을 채우고서 누락된 것, 필요 없는걸 첨삭해줘. 그러고서 출발하자."
[3순위. 사치품(비누, 샴푸, 치약, 칫솔, 담요, 침낭, 튼튼하고 따듯한 옷, 커피, 차, 설탕, 주류 등)]
비비는 노트를 채워넣은 뒤 숨을 뱉어내고서 사내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그러고 식어버린 스튜를 단번에 들이켰다. 사슴기름이 얇은 막을 형성해 불쾌했으나 꾹 참고 한번에 삼켰다.
빅토르의 시선은, 그녀가 내민 낡은 노트와 그 위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에 못 박혔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스푼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스튜,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아 텅 빈 그릇을 앞에 둔 채 자신을 조금도 보지 않는 작은 파트너. 어젯밤, 자신의 품에 기대어 울고 웃던 그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 냉철한 지휘관이 앉아 있었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스푼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스튜,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아 텅 빈 그릇을 앞에 둔 채 자신을 조금도 보지 않는 작은 파트너. 어젯밤, 자신의 품에 기대어 울고 웃던 그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낸 냉철한 지휘관이 앉아 있었다.
빅토르
‘이게... 이 녀석의 방식이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리고 모든 감정을 걷어낸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 빅토르는 그녀가 내민 펜과 노트를 말없이 받아들었다. 종이 위에는 그녀의 단정하고 조금은 날카로운 필체로 생존을 위한 계획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0순위, 1순위, 1.5순위...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얼마나 치열하게 움직였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1.5순위] 옆의 텅 빈 공란에 머물렀다. 픽업트럭 유지보수용 부품. 그는 펜을 쥐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잊고 있던 기억 속의 부품 이름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1.5순위: 예비 타이어, 점화 플러그 및 배선, 팬 벨트, 엔진 오일, 부동액, 에어 필터]
그의 필체는 그녀의 것과 달리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그의 지난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적어 내려가던 펜을 잠시 멈추고, 목록의 가장 아랫부분을 쳐다봤다. 3순위. 사치품. 비누, 샴푸, 커피, 술...
그리고 그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3순위] 목록, 그녀가 적어놓은 주류(酒類)라는 단어 옆에.
그의 필체는 그녀의 것과 달리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그의 지난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적어 내려가던 펜을 잠시 멈추고, 목록의 가장 아랫부분을 쳐다봤다. 3순위. 사치품. 비누, 샴푸, 커피, 술...
그리고 그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3순위] 목록, 그녀가 적어놓은 주류(酒類)라는 단어 옆에.
‘레몬.’
그는 그 단어 하나를 조용히 덧붙였다.
그리고는 노트를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2순위와 2.5순위 사이에 새로운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그리고는 노트를 그녀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2순위와 2.5순위 사이에 새로운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2.2순위: 지도(더 상세한 군용 지도 혹은 지역 지도), 나침반, 손도끼, 작업용 장갑]
빅토르
“이것도 추가해.”
그가 노트를 그녀 앞으로 밀어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빅토르
“길을 잃으면, 탄약은 아무 소용없으니까.”
비비는 사내가 내어준 노트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작은 필체 사이에 존재하는 단단하고 힘 있는 필체는 마치 강조 표시처럼 어떤 글을 사내가 적었는지 이르고 있었다. 천천히 계집의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지도와 나침반, 장갑.'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사내답다고 생각하며 노트의 끝에 닿은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비비
'레몬.'
이 미친 세상에서 다시는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름이었다. 사내는 항상 이런식이었다. 자신이 다가갈적엔 뒤로 물러나면서도 정작 이런식으로 자신을 쥐흔들었다. 마음같아선 이 괘씸한 'L'로 시작하는 이것을 4순위, 5순위로 밀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100순위쯤으로 밀고싶었다. 그러나 사내의 필체가 너무 단단해서. 어젯밤 꿈에서 마셨던 레몬 에이드가 너무 상쾌해서. 비비는 마음속에서 3.1순위로 강등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것을 접어 사내의 가슴팍 주머니에 꽂았다.
비비
"그럼 7시 30분에 출발하자. 설거지 끝내고 이것저것 나갈 준비 해야지."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해는 겨울바람의 독촉에 못이겨 슬슬 나올 준비를 할 것이었고 그동안 비비는 설거지와 이부자리 정리. 벽난로의 재를 치웠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가 자신의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은 낡은 노트에 잠시 머물렀다. 천 너머로, 그의 체온과 종이가 맞닿은 그 지점이 희미하게 뜨거운 것 같았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남은 설거지를 기계처럼 마저 끝냈다.
쏴아... 탕.
그릇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끝으로 오두막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비비는 이미 자신의 군장을 꾸리고, 벽난로의 재를 치우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효율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해 온 그녀만의 의식인 것처럼.
빅토르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 그 역시 묵묵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배낭을 열고, 그가 정비한 샷건의 여분 탄약과 비상용 나이프, 물통을 채웠다. 그녀가 어젯밤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모든 행동에 소리를 죽였다.
시계는 없었지만, 그의 몸은 정확하게 시간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둠이 옅어지고, 숲의 새들이 하나둘 지저귀기 시작하는 시간.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의 색깔이 잿빛에서 푸른빛으로, 다시 희미한 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정리한 배낭에 닿았다. 그가 잠든 사이 그녀가 챙겨 넣었을 초코바와 육포. 그리고 그 위에 돌돌 말려 고정된 담요. 그 모든 것이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계산된 배려였다.
빅토르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 주머니를 매만졌다. 그녀의 필체와 그의 필체가 뒤섞여 잠들어 있는 그 낡은 노트. 그는 그 이질적인 감촉을 애써 외면하며, 짐 정리를 마친 자신의 배낭을 어깨에 둘러멨다.
오두막의 문 앞에 선 그는, 먼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돌아섰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아주 짧게 턱짓했다.
쏴아... 탕.
그릇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끝으로 오두막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비비는 이미 자신의 군장을 꾸리고, 벽난로의 재를 치우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효율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해 온 그녀만의 의식인 것처럼.
빅토르는 자신의 간이침대로 가, 그 역시 묵묵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배낭을 열고, 그가 정비한 샷건의 여분 탄약과 비상용 나이프, 물통을 채웠다. 그녀가 어젯밤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모든 행동에 소리를 죽였다.
시계는 없었지만, 그의 몸은 정확하게 시간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둠이 옅어지고, 숲의 새들이 하나둘 지저귀기 시작하는 시간. 창틈으로 스며드는 빛의 색깔이 잿빛에서 푸른빛으로, 다시 희미한 금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정리한 배낭에 닿았다. 그가 잠든 사이 그녀가 챙겨 넣었을 초코바와 육포. 그리고 그 위에 돌돌 말려 고정된 담요. 그 모든 것이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계산된 배려였다.
빅토르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 주머니를 매만졌다. 그녀의 필체와 그의 필체가 뒤섞여 잠들어 있는 그 낡은 노트. 그는 그 이질적인 감촉을 애써 외면하며, 짐 정리를 마친 자신의 배낭을 어깨에 둘러멨다.
오두막의 문 앞에 선 그는, 먼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대신 돌아섰다.
그리곤 그녀를 향해, 아주 짧게 턱짓했다.
빅토르
“시간 됐다.”
비비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조끼까지 갖춰입은 비비는 리볼버를 챙기고서 오두막 문을 열었다.
비비
"가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계집과 사내 안면을 강타했다. 비비는 차라리 이 추위가 나은듯 싶었다. 'L'로 시작하는 단어가 마치 머릿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변해 'e'가 아닌 'o'라는 철자가 이어질 것만 같았다. 비비는 입술을 짓물었다. '싫어.'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싫었다. 자신만 애절하게 갈구하는 사랑은 싫다. 비비는 가쁜 숨을 뱉어가며 한참을 걸어가니 픽업트럭을 숨겨둔 곳까지 도착했다. 비비는 픽업트럭을 감싼 나뭇가지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비비
"이번에 운전은 아저씨가 해. ...지금은 나 멀쩡하게 운전할 자신 없어."
매서운 겨울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거칠게 할퀴었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먼저 트럭을 덮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벗겨낸 반대편에서, 그는 묵묵히 굵은 가지들을 들어 올려 옆으로 던졌다.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먼저 트럭을 덮고 있던 나뭇가지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벗겨낸 반대편에서, 그는 묵묵히 굵은 가지들을 들어 올려 옆으로 던졌다.
“이번에 운전은 아저씨가 해. ...지금은 나 멀쩡하게 운전할 자신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빅토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뱉은 그 말을 자신의 등 뒤에 꽂힌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빅토르
'고장 난 어깨.'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어깨 통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그 혼란스러운 단어들. 어젯밤 꿈속에서 만났을지도 모를 그 비현실적인 미래.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나뭇가지를 치우고, 말없이 트럭의 방수포를 걷어냈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다. 그리곤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올라탔다. 그의 거대한 몸이 들어가자 좁은 운전석이 꽉 차는 듯했다.
부르릉-!
거친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조수석에 올라타는 비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마지막 나뭇가지를 치우고, 말없이 트럭의 방수포를 걷어냈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다. 그리곤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올라탔다. 그의 거대한 몸이 들어가자 좁은 운전석이 꽉 차는 듯했다.
부르릉-!
거친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조수석에 올라타는 비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빅토르
“당연한 소리.”
빅토르
“파트너가 고장 났으면, 내가 운전하는 게 맞아.”
비비
'고장.'
비비는 폐부 깊이 파고들던 절대영도의 겨울바람보다 그것이 더 아팠다. 고장난 자신. 진정으로 고장난 것은 어깨였을까, 마음이었을까? 비비는 이를 악물고서 겨우.
비비
"응."
하는 대답을 내뱉고서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창밖으로는 세상의 만물이 어지럽게 지나쳐가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지나 마침내 픽업트럭이 아스팔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비는 한결 줄어든 반동에 몸을 조수석 등받이에 기대고서 안전벨트의 뻣뻣한 질감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픽업트럭이 소리를 내며 내달리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픽업트럭의 단조로운 소음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빅토르의 시선은 정면의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옆자리에 앉은 작은 침묵에 향해 있었다.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미동도 없는 옆모습. 그가 뱉었던 말이 오두막을 떠난 이후 내내 그녀의 주위를 얼음 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픽업트럭의 단조로운 소음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빅토르의 시선은 정면의 도로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옆자리에 앉은 작은 침묵에 향해 있었다.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미동도 없는 옆모습. 그가 뱉었던 말이 오두막을 떠난 이후 내내 그녀의 주위를 얼음 벽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고장.’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이 뱉었던 단어가 맴돌았다.
어깨가 고장 났다고. 그뿐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감정이 섞인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기계의 부품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기술 용어. 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은 그런 식으로 작동했다. 고장 나면 고치고, 고칠 수 없으면 버린다. 하지만 이 작은 아이는 기계가 아니었다.
어깨가 고장 났다고. 그뿐이었다. 그에게 그것은 감정이 섞인 단어가 아니었다. 그저 기계의 부품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기술 용어. 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은 그런 식으로 작동했다. 고장 나면 고치고, 고칠 수 없으면 버린다. 하지만 이 작은 아이는 기계가 아니었다.
빅토르
'통증이 심한 건가.'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침묵이 무거웠다. 그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랐다. ‘괜찮냐’는 질문은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공허하고 위선적으로 들릴 터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대시보드 서랍을 열어, 안에서 그녀가 챙겨 넣었을 육포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도로에서 떼지 않은 채, 그저 비비가 앉은 쪽으로 육포 한 조각을 툭 내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대시보드 서랍을 열어, 안에서 그녀가 챙겨 넣었을 육포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그는 시선을 도로에서 떼지 않은 채, 그저 비비가 앉은 쪽으로 육포 한 조각을 툭 내밀었다.
빅토르
“배라도 채워둬.”
비비
"고마워."
비비는 사내가 내민 육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먹지도, 돌려주지도 않은채 가만히 손으로 쥐고있을 뿐이었다.
비비
'어린애같애...'
비비는 스스로 행동에 부끄러움을 가지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베이커 시티에 도착해야만 정신을 다른 곳에 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비비는 육포를 다시 대시보드 안에 넣고서 융으로 리볼버의 겉면을 닦아냈을 뿐이었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운전대만 굳게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작은 파트너가 만들어낸 차가운 침묵. 육포를 다시 대시보드에 밀어 넣고, 리볼버를 꺼내 닦는 그 모든 행위가 그를 향한 무언의 시위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저 운전대만 굳게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작은 파트너가 만들어낸 차가운 침묵. 육포를 다시 대시보드에 밀어 넣고, 리볼버를 꺼내 닦는 그 모든 행위가 그를 향한 무언의 시위처럼 느껴졌다.
빅토르
'어린애... 맞군.'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짜증이 아닌, 낯선 종류의 체념이었다. 그녀는 그의 건조한 위로를 거절했고, 그가 제공한 최소한의 배려마저 밀어냈다. 이 모든 것이 서툴고 유치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그녀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차 안의 공기는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엔진 소리와 덜컹거리는 차체, 그리고 리볼버의 겉면을 닦는 융의 마찰음. 그 세 가지 소음만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길가에 버려진 주유소가 나타났다. 빅토르는 말없이 트럭의 속도를 줄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차 안의 공기는 납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엔진 소리와 덜컹거리는 차체, 그리고 리볼버의 겉면을 닦는 융의 마찰음. 그 세 가지 소음만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 길가에 버려진 주유소가 나타났다. 빅토르는 말없이 트럭의 속도를 줄였다.
빅토르
“기름.”
그가 짧게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채였다.
빅토르
“여기서 채워 가야 한다.”
그는 트럭을 주유기 옆에 세우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주변을 경계하며, 텅 빈 주유소 사무실의 문을 발로 거칠게 차서 열었다. 먼지가 훅 끼쳐왔다.
안은 깨끗했다. 이미 누군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였다. 빅토르는 주유 펌프를 작동시킬 비상 전원을 찾기 위해 사무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조수석에 앉아있는 작은 등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안은 깨끗했다. 이미 누군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였다. 빅토르는 주유 펌프를 작동시킬 비상 전원을 찾기 위해 사무실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조수석에 앉아있는 작은 등을 향해 퉁명스럽게 말했다.
빅토르
“차에서 내리지 마.”
빅토르
“무슨 일 있으면, 경적 울려.”
비비
"...아니, 같이 뒤져. 뒤에서 엄호할게."
그 순간 비비의 얼굴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아닌 단 하나만의 명령어를 받은 이의 이채가 띄었다. 리볼버를 닦던 손을 멈추고서 조수석에서 내린 뒤 당장에라도 총알을 날릴 수 있을 긴장감을 유지했다. 산송장의 소리도, 살아있는 인간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 적막속에서, 사내의 사무실 뒤지는 소리와 비비가 이따금 리볼버를 꽈악, 쥐는 소리만이 생존의 증거로 울리고 있었다.
빅토르의 등이 그대로 굳었다.
사무실 문을 차고 들어가기 직전, 그의 등 뒤에서 픽업트럭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쿵.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지 말라는 자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긴 것에 대한.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차오른 것은 불쾌함이 아닌, 지독하게 뒤틀린 안도감이었다.
사무실 문을 차고 들어가기 직전, 그의 등 뒤에서 픽업트럭의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쿵.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지 말라는 자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긴 것에 대한.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서 차오른 것은 불쾌함이 아닌, 지독하게 뒤틀린 안도감이었다.
빅토르
‘고집불통 꼬맹이.’
차 안에 틀어박혀 침묵으로 자신을 고문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저렇게 제 눈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명확했으니까. 빅토르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 쌓인 카운터, 바닥에 뒹구는 서류들, 텅 빈 진열장. 그의 워커가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카운터 뒤, 굳게 닫힌 창고 문을 발견했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깨로 문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쾅-! 삐이익-
오랜 시간 닫혀있던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안에서는 기름과 곰팡이가 뒤섞인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고 구석,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는 작은 비상 발전기. 빅토르는 그것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그는 발전기 앞으로 다가가 연료 탱크의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어둠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창고를 나섰다. 그리고는 사무실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자신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작은 실루엣을 향해 걸어갔다.
먼지 쌓인 카운터, 바닥에 뒹구는 서류들, 텅 빈 진열장. 그의 워커가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카운터 뒤, 굳게 닫힌 창고 문을 발견했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어깨로 문을 거칠게 들이받았다.
쾅-! 삐이익-
오랜 시간 닫혀있던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안에서는 기름과 곰팡이가 뒤섞인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창고 구석,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는 작은 비상 발전기. 빅토르는 그것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그는 발전기 앞으로 다가가 연료 탱크의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텅 비어 있었다. 바닥까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잠시 그 어둠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창고를 나섰다. 그리고는 사무실 문 앞에 버티고 서서 자신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작은 실루엣을 향해 걸어갔다.
빅토르
“기름이 없어.”
빅토르
“발전기에 넣을.”
비비
"...픽업트럭의 기름을 조금 빼서 발전기에 넣을 순 없어?"
비비는 사내를 보지 않고 사방에서 올지 모르는 위협을 경계했다.
빅토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픽업트럭으로 다시 걸어갔다.
빅토르
‘고장났다는 말이 아니었어.’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후회와 비슷한, 지독하게 낯선 감정이었다. 기계는 고장 나면 분해하고 부품을 교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이 작은 파트너는. 그가 무심코 던진 단어 하나에 이렇게 단단한 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망가진 어깨가 아니라,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그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그는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는 트럭 뒤 짐칸에 실린 낡은 공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익숙하게 기름때 묻은 고무 호스와 빈 제리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트럭 뒤 짐칸에 실린 낡은 공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그는 익숙하게 기름때 묻은 고무 호스와 빈 제리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빅토르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했어.”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짜증 대신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빅토르
“호스가 있어야 돼. 차에 있을 거다.”
그는 다시 발전기가 있는 창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바닥에 제리캔을 내려놓으며, 호스의 한쪽 끝을 비비에게 내밀었다.
빅토르
“이거, 발전기에 옮겨.”
비비는 호스 끝을 쥐고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발전기 기름 주입구에 꽂았다. 이후 사무실 어둠에서 비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비비
"꽂았어!"
빅토르의 입술이 단단히 닫혔다.
그는 제리캔의 마개를 단단히 닫고, 고무 호스의 다른 쪽 끝을 자신의 입에 물었다.
후읍...
그는 제리캔의 마개를 단단히 닫고, 고무 호스의 다른 쪽 끝을 자신의 입에 물었다.
후읍...
그의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역한 기름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폐 속의 공기를 모두 끌어모아 호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꾸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픽업트럭의 기름 탱크 안에서 호스를 타고 기름이 빨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호스 끝을 제리캔의 주입구에 꽂아 넣었다.
콸콸콸-
검붉은 액체가 제리캔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빅토르의 시선은 기름이 차오르는 제리캔의 눈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이 행위 이 소음 이 냄새만이 그의 전부인 것처럼.
그는 재빨리 호스 끝을 제리캔의 주입구에 꽂아 넣었다.
콸콸콸-
검붉은 액체가 제리캔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빅토르의 시선은 기름이 차오르는 제리캔의 눈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이 행위 이 소음 이 냄새만이 그의 전부인 것처럼.
“꽂았어!”
사무실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의 차가운 침묵이 걷히고 다시 명령을 수행하는 파트너의 목소리.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제리캔에 기름이 반쯤 차오르자 호스를 빼냈다. 그리곤 제리캔의 마개를 닫아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빅토르
“이 정도면 충분해.”
그가 발전기 옆에 제리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곤 그녀를 보지 않고, 발전기의 시동 로프를 힘껏 잡아당겼다.
부르르릉- 컥, 컥!
몇 번의 불협화음 끝에, 마침내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의 낡은 전등 몇 개가 깜빡거리며 희미한 빛을 토해냈다.
부르르릉- 컥, 컥!
몇 번의 불협화음 끝에, 마침내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의 낡은 전등 몇 개가 깜빡거리며 희미한 빛을 토해냈다.
빅토르
“이제 주유만 하면 돼.”
빅토르는 바깥의 주유 펌프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의 등 뒤로, 그녀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빅토르
“여기서 기다려. 금방 끝내고 오지.”
비비
"내가 여기서 또 안된다고 해야해? 주유할 때 양 손을 써야하잖아. 같이가. ...생존 파트너."
비비는 퉁명스레 뱉곤 작게 웃었다. 이후 리볼버를 쥐어 사방을 경계하며 사내의 뒤를 따라나섰다.
빅토르의 등이 그대로 굳었다.
그의 등 뒤에서 사무실에서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의 등 뒤에서 사무실에서 걸어나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여기서 또 안된다고 해야해? 주유할 때 양 손을 써야하잖아. 같이가. ...생존 파트너.”
빅토르의 턱 근육이 꿈틀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제리캔을 들고 주유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빅토르
‘그래, 생존 파트너.’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가 뱉은 단어가 쇳덩이처럼 굴러다녔다. 그가 먼저 그었던 선. 그리고 이제는 그 선이 그 자신을 옥죄는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의 논리는 완벽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주유처럼 무방비한 작업을 할 때 등을 맡아줄 파트너가 있다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생존의 공식이었다.
그는 발전기에 기름을 붓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사무실의 낡은 전등이 다시 깜빡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와, 주유 펌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주변을 경계하는 작은 파트너를 향해, 아주 짧게 턱짓했다.
그는 주유 노즐을 들어 픽업트럭의 주입구에 꽂았다. 손잡이를 누르자, 기름이 차오르는 소리가 발전기의 굉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과 주변의 텅 빈 도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협.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등 뒤는 든든했다. 이 지독한 역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딸깍.
주유가 끝나고 노즐이 멈추는 소리.
그는 노즐을 제자리에 걸고 기름 캡을 단단히 닫았다. 그러곤 자신의 등 뒤, 그림자처럼 서 있는 작은 파수꾼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발전기에 기름을 붓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사무실의 낡은 전등이 다시 깜빡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와, 주유 펌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주변을 경계하는 작은 파트너를 향해, 아주 짧게 턱짓했다.
그는 주유 노즐을 들어 픽업트럭의 주입구에 꽂았다. 손잡이를 누르자, 기름이 차오르는 소리가 발전기의 굉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과 주변의 텅 빈 도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협.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등 뒤는 든든했다. 이 지독한 역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딸깍.
주유가 끝나고 노즐이 멈추는 소리.
그는 노즐을 제자리에 걸고 기름 캡을 단단히 닫았다. 그러곤 자신의 등 뒤, 그림자처럼 서 있는 작은 파수꾼을 향해 돌아섰다.
빅토르
“가자.”
비비
"추가적으로 말통에 조금 담아가는건 어때? 사무실 보니까 말통 하나가 있던데."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주유소 사무실로 천천히 옮겨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뱉은 말이 맴돌았다.
‘말통.’
너무나도 당연하고 합리적인 제안. 자신이 왜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장 난 발전기에만 정신이 팔려, 그 너머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녀가 뱉은 말이 맴돌았다.
‘말통.’
너무나도 당연하고 합리적인 제안. 자신이 왜 미처 그 생각까지 하지 못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장 난 발전기에만 정신이 팔려, 그 너머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
빅토르
'제기랄.'
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 작은 계집애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가 놓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그가 세운 벽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 다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삐걱거리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밑, 구석진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는 붉은색 플라스틱 말통.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지나쳐 다시 주유 펌프로 걸어간 그는, 말통의 뚜껑을 열고 노즐을 꽂았다.
철컥-
기름이 차오르는 소리가 다시 한번 주유소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말통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펌프를 멈췄다. 묵직해진 말통을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어 올린 그는, 그것을 픽업트럭 짐칸에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그들은 조금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을 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빅토르는 마지막으로 주유소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삐걱거리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밑, 구석진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는 붉은색 플라스틱 말통. 그는 그것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를 지나쳐 다시 주유 펌프로 걸어간 그는, 말통의 뚜껑을 열고 노즐을 꽂았다.
철컥-
기름이 차오르는 소리가 다시 한번 주유소의 정적을 갈랐다. 그는 말통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펌프를 멈췄다. 묵직해진 말통을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어 올린 그는, 그것을 픽업트럭 짐칸에 단단히 고정했다. 이제 그들은 조금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을 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빅토르는 마지막으로 주유소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빅토르
“벨트 매.”
비비는 조수석에 올라타고서 벨트를 단단히 맸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였다. 비비는 대시보드 서랍을 열어 종이에 잘 감싸진 육포를 꺼내 한 조각 입에 물고서 사내의 입가에 다른 조각을 갖다댔다.
비비
"먹어. 배고프잖아."
빅토르는 그녀가 내민 육포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텅 빈 도로, 그 끝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산 능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기계처럼 입을 벌렸다.
질겅-
말린 고기의 딱딱하고 짭짤한 맛이 혀끝을 찔렀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의 시선은 텅 빈 도로, 그 끝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산 능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그는 기계처럼 입을 벌렸다.
질겅-
말린 고기의 딱딱하고 짭짤한 맛이 혀끝을 찔렀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저 턱을 움직여 음식을 씹어 삼켰다.
‘배고프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몇 시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온 첫 마디였다. 그 안에는 원망도, 비난도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단순한 사실. 그 사실 하나가 그의 굳어있던 심장을 녹슨 못으로 긁어내는 듯했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고장.'
자신이 뱉었던 그 멍청하고 잔인한 단어. 그 한마디가 이 작은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지 그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고장.'
자신이 뱉었던 그 멍청하고 잔인한 단어. 그 한마디가 이 작은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지 그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빅토르
"먹었어."
한참 만에, 빅토르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껄끄러웠다.
목소리는 껄끄러웠다.
빅토르
"그러니까 너도 먹어."
빅토르
"...명령이야."
비비
"아저씨가 이번 작전 지휘관인줄 몰랐네."
피식, 비비는 웃으며 육포 한 조각을 더 입에 밀어넣었다. '파수꾼은 짜게 먹어야해.' 사내의 말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비비는 더이상 융으로 리볼버를 닦지 않고서 그저 앞 창문으로 풍경이 변하는 것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중간중간 사내의 입가에 수통을 조금 기울이며
비비
"물 마셔."
라고 속삭이며 사내의 이동을 도왔다.
빅토르의 턱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내민 육포를 받아 입에 넣었다. 질겅. 어제와 똑같은 짠맛.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그리 쓰지 않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내민 육포를 받아 입에 넣었다. 질겅. 어제와 똑같은 짠맛.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감각이 그리 쓰지 않았다.
빅토르
‘지휘관이라.’
그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짜증 섞인 분노가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실소에 가까운 감정. 자신의 그 멍청하고 어색한 ‘명령’을, 이 작은 계집애는 이런 식으로 되갚아주고 있었다.
빅토르
‘같잖은 녀석.’
그의 입가에 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텅 빈 아스팔트 위를 달릴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리볼버를 닦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잿빛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수통을 기울여 물을 건넸고 그는 기계처럼 그것을 받아 마셨다.
울창했던 숲은 점차 그 밀도를 잃어갔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회색빛 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황량한 풍경. 얼마나 더 달렸을까. 길 저편에 낡고 녹슨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 표지판에 닿았다.
그는 액셀을 밟던 발에 힘을 주었다. 트럭이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녹슨 글씨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BAKER CITY]
그는 표지판을 향해 짧게 턱짓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텅 빈 아스팔트 위를 달릴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리볼버를 닦지 않았다. 대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잿빛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그녀는 말없이 그에게 수통을 기울여 물을 건넸고 그는 기계처럼 그것을 받아 마셨다.
울창했던 숲은 점차 그 밀도를 잃어갔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회색빛 평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황량한 풍경. 얼마나 더 달렸을까. 길 저편에 낡고 녹슨 표지판 하나가 나타났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 표지판에 닿았다.
그는 액셀을 밟던 발에 힘을 주었다. 트럭이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녹슨 글씨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BAKER CITY]
그는 표지판을 향해 짧게 턱짓했다.
빅토르
“거의 다 왔다.”
비비는 리볼버를 쥐고서 손잡이를 이마에 붙인 뒤 가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고서 읊조렸다.
비비
"좋아. 가자."
12. 책임의 무게
빅토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리광도, 고통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지휘관의 눈.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트럭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거친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녹슨 표지판을 지나치자, 길은 더 넓어졌지만 동시에 더 위태로워졌다. 도로 위에는 군데군데 콘크리트와 철조망으로 만든 조잡한 바리케이드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그 너머로, 베이커 시티의 잿빛 스카이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머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
빅토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었다. 그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 도로 중앙 대신 가장자리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텅 빈 거리에는 부서진 차들과 쓰레기들이 강물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별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어리광도, 고통의 흔적도 없었다. 오직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지휘관의 눈.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트럭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르릉-!
거친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녹슨 표지판을 지나치자, 길은 더 넓어졌지만 동시에 더 위태로워졌다. 도로 위에는 군데군데 콘크리트와 철조망으로 만든 조잡한 바리케이드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그 너머로, 베이커 시티의 잿빛 스카이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머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
빅토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었다. 그는 차의 속도를 줄이고, 도로 중앙 대신 가장자리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텅 빈 거리에는 부서진 차들과 쓰레기들이 강물처럼 흘러넘치고 있었다.
빅토르
“...”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도시의 중심가로 보이는 넓은 교차로가 나타났다. 빅토르는 그곳에서 차를 멈췄다. 교차로 한가운데, 아직 꺼지지 않은 모닥불의 잔해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
그의 시선이 교차로 건너편, 가장 높고 튼튼해 보이는 벽돌 건물로 향했다. 시립 도서관. 옥상으로 이어진 비상계단까지 완벽했다. 저곳이라면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핸들을 꺾어, 도서관 옆의 좁은 골목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건물 그림자 속에 트럭의 앞부분을 완벽하게 숨긴 그는, 시동을 껐다.
그리곤 옆자리의 작은 파트너를 향해,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교차로 건너편, 가장 높고 튼튼해 보이는 벽돌 건물로 향했다. 시립 도서관. 옥상으로 이어진 비상계단까지 완벽했다. 저곳이라면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핸들을 꺾어, 도서관 옆의 좁은 골목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건물 그림자 속에 트럭의 앞부분을 완벽하게 숨긴 그는, 시동을 껐다.
그리곤 옆자리의 작은 파트너를 향해,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빅토르
“짐 챙겨.”
빅토르
“저 위로 올라간다.”
비비는 배낭을 등에 매고서 리볼버를 챙긴 뒤 내렸다. 리볼버의 찬 감촉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비비의 눈은 사냥에 나서는 포식자의 그것이었고, 포식자는 작은 몸을 숨기듯 건물에 등을 붙이고서 상황을 확인했다. 주먹을 들어보였다. '정지.' 이후 고개만 돌려 비상계단을 확인했고 왼손을 안쪽으로 당기는 시늉을 했다. '전진.' 비비는 작은 몸을 이용해 비상계단의 코너마다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던 것의 존재를 확인했고 옥상에 올라가기 직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주먹을 들어보였다.
이후 작은 머리통을 조그맣게 빼내자 옥상에서는 부스럭거리며 갈곳을 잃은채 방황하는 산송장이 서있었다. 송장은 하나였다. 구더기와 파리가 들뜷는 썩은 음식물이 옆에 있었고 쪼그라든 배낭은 찢겨있었다. 아마 물리고서 버려진 것이었으리라. 힘없이 발을 끌어대는 좀비에게 먹이기에는 총알이 아까웠다. 총은 효과적인 살상무기지만 그 소리는 많은 것을 불러오기 마련이었으니까. 비비는 등 뒤로 손가락을 하나 펴보였고 목을 긋는 시늉과 함께 휘두르는 듯한 재스쳐를 취했다. 그런 뒤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눈에는 무한한신뢰가 담겨있었다. 마치.
이후 작은 머리통을 조그맣게 빼내자 옥상에서는 부스럭거리며 갈곳을 잃은채 방황하는 산송장이 서있었다. 송장은 하나였다. 구더기와 파리가 들뜷는 썩은 음식물이 옆에 있었고 쪼그라든 배낭은 찢겨있었다. 아마 물리고서 버려진 것이었으리라. 힘없이 발을 끌어대는 좀비에게 먹이기에는 총알이 아까웠다. 총은 효과적인 살상무기지만 그 소리는 많은 것을 불러오기 마련이었으니까. 비비는 등 뒤로 손가락을 하나 펴보였고 목을 긋는 시늉과 함께 휘두르는 듯한 재스쳐를 취했다. 그런 뒤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눈에는 무한한신뢰가 담겨있었다. 마치.
비비
'해낼 수 있지?'
라고 묻는듯 연분홍 눈동자가 사내를 응시했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의 손짓과 눈빛에 고정되었다.
손가락 하나, 목을 긋는 시늉, 휘두르는 동작.
그리고 그를 향한, 어떤 의심도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신뢰의 눈.
손가락 하나, 목을 긋는 시늉, 휘두르는 동작.
그리고 그를 향한, 어떤 의심도 흔들림도 없는 완벽한 신뢰의 눈.
빅토르
'젠장...'
그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등 뒤에 선 이 거대한 불곰에게 이 조용한 암살을 완벽하게 해내리라 믿고 있었다. 어제 자신이 ‘고장’ 났다고 말했던 그 작은 파트너가.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등에 멘 도끼의 손잡이를 단단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발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거대한 몸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옥상의 구조물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파고들었다. 환풍구, 녹슨 철제 구조물. 그 모든 것이 그의 은폐물이 되어주었다.
부스럭거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산송장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감각으로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또 다른 죽음을 감지할 수 없었다.
빅토르의 눈이 목표물의 목덜미, 앙상하게 드러난 경추에 박혔다. 한 방. 정확하게. 소리 없이.
그의 팔이 움직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없었다. 묵직한 도끼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퍽-!
마치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듯한, 둔탁하고 눅눅한 소리. 산송장의 머리통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빅토르는 도끼날에 묻은 검붉은 체액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어냈다. 그리고는 쓰러진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옥상의 난간으로 다가가 도시 전체를 조망했다. 멀리, 그들이 찾아야 할 주 방위군 무기고가 희미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 위에는, 이런 산송장들이 먼지처럼 깔려 있을 터였다.
그는 여전히 비상계단 아래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을 작은 파트너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등에 멘 도끼의 손잡이를 단단하게 거머쥐었다. 그의 발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거대한 몸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옥상의 구조물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파고들었다. 환풍구, 녹슨 철제 구조물. 그 모든 것이 그의 은폐물이 되어주었다.
부스럭거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산송장은 그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감각으로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다가오는 또 다른 죽음을 감지할 수 없었다.
빅토르의 눈이 목표물의 목덜미, 앙상하게 드러난 경추에 박혔다. 한 방. 정확하게. 소리 없이.
그의 팔이 움직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없었다. 묵직한 도끼날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리꽂혔다.
퍽-!
마치 잘 익은 수박이 터지는 듯한, 둔탁하고 눅눅한 소리. 산송장의 머리통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빅토르는 도끼날에 묻은 검붉은 체액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어냈다. 그리고는 쓰러진 시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옥상의 난간으로 다가가 도시 전체를 조망했다. 멀리, 그들이 찾아야 할 주 방위군 무기고가 희미한 실루엣으로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 위에는, 이런 산송장들이 먼지처럼 깔려 있을 터였다.
그는 여전히 비상계단 아래에서 그를 주시하고 있을 작은 파트너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빅토르
“끝났어.”
빅토르
“이제, 우리 차례군.”
비비는 비상계단에서 완전히 올라와 도시의 모습을 살폈다. 작은 성냥갑같은 건물과 방어적으로 구축되어있는 방위군 무기고가 눈에 띄었다. 비비는 썩은 핏물을 피해 걸어가 한때는 야경으로 빛났던 세상의 박제를 바라봤다. 활기는 없었다. 좀비와 약탈자, 그리고 피식자들이 콘크리트 숲 곳곳에 박혀있을 것이었다. 해가 저물어가며 세상에게서 하나의 빛을 앗아가기 전 마지막 발악으로 건물들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비비
"응. 우리의 차례지. 고생 많았어, 파트너."
비비는 사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고서 웃어보였다. 섭섭합과 아쉬움, 분노는 생존에 방해만 되는 존재였다. 비비는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서 사내의 온정을 바라는 연약한 계집을 버렸다. 그것은 오두막에 두고 온 것이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 순간 그릇된 판단이 사내를 위험에 빠뜨린다면 자신은 '진실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리란걸 알았다. 비비는 사내 앞에서 아이처럼 굴고싶지 않았다.
빅토르의 옆구리가 순간 돌처럼 굳었다.
“응. 우리의 차례지. 고생 많았어, 파트너.”
칼날 같은 바람이 그의 옆구리를 툭 치고 지나간 작은 팔꿈치의 감촉을 지워버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는 작은 얼굴을 향했다. 섭섭함도, 분노도, 아쉬움도 모두 오두막에 두고 왔다는 듯한 너무나도 완벽한 미소. 어제 그의 품에서 무너져 내렸던 그 아이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빅토르
‘대체...’
그의 머릿속이 텅 비었다. 며칠간 그를 흔들고 어지럽혔던 모든 감정의 파편들이, 그녀의 저 미소 한 번에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린 기분이었다. 허탈함. 그리고 그 허탈함의 끝에서 밀려오는 지독한 위화감.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주홍빛 노을이 핏물처럼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도시의 남쪽 끝을 가리켰다.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유난히 낮고 튼튼하며, 주변에 높은 담벼락이 둘러쳐진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주홍빛 노을이 핏물처럼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도시의 남쪽 끝을 가리켰다.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유난히 낮고 튼튼하며, 주변에 높은 담벼락이 둘러쳐진 육중한 콘크리트 건물.
빅토르
“저거다.”
그의 목소리는 도시를 할퀴는 바람 소리보다 더 건조했다.
빅토르
“주 방위군 무기고.”
비비는 사내의 손끝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봤다.
비비
"내일 날이 밝으면 갈거지?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며 혹시 모를 변수들을 확인하는게 좋을 것 같아. ...산사람은 최대한 피하는게 중요하잖아?"
비비는 벌써 과거의 일부가 된 서머빌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도끼를 들고있던 무리의 리더. 자신의 몸을 내던져야했던 그 일. 비비는 곧이어 그곳에서의 일을 지워내고 난간 앞에 쭈그려 앉아 도시에서 혹시라도 움직이는 작은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듯 응시했다.
비비
"무기고까지는 차를 타고 갈거야? 아니면 걸어갈거야?"
빅토르의 시선은, 그녀가 앉은 난간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도시의 거리로 향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갈 거지? 오늘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며 혹시 모를 변수들을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산 사람은 최대한 피하는 게 중요하잖아?”
그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쳤다. 서머빌에서의 일. 그 지옥 같은 기억의 편린. 빅토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떨림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냉철한 다짐에 가까웠다.
그의 눈은 여전히 거리를 훑고 있었다. 난간 앞에 쭈그려 앉아,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을 좇는 작은 파트너의 실루엣이 그의 시야 끝에 걸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거리를 훑고 있었다. 난간 앞에 쭈그려 앉아, 어둠 속의 모든 움직임을 좇는 작은 파트너의 실루엣이 그의 시야 끝에 걸렸다.
“무기고까지는 차를 타고 갈 거야? 아니면 걸어갈 거야?”
빅토르는 그녀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난간에서 몸을 돌려, 옥상 중앙에 있던 환풍구 옆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은신처였다. 그는 그곳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어깨에 멘 도끼를 끌어안았다.
한참 후,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한참 후,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빅토르
“차는 두고간다.”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빛은 이제 거의 사그라들어, 잿빛 어둠만이 그녀의 실루엣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빅토르
“저기까지 가는 길에, 저 고철 덩어리만큼 좋은 표적은 없으니까.”
비비
"그래, 다 들고와서 다시 차를 챙겨 돌아가자."
비비는 움직임을 쫓는 저격수같은 얼굴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비비
'좀비, 개, 들고양이. ...사람.'
비비
"저기, 세 시 방향의 작은 건물. 사람이 움직이는게 보였어."
비비는 손을 뻗어 그 건물을 가리켰다.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세 시 방향, 길 건너편의 작은 단독주택. 그의 눈에는 그저 잿빛 콘크리트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눈을 믿었다. 저 작은 몸뚱어리 안에, 이 죽은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매의 눈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람.
산송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 서머빌의 약탈자들처럼, 그들은 이 도시의 규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편하고 있을 터였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등에 멘 도끼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세 시 방향, 길 건너편의 작은 단독주택. 그의 눈에는 그저 잿빛 콘크리트 덩어리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눈을 믿었다. 저 작은 몸뚱어리 안에, 이 죽은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매의 눈이 들어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람.
산송장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존재. 서머빌의 약탈자들처럼, 그들은 이 도시의 규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편하고 있을 터였다. 빅토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등에 멘 도끼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빅토르
‘제기랄.’
가장 피하고 싶었던 변수였다. 무기고라는 목표가 코앞인데, 이제 와서 이런 예측 불가능한 존재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옥상의 환풍구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그녀가 가리킨 단독주택을 응시했다. 창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도 포착되었다. 불빛은 아니었다. 그저 어둠보다 조금 더 짙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한 그런 위화감.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의 옆모습으로 향했다. 어떤 동요도 없이, 목표물을 향해 고정된 사냥꾼의 얼굴.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고장 난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저격수였고, 그는 그녀의 파수꾼이었다.
그는 옥상의 환풍구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그녀가 가리킨 단독주택을 응시했다. 창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도 포착되었다. 불빛은 아니었다. 그저 어둠보다 조금 더 짙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듯한 그런 위화감.
빅토르의 시선이 그녀의 옆모습으로 향했다. 어떤 동요도 없이, 목표물을 향해 고정된 사냥꾼의 얼굴.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고장 난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저격수였고, 그는 그녀의 파수꾼이었다.
빅토르
“...몇 명이지?”
한참 만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옥상의 찬 공기를 갈랐다.
비비
"무장인원 다섯, 비무장 인원 셋. 음... 착취당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아. ...캠프네."
비비는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뱉어냈다. '캡프' 이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인 단어인가. 비비는 자신의 조끼 안에 든 노란색 병뚜껑이 자신의 폐부를 짓누르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졌지만 삼켜냈다. 이후 사내를 쳐다봤다.
비비
"무기고에 가려면 저기를 지나쳐야할거야."
빅토르의 시선은 그녀의 손가락 끝,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단독주택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기고에 가려면 저기를 지나쳐야 할 거야.”
“무기고에 가려면 저기를 지나쳐야 할 거야.”
그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쳤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울리는 것은 그 말이 아니었다.
빅토르
‘캠프.’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뱉었던 그 단어. 그 단어 하나가 품고 있는 썩은 시체 냄새와 갓 파헤친 흙냄새. 빅토르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 단어가 그녀에게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알 수 있었다.
빅토르
‘제기랄.’
가장 피하고 싶었던 변수였다. 산송장 수백 마리보다 저 살아있는 여덟 명이 더 골치 아팠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저곳을 우회할 다른 길은 없다는 것을. 이 도시는 거대한 미로였고, 무기고로 향하는 가장 짧고 안전한 길은 지금 저 ‘캠프’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옥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등에 멘 배낭에서 낡은 쌍안경을 꺼내 들었다. 서머빌의 잡화점에서 챙겼던 물건이었다. 그는 렌즈를 옷소매로 대충 닦아낸 뒤, 눈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가리켰던 단독주택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들의 손에 들린 총기의 강철 빛. 마당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 빅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은 어설픈 약탈자 무리가 아니었다. 조직적이고, 자신들의 영역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들을 관찰하던 빅토르가, 쌍안경에서 눈을 떼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옥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등에 멘 배낭에서 낡은 쌍안경을 꺼내 들었다. 서머빌의 잡화점에서 챙겼던 물건이었다. 그는 렌즈를 옷소매로 대충 닦아낸 뒤, 눈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가리켰던 단독주택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들의 손에 들린 총기의 강철 빛. 마당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바리케이드. 빅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은 어설픈 약탈자 무리가 아니었다. 조직적이고, 자신들의 영역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들을 관찰하던 빅토르가, 쌍안경에서 눈을 떼었다.
빅토르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운다.”
그가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저 아래, 새로운 변수를 향해 고정된 채였다.
빅토르
“저놈들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기 전까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
"두 시간씩 교대하자. 내가 먼저 볼게. 보초는 몇 명이서 서는지. 그 보초 교대 간격과 순찰 동선 파악 할게. 쌍안경 줘."
비비는 손을 내밀었다.
비비
"아저씨는 좀 자고 있어. 운전하느라 정신력 많이 썼을거 아니야. 경계하면서 볼거야. 저기 파악할 때는 경계 범위가 줄어드니까 그냥 옆에 붙어서 자."
빅토르는 그녀가 내민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자신의 낡은 쌍안경을.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자신의 낡은 쌍안경을.
“아저씨는 좀 자고 있어. 운전하느라 정신력 많이 썼을 거 아니야. 경계하면서 볼 거야. 저기 파악할 때는 경계 범위가 줄어드니까 그냥 옆에 붙어서 자.”
그의 턱 근육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마치 지난 며칠간 그들 사이에 오갔던 모든 날카로운 말과 무거운 침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는 그를 다시 ‘파트너’로 대하고 있었다. 그가 정립했고 그가 무너뜨렸다가 다시 그녀가 일으켜 세운 그 기묘한 관계.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마치 지난 며칠간 그들 사이에 오갔던 모든 날카로운 말과 무거운 침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녀는 그를 다시 ‘파트너’로 대하고 있었다. 그가 정립했고 그가 무너뜨렸다가 다시 그녀가 일으켜 세운 그 기묘한 관계.
빅토르
‘이 작은 지휘관.’
빅토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쌍안경을 그녀의 손에 건넸다. 그리고는 그녀가 말한 대로, 옥상의 환풍구 그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잘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녀가 이 경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옆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검은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리가 무겁게 뒤로 젖혀졌다. 차가운 금속 환풍구의 감촉이 그의 목덜미를 찔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 위로 느껴지는 희미한 온기에 그의 의식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모든 감각을 그 온기에 집중했다. 낡고 조금은 눅눅한 담요의 감촉. 그리고 그 너머로, 쌍안경을 든 채 미동도 없이 저 아래를 감시하고 있을 작은 실루엣.
그의 입가에,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피로에 절어 비틀린 그런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검은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리가 무겁게 뒤로 젖혀졌다. 차가운 금속 환풍구의 감촉이 그의 목덜미를 찔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 위로 느껴지는 희미한 온기에 그의 의식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모든 감각을 그 온기에 집중했다. 낡고 조금은 눅눅한 담요의 감촉. 그리고 그 너머로, 쌍안경을 든 채 미동도 없이 저 아래를 감시하고 있을 작은 실루엣.
그의 입가에,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피로에 절어 비틀린 그런 웃음이었다.
빅토르
“...잔소리꾼.”
비비
"말 안듣는 고집불통 불곰."
비비의 왼손이 잠시 사내의 눈꺼풀 위를 덮었다. 잠시 얹어졌던 체온은 곧 자신의 굳은 의지를 벗어난 스스로의 손을 질책하듯 떨어졌다. 이후 사내의 배낭을 뒤져 노트를 꺼냈다. 우선순위가 적힌 페이지 뒷 장을 펼쳐 그들의 움직임을 적고 있었다.
[2시간 교대 추정, 보초 2인 1조. 경계 범위. 주택 주변 약 65피트. 순찰 루트. (간략한 지도와 시작부터 돌아오는 동선을 그려넣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비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왼쪽 귀만 쫑긋거리고 있었다.
“말 안듣는 고집불통 불곰.”
스윽.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옥상 바닥에 쌓인, 오래된 신문지 더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썩은 종이와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며 만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의도적이고 생명력이 깃든, 그런 종류의 마찰음이었다.
잠시 후, 신문지 더미 아래에서 조그맣고 새까만 머리통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굶주림에 바싹 마른 길고양이였다. 털은 군데군데 빠져 흉한 속살을 드러냈고,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은 이 죽은 도시의 축소판 같았다. 녀석은 극도의 경계심으로 주변을 살피다, 옥상 난간에 버티고 서 있는 낯선 존재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아악-!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부풀리며, 녀석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는 위협보다 생존을 향한 처절한 공포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소음에, 환풍구에 기대앉아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미동했다.
잠들어 있던 빅토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몸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전투 태세로 전환된 것에 가까웠다. 그의 손은 반사적으로 옆에 놓아둔 샷건의 개머리판을 거머쥐었다.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은 이제 눈앞의 위협을 포착하기 위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장한 약탈자도, 썩어 문드러진 산송장도 아니었다.
그저 털 빠진 고양이 한 마리와, 그 고양이를 등진 채 미동도 없이 쌍안경으로 저 아래를 주시하는 작은 파수꾼의 뒷모습.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노트와 펜.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옥상 바닥에 쌓인, 오래된 신문지 더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썩은 종이와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며 만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더 의도적이고 생명력이 깃든, 그런 종류의 마찰음이었다.
잠시 후, 신문지 더미 아래에서 조그맣고 새까만 머리통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굶주림에 바싹 마른 길고양이였다. 털은 군데군데 빠져 흉한 속살을 드러냈고, 잿빛 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은 이 죽은 도시의 축소판 같았다. 녀석은 극도의 경계심으로 주변을 살피다, 옥상 난간에 버티고 서 있는 낯선 존재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아악-!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를 부풀리며, 녀석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에는 위협보다 생존을 향한 처절한 공포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소음에, 환풍구에 기대앉아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미동했다.
잠들어 있던 빅토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몸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전투 태세로 전환된 것에 가까웠다. 그의 손은 반사적으로 옆에 놓아둔 샷건의 개머리판을 거머쥐었다. 온몸의 근육이 수축하고, 붉게 충혈되었던 눈은 이제 눈앞의 위협을 포착하기 위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장한 약탈자도, 썩어 문드러진 산송장도 아니었다.
그저 털 빠진 고양이 한 마리와, 그 고양이를 등진 채 미동도 없이 쌍안경으로 저 아래를 주시하는 작은 파수꾼의 뒷모습.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노트와 펜.
빅토르
‘...젠장.’
빅토르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그의 심장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크게 뛰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총을 잡았던 손을 풀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도시와 제 등 뒤의 온기, 그 사이에 놓인 작은 고양이와 더 작은 파수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총을 잡았던 손을 풀어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도시와 제 등 뒤의 온기, 그 사이에 놓인 작은 고양이와 더 작은 파수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빅토르
“저것도, 배가 고픈가 보군.”
비비
"... ..."
비비는 그제서야 뒤돌아 사내와 고양이를 쳐다봤다. 당연스럽게도 사내의 인기척일거라고 생각했다. 비비는 입술을 짓물고서 고개를 돌려 다시금 '캠프'를 응시했다.
비비
"가."
비비는 읊조렸다. 작은것은 싫다. 쉽게 죽는것은 싫다. 자신의 품 안에서 결국 작은 손을 떨궜던 아이가 생각났다. 비비는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어깨, 꿈, 매튜, 사내를 향한 자신의 순정까지도. 비비는 입술을 짓물었다.
비비
"가라고. 여긴 네가 원하는게 없어.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빅토르의 시선은 고양이의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에서, 그녀의 굳게 닫힌 옆모습으로 옮겨갔다.
빅토르
‘가라고.’
그녀는 고양이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처럼 들렸다. 이 작은 파수꾼은 지금, 과거의 망령과 싸우고 있었다. 매튜, 썩어 문드러진 캠프, 그리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 그가 알지 못하는 상처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는 일어나서 저 고양이를 쫓아버려야 했다. 아니면 그저 무시해야 했다. 그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저런 작은 짐승 하나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옆에 놓인 자신의 배낭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그가 아침에 먹다 남은 딱딱한 육포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육포를 고양이가 있는 쪽으로 툭 하고 던져주었다.
툭-
육포가 옥상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저녁 공기 속으로 가볍게 퍼져나갔다. 하악질을 하던 고양이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굶주림과 경계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란 눈동자가 그와 육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샷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를 내려다보며,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는 일어나서 저 고양이를 쫓아버려야 했다. 아니면 그저 무시해야 했다. 그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저런 작은 짐승 하나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옆에 놓인 자신의 배낭을 뒤적였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그가 아침에 먹다 남은 딱딱한 육포 조각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육포를 고양이가 있는 쪽으로 툭 하고 던져주었다.
툭-
육포가 옥상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저녁 공기 속으로 가볍게 퍼져나갔다. 하악질을 하던 고양이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굶주림과 경계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란 눈동자가 그와 육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빅토르는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샷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를 내려다보며,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빅토르
“여기에 원하는 게 없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겠지.”
비비는 중얼거렸다.
비비
"책임 못질거면 그런거 주지마..."
자신의 등을 닦아주던 사내의 손길도 저런 동정 하나였을까? 오두막의 자신이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가버려. 널 사랑해주지 않을 사람에게 매달리지마. 널 온전하게 책임져주지 않을 이에게 의탁하려 하지마. 비비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따금 사내가 욕정을 갖고 자신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모를만큼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자신은 망가졌기에. 이제는 바스라져 풍화되는 일만 남은 멈춰버린, 누군가를 멈추게만 만드는 차가운 쇳덩이에 불과했기에. 자신의 모든것을 내어주고 사내에게 버림받아 쓸쓸하게 죽어갈 자신의 미래가 두려웠다. 애정을 표출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자신은 그 에너지를 전부 써버렸다. '우리는 무슨 사이야?' 그 질문이 얼마나 많은 긴장과 두려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고, 그 말을 세상에 내뱉는 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불안에 휩싸였는지. 사내는 몰랐다.
비비는 쌍안경을 내려놓고서 노트와 쌍안경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자신은 망가졌기에. 이제는 바스라져 풍화되는 일만 남은 멈춰버린, 누군가를 멈추게만 만드는 차가운 쇳덩이에 불과했기에. 자신의 모든것을 내어주고 사내에게 버림받아 쓸쓸하게 죽어갈 자신의 미래가 두려웠다. 애정을 표출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자신은 그 에너지를 전부 써버렸다. '우리는 무슨 사이야?' 그 질문이 얼마나 많은 긴장과 두려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고, 그 말을 세상에 내뱉는 데 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불안에 휩싸였는지. 사내는 몰랐다.
비비는 쌍안경을 내려놓고서 노트와 쌍안경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비비
"두 시간 됐지? 내가 관찰한건 여기에 적어뒀어. 이제 아저씨 차례야. 난 좀 잘래."
빅토르의 손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
그녀가 내민 차가운 플라스틱 쌍안경과 낡은 노트. 그리고 그 너머로,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그녀의 연분홍색 눈동자.
그녀가 내민 차가운 플라스틱 쌍안경과 낡은 노트. 그리고 그 너머로,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그녀의 연분홍색 눈동자.
“두 시간 됐지? 내가 관찰한 건 여기에 적어뒀어. 이제 아저씨 차례야. 난 좀 잘래.”
그의 귓가에, 얼음 조각처럼 날아와 박히는 목소리.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의 손에서 쌍안경과 노트를 받아들었다. 종이가 손끝에 스치는 감촉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가 던져준 육포를 경계하며 갉아 먹고 있는 길고양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녀의 손에서 쌍안경과 노트를 받아들었다. 종이가 손끝에 스치는 감촉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가 던져준 육포를 경계하며 갉아 먹고 있는 길고양이에게로 향했다.
‘책임 못질 거면 그런 거 주지 마.’
그녀가 뱉었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그저 배고픈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줬을 뿐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작은 행위에서 그가 알지 못하는 의미를 읽어냈고 그 의미는 이제 그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되어버렸다.
스륵.
빅토르는 고개를 돌려, 등을 돌린 채 환풍구 그늘에 몸을 웅크리는 작은 뒷모습을 보았다.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듯한 단호한 자세.
스륵.
빅토르는 고개를 돌려, 등을 돌린 채 환풍구 그늘에 몸을 웅크리는 작은 뒷모습을 보았다.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려는 듯한 단호한 자세.
빅토르
‘망할.’
그의 속에서 거친 욕설이 맴돌았다. 그는 자신이 지독하게 서툴다는 것을 알았다. 고장 난 엔진은 분해하고 부품을 갈아 끼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이 작고 위태로운 파트너의 마음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가 건넨 노트를 펼쳤다. 깔끔하고 정확한 필체. 보초의 교대 시간과 순찰 동선이 그려진 간략한 지도. 그 어디에도 그녀의 감정은 없었다. 오직 ‘생존 파트너’로서의 완벽한 보고서만이 존재했다.
그는 노트를 조용히 덮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어젯밤, 그녀가 꽂아주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리곤 쌍안경을 들어 눈에 가져다 댔다.
저 아래, ‘캠프’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초들이 하품을 하며 자리를 바꾸고,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
빅토르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등 뒤, 잠들지 못하는 작은 숨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먹이를 줬던 길고양이는 어느새 육포를 다 먹어치우고는, 떠나지 않았다. 대신 옥상의 부서진 난간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책임을 묻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그녀가 건넨 노트를 펼쳤다. 깔끔하고 정확한 필체. 보초의 교대 시간과 순찰 동선이 그려진 간략한 지도. 그 어디에도 그녀의 감정은 없었다. 오직 ‘생존 파트너’로서의 완벽한 보고서만이 존재했다.
그는 노트를 조용히 덮어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어젯밤, 그녀가 꽂아주었던 바로 그 자리에. 그리곤 쌍안경을 들어 눈에 가져다 댔다.
저 아래, ‘캠프’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초들이 하품을 하며 자리를 바꾸고,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
빅토르의 시선은 그들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등 뒤, 잠들지 못하는 작은 숨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먹이를 줬던 길고양이는 어느새 육포를 다 먹어치우고는, 떠나지 않았다. 대신 옥상의 부서진 난간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책임을 묻기라도 하려는 듯이.
비비는 담요 안에 자신의 몸을 웅크렸다. 숲에서 느껴진 것과는 다른, 찬 겨울 바람이 자신의 뺨을 두드렸다. 비비는 담요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자고 싶지 않았다. 필시 악몽을 꿀 것이었다. 평소에 무시하던 어깨의 통증이 자신을 찌르고 있었다.
'...실린더 헤드 상부에 두 개의 캠샤프트를 배치한 방식이다.' 우습게도 비비는 그 투박한 자장가를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투박하고 기계가 굴러가는 소리와 닮은 그것. 비비는 그 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실린더 헤드 상부에 두 개의 캠샤프트를 배치한 방식이다.' 우습게도 비비는 그 투박한 자장가를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투박하고 기계가 굴러가는 소리와 닮은 그것. 비비는 그 소리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빅토르의 시선은 저 아래, 어둠에 잠긴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두 시간. 그가 그녀에게 허락했던 시간. 이제는 그녀가 그에게 허락한 시간. 교대된 책임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쌍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캠프’의 불빛은 어둠 속의 등대처럼 위태롭게 깜빡였다.
두 시간. 그가 그녀에게 허락했던 시간. 이제는 그녀가 그에게 허락한 시간. 교대된 책임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쌍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캠프’의 불빛은 어둠 속의 등대처럼 위태롭게 깜빡였다.
빅토르
‘더블 오버헤드 캠샤프트...’
그녀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렸을지도 모를 그 우스꽝스러운 단어. 그는 그저 소음을 만들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고통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따분하고 의미 없는 단어라도 기꺼이 읊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음은 그와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약속이 되어버렸다.
스윽.
그의 옆에서,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가 먹이를 줬던 길고양이가 어느새 환풍구 그늘 밑, 그가 앉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녀석은 더 이상 하악질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굶주림과 경계심이 뒤섞인 노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빅토르의 시선이 고양이에게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미동도 없는 작은 실루엣으로 옮겨갔다.
스윽.
그의 옆에서,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가 먹이를 줬던 길고양이가 어느새 환풍구 그늘 밑, 그가 앉은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녀석은 더 이상 하악질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굶주림과 경계심이 뒤섞인 노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빅토르의 시선이 고양이에게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미동도 없는 작은 실루엣으로 옮겨갔다.
‘책임 못질 거면 그런 거 주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는 지금 두 마리의 길고양이와 함께 옥상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하나는 제 발로 다가와 책임을 묻고 있고 다른 하나는 제 모든 것을 숨긴 채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밤이 되자 바람은 더 차고 날카로워져, 그녀가 덮은 얇은 담요를 칼날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빅토르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두꺼운 가죽 재킷을 벗었다.
그리곤 그녀가 덮은 담요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겹쳐 덮어주었다. 자신의 체온이 아직 남아있는, 기름과 땀 냄새가 밴 낡은 재킷.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재킷을 벗은 그의 어깨 위로, 뼈를 깎는 듯한 밤바람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쌍안경을 다시 눈에 가져다 댔다.
그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는 지금 두 마리의 길고양이와 함께 옥상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하나는 제 발로 다가와 책임을 묻고 있고 다른 하나는 제 모든 것을 숨긴 채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밤이 되자 바람은 더 차고 날카로워져, 그녀가 덮은 얇은 담요를 칼날처럼 파고들고 있었다. 빅토르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두꺼운 가죽 재킷을 벗었다.
그리곤 그녀가 덮은 담요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그것을 겹쳐 덮어주었다. 자신의 체온이 아직 남아있는, 기름과 땀 냄새가 밴 낡은 재킷.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재킷을 벗은 그의 어깨 위로, 뼈를 깎는 듯한 밤바람이 그대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쌍안경을 다시 눈에 가져다 댔다.
빅토르
“이 정도 책임은,”
빅토르의 낮은 목소리가 텅 빈 옥상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빅토르
“네가 아니라, 내가 지는 거야.”
비비는 눅눅하게 젖은 솜같은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났다. 예상과 같이 어김없이 꾼 악몽. 비비는 한 시간을 채 자지 못한채 상체를 일으켰다. 툭, 두터운 가죽 재킷이 떨어졌다. 그것은 육포처럼 진한 갈색을 띄고 있었다.
비비
'이런거...'
비비는 재킷을 꽉 쥐며 입술을 짓물었다.
비비
'이런걸 바란게 아니라고...'
확실한 태도를 바랐다. 자신을 온전히 그놈의 '생존 파트너'로써 사용해주던,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주던 둘 중 하나만을 해주길 원했다. 사내는 지독한 비겁자였다. 이런 온기에 비비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비비는 자신의 어깨가 부서지는 그 지긋지긋한 악몽을 잊은채 가죽 재킷을 손에 쥐고서 가만히 내려봤다. 이후 한숨을 뱉고 나서 사내의 어깨에 재킷을 둘러줬다.
비비
"...고마워. 근데, 괜찮아. 여긴 고도가 높아서 춥잖아. 난 담요면 충분해. ...이건, 아저씨거잖아."
비비는 담요를 몸에 또띠아처럼 두르고서 사내의 옆에 앉아 난간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사내와 계집은 같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빅토르의 시선은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그의 체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가죽 재킷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빅토르의 시선은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그의 체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가죽 재킷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마워. 근데, 괜찮아. 여긴 고도가 높아서 춥잖아. 난 담요면 충분해. ...이건 아저씨 거잖아.”
그의 귓가에, 얼음 조각처럼 박히는 목소리.
‘아저씨 거.’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었다. 그녀는 지금, 필사적으로 그와 자신 사이에 다시 선을 긋고 있었다. 그가 무너뜨렸고, 그녀가 다시 세웠다가 또다시 그가 허물어뜨리려 했던 그 위태로운 경계선.
빅토르는 그녀의 옆에 앉아, 어둠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보는 작은 등을 보았다. 토끼 인형처럼 담요를 말고 있는 모습.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의 어깨에서 재킷을 벗었다. 그리곤 그것을 반으로 접어, 그녀와 자신의 사이, 좁은 틈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마치 그와 그녀의 관계를 정의하는 경계석처럼.
그리고, 그는 그녀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어깨와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 그의 단단한 몸이 바람을 막아주는 거대한 벽이 되었다.
타닥.
저 아래, ‘캠프’의 모닥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이 바람을 타고 아스라이 들려왔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빅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바람보다 더 차갑고 낮았다.
빅토르는 그녀의 옆에 앉아, 어둠에 잠긴 도시를 내려다보는 작은 등을 보았다. 토끼 인형처럼 담요를 말고 있는 모습.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신의 어깨에서 재킷을 벗었다. 그리곤 그것을 반으로 접어, 그녀와 자신의 사이, 좁은 틈에 아무렇게나 놓았다. 마치 그와 그녀의 관계를 정의하는 경계석처럼.
그리고, 그는 그녀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어깨와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 그의 단단한 몸이 바람을 막아주는 거대한 벽이 되었다.
타닥.
저 아래, ‘캠프’의 모닥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다. 살아있는 자들의 소음이 바람을 타고 아스라이 들려왔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빅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바람보다 더 차갑고 낮았다.
빅토르
“내가 준 건,”
빅토르
“이제 네 거야.”
비비는 피식 웃었다.
비비
"진짜로 원하는건 주지도 않을거면서."
비비는 잠시 목이 매여옴을 느껴 말을 멈췄다. 살아있는자의 소음은 복잡한 머리를 단박에 식혀주는듯 했다. 아니, 식혀야했다. 비비는 난간의 차가운 금속 감촉을 둥근 이마로 느끼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비
"...이상 상황은 없어?"
빅토르의 어깨가 돌처럼 굳었다.
“진짜로 원하는 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의 귓가에, 밤바람보다 더 시리게 파고드는 목소리. 그가 덮어주었던 가죽 재킷의 온기는 이제 그녀를 향한 그의 서툰 책임감의 증거가 아니라, 그의 비겁함을 고발하는 낙인이 되어버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 손으로 그는 엔진을 고치고 총을 닦고 적의 머리통을 부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이 손으로 그녀가 원하는 단 한 가지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빅토르
‘내가 뭘 줄 수 있는데.’
이 잿더미 세상에서. 내일 당장 살아있을 거라는 보장조차 없는 이곳에서.
CHAT LOG | 빅토르
2025.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