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그때의 대구도 폭염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구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그리고 작가 석경 고향도 그곳이었다.

-대구는 크고 넓었다. 밝고 우글거렸다. 장정일은 대구는 부산의 절반도 안 된다고 했다.

-대구의 밤 공기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몹시 해로웠다. 선풍기를 틀고 잠을 청했는데 깨어보면 선풍기가 멎어 있고 한 시간 남짓한 토막잠들을 몇 편 잤다.


<남원>

-옥수수밭을 지나고 그리고 남원이었다. 춘향과 몽룡의 그림을 올려붙인 나무 입간판을 지난다.


<전주>

-전주에는 6시에 내렸다. 전화를 넣으니 강석경 선생이 크게 기뻐하셨다. 수박 한 덩어리와 복숭아, 그리고 담배 몇 갑을 사고 황방산 서고사를 향해 택시를 탔다.

-바위에서 바라다보이는 들판은 거대한 바다로 보였다. 먼데 호수가 있었고 농가들과 송전탑이 내려다 보였다. 

-의성 스님과 강선생 그리고 피아노 치러 학교 갔던 하욱과 나 이렇게 셋이 국일관에서 백반을 먹었다. 역시 전주의 반찬은 엄청나게 많았다.


<광주>

-필름 한 통을 쓰고 이제 광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곳은 십자가로 만든 땅인가, 넋들 위에 솟아난 도시인가. 나는 아무런 감정도 예감도 없이 무등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무등은 날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검은 산들을 거느리고 회색의 구름 숲속에 무등은 있었다.

-광주고속터미널은 내가 본 그 어느 대도시 터미널보다 초라하고 궁핍했으며 무더웠고 지친 모습이었다. 땀이 폭포처럼 옷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음의 공포를 겪었던 사람들일까. 어찌 보면 그랬다. 어두웠고 희미하였다. 거리는 복잡했지만 힘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나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제3묘원을 올랐다. 만장 같은 격한, 그러나 햇빛에 바삭바삭 마르고 있는 수십 개의 붉고 검고 흰 현수막들과 무덤들이 있었다. 나는 꽃 한 송이 소주 한 병 없이 무덤 사이를 거닐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무명 열사의 묘, 박관현의 묘, 묘비명 사이를 걸으며 나는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중략) 너무 뜨거워 화상처럼 달구어진 내 얼굴 위로 땀이 사납게 흘러내렸고, 그것들이 내 눈속에 들어갔다. (중략) 마른 꽃다발과 뜨거운 술병, 금이 간 성모상들을 넘어 간이 화장실을 들렀다. 변기 속에는 죽은 구더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망월동 공원 묘지 제3묘원은 찌는 듯이 무더웠고 그것은 고의적인 형벌 같았다. 나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묘원의 인상만 자신없이 기억 속에 집어넣었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 교차로에 있는 이곳 '충금'다방에서 광주와의 첫 만남을 적는다.

-유령의 도시 광주, 그러나 화산의 도시 광주여, 잘 있거라. (중략) 무등의 권태로운 잔등 아래로 외곽을 벗어나는 버스 안에서 돌아본 광주는 어두워지며 밀려드는 안개 속에서 땅속 아득히 꺼져가고 있다.


<순천>

-순천은 나에게 무엇인가. 안개와 병든 지성의 도시, 부패하고 끈끈한 항구, (후략)

-나 태어나 한번도 사진조차 구경 못 한 도시 순천으로, 막막한 절망과 음습한 권태가 안개처럼 부두와 상점과 낡은 건물들을 감싸고 있을 도시로 나는 잠시 피난을 떠난다.

-도시 가득 소금기 섞인 해풍이 군림하고 있다. 예상보다 규모가 크고 번화한 도시였으나 네온 사인을 켠 건물들이 거의 없었다. 검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삐죽삐죽 솟은 가운데 무슨 여관의 간판들만 허공 간간이 빛을 발하고 있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근처 수산물 창고에서 물고기 썩는 냄새들이 풍겨온다. 사내들은 러닝 셔츠 바람으로 검은 바지를 입고 불량하게 아스팔트 위를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렇다. 건물들은 모두 다 숨어 있다. 낮고 고집스러운 단단한 건물들이 불을 끄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중략) 내게 주어진 짧은 순천의 야경은 쓸쓸하고 부랑자의 그것이었다. 누구든지 몇 달만 이곳에서 산다면 쉽게 권태와 체념에 길들여진 욕망을 체질 속에 받아들일 것이다.


<부산>

-부산. 나는 왜 이곳에 또 왔던가. 너무 많이 온 곳. 활기찬 곳. 이곳에선 사소한 절망을 과시할 수 없다. 이 도시는 탐미적 딜레탕트들을 경멸한다. 힘으로, 건강함으로 들끓는 도시.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추악한 방랑자의 모습을 하고 해운대로 갔다. 아침 해운대에는 벌써부터 피서객들에 의해 침범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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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형도 작가의 '1988년 8월 2일(화요일) 저녁 5시부터 8월 5일 (금요일) 밤 11시까지 3박 4일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는 노트의 전문에서 도시와 관련된 서술만 본인이 뽑아봤음. 작가는 3박 4일간 서울->대구->전주->광주->순천->부산->서울이라는 코스를 돌았음.

작가의 필체가 상당히 어두운지라 도시에 관한 묘사도 조금 어두운 것 같음. 읽다가 재미있어서 올려 봄. 혹시 정떡이려나??

기형도(1960~198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