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여러 사람들에게서 제기되는 가설이지만 수용되기에는 너무 근거가 빈약하다고 판단됨.


경부고속선이 완공될 즈음에는 수도권 인구 유출이 느려질 시기였음. 인구 집중이 더 심했을 때 고속철도가 없었는데 덜해졌을 때 고속철도가 인구 유출의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음. 고속철도 완공 후 2000년대에만 한정하더라도 고속철도 이전의 수도권 인구 이동의 원인이 고속철도 이후 달라졌을 거라고 볼 이유는 없음.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 이동의 목적은 더 많은 경제적 기회이지, 4시간 걸리던 거리가 2시간으로 짧아진 것은 아님. 


해외 사례를 보면 프랑스, 독일에서는 고속철도 부설이 대도시 인구 집중의 결과를 낳지 않았음. 프랑스, 독일에서는 전통 산업 도시가 쇠퇴하고 첨단, 3차 산업 도시가 흥한다는 일반적인 경향을 볼 수 있을 뿐임. 정작 고속철도가 놓이지 않은 영국에서는 런던 집중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될만큼 심화되었음. 프랑스, 독일과 영국의 차이는 신산업이 한 도시에만 집중되어 있느냐 분산되어 있느냐일 뿐임. 


일본의 사례를 보면 그 가설이 그럴듯해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음. 그러나 이 주장도 면밀한 검토를 견딜 수 없음. 도쿄 대비 케이한신(오사카)권의 침체는 뚜렷하나 정작 도쿄에 더 가까운 츄쿄권(나고야)는 케이한신에 비해 쇠퇴하지 않았음. 센다이는 오사카보다 도쿄에 훨씬 가까우나 발전하고 있음. 또한 도카이도 신칸센이 오사카권 쇠퇴의 주 원인이라면 산요 신칸센이 개통되고 나서 오사카 서부의 중견 도시들은 오사카보다 더 빠르게 쇠퇴해야 하나 정작 히로시마는 잘 나가는 도시가 되었음. 


교통의 발전이 대도시 집중을 낳는다는 가설이 과연 현대에도 적실한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움. 도리어 산업화의 시기에 교통도 발전했기에 교통 발전이 이주를 부추긴 것으로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농촌에 경제적 기회가 있었다면 아무리 교통이 편리해졌어도 사람들이 도시로 떠났을까)도 있지만 특히 현대 한국에서 대구, 부산, 광주에서 고차 서비스를 소비하던 사람들이 고속철도로 인해 서울에서 그 수요를 충족하게 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움. 최고의 고차 서비스 수요(예를 들면 대학)는 원래 서울로 향하던 것이었음. 어차피 그런 수요는 하루만에 처리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속철도 때문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보기 어려움. 그 가설에 따르면 변화는 대구, 광주, 부산이 아니라 더 가까워서 서울, 수도권으로 더 가기 쉬운 충청권, 강원권에서 더 커야 했겠지만 충청권, 강원권은 낙수 효과를 보고 있음. 


고속철도로 인한 빨대 효과는 사례가 충분하지 않고 인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수용하기 힘든 가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