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조선일보에서 시작한 경평축구전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간 축구경기였음. 


조선 제1의 도시 경성과 제2의 도시 평양은 1000년의 라이벌 관계로, 이 축구경기는 일본 본토에서도 유명했을 정도로 조선을 들썩이게 한 최대의 스포츠 경기였음. 


특히 경기와 충청은 경성의 편을, 황해와 평안은 평양의 편을 많이 들었지. 



총 스코어는 경성 5승, 평양 9승, 무승부 7경기였음. 

경성축구단은 1935년에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고, 평양축구단은 와세다대학을 이겼을 정도로 제국 내에서도 강팀으로 유명했음. 




1942년 전쟁중 일본제국의 구기종목 금지령으로 인해 3년간 대회가 열리지 못하다가

1946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재개되었는데, 오랜만에 열리는 경기로 인해 경찰이 공포탄을 쏘아야 할 정도로 열기가 엄청났음. 결과는 경성팀이 패배했음. 


그런데 당시에는 이미 분단이 시작되고 있었고, 평양축구단은 위험한 육로 대신 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와서 경기를 해야 했음. 


평양축구단은 ‘내년 경기는 평양이니 평양에서 보자’고 했지만, 이 경기는 2022년이 된 지금까지도 열리지 못했음. 



경성축구단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팀으로, 평양축구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 국가종합팀으로 계승되어 5-60년대에 월드컵에서 신생국치고 매우 높은 스코어를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