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1946년 5월 25일자 기사 

"서울의 명칭이 경성부로 존속"

우리가 살고 있는 장안의 명칭은 과연 무엇인가. 해방 후 장안의 명칭은 구구하여 누구는 전대로 경성부라 부르고 또는 서울시라고 부르는가 하면, 서울시를 문자화할 때에는 漢城市라고 하자는 등 장안의 명칭 하나 가지고 의논이 분분하여 일반 시민은 과연 무엇으로 자기나라 수도를 불러야 좋을지 몰라 제각각 멋대로 불렀는가 하면, 관청에서도 이 세 가지 호칭을 잡용해 왔던 것이다. 그러면 서울시와 한성시라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

경성부라는 것은 해방 후 金昌永 부부윤이 있을 적에 부명 개칭에 대한 의견이 나왔었으나, 그 후 즉시 사임으로 그대로 좌절되었다가, 전번에 사임한 李範昇이 취임되자 다시 의론이 대두하여 부청 간부 측에서는 서울시라고 결정이 되어 시장에게까지 이 결정안이 갔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전 시장이 독단으로 한성시로 개정하여 그때 군정청 내무국으로 개칭 신청을 했던 것으로, 법령으로서 결정도 안 된 것이 발설 전파되어 멋대로 서울시이니 서울시장이니 한성시청이니 또 서울의 명칭은 한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市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하면, 영어로 번역을 해서 서울시청이 씨티홀이 된 연유로 부가 시로 갈려졌던 것이고, 한성이라는 한자는 보수적인 견지에서 구 한국적인 견지에서 구 한국 적에 쓰던 한성이 나온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지난 3월 23일 군정청지방행정처장 申東起의 명의로 다음과 같은 이유가 붙은 경성부명 개칭신청서가 반환이 되었던 것이다.

1) 현하 정세에 감하여 시기가 적의치 아니한 것
2) 귀부를 관할하는 경기도지사의 의견이 없는 것

이렇게 해서 서울은 해방 후 6개월 만에 전 이름인 경성부를 다시 찾은 셈이 되었으니, 이에 따라 시장이 아니라 부윤으로 다시 되었다. 그러면 전 구 역소도 구청이라고 간판을 새로 내걸었는데 이것은 또한 정식으로 법칙 결정이 없이 고쳐서 붙인 것이니, 앞으로 경성부와 같이 다시 일제 때 이름으로 고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이 기사를 통해 해방 후 조선에서 서울의 이름에 대한 혼란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음. 


당시 경성부에서는 부윤이 독단적으로 도시 이름을 한성시로 바꾸고, 이를 미군정에 허가신청을 했는데 미군정은 시기가 적절치 않고 경기도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 하여 이를 반려하고 경성부로 존치됨 

 

그리고 김형민 경성부윤이 취임하자, 그는 도시이름을 ‘서울’로 확정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지금의 서울로 이름이 확정되었음. 당시에도 이승만의 이름을 딴 ‘우남시’라는 이름에 대한 주장이 강했으나, 그는 무조건 서울을 밀어붙혔음   


김형민은 서울 내 일제식 행정구역인 정, 통 등을 정리하고

지명도 바꾸어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을 만든 업적이 있음. 



그는 사실 원래 경성에서 삼일사라는 회사를 운영중이었는데,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신문에 ‘김형민’이라는 사람을 찾습니다‘ 라는 공고를 내고 그를 시장으로 취임시켰음. 

하지 중장의 삼촌이 김형민의 웨슬리언 대학교 동창이었기 때문…. 당시 미군정이 굉장히 거시기하게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