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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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내가 되어라.

멋대로 정한 한계에 나를 끼워 넣지 마라.

넘실거리는 수은 바다와 유리로 만들어진 육지는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니.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9)

― 단 하나의⋯











“이봐, 데니스.”




날 부르는 소리에 미하일 쪽으로 돌아보자,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보였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올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돔처럼 생긴 거울의 방은 전대장님이 액체 구슬에 갇히기 직전까지의 모습으로 멈춰있었다.




“음⋯ 깨지질 않는군.”

“어떻게 생각하지?”

“허!”




생각할 게 있나?


나의 어이없다는 듯 내뱉은 한숨에 미하일 녀석도 의미 없단 걸 알았는지 방패를 고쳐잡았다.

우리에겐 답이 너무도 명확하다.



“저건 멈춰도 우린 멈출 이유가 없어.”

“그래, 맞아. 전대장님이 저 안으로 들어가신지 1분도 안 지났어. 그리고⋯ 전대장님이 펼치신 염동력은 남아서 우릴 지켜주고 있다. 내가 바보 같은 소리를 했군.”

“잘 알고 있네. 우린 그 이상도 해내야하지. 전대장님처럼.”




그림자 공간에서, 우리는 계속 생각하고 고뇌했다.

우린 모두 똑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제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 평범한 녀석들이 전대장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부전대장님과 예고르녀석의 조언과 부탁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한참의 고뇌 끝에 우리는 그날과 같은 답을 내렸다.

우리를 잠들게 했던 코핀-6와 거센 눈보라가 치던 그날과 같은.




“그냥 아낌없이 쏴! 재생할 틈을 최대한 주지마! 늦추는 거야!”

“에스타크 56문! 좌표 고정하라!”

“일단 버텨! 이기려 들지 마!”




함성인지, 고함인지. 저마다 한마디씩 얹어가며 서로를 다독이고, 끝없이 폭격을 퍼붓는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서로에 대한 믿음과 포격 세례다.




“크윽⋯!"

“알렉세이!”


“젠장, 재생 중에도 염동력을 계속 방출하고 있다! 긴장을 늦추면 안 돼!”

“괜찮아! 전대장님의 방식과 똑같이 하는 거라면 사각지대가 있어!”




땅이 갈라지고, 바위가 날아들며, 회피기동을 하지 못하는 포격 전차 몇 기는 반파되어간다.

데모고르곤 답게 어마어마한 화력과 그간 습득한 전대장님의 전술 지식이 있는지, 사각지대를 노려 우리를 공격했다.




“모네카! 다른 에스타크들은 아직 멀었나!”

“과열 상태에서 발포하다간 포신이 녹아내릴 거에요⋯!”

“음, 곤란하군. 일단 준비된 건 아낌없이 쏴버려!”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메이즈 전대 모두는 이미 전대장님의 전투법을 잘 알고 있었고, 도플갱어는 여전히 전대장님의 힘을 조금 더 과시할 뿐 방식은 같았다.




“크흐흐⋯⋯ 흐흐흐흐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꺼림칙한 목소리.


아마 우리가 한낱 귀찮은 벌레떼로 보이겠지, 그러니 전대장님의 모습을 하고 비웃는 거다.

하지만 그 비웃음이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릴 거라 생각했다면, 아주 큰 오산이다.


우리에게 있어 사기 저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흠, 웃고 있는데? 혹시 모르니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게 어때.”

“하! 실컷 웃으라지. 음⋯?”




하지만, 이 배짱이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하겠지.

그 생각대로, 눈이 아플 정도로 붉은 설원에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촉감으로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 슈트와 바이저를 쓰고 있으니까.

단순하게 불어오는 바람이라면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불어오는 바람이 단순히 거세게 부는 자연풍이 아니라는 것.




“자, 머저리들에게 상상도 못 한 걸 보여주지!




까드득, 쿵.

우리가 대열을 잡은 이 땅 위로 깊은 크레이터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혹감이 머리를 지배한다.

설마⋯⋯. 정면공격이 통하지 않아서 지반 자체를 잡아당겨 무너뜨렸나?




“이런! 빨려 들어간다!”

“으, 으아악!”




매섭게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는 바람은, 그저 한 점으로 우리와 같이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져 그 한 방향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뭐라도 잡아야 해! 에스타크를 붙잡아!”

“데니스!!”




다행히 맥을 못추리고 끌려가던 도중, 에스타크를 붙잡은 미하일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으윽! 우릴 한군데다가 모아서 우그러뜨릴 생각인가 본데? 악취미로군⋯”

“말할 시간에 내 손이나 더 꽉 잡으라고!”




그 힘은 서서히 강해져 포격 전차들도 조금씩 끌려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기계와 서로를 의지해 매달리는 중에도――




“으흐흐⋯⋯. 자, 이건 생각 못했지? 너희 같은 졸개 놈들이 상상도 안 해봤을 힘이거든?!”




적은 우리를 비웃고, 재생을 끝마쳐 가고 있었다.

구태여 이런 방식으로 우릴 말려 죽이려는 이유가, 그저 자기과시인지 악독한 취향이라도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확실한 건 우리에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에스타크에 매달린 미하일 녀석의 손을 잡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짐짝은 질색이다.




“여차하면 놔라! 미하일!”

“놓을 리가! 애초에 에스타크도 점점 빨려 들어간다고!”




그 말에 불현듯 미하일이 말한, 그 한점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한점으로 모여 피와 살덩어리가 될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했다.


그건 큰 오산이었다.




“아냐!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다! 지금 힘의 중심축⋯ 저기엔 아무것도 없어!”

“뭐? 그럼 이건⋯!”




사람과 전차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점점 가속이 붙어가지만, 빨려 들어가진 않는다.


그리고, 꺼지면서 생긴 벽면에⋯ 바짝 붙어서,

돌고 있다⋯⋯.




“⋯⋯악질이군.”




‘원심분리’를 연상시키는 현상.

눈앞의 적은, 그런 방법으로 우릴 잔인하게 죽일 셈이다.


이미 단순한 형태를 가진 공격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다.




“살덩이 뭉치가 되는 게 아니라, 피와 살이 분리되겠는걸?”

“태평한 목소리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큭⋯!”




태평한 것이 아냐.




“그렇게 들렸나?”




나는, 우리는 그저 믿을 뿐이다. 


다소 무모하고, 미련해 보여도 상관없었다.




“전대장님이 믿고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도 그만큼 믿는 거라고!”


“⋯! 무너지는 소리가!”




















다시 한번 거울이,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전장을 메운다.

맑은소리와 함께 높은 곳을 중심으로 깨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내려친 강한 충격에 데모고르곤이 펼친 물리법칙도 멈춘다.


유리⋯ 거울 조각의 비가 전장을 덮고, 어느 한점은 그 힘을 잃었지만.

우리는 관성 때문에 그대로 튕겨 나가버렸고,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왜지? 


왠지 모르게 몸이 가볍게 뜨는 것 같아⋯⋯.



그리고 이건⋯ 메이즈 전대원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느껴봤을, 아주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득해져 가는, 멀어지는 것만 같았던 청각이⋯ 그 흐린 안개를 뚫고 선명한 함성이 뚫고 들어왔다.

나는 이 구름에 안겨있는 것만 같은 감각과 전율이 올라오는 함성에 몸을 맡기며 눈을 떴다.


거울이 깨져, 하얗게 변해가는 눈보라와 전장. 무엇인지 모를 청아한 소리.


그리고 그 비와 눈 사이로 나타나, 고고하게 걸어 내려오는 무언가를 목도한 순간.

나도 뒤늦게 모두를 따라 당연하다는 듯 그 함성에 섞여들어 갔다.




“전대장님⋯!”










***














https://youtu.be/dkZ284otk0I?si=H-NyzJ9bNe1xwGkG





 

“너⋯⋯. 지긋지긋할 정도로, 용케 돌아오는구나?!”




도플갱어가 나에게 외치는 광기 서린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눈보라로 뛰어든 순간 목도한 모습⋯ 그 앞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잔인하게 죽을뻔한 전대원들을 구하는 것이었으니.












“우와아아아아악!! 전대장니이임―――!!!”

“전대장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 안에서 느끼고 받아들인 모든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의 환호성이 내가 늦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한결 가벼워진 몸과 그림자가 된 후 느끼지 못했던 차가운 감각을 다시 느꼈다.

전우들의 침식을 모두 끌어안으며 생긴 통증도 이제는 미미하다.


게다가, 이 정도의 대규모 범위에 섬세한 컨트롤을 요구하는 힘은

앞으로도 구사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나는 옆으로 뻗었던 침식된 오른팔을 천천히 거두었다.




“크흐흐⋯ 됐어. 뭘 하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어차피 너도 껍데기만 빌려 쓰고 왔을 텐데. 그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그러한지는 너 나, 류드밀라가 겨뤄보면 알겠지.”




관성으로 인해 날아오른 대원들을 지면 위로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이제 남은 것은 전대원들 모두와 함께 싸워 류드밀라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것.


반격의 시간이다.











“전대원에게 전파한다.”


“나를 믿고, 끝이 보이지 않을 이 역경을 견뎌 전선을 유지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적은 나를 본떠 만들어진 도플갱어 타입 데모고르곤.”


“관리국과 세계를 위해. 대원들 스스로를 위해.”


“이 자리에 없는 전우들의 몫까지 다하여.”


“적에게 강철의 눈보라를 선사하도록.”













나의 각오에 부응하듯 찢어질 듯한 함성과 함께 포격 세례가 시작된다.


새빨갛게 물들었던 전장은 어느 순간부터 그날의 새하얀 눈보라를 재현하고 있다.



다시 한번 그날의 전투처럼, 우리는 승리를 가져와야 한다.

⋯⋯아니, 가져올 것이다.





“크큭⋯ 크흐흐⋯ 이히히⋯!"




입은 찢어지라 웃어도, 나를 향한 눈에는 터질듯한 실핏줄이 동공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내가 그러했듯이, 당연히 너도 초조하겠지. 


그러니 나에겐 바로 잡고, 똑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것이다.




“너 또한 나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강한 힘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새롭게 만들어진, 침식된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주먹을 쥔다.

이미 다 무너져 내려오고 있던 거울 파편들이 허공에서 멈췄다.




“⋯와라.”




허공에 멈추었던, 거울 파편들이 한순간에 지면으로 곤두박질친다.

그와 동시에 이 자리에 없는 전우들의 환영이 새로이 생겨난다.




“그래! 어디 덤벼봐, 바퀴벌레에에―――――!!!”


“그림자 공간, 전개!”




이젠 마치 나의 무대라는 듯, 기억 속 멀리 존재하고 있던 코핀-6 함선도 눈보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지금.

이곳, 이 관 안에서 결판을 지어야 할 때다.




“에스타크 전 기체 발포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내가 제압하여 길을 만들겠다.”




정말 모든 것이 그날과 닮아있었다.


나와 도플갱어를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