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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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짝이는 영약을 보아라.

만병통치약 같지 않으냐?

 

거울 속 환희에 찬 여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잔을 들어 수은 덩어리를 한 번에 삼켰다.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6)

― 유약함

 







마주하는 것들은 적대적일 수도 있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모두를 지키기로 선택한 가능성이라면,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과대평가였다.


거울의 방이 보여주는 생생한 감각과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가진 가능성들.

그것들이 제집 드나들듯이 서로를 잡아먹고,




“어때? 이게 한계라고. ”




궁극에는 를 노리고 있다.


서로는 서로의 거울.

어쩌면 내 목을 조르는 이 눈앞의 류드밀라가 진짜가 될지도 모른다.




“남들 감싸느라 막대한 힘을 포기하고, 벌레처럼 살아남을 줄만 아는 바퀴벌레일 뿐이지.”

“하⋯ 지만⋯⋯.”

“뭐라고? 잘 안 들려. 키킥.”




포기할 수 없어!




“함, 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 일념 하나로 무거워진 양쪽 다리를 들어 도플갱어의 목을 걷어찼다.




“오오?”




직접 물리적 타격을 줄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도플갱어가 나를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그만큼 포기할 수 없으니까.

아무리 절망적이라 한들,

내가⋯ 전대장이 포기해버린다면 전대원들은 누가 지키고, 무엇을 믿고 전장에 선단 말인가.

 

 

 

“기운 넘치네? 하지만 그것도 곧 끝이야. 날 흡수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놓고선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순간, 운명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고? 언젠간 내 이긴다는 건 시간문제였어.”

“지금 에게 결과론을 들이미는 건가?”

“변하지 않는 결과가 보고 있잖아?”




공중으로 떠오른 도플갱어는 양팔을 벌렸다.

마치 이 세상을 다 가졌다는 듯이. 이곳의 신이 된 것처럼. 환희에 찬다.

그 환희는 곧 불쾌한 미소로 바뀌었고, 도플갱어는 나에게 경고했다.




“난 ‘데모고르곤’이라고?”














***











실패한 가능성은 나에게 물었었다.

‘왜, 거울의 방을 부수지 않냐’고.


애초에 이 관 안에서 성공한 가능성이라는 조건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땐 그저 다음 가능성을 보려면 거울을 깨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을 부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게 아무리 두려운 적이라도, 나는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눈앞의 도플갱어 데모고르곤 역시 거울의 방을 부수지 않고 있다.

계속 파멸적인 힘을 과시하며 나를 제압하려 드는 게 전부.




“전력을 다해봐, 바퀴벌레!! 가 잘하는 거 있잖아?”

“큿⋯!”

“그때처럼 졸개들 불러서 싸워보라고! 병정놀이는 질려버린 거야?! 하하하하하!”

“네놈 원하는 대로 두지 않을 거다! 전대원들은 장난감이 아냐!”




저 녀석도 거울의 방의, 관 안에서의 조율이 끝나는 조건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관 안에 들어온 류드밀라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될 사람을 가르는 기로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죽이거나. 흡수하거나.

도플갱어와 원본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면.

결국 류드밀라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아, 설마 내가 밟아 죽일까 봐 걱정하는 거냐? 걱정마. 가 완전한 힘을 포기하면서까지 애지중지한 졸개들은 가 자비를 베풀어서 마음껏 부려줄게!”




누구 마음대로⋯!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은 도발이니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일반적인 카운터들은 데모고르곤 앞에선 개미나 다름없는 미약한 존재.

부전대장도 없는 지금 나를 따라온 모든 전대원들은 모두 일반인⋯⋯.



전대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늘 그래왔듯 대원들을 계속해서 지켰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최선의 선택이었다.




“원래 클리포트 게임을 위해 대비해둔 거였다만⋯⋯.”




아무리 견고한 높은 벽의 적일지라도,

잊어선 안 되고 끝없이 인지해야 한다.


나는 지금 당장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후일을 위해 안배해둔 수를 꺼낸다.


4종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포격 대포.

에스타크의 화력과 함께라면 승산이 있다.




“흥, 무식하긴.”

“누가 무식한 건진 겨뤄보면 알겠지.”




가능성의 머리부터 삼킨 탓일까. 그림자 집속반응은 ‘머리’.

에스타크의 화력지원을 통한 엄호를 바탕으로 집속반응이 강하게 느껴지는 저 목을 쳐내야 한다.



 

“하아, 정말 애처롭기 짝이 없어. 가 성질이 급해서 말이야. 당장에 를 목 졸라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고!”




역시 움직이는 타깃을 조준하기엔, 모네카의 도움 없이는 조금 힘들군.



하지만⋯ 4종도 견제한다는 에스타크의 포격은 분명히 도플갱어에게 있어서 유효타였다.

타깃은 계속 움직였고, 염동력 자체로 막으려는 시도 탓에 직격타는 아니었으나,

신체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그림자들 특유의 재생 현상을 미약하게 보이고 있었다.


도플갱어는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에스타크의 포를 하나하나 우그러뜨리려고 시도하는 게 분명한 증거였다.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니 수월하진 않겠다만, 도플갱어는 꽤 집요하게 에스타크를 노렸다.



그걸 따라 승리의 수를 하나 도출한다.


내가 만약 저 몸을 붙잡을 수 있다면, 에스타크의 화력을 전부 머리로 모을 수 있다.


잡을 수 없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피해를 최소화하여 격파해야만 하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바로 실행에 옮긴다.

이 거울의 방이 아직 나의 거울의 방이라면.


제발.


그런 간절함으로 나는 왼손을 들어 서서히 도플갱어의 몸을 옥죄었다.




“하아?”

“길길이 날뛰는 것도 거기까지다!”




모든 입자포가 도플갱어로 향한다. 

나의 모든 힘을 도플갱어를 붙잡는데 쓰는 탓에 보호받지 못한 에스타크가 빠르게 부서지고 손상되고 있었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적어도, 몇 기라도 좋으니. 제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멍청한 놈아. 풉, 크크큭⋯”

“하⋯ 하아⋯⋯.”




의미 없는 도발에 대답할 힘 따위 없었다.

계속해서 움직이려 드는 저 녀석을 한 좌표에 고정해야만, 에스타크의 155mm 입자포를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을 테니.


왼손이 파르르 떨려오고, 주변에선 꺼림칙한 금속 긁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나의 오른쪽으로 에스타크가 파괴되어 떨어져 날아든 장갑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감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곳엔 함선이 없음에도, 위험하다는 경고음이 끊임없이 귓가에 울린다.


그리고, 나에게 붙잡힌 도플갱어는⋯




벌레 날개짓은 그게 다야? 응? 퍼덕거리는 게 추한데?”




힘겹게 붙잡고 있는 나를 향해 보란 듯이,

도플갱어를 중심으로 사방에 염동력을 방출했다.











***










“네가 나를 구해준 이유를 묻고 싶다.”

 

“그건 ‘실패’하기 때문이다. 류드밀라.”

 

“⋯⋯가 실패한다고?”

 

 

 

“그럼 실패한 가능성인가?”







나라는 존재가 투명한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고, 희석되어버렸지만,

그것 또한 나인가?



밉고, 두려운. 그 도플갱어의 말처럼⋯

나라는 그림자는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력을 가졌다.

아니, 이걸 생명력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런 상태가 되어버린 뒤론 ‘지친다’라는 개념은 잊어버렸다.

분명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는 반파된 에스타크 위에 허리가 뒤로 꺾인 채 쓰러져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재생되지 않는 오른팔을 보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까?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엔, 새하얗고 붉게 물든 눈만이 내려앉았다.




“흐음, 이제 포기할 마음이 들었나 봐?”

“그럴⋯ 리가⋯⋯.”




점점 다가오는 목소리에 다시 왼손을 뻗어 막아보려 했다.

염동력에 가로막힌 도플갱어는 우습다는 듯 한 번에 반발력으로 밀어붙인다.


젠장. 젠장⋯⋯!

이렇게 쉽게 밀어버린다고⋯?


아니야, 아직 내가 미처 회복하지 못했을 뿐이야⋯⋯.


분명 신체에 큰 타격을 입어서 재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일 거야.

지쳤다는 개념이 아니다.


그니까.


그러니까⋯!


빨리, 빨리 재생되라고!

그림자에 뼈나 살덩이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제발, 제발.

제발!




가 특별히 원본에 대한 예우는 충분히 해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흐흐흐.”




도플갱어의 오른손에서 침식 쐐기가 솟아 나온다.

염동력이 아니라 굳이 이 앞까지 와서 쐐기를 박으려는 걸 보면, 날 흡수하려는 게 분명했다.


위험해.


안돼, 살아남아야 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모두를 지켜야 한다.


그런 가능성을 찾아야만 해.




“으으윽⋯⋯!”




방법을 바꾸어 염동력으로 내 몸을 민다. 꽤 먼 거리로 굴러떨어져 붉은 눈밭을 뒹굴었다.


그렇게 간신히 침식 쐐기를 피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느 쪽에 더 많은 힘이 남았는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도플갱어는 염동력으로 내 몸을 그대로 눈바닥에 찍어누른 채로 다가왔다.




“으흐흐⋯ 그래도 꽤 재밌었는데 말이야. 아쉽게 됐네?”




알고 있었다. 쉬운 길은 아니라는 걸.

분명한 격차에 좌절할 자격조차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 원본이 멍청한 새끼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추할 줄이야. 크큭.”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이토록 약한 내가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능성’을 찾아.



살아남아서 모두를 지켜야 해.

그 누구도 죽게 할 수 없어.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병정놀이 장난감은 가 잘 데리고 놀아줄게?”


“크으으윽⋯!!”




흔들린다.

시선이 마구잡이로 요동친다.




“으흐흐⋯! 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모르겠지?”




그게 극한까지 발버둥 치면서 생기는 부작용인지⋯


아니면, 힘의 차이에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인지 알 길은 없었다.




“크으으윽⋯! 으아아악⋯⋯!”




시야와 생각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구역질이 난다. 


내가 짊어지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으면⋯ 안돼.




“마지막까지 질척거리긴!”




일어나야 해.


일어나, 류드밀라.


몸을 일으켜 류드밀라――――!!





제발⋯⋯.





“이제 꺼져라! 명줄만 질긴 바퀴벌레!



























파스스⋯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너무 익숙한 소리라서, 놀란 나머지 질끈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




“거기까지입니다.”




전 대원의 방패가 부서지는 소리는 숱하게 들어왔으니까. 바로 알 수 있었다.

당혹감에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너, 뭐야? 죽고 싶어 환장했냐?”

“미하일! 어째서⋯⋯!”




쐐기를 정통으로 막은 방패가 부서지고,

뒤따라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데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 기체, 미리 지정한 좌표로 발포하라!”




눈부신 입자포가 쉴 새 없이 쓰러져있는 나의 시야 위로 날아가, 도플갱어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