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1편 2편 3편


저 윤기 나는 수은이 출렁거리는 유리창에 비친 나.

여러 명, 수십 명. 무수히 많은 나.

모든 것이 '나'의 향연이었다.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4)

― 데모고르곤

 









처음부터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니 가능성이 다른 가능성에 간섭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와 가능성의 주변으로 부서져 내리던 유리 파편과 거울 조각이 사라지고, 주위는 황량하고 아무것도 없는 잿빛의 땅이 되었다.


가능성  데모고르곤 은 무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다른 가능성 괴물 을 공격한 것과는 다르게, 나에게는 아무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오듯, 나에게로 걸어 내려왔다.


염동력자가 굳이 거리를 내줄 이유가 없는데도 다가온다. 이 행동의 의미는 분명했다.

적대적이지 않다면 굳이 먼저 공격할 이유는 없다.


여태 만나왔던 가능성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니, 이번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나를 구해준 이유를 묻고 싶다.”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이게 느껴지는 회색 평원에 바람이 불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남았다는 증거인 듯,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가능성은 바로 답하지 않았고,

뜸을 조금 들이고 나서야, 가능성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나에게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건 ‘실패’하기 때문이다. 류드밀라.”

“⋯⋯가 실패한다고?”




이번엔 대답해주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며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예언가라도 된 것처럼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이 정말 ‘나’라는 존재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낯선 분위기였다.

그래도⋯ 저 말이 나오는 데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실패한다고 단언하는지.

그게 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실패한 가능성인가?”


“⋯⋯"




또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시선이 내가 아닌 저 멀리 향한다.

조금씩 그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천천히 눈에 담았다.


건물이나 시체는 물론 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조금도 없다.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이⋯ 흙먼지만이 황량하게 날릴 뿐이었다.



그걸 자각할 때,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설마, 이면 세계⋯⋯?”




이 거울은 이면 세계의 고요함을 그대로 담았고, 무거운 공기와 냄새까지도 지독하게 닮았다.


⋯⋯.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맨 처음에 만난 가능성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딘가 비어 보이는 표정과 행동이 자꾸만 불안하게 했다.


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실패했냐는 질문에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은 그 행동을 다시 떠올리니 어딘가 시큰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의문이 싹을 틔운다.


나에겐⋯

정녕 실패뿐인가?


아무것도 남지 않거나,

모두를 내 손으로?




“넌 대체 무엇――”

가 가진 두려움을 직시하지 않는 한, 실패할 것이다.”

“⋯⋯나에겐 시간이 없어. 가능성.”




제대로 된 설명은 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무표정과 도돌이표로 돌아오는 말은 내 인내심을 다 태워버리기 충분했다.



됐어, 이 거울의 방이 보여주는 가능성이 또 실패한 거라면⋯

또, 그런 거라면⋯




⋯⋯젠장!




“일단, 구해준 것에 대해선 감사를 표한다.”




머리를 몇 번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덜어낸다. 세 번이다. 이제 겨우 세 번 실패한 거다.

나에겐 의무가 있었다. 이렇게 발목을 붙잡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와 의미 없는 대화로 시간을 보낼 만큼 여유롭지 않아. 가 비단 실패했다는 이유만은 아냐.”


“⋯⋯.”


“나는 전우들과 내 친구를 지키기 위해, 그만한 힘을 가진 ‘나의 가능성’을 찾으러 온 것이다. 그러니 무의미하게 시간을 끌 생각이라면⋯”


“하지만, 류드밀라⋯”


“또 같은 말을 반복하겠다면 힘으로 부수고 나갈 수밖에 없어!”




그 말과 함께 염동력 출력을 높이려는 순간⋯


고무풍선이 터지는 것처럼, 퍽!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오른팔의 격통과 함께 내가 튕겨 나갔다.


내가 가한 힘이 가능성보다 약해 밀려난 것이라기보단⋯

이건 가능성의 일방적인 척력이었다.


저항하기도 어려운 압도적인 힘보다 더 아픈 것은, 지속적인 오른팔의 통증이었다.

분명 나에게 정신적인 공격까지 가했던 그 가능성괴물은 지금 나를 공격한 가능성데모고르곤이 끝장을 낸 게 아니었나?


왜⋯⋯?




“으윽⋯⋯.”

그것괴물 또한 였다. 그러니 가 하나 묻지.”




이런⋯!


순식간에 다가온 데모고르곤에 놀라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다가오는 건 적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래도 된다는 자신감이었나?!


공중으로 날아올라 함포를 소환해 가능성을 향해 조준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주저 없이 공격할 수 있도록.




입으로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 왜 이 거울의 방을 부수지 않는 거지?”

“뭐라ㄱ――” 




나의 함포가 그대로 힘없이 구겨져 종잇장이 되고, 나의 오른팔을 그대로 강타한다.

충격을 버티기 위해 출력을 높였고, 분명한 반발력이 느껴졌음에도 압도적인 힘을 이기지 못해 추락했다.


곤두박질치면서 느껴지는 통증과 오른팔의 격통보다도 의문이 앞선다.


왜 거울의 방을 부수지 않냐고⋯⋯?


가능성이 나에게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이대로 맥없이 엎어져 있을 순 없어 염동력으로 몸을 일으킨다.




“그야⋯ 쿨럭⋯! 가 가로막고 있으니⋯⋯ 를 이겨야만⋯⋯”


“모든 걸 내던지지 않으면 지킬 수 없고, 직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알아! 가⋯ 가벼운 마음으로 관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왜 두려워하지?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어. 류드밀라.”




가 두려워한다고?


어이없는 질문에 데모고르곤을 향해 염동력을 가해 밀어내려 온 힘을 다해보지만,




“미지는 당연히 두려운 법이고,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이 거울의 방은 류드밀라가 만든 것.”




아무리 애를 써도 밀어낼 수가 없었다.

역시 실패한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결국 데모고르곤인가⋯⋯?


결국 나는 거리를 벌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곳에 비치는 우리서로가 서로의 가능성이다.”

“⋯⋯!! 가까이 오지 마!”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류드밀라가능성이다.

그 말뜻을 단번에 이해해버린 나는 더더욱 거리를 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공중으로 떠올라 계속 거리를 벌렸다.




“젠장⋯! 라는 존재도 실패한 나의 입장에선 가능성이라고⋯?”




지금 이곳, 관 안에 들어와서 본 것들은⋯⋯


언제든 나는 내 전우들을 공격하거나, 흡수하고,

데모고르곤에 준하는 힘을 얻고도 아무것도 지킬 수 없으며,

이미 과거에 흡수했던 도플갱어가 나를 장악하는 가능성밖에 보지 못했다.


내가 나의 가능성을 관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 또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관찰당하고 노려지고 있다는 것은⋯


설마 가능성이 다른 가능성에 간섭하는 것도,

내가 거울의 방을 들여다본 것과 같은 건가⋯?!


어쩌면 나 스스로 주장하는 나라는 존재가 흡수당할지도 모른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결말’을 바라진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것은 다. 하지만 관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실패했나?’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나?”




가능성은 이제야 거슬린다는 건지, 힘들다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인상을 구기며 나를 지면으로 눌렀다.

평범한 사람, 카운터였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압박이었다.


질식이라는 개념을 다시 주입 당하는 기분에 시야가 흐려졌다.




“케흑⋯! 콜록⋯!”




불리하다.

불리해도 너무 불리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거울의 방을, 저 가능성을 이길 수 있지⋯⋯?


더는 안된다는 걸 확인시켜주겠다는 듯, 찍어누른 것도 모자라 눈앞으로 끌어당겨 온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대⋯체⋯⋯ 윽⋯! 크아아악――――!!”




오른팔이 물걸레를 짜내듯, 꼬이고 비틀린다.

마치⋯ 인간이었을 적, 인간이었다면 버티지 못할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 데모고르곤이 내 팔을 비틀고 있나⋯?

아니다. 이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똑바로 보아라. 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정말로 데모고르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앞으로 끌어와 잡고 있는 것이 전부.

내 오른팔을 비틀고 있는 건⋯⋯ 데모고르곤이 확실히 아니었다.




가 처리하겠다.”




데모고르곤의 뒤에 침식 쐐기가 순식간에 나타나고, 쐐기의 끝은 모두 한곳으로 향한다.

단숨에 잘라버리겠다는 각오가 벼려진 날카로운 쐐기의 날⋯⋯.


그 끝을 따라 도착하는 곳은 나의 오른팔 어깨. 나의 어깨였던 것은⋯⋯




“ 늦었어. 바 퀴 벌 레. ”




잊고 있었던 또 다른 내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텀 길어져서 미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