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두렵다면,
네가 그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권력을 허락했기 때문이지.
거울의 방 : 크레스니크 프로젝트 (3)
― 거울상
지금 펼쳐진 풍경에 대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피부에 닿는 침식파만으로도 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으히 히 힉!”
“넌⋯ 데모고르곤이군.”
대화해볼 가치도 없었다. 지독한 침식파와 날 노려보는 빨간 눈동자로 확신했다.
더는 엮일 필요가 없다.
조금의 지체 없이 바로 부수고 나가야겠다고, 힘을 방출하려는 순간――
“큭⋯!”
공중에 떠 있던 내가 지면으로 떨어지고, 땅은 늪지대처럼 부서져 내려앉았다. 머리 위부터 무식하게 내려찍은 모양이었다.
염동력으로 몸을 방어한 덕에 신체가 고기 파편처럼 터져버리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신속하게 내가 박혀있는 지반을 한정으로 중력을 역전시켜 땅속에 박혀버린 내 몸을 역으로 띄워 올렸다.
뜸 들일 필요 없이 지반이 부서지며 생긴 바윗덩어리들을 들어 올려 저 사족보행 괴물을 향해 던졌다.
“처참하군⋯ 나의 가능성이라고 부르기 싫어질 정도로⋯! 윽⋯?!”
날려버린 바윗덩어리를 그대로 받아친 모양이었다.
산산이 조각나서 퍼진 돌덩이들이 산탄총처럼 퍼져 나에게 되돌아왔다.
짐승 이하의 모습이긴 하나, 역시 데모고르곤이라는 체급은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림자가 되기도 전부터, 그 후로도⋯ 데모고르곤 자체는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방심해선 안 되나, 그렇다고 아무 저항도 못 하고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자부했다.
“제압하지 못하면 거울의 방은 부술 수 없나⋯”
미치겠군.
제일 먼저 조우한 가능성⋯ 첫 거울의 방을 부수고 나온 것처럼, 거울의 방을 부수기 위해 사방으로 염동력을 방출해 공간을 깨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장은 저 적대감 가득한 괴물을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전투 패턴을 관찰했다.
밀치고, 찍어누르고, 집어던지기⋯ 고작 그것뿐?
“인간이 인지하는 수많은 물리법칙 중에서도 고작 그것밖에 쓰질 못하나?!”
이 싸움은 내가 우위에 있다.
저 괴물도 일단 나라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실상 지성이 없는 것처럼 무식하게 나를 공격하고 있으니 빈틈도 명확했다.
나는 저 처참한 가능성에게 일갈하며 저 무식하게 움직이는 몸뚱이를 지면으로 끌어내렸다.
빠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갈라지고, 괴물이 그 중심에 점점 빨려 들어갔다.
내가 누르고 있다고 판단한 건지, 저 괴물이 위로 미는 힘이 느껴졌다.
“잡아당긴다는 개념도 잊어버린 걸 보니, 한때 인간이었다는 자각마저 잊은 모양이군. 그러고도 메이즈 전대의 전대장이라고 말하지 마라!”
상반신만 내놓은 채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늪에 빠진 짐승과도 같았다.
이대로 둘 수 없었다. 저 괴물이 나라면 저런 모습은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대로 내려찍어 거울의 방과 함께 통째로 부수기로 마음먹었다.
무너져내리며 생기는 부서진 지반을 들어 올려 괴물의 상반신과 머리끝까지 덮어 누른다.
“이대로 최대출력까지 올려 찍어 눌러주마. 괴물⋯!”
빠드득 까드득거리는 살벌한 굉음과 함께 검은 짐승이 땅 아래로 사라져간다.
이대로 임계질량을⋯
“으 히 히히 히 힉――――――!!!”
“크윽?!”
속임수였나⋯?!
그 순간 땅을 뚫고 날아온 무언가가 내 오른팔을 강타했다.
갑자기 몰려오는 격통에 부유 높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위아래로 요동쳤다.
“으윽⋯⋯. 이, 이건⋯?”
한순간이지만 ‘솔개’가 내 오른팔에 박혀있는 걸 보았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기 전에 솔개는 내 팔 안으로 사라져버렸고, 격통을 버티지 못한 나는 땅으로 추락했다.
“그래도⋯ 질 수 없―――!!!”
순식간에 나에게 날아든 검은 물체와 엉켜 땅을 뒹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돌발상황 속에서 간신히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적안과 눈이 마주쳤다.
“쉬 울 거라 고, 생 각 했어?”
“시끄럽다! 난 알량한 각오로 이곳에 온 게 아냐! 너야말로 쉽게 말하지 말란 말이다!”
“순진 해!”
밀쳐내려고 출력을 높이지만, 어째선지 괴물의 출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저놈이 날린 솔개의 영향인가?
“크으윽⋯⋯ 으윽⋯⋯ 떨⋯어져⋯!”
지금 분명히 내가 밀고 있다.
서로 밀어내는 반발력에 의해 바르르 떠는 검은 몸체가 내 출력을 버티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압도하지는 못하나, 반드시 기회는 있다⋯⋯.
“웃 기시네.”
“가치 없는 질문에 답할 시간 따위⋯!”
“바 퀴벌레 따 위 가.”
“뭐⋯?”
나를 깔고 올라탄 괴물이 무엇인지를 직감하자, 괴물의 머리가 까드득 소리를 내며 변형된다.
솔개의 모습이 드러났다가, 머리가 뾰족하게 변질한다⋯⋯.
설마 내 팔에 박힌 그 솔개도⋯⋯.
검고 빨간 침식 쐐기가 내 눈동자에 담긴 순간엔 이미 늦은 뒤였다.
분명히 찔린 것 같은데⋯⋯.
눈이 시릴 정도로 새빨간 시야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강제로 셀로판지를 씌운 듯한 느낌에 눈에 손을 대려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극단적인 색감의 시야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헉⋯ 허억⋯!”
차마 떨어뜨리지도 못하고, 꽉 붙잡아서 놓지 않았다.
깨닫는 순간 붉은 색채가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쥐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틀림없는⋯
예고르의 머리였다.
“이럴⋯ 리가⋯⋯.”
그 충격적인 모습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부, 부전대장⋯?”
주저앉은 나의 눈앞엔 알렉스의 시체가 눈을 채 감지 못한 채 날 보고 있었다.
나에게로 뻗은 오른손엔 기이한 형태의 침식 쐐기가 박혀있었고, 알렉스의 대검이 수직으로 등에 꽂혀있었다.
결국 놓쳐버린 예고르의 머리가 굴러떨어져, 새빨간 피 웅덩이를 향해 구른다.
“모두⋯ 어, 어떻게⋯ 아무도⋯ 살아있는 대원은 없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치고, 둘러본 주위는 시체로 가득했다.
새빨간 웅덩이들은 전부 그들의 피로 고여 만들어 진 것⋯⋯.
철퍽거리는 피 웅덩이를 주먹으로 연신 내려치고, 나에게 일갈한다.
“아냐⋯! 속지마⋯! 속지마라! 류드밀라!”
말도 안 되는 이 허상에 속지마라!
나와 떨어져 관 밖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간 대원들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크윽⋯ 윽⋯”
간신히 염동력의 보조까지 받아 가며 몸을 일으킨다.
강한 중력이 나를 찍어누르는 듯, 몸이 무거워 염동력 없이는 도저히 설 수가 없었다.
“움직여, 류드밀라⋯”
그리고 생각해. 똑바로 직시해야 해⋯
분명 순간적으로 끊기기 직전의 기억엔⋯ 그 괴물이 나를 침식 쐐기로 찔렀다.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나에게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간에, 어떻게든 영향을 주기 위한 하나의 행위였을 테고⋯
⋯⋯.
“우욱⋯!”
나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지금보다 더 유약한 과거의 내가 느꼈던,
극도로 두려운 감각이었다⋯⋯.
아무리 시선을 돌려도, 무거운 몸을 움직여도⋯
온몸이 찢어진 시체, 목이 없는 시체, 팔다리가 뽑힌 시체, 완전히 우그러져 형체를 잃어버린 시체⋯⋯.
그리고 그 시체들은 전부 나의 전우들이었다.
누구도, 내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아⋯ 만약, 똑같은 거울의 방이라면 부수면 그만이다⋯!”
염동력을 방출시킬수록 오른팔에 통증이 느껴진다.
격통에 당황할 시간은 없었다.
침식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보는 환각과 비슷할지도 모르나⋯
급이 다른, 생생하고 현실적인 감각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질 듯이 아픈 오른팔에 시선을 돌린다.
“자, 잠깐⋯ 팔이⋯?!”
분명 조금 전까진 멀쩡한 몸이었는데⋯!
믿을 수 없어서 양손을 펼쳐 확인하고,
몸을 내려다보고,
머리를 흔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고 보아도⋯
“헉⋯!”
이젠 양손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혈흔이 눈에 들어온다.
난 황급히 고여있는 붉은 웅덩이에 얼굴을 들이밀어 상태를 확인했다.
“아냐⋯⋯. 아니야, 아니야, 아냐. 이건⋯ 날 속이는 거다!”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온몸이 마주쳤던 괴물의 모습과 같았다.
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 웅덩이가 나에게로 튀어 오르고,
새빨간 혼란이 내 몸에 매달려 천천히 흘러내린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 이, 이건 내가 아니야!”
이대로 가다간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또 힘을 써보지만, 오른팔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더 아픈 건 눈앞의 참상이었다.
더는 차마 볼 수 없었고,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정의 격통이 더 괴로웠다.
“지금 오른팔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길 벗어나 제대로 된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이런 가능성은 원하지 않으니까.
이런 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말이니까.
“으, 으윽⋯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참기 힘든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간 자체가 흔들릴 때까지 계속, 계속――――――――
끝없이 출력을 유지하던 그때였다.
“흐윽⋯?!”
쩌적거리며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내 시야도 함께 깨졌다.
아니, 정확히는 허공이 깨졌다.
바로 눈앞에 유리창이 있는 것처럼 금이 가고, 주변의 참상과 내가 조각들에 각각 붉게 담긴다.
“하아⋯⋯. 깨⋯ 졌어⋯?”
의심스러웠다. 외압이라고밖에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물체를 밀치거나 파괴하면 반드시 느껴지는 반발력이 있는데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으로 방출하고 있던 염동력이 정확히 내 앞 정면, 그것도 공간의 한 가운데를 깰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그렇게⋯
한점으로 퍼지듯 깨진 유리는⋯⋯.
순식간에 나를 향해 덮쳐왔다.
***
“으으아 아아아아! 크아아 아아 악――――”
목이 꺾인 채 온몸을 비트는 검은 형상.
제일 높은 곳부터, 주변의 풍경을 잃고, 조금씩 부서져 내려가는 거울의 방.
그리고, 그 높은 곳에 누군가 있었다⋯⋯.
“너는⋯⋯?”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류드밀라다.”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
마지막 삽화 류드밀라는 내 뇌로 상상한 데모고르곤 류드밀라 다른 버전임..
직접그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