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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성야의 광채가 아득히 거리를 메우는, 지상의 찬란함이 하늘의 반짝거림을 뒤덮는 그날.
모두가 저마다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존재의 여부 자체를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끝없이 말을 건네는 그날.
많은 연인들이 사랑과 탄생의 축복을 만끽하는 그날.
여느 날과 다름 없는 평범한 크리스마스...였을 터에
유미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야, 서윤. 오늘이 며칠이지?"
한가로운 오후의 사무실.
시끌벅적한 거리를 둘러보던 유미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서윤에게 말했다.
"오늘말이야? 그건 갑자기 왜?"
그런 유미나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서윤은 눈꺼풀을 동그랗게 늘어뜨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말고 빨리."
"음...오늘은 물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서윤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유미나는 대답을 듣자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역시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고 생각했다.
여전히,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
12월 25일의 해는 오늘도 세상을 비추지 못했다.
그녀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조명을 향해 손을 내밀고는, 손바닥을 펼치며 그 형형한 빛을 가리웠다.
***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평소의 무뚝뚝한 유미나에게 있어서도 꽤나 커다란 감흥을 이끄는 이벤트였다.
우선은 합법적인 휴일.
이게 가장 중요했다.
특히나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요일이기 때문에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이어지는 황금 같은 연휴를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회사를 땡땡이치면서도 월급을 받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신의 탄생과도 같은 거룩한 행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시내의 들뜬 분위기.
제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카운터 능력자일지라 하더라도, 그녀 또한 아직은 학생티를 벗어내지 못한 앳된 소녀 한 명에 불과했다.
얼마 되지 않는 학창 시절에조차 이런 이벤트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였지만,
내심 그녀가 이런 이벤트를 즐기고 싶어했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곁에 두는 그녀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평화로운 휴일.
그렇다보니, 거리를 나도는 연인들과 치렁치렁 매달린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진중했던 그녀의 마음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산타에게 선물을 받고, 연말을 맞아 서로 축하를 나누며...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정과 감사를 표할 수 있다니.
이렇게 즐거운 날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유미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기쁘게 기숙사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일어난 그 즉시, 기숙사의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다른 사람은 접근할 수 없는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있는 것처럼.
"일단은 언니 병문안을 갔다가, 전부터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소빈이랑 그때 얘기했던 카페나 가볼까? 그리고...또...음...소대장한테 선물이나 하나 사줘야겠다! 그리고 겸사겸사 선배한테도..."
순간이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유미나의 얼굴이 어렴풋이 불그스름해진 것이다.
최근 있었던 여러 사건들을 함께 하며, 유미나는 주시윤을 조금씩 의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띠는 도저히 선호할 수 없는 남자라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보다도 따스하고 여린, 그러면서도 그녀를 믿고 의지하며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내거는 그의 모습에 그가 달라 보였던 것이다.
그가 듬직한 사람으로 보였고, 동경하는 선배로 보였으며,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사랑스런 이성으로 보이기도 했다.
"선배는...선배는...흠...선배는..."
구석에서 홀로 중얼거리던 유미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계속 버벅거리다가, 끝내 선배라는 단어로 시작했던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아이 씨, 모르겠다! 일단 나가자!"
스스로 부끄러워진 갑작스레 그리 소리치며 유미나는 문을 힘껏 열어재끼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리리리리리리-
책상 위에 올려진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48개월 할부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들려왔다.
이 아침부터 누구지? 하는 생각으로 그녀는 전화기를 집어들었고, 이내 그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보게 된 광경은 단 두 가지였다.
아침 8시 정각을 가리키는 숫자 모음과, '부사장님' 이라고 적힌 발신자의 이름이었다.
설마 이 황금같은 휴일 아침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유미나는 전화를 받은 뒤 휴대폰을 귓가로 옮겼다.
"여보세요, 미나양?"
"....부사장님?"
코핀 컴퍼니의 악덕 업주 이수연.
전화기를 붙잡자마자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오싹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잠깐 회사로 나와봐야할 것 같은데요?"
"하...."
유미나의 입에선 자연스레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회사로 출근하는 동안 유미나는 자신의 몸이 이 발을 디디고 있는 땅과 멀어지길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에 출근이 말이 되냐고 진짜..."
한 걸음 한 걸음을 무겁게 옮기며 유미나는 회사의 입구에 들어섰고, 부사장님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걸음걸이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약 한 개층 정도의 위에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복도를 방방 뛰어다니는 사장님의 딸이 보였고,
격납고의 입구 부근에선 이상한 기계 부품들을 상자에 담고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나희린이 보였다.
또한 피곤해보이는 다크 서클을 턱밑까지 길게 늘이고서 복도를 거닐고 있는 레나와 클로에도 그녀의 눈에 띄었다.
"아...피곤하다, 피곤해."
"정령님께서 빨리 도망가라고 제게 속삭이고 계십니다..."
이상한 대화까지 들려왔다.
이 황금같은 연휴에 불려나온 사람들이 많구나, 하고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인 그들의 처지를 동정했다.
적어도 인센티브라도 달라고 해야겠다며 다짐을 하고는, 그녀는 부사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제가 원래 이렇게 휴일에까지 불러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말한지가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한 페이지도 작성하지 않았다고요? 제말이 우스워보이나보죠? 스승님도 그렇고 시윤군도 그렇고, 하여간 펜릴 소대는..."
"알았어, 알았어...미안하다니까?"
회사의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반겼던 것은 부사장의 유수와도 같은 잔소리였다.
5분이 넘도록 이어진 그녀의 잔소리에 유미나는 팔을 내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반복했지만,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나고서야 그녀는 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하...그래서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갖은 잔소리의 폭격을 견디고 드디어 사무실의 컴퓨터 앞에 앉은 유미나는 홀로 궁시렁거렸다.
그녀로서는 눈앞에 놓인 문자들이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무수히 많은 글자들이 제각기 춤을 추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원체부터 일자무식이 상징인 그녀였다.
컴퓨터로 업무를 하는 잡무를 위해 머릿속에 공간을 허비할 여력 따위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일은 해본 적도 없었고, 시켜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녀는 스스로 자조하며 아무 의미 없이 마우스의 휠을 상하로 움직여댔다.
"선배한테 배워놓기라도 할 걸 그랬네..."
유미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어머, 미나야. 힘들어보이네?"
흩날리는 구릿빛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하게 퍼져나오는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최근 들어 이런 향수를 뿌리는 사람은 회사에 단 한 명밖에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안녕, 서윤."
그녀의 옆에는 어느 틈엔가 알트 소대의 서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순수한 의도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경우따위 전무했으니까.
의심의 눈초리를 한껏 쏟으며 그녀는 서윤에게 질문했다.
"너가 왜 여깄냐? 설마 너희도 우리처럼 보고서 땡땡이라도 쳤어?"
"에이~설마. 그냥 회사에 일이 있어서 들른 차에 너가 보이길래 와봤지~."
"아, 그래."
예상에서 한치도 달리 벗어나지 않은 넉살스런 대답에 유미나는 무건조한 대답으로 응대했다.
그나저나 업무도 없으면서 이 한가로운 휴일에 회사에 볼 일이 있다니?
유미나는 그녀도 참 이상한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굳이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유미나는 다시 고개를 컴퓨터로 향하고 업무에 집중했다.
"음...그러니까...컨트롤...브이...컨트롤...씨...?"
"어, 미나야! 순서가 반대로인 것 같은데?"
"딜리트를 누르고 삭제.......왜 안 되지?"
"어휴 안되겠다... 자, 미나야, 잘 봐.... 이게 클릭이야."
유미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모른 척하고자 했지만, 그녀를 보다 답답했는지 서윤은 마우스를 뺏고 그녀의 업무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는 것이겠지. 유미나는 그녀에게 품었던 악감정을 사르르 녹이며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을 조금 놀리는 것 같았던 건 기분탓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서윤의 도움에도 밀려있던 업무를 끝내기는 유미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약 20분 가량이 지나자 많은 업무량에 질겁한 서윤은 자신도 어딘가를 가봐야 한다며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혼자 남아 일을 계속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가버릴 거면 처음부터 도와주지나 말던가.
그녀는 입을 한 발짝 크게 삐쭉 내밀며 일을 이어나갔다.
서윤이 알려준 부분은 그대고 하고, 모르는 부분은 눈치껏 인터넷에 검색을 하며 떼워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천에 모습을 드리우던 태양이 어느덧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을 무렵, 유미나는 모든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일이 끝나자마자 유미나는 책상에 쭉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이 악덕업주 같으니라고..."
부사장을 향해 그녀가 작게 읊조린 그 말은 공허한 사무실에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부사장님~, 여기 있어?"
잠깐의 휴식 시간을 마친 뒤, 그녀는 이수연이 있을 법한 장소를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사무실, 탕비실, 연구실, 격납고 등등 여러 장소를 다 뒤집 듯 훑어봤지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메일이나 전화를 보낸다거나 그녀의 방에 보고서를 놓고 간다는 선택지도 분명 존재했겠지만은, 티끌 하나 없이 정직하면서도 단순한 그녀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찌됐든 온 회사를 쥐 잡듯이 확인해봤을 즈음에 조차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유미나로서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아있었다.
여기에도 없으면 보고서는 그냥 던져놓고 퇴근한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겨둔 장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부사장님, 보고서 다 썼-"
하지만 그녀가 힘차게 재낀 사장실에조차 사람의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어....어라..?"
분명히 그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음에도 그림자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으니 유미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자기한테만 업무를 떠맡겨놓고 퇴근이라도 한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유미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그녀가 사원들을 굴리기로서니 해도 그녀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지니고 사원들을 보살펴주는 부사장이다.
아마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다른 곳이 있기라도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유미나는 발걸음을 돌리려했다.
바로 그때, 사장실 안에서 가볍게 빙그르르 돌던 유미나에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뭐야, 이건.......구슬?"
그녀의 두 눈길이 향해있던 그곳엔 이상한 구슬이 하나 놓여있었다.
생긴 것이 이상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어떤 다른 구슬보다도 매끄러웠고 반듯한 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연분홍 빛의 선명함을 띠고 있었다.
이상했던 것은 느낌이었다.
저런 물건이 사장님의 책상에 놓여있던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매혹적인 동시에 무언가 꺼림칙한 감상이 그녀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그 물건을 살며시 들어보았다.
약간의 호기심과, 그리고 반짝거리는 물건을 보고 동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그녀를 자극했던 탓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어 의심이라는 감정이 끼어들 자리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구슬은 그녀의 두 손에 딱 알맞게 들어오는 그녀의 머리 정도 되는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구슬의 광색은 그녀의 보랏빛 눈에 비쳐 형형색색 그 아름다움을 더해갔다.
구슬의 그 아름다운 선홍빛을 보고 있자니 유미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한 탓이었는지, 그녀의 뺨끝에서는 땀 두세방울이 흔적을 남기고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슬을 든 채 그녀는 무거운 한 걸음을 뗐고,
그대로 사장실의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딱히 이 행동에 커다란 이유는 없었다.
이 물건이 아름다웠고, 조금은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팔면 돈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선배한테 이 구슬을 주면, 선배가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음에도 주시윤을 위해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던 유미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허나 그녀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도둑질.
그것도 사장님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이지 않았던가.
일단은 이 장소에서 벗어나고 생각하자며, 유미나는 구슬을 안고 사장실을 뛰쳐나가 복도를 내달렸다.
"어라, 미나양?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목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한 넉살스런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그러나 아까와 다른 점은, 그것이 남자의 목소리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듣기에 그 목소리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몇 번이고 더 듣고 싶은 목소리였다는 점이었다.
그녀가 이 목소리를 모를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서...선배...?!"
그녀가 뜀걸음을 멈추며 주시윤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 그녀에 주시윤은 멋쩍은 표정을 짓고 뺨을 긁적였다.
"어이쿠. 그렇게 놀라시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받은데요?"
"아, 아...미안...갑자기 나오길래 놀라서 그만..."
"아, 농담이니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
그나마 만난 게 선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유미나의 가슴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하필 여기서 선배를?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내가 수상해보이지는 않을까?
잡다한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좀먹어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물건이 도둑질한 물건임을 인식한 탓에, 그녀는 그 물건을 급하게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주시윤에겐, 그 모습이 여간 수상해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미나양. 뭔가 되게 급해보이시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주시윤은 말했다.
"아, 아냐! 일은 무슨..."
"그런데 그 등 뒤에 감추고 있는 물건은 뭔가요?"
음흉하게 실눈을 히죽거리며 주시윤이 말했다.
처음부터 계속 주시하고 있던 거겠지.
하여튼간 눈치는 더럽게 빠른 인간이었다.
"아 이거...? 이건 그러니까..."
"왜 이렇게 말을 더듬으세요~?"
자신을 놀리는 것이 분명한 그의 태도에도 유미나의 얼굴은 갓 재배한 홍당무와 같이 시뻘개졌다.
그녀는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한 채 바닥에 고정해놓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있잖아...그러니까...아니 뭐..."
가슴이 쿵쾅쿵쾅, 커다란 엔진과도 같이 진동했다.
선배에게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들키기 싫었고, 자신이 사장님의 물건을 도둑질 했단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가 띄울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이걸 왜 갖고 왔을까?
지금와선 자신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 상태로 보내다가, 유미나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대로면 자신의 부끄러운 과오만 드러날 뿐이기에, 그녀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을 사용했다.
"선배!!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선배 주려고 준비했어!!"
유미나는 고개를 숙이고 팔을 쭉 뻗어 그의 안면 앞으로 커다란 구슬을 내밀었다.
갑작스레 자신의 눈앞에 놓인 얼굴만한 구슬을 보고 있자니, 천하의 주시윤도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ㄴ...네?!"
"선물이라니까!" 유미나는 말했다.
"아니, 미나양. 이게 무슨..."
"잔소리말고 그냥 받아!"
유미나는 소리를 지르며 주시윤의 손목을 덥썩 쥐고 그 구슬로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리고 유미나의 손과, 주시윤의 손이 구슬을 동시에 만진 그 아주 짧은 찰나,
구슬에서 터져나온 섬광이 순백의 세계를 자아냈다.
떼구르르르르-
순간 일섬한 빛에 두 사람은 눈을 가렸고, 그 탓에 구슬은 두 사람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잦아들었고, 두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아 저마다 사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유미나는 멍하니 구슬을 쳐다봤고, 주시윤은 눈을 비볐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자신이 가지고 온 구슬이 이상반응을 일으키고, 그 때문에 자신과 선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니.
유미나는 너무나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사장님의 물건을 함부로 훔치면 안 됐던 건데.
그녀는 이제 와선 어찌할 수도 없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주시윤에게 다가갔다.
"선배, 괜찮아?"
"아, 네, 미나양...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죠?"
유미나는 차마 자신이 사장님의 물건을 갖고와서 이 사단이 났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말을 돌렸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갑자기 구슬에서 빛이 터져나온 것 같았는데, 이상하네요."
유미나가 내민 손을 붙잡은 채로 땅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며 주시윤이 말했다.
"그, 그러게. 하하."
유미나는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주시윤을 쳐다봤다.
그는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조용히 침묵에 빠져있는 참이었다.
유미나는 슬금슬금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선배, 혹시 화났어...?"
"? 제가 화날 이유라도 있나요?
주시윤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래? 아니 난 또 화난 줄 알고. 하하, 다행이네."
"오히려.."
유미나가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한편, 주시윤은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가 말끝을 흐린 탓이었다.
"...?"
유미나는 웃음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미나양이 처음으로 제게 제대로 된 선물을 주셔서 너무 기쁜 걸요? 선물 고마워요, 미나양. 소중히 간직할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유미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닫혀 있던 실눈이 열리고 그의 시원한 물결과도 같은 푸르른 눈동자를 마주하자, 유미나는 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어, 어? ㄱ...그래! 아니 뭐~ 별 거 아니야! 하하!"
그녀는 짝사랑하는 상대를 앞에 둔 중학생 소녀와 같았다.
부끄러움에 시선은 천장으로 돌렸고, 말을 더듬었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당황한 탓에 자신이 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기억에서 지운 것처럼, 뻔뻔스런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에 주시윤은 가볍게 미소 짓고 말을 이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미나양..."
그러나 그가 말을 끝맺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견뎌내지 못한 유미나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뒤를 돌아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어...어, 선배! 나 그럼 가볼게! 잘 있어!!"
그녀는 뒤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의 형체를 잠시 돌아보곤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를 달려 나갔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행한 행동은 숙면이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고 싶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숙면을 취하고 싶었고, 시계의 시침이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음에도 그녀는 침대로 온몸을 힘껏 던졌다.
그리고 8시간이 지났다.
밤 9시가 되자 그녀는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고, 꼬르륵거리는 뱃고동에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꽁쳐놓은 컵라면이 없던가..."
그렇게 한참동안 서랍을 뒤지다 그녀는 서랍에 끄트머리에 있던 하나 남은 ㅇ개장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포트에 가볍게 물을 올려놓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순간 밖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연인들이 생각났고, 오늘의 그녀가 생각났다.
그녀가 밖에 나도는 연인들과 같이 하루를 만끽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으니까.
선배에게 고백하고,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자고 말할 용기 따위 그녀에겐 존재치 않았으니까.
"에휴, 그냥 라면이나 먹자."
그녀는 끓은 물을 라면 용기에 붓고 라면을 휘저었다.
그리고 잠깐동안 모든 것을 잊는 만찬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러나 컵라면 용기 하나로 달래지 못한 심야의 공복감은 오히려 그녀의 처참한 처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었다.
"아-내가 왜 그딴 소리를 했을까..."
그녀는 책상에 머리를 쥐어박고 그것을 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오, 이 바보! 멍청이! 등신!"
계속된 질책과 질타에도 돌아오는 것은 자기 혐오와 비스무리한 어색한 감정이었다.
유미나는 그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선배!!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선배 주려고 준비했어!!'
'잔소리말고 그냥 받아!'
'어...어...어, 선배! 나 그럼 가볼게! 잘 있어!!'
"..."
조용히 공상에 빠져있던 유미나의 양 주먹에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아아아아악! 닥쳐 등신아!!!!"
그녀는 곧이어 이리저리 손과 발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뭐라 말하는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괴성.
사내 기숙사의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분명 컨퍼런스가 들어왔을 수준이었다.
얼마간의 난폭한 시간을 가진 후, 그녀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긴 너무나도 초라한 꼴이 아니었던가.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자신은 그에게 항상 짓궃게만 대하는 후배일텐데, 그가 자신을 좋게 생각이라도 할까.
내가 준 선물을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긴 할까?
그때 했던 말도 그냥 체면 치레 정도가 아니었을까?
선배가 다른 사람한테 그 구슬이 뭔지 물어보면, 내가 사장님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이 들키지나 않을까?
온갖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리를 쥐어 짜는 듯 했다.
애초에 그 구슬은 뭐였던 걸까.
자신이 그때 조금만 다르게 대답을 했더라면, 애당초 그 요상한 구슬에 혹해서 그것을 훔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애당초 그것은 무엇이었을지 그녀는 의문에 빠졌다.
갑자기 발산한 빛하며, 무언가에 홀린 듯했던 자신의 모습하며, 그 구슬과 관련해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내일 사장님한테 물어라도 봐야 하나...
하...퍽이나 대답해주겠다...
유미나는 그렇게 한창을 식탁 위에서 둥글게 말은 팔 사이에 얼굴은 박고 있다가, 서서히 자신의 눈이 감겨져가는 것을 느꼈다.
'아, 갑자기 식곤증이...'
'먹고 자면 살 찌는데...'
그러나 적당히 따뜻한 온도와 적당한 배부름이 불러오는 잠을 그녀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점점 잠이 불어나고, 무거워진 눈꺼풀이 시야를 가릴 때, 그녀는 한가지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그래도, 선배가 기뻐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삐리리리리리리-
"아~언니. 나 5분만 더 잘게...5분만..."
유미나는 적당히 푹신한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팔을 내저었다.
삐리리리리리리-
"아니 진짜, 딱 5분만 더 잔다니까...?"
그럼에도 사방에 울리는 벨소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삐리리리리리리-
"하...알았다, 알았어. 일어나면 되잖아."
유미나는 힘겹게 기숙사의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아침햇살을 맞이했다.
잠결에 일어난 유미나는 눈을 비비고 앉아있는 상태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어, 내가 왜 침대에 있지?"
유미나는 혼잣말을 했다.
분명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뻗어있던 모습이었을 터인데, 그녀는 지금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마 잠결에 기어왔던 것이 아닐까?
그리 가벼이 생각하고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완전히 일으켰고, 자신의 잠을 방해한 원수를 응징하러 갔다.
삐리리리리리리-
그러나 그것은 알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화 벨소리였다. 그것도-
"...부사장님?"
또 다시 아침 8시부터 단잠을 깨우는 부사장의 전화였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미나양.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으시는 거죠?"
"아, 조금 늦잠을 자느라...헤헤..."
유미나는 능청스럽게 그녀의 일갈을 회피해 넘겼다.
수화기 너머에서 "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유미나는 이를 못들은체 했고, 잠시 뒤 부사장의 이어지는 말이 들렸다.
"뭐, 어쨌든 미나양. 잠깐 회사로 나와봐야할 것 같은데요?"
아, 보고서 제출 안 하고 도망가서 그런가 보다.
그녀의 화난 목소리에 유미나는 순식간에 짐을 싸고 방 밖을 나왔다.
그녀는 회사에 들어가 회사 안을 두리번거렸다.
시그마가 복도를 달리고 있었고, 나희린이 기계 부품들이 든 박스를 들고 달리다가 넘어졌다.
한쪽 옆에서는 피곤해보이는 레나와 클로에가 이야기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뭐랄까 모든 것들이...어딘가에서 본 듯한 모양새였던 것은 그녀만의 착각이었을까?
혹시 이게 그 데자뷰 현상인가 뭔가하는 그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사내를 걸어갔다.
이수연이 그녀를 부른 곳은 어제와 똑같은 사무실이었기에, 그녀는 그곳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유미나는 문앞에 서서 또 다시 한소리를 들어먹을 각오를 하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예상과 다를 것없이 그녀를 반긴 것은 부사장의 숨 쉴 새도 없는 잔소리였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제가 원래 이렇게 휴일에까지 불러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말한지가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한 페이지도 작성하지 않았다고요? 제말이 우스워보이나보죠? 스승님도 그렇고 시윤군도 그렇고, 하여간 펜릴 소대는..."
"...? 잠깐만, 부사장님. 이 얘기 어제도 하지 않았어?"
어제 들었던 것과 똑같은 잔소리에 유미나는 조심히 그녀에게 질문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시죠?"
그러나 부사장의 강압적인 태도가 돌아왔고, 유미나는 기가 죽어 움츠릴 뿐이었다.
"아, 아니라면 됐어..."
결국 그녀는 오늘도 자리로 돌아왔다.
어제와 똑같은 보고서를 써야한다는 말을 들은 채로.
이게 무슨 상황이지?
유미나는 손에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혹시 만약에 여기서 서윤이 나온다면...그건...
"어머, 미나야. 힘들어보이네?"
"..."
옆에 놓여있던 책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서윤의 모습에, 유미나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런 유미나의 서윤은 쑥쓰런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미나야, 왜 그래...?"
"...아냐."
입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동공은 떨리고 있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서윤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잠깐만...야, 혹시 오늘이 며칠이지?"
서윤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오늘? 갑자기 무슨 이상한 소리야, 미나야?"
"쓸데없는 소리말고 빨리."
"그야 오늘은 당연히..."
그리고 그녀는 말을 끌었다.
그사이, 유미나는 자신의 목부근을 커다란 액체의 일렁임이 관통해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이런.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하루가, 반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