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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가 미나양께서 가고 깊다고 한 장소인 건가요?"
"그래, 맞아."
그들의 주위는 우거진 숲에 펼쳐진 나무와 같이 붐비는 인파로 가득차있었다.
유미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를 찬찬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중세 바로크 시대의 건축양식과도 같은, 웅장하고 찬미적인 성의 대문.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게끔 착각을 일으키는, 그 레플리카.
주위의 어린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풍선들과,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그들이 현재 어느 장소에 와있는질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미나양이 설마 놀이공원을 가자고 하실 줄은."
놀이공원.
어린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동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들이 찾아오는 명소.
순수한 쾌감과 오락을 추구하기도 하며, 때로는 연인들끼리 사랑의 교감을 공유하는 장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다 싶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당당하고도 뻔뻔스러운 태도로 주시윤과 함께 성의 대문을 통과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탔던 것은 회전목마였다.
본래 회전목마라는 것은 놀이기구 중에서도 최하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구.
남녀노소 성인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탈 수 있는 놀이기구였기 때문에, 놀이기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유미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잠깐만, 잠깐만! 이거 좀 빠르지 않아?"
물론, 그 기구조차도 하이라이트 부분에 다다르자 유미나는 질색을 하긴 했다.
두 번째로 탄 놀이기구는 범퍼카였다.
다른 놀이기구들과는 달리 적당한 속도감과 운전자의 실력에 많은 것이 좌지우지되는 기구인만큼, 유미나 또한 이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범퍼카에 올라타자마자 옆의 차량에 앉아있던 주시윤에게 선언했다.
"선배! 나 선배만 노릴 거니까 각오하고 있으라고!"
"하하. 감당되시겠어요, 미나양?"
"감당은 선배가 해야지! 자, 간다!"
유미나는 있는 힘껏 악셀을 밟고 주시윤에게 달려갔다.
적당한 속도감과 함께 시야가 줄어들었다. 볼끝에 바람이 스치고 머리가 휘날렸다. 이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는 새에도 그녀와 주시윤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
체크메이크. 그녀가 그리 생각할 순간이었다.
"어이쿠."
그가 별다른 조작을 하지 않고도 슬쩍 움직이더니 자신의 차량을 저 멀리 밀쳐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유미나는 방금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지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주시윤은 사악하게 그녀를 비웃었다.
"미나양. 그냥 밀어붙인다고 다 되는 게 아니랍니다~."
"으으으아아아아아!!"
그렇게 괴성을 지르며 몇 번이고 그를 더 들이박고자 시도했지만, 매번 나가떨어지는 것은 그녀였을 뿐이었다.
"미나양, 솜사탕이라도 드실래요?"
범퍼카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경험하고 유미나가 쭉 시무룩해있으니 주시윤이 말을 건넸다.
유미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우울해도 공짜 음식을 거절할 이유따윈 없었던 것이다.
잠시후, 주시윤이 커다란 구름형태의 사탕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것을 보자마자 유미나의 눈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을 냈다.
그 솜사탕이 무려 자신의 얼굴의 두 배 가량이나 될 정도로 커다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로 솜사탕을 한 손에 들고 한동안 거리를 누볐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회사에 관한 이야기나, 취미에 관한 이야기, 소대장이나 부사장님에 관한 뒷담이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갔다.
"아니 그래서, 소대장은 보고서도 안 쓰고 대체 어디로 도망간 거야?"
"글쎄요. 미안하다는 편지만 남기고 휴가 나가신 걸로 알고 있긴 한데, 어디로 가신진 잘 모르겠네요."
"이거 제대로 짬처리 당한 거였구만..."
유미나가 아침 8시마다 자신을 핍박하던 구박의 원인을 알고나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으니, 저 앞에서 인파가 몰려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유미나는 눈동자를 한데 집중시켜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몰려있는 사람들과, 거대한 전차들. 전차 위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고, 그들은 모두 괴상망측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유미나의 등골에 차가운 식은 땀이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설마 여기서 또 적의 습격이라고?
자신에겐 놀이공원에 오면 안 되는 저주라도 걸려있는 건가?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그 집단을 손가락을 가리키머 소리쳤다.
"선배! 빨리 도망쳐야 돼! 저기서 뭔가가 오고 있어!"
"네?"
"막 엄청 커다란 것들이 오고 있다니까!"
"음..."
보이기는 하는 건지 주시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 물체들을 쳐다봤다.
그리곤 유미나에게 말했다.
"설마 저 퍼레이드 말하시는 건가요?"
"엥."
"대충 보니까 놀이공원 퍼레이드 같은데요?"
유미나의 등골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이긴 했지만.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나도 알아. 그냥 선배가 어떻게 반응하나 궁금해서 말해봤어! 하하!"
주시윤은 헤-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그것을 보러 가자고 권유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퍼레이드가 궁금하기도 했던 유미나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인파 속에 몸을 내던졌고, 거대한 전차들을 경의가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어, 선배! 저거 봐! 마법소녀 네크로미코야! 옛날에 진짜 많이 봤었는데!
유미나는 유독 더 신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몇 가지 유명한 놀이기구를 더 탔다.
적당히 무섭고, 적당히 빠른, 그러면서도 충분히 재밌는 놀이기구들을 모두 섭렵했다.
그러나 역시 놀이공원의 하이라이트라 한다면, 역시 '이것'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기, 선배... 그냥 나 빼고 혼지 타고 오면 안 될까?"
"아뇨? 전 미나양이랑 꼭 같이 타보고 싶은 걸요?"
이런 말을 듣고도 내뺄 여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홀린 듯이 그에게 대답했다.
이 인간 용혈 아직도 있는 거 아니야?
유미나는 그저 그를 째려다보며 생각할 뿐이었다.
거대한 낙차와 절정에 이르는 속도감.
놀이공원의 하이라이트, 롤러코스터.
기본적으로 롤러코스터를 싫어하기도 하고, 약 2시간에 달하는 기다랗게 늘어진 줄을 서기도 싫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주시윤은 전에 없을만큼 완고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줄을 섰지만, 한걸음 한걸음 놀이기구와 가까워질 때마다 사지로 내몰려가능 기분이 들었다.
"저기 선배, 나 갑자기 배가 아픈데..."
"여기 소화제 드릴까요?"
"갑자기 배도 좀 고프고..."
"아까 사놓은 핫도그가 있는데..."
"도라X몽이야?"
별별 핑계를 대봤지만, 주시윤에겐 먹혀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줄은 모두 줄어들었고, 그녀는 어느새 롤러코스터의 맨 뒷자리에 앉아 안전바를 착용하고 있었다.
하...
공기가 폐의 곳곳을 내부에서 터뜨리려는 것 같았다.
이 가시 돋힌 느낌을 강제로 즐기고 있으니, 롤러코스터의 바퀴가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올라갔다. 올라가는 속도도 빨랐다.
이러다 하늘에 있을지도 모를 천국에 다다르는 것이 아닌지하는 착각이 들 때 쯤, 리프트는 고지에 다다랐다.
반바퀴를 돌자 경사가 보였다. 그러나 맨 뒷자리에 앉은 탓에 사람들의 머리에 가려 온전히 보이진 않았다.
목젖을 강타하며 침이 식도를 미끄러져 갔다.
온다...온다....
순간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부터 순차적으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그녀의 동체시력에 잡혔다.
그리고 자기가 곧 떨어진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에 이르자, 기억의 필름이 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그녀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이었던 것이다.
"하하하! 여기 미나양 표정 좀 보세요! 되게 웃기게 찍혔는 걸요?"
"그만..."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고, 인상된 필름을 한장 받았다.
그곳에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온갖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에 맞서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지끈 눌렀다.
괜히 오자고 했나...
이제 어느덧 밤이 깊었고, 그들은 떠나기 전 마지막 코스로 관람차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는 것도 여기까지. 즐길만큼 즐겼으니, 이제 이것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선배가 말한 것처럼 내일부턴 정상적인 하루로 돌아가겠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정도면 됐다.
단 둘이서만 비밀을 간직하고자 하는 건 터무니 없는 욕심이었을테니.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처럼, 지금의 사건을 마무리지으면 될 뿐이었다.
"자, 두 분! 탑승하세요!"
그들의 차례가 다가오자 관람차 담당 직원이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서로 싱글벙글, 하지만 조금은 정숙하고도 진중한 태도로 그곳에 탑승했다.
이제 곧 다 끝나겠구나 생각한 찰나, 관람차의 문을 닫으며 직원이 말했다.
"커플분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그 말에 유미나와 주시윤은 흠칫 그 직원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문은 닫히고 난 뒤였다.
그렇게 관람차 안은 어색한 침묵이라는 사람의 형태가 그들을 짓누르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식을 안 하려 하고 있었는데, 구태여 그 이야기를 하다니.
유미나는 그 직원이 원망스러웠다.
미련을 가질 것만 같았다. 선배와 이렇게 둘이 단 며칠만을 더 보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욕심이 들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로부터 꾸물거리며 자신의 피부를 기어오르는 그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다.
유미나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의 시간을 보았다.
오후 8시.
일어난지 딱 12시간이 지났을 시각이었다.
유미나는 고개를 돌려 앞에 앉아있던 주시윤을 바라봤다.
그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어떠한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유미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 여기 풍경 좋지않아? 여기 관람차가 그렇게 풍경이 좋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네요. 참 아름다워요."
"그, 그렇지?"
주어가 없는 문장에 순간 착각을 일으킬 뻔 했지만, 유미나는 마음을 바로 잡고 말을 이었다.
"저기 선배, 놀이공원은 괜찮았어?"
"재밌었어요. 미나양 쪽에서 먼저 놀이공원을 가자고 한건 의외였지만요."
먼저? 그녀는 의문을 감추고 계속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 저번에 선배랑 놀이공원 갔을 때가 자꾸 마음에 걸렸었거든."
"...네?" 주시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왜, 그땐 내가 좀 쌀쌀맞기도 했고, 갑자기 일이 생겨서 놀이공원을 막 즐기지도 못했잖아? 그게 좀 마음에 걸렸어서...헤헤..."
주시윤은 놀란 안색으로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 모습에 쑥쓰러워진 유미나는 볼을 긁적였다.
"왜, 왜 그래?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뇨, 미나양이 제가 예상한대로의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거 칭찬이지?"
"물론 칭찬이죠."
주시윤이 말 사이에 의도적으로 잠깐의 공백을 두었다.
그리고 잠깐의 생각을 가진 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그 공백을 메꾸었다.
"미나양은 그 구슬에 대해 제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좀 궁금하긴한데, 왜?" 유미나가 말했다.
"그러면 이야기 드릴게요. 처음부터, 아니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천애고아(天涯孤兒).
어린 시절의 주시윤이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 수나 있을까.
어린 시절 눈앞에서 부모를 여의고, 살기 위해 원수의 손에서 자란 그는, 독니를 품은 한 마리의 뱀새끼. 그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독니는 다소 무뎌진 칼날과도 같았다.
주시윤이라는 독사가 가진 송곳니의 끝자락은 그 누구를 향해서도 겨눠지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였지만, 자신을 거두고 보살펴준 스승을 향해 그를 겨눈다라.
참으로 우스운 역설이다. 그러나 그 역설은 그의 가슴 한켠을 동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자신을 힐난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비웃을 것이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그 원수를 베어낼 칼날조차 마련하질 못했으니.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긴 한 것일까. 칼집이 손에 쥐어졌음에도 그것을 '내던졌다는 것이 더 있는 그대로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는 응어리 진 사념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부모님과 그녀 사이에 모종의 이유가 있었다는 것도.
그는 그렇게 자랐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알지고 못하고, 그것을 통제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자라왔다.
'번뇌'라는 단어는 그 당시의 그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그런 이야기였다.
그것이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은 그녀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다.
"......소대장? 이런 꼬맹이가?"
그녀가 처음 내뱉었던 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돌한 여성이라고,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하는게 싸가지가 없긴 했지만, 그것도 그녀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흥미를 가지고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면세계에서 거대한 여성 그림자형 침식체를 쓰러뜨리는 그날, 흥미는 곧 흥분감으로 변모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언령을 걸어봤지만, 언령마저 걸리지 않았다.
처음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녀가 너무나 특이한 종자였기 때문에, 단지 그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특정한 힘을 다루는 '어떠한 인자'를 다룰 수 있는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즈음부터는, 생각이 조금 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원망감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되려 그것과 거리를 벌리고자 하는 감정이었다.
본래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은 그에게 맞는 감정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품은 것은 호기심. 그녀의 존재가, 스승님이 부모님을 죽인 것을 알려줄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는데서 나오는 호기심이었다.
그는 그녀를 지켜봤고, 그녀와 함께 행동했으며, 그녀를 보호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리플레이서 킹을 잡으러 가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유미나라는 소녀를 바로 곁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힘을 감당하기엔 너무나 여렸고, 평범한 인물이었다.
강해보이고자 하는 겉모습으로도 그것을 감출 수 없었다.
운명의 사슬이란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느긋한 일생을 보내게 될 이를 전장으로 끌어당긴다니.
마치 그 모습이, 자신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응원했다. 고작 이따위 것에 지지말고 스스로 이겨내라고. 스스로 성장해나가라고.
그는 그녀에게서 자신을 투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세상을 구할 땐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고,
이후 자신과 그녀의 목숨이 저울의 양 끝에 올려져 있을 땐 뼈를 허무는 쓰라림을 느꼈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스승이었다.
그녀의 삶을 관망함으로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했을 때, 그녀와 조금 더 살지 못해 아쉽다는 여운이 남았다.
그녀를 동경했고, 감사했고, 또 사랑했다.
어느덧 그녀는 그에게 있어 어떠한 미사여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
그 구슬을 처음 본 것은 12월 20일이었다.
불현듯 사장실에 들어갔을 때, 사장이 그 물건을 만지고 있는 모습을 봤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소원을 이뤄주는 물건이라고 답했다.
이전에 서윤이 회수해왔다는 소원구슬을 이야기하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또 다른 어떤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사장은 그것에 특이한 공간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원을 이룰 때까지,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그는 자신을 보며 그것이 필요하냐고 물었었지만, 주시윤은 이를 거절했었다.
자신의 소원은 그런 도구를 쓸만큼 거창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12월 24일 되었다.
그는 원체 계획했던 그의 소원을 실현시키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별 다를 건 없었다. 그저 유미나와 하루를 보내는 것. 그뿐이었다.
흔히 말하는 데이트처럼. 이런 특별한 날에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꽤나 의미있는 일이었을 테니까.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과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 누구나가 꿀 수 있는 소망이 아니던가.
그는 여러 핑계를 대며 그녀를 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녀의 핸드폰에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기숙사를 찾아갔다. 문을 두드렸다. 어떠한 반응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갔다.
어딘가로 다급히 이동하는 서윤이 보이길래, 유미나가 어딨냐고 물으니 한 사무실에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 그녀가 있을 사무실로 가던 중, 그녀를 마주쳤다.
그녀가 자신에게 건네던 구슬이 무엇이었는지, 맨처음엔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크나 큰 섬광을 뿜어냈을 때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이 급했던 탓이리라.
구슬은 뒷전이요, 그는 유미나에게 손을 뻗으며 함께 그의 소망을 이루자고 권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마쳐지기도 전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피했다.
하루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언가를 생각할 틈도, 꿈 꿀 틈도 없이 하루가 사라졌다.
하루종일 유미나를 찾아다녔지만, 그녀가 기숙사에 처박혀있을 줄은 몰랐으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뻔한 일이었다.
그는 자책하며 하루를 보냈다.
자신이 조금 더 용기를 냈어어야 한다면서.
다음날이 밝았을 때, 맨 처음 그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가장 먼저 위화감을 느낀 순간은 복도에서 유미나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급해보였고, 그에겐 그것이 수상해보였다.
그때부터 회사 사람들을 관찰하고, 달력을 보며 그는 24일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때 봤던 구슬이 사장실에서 봤던 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났다.
그는 그녀가 자주 가는 탕비실로 가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제가 반복된다면 자신은 그녀를 찾을 수 없겠지만, 그녀에게서 또한 어제와는 다른 낌새를 느낀 까닭이었다.
그 직감은 적중했다.
그녀는 탕비실로 찾아왔고, 자신은 알고 있는 것을 얼추 말하며 그녀를 유혹했다.
우선 하루를 더 지켜보고 그래도 상황이 변치 않는다면 자신과 같이 행동하자고.
하루가 많이 지났으니, 자신의 소망은 내일로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던 탓이었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알았고, 내일도 오늘과 똑같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였다.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데 그런 요물스런 힘까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거절할 이유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그녀를 데리고 방문하고 싶던 장소를 모두 방문했다.
카페 스트레가, 노래방, 보드게임 카페, 영화관 등...
계획했던 데이트 플랜을 모두 완료하였지만, 12월 24일이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까닭이 아마 그녀의 소원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적당히 말을 돌린 뒤, 그녀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했다.
그것이, 자신과 함께 놀이공원을 오는 것일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
"자, 사건의 전말입니다. 어떤가요. 만족스러우셨나요?"
이 장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유미나는 벌어진 턱을 스스로 다물지 못했다.
여성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해가 따라가질 않았다.
이야기는 너무나도 과거부터 이어졌고, 그것이 현재와 자연스럽게 섞여 혼합되었다.
정확히 꼽자면 자신이 동반자였다고 할 때부터였을까.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정신이 산만하게 두뇌의 광장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저기, 선배. 나 지금 이해가 잘 안되는데..."
유미나가 말을 하다 잠깐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요약 좀 해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시윤의 오른손이 유미나의 오른손을 감싸듯 쥐어 안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보드라운 감촉이었다.
"제가 미나양을 좋아한다는 겁니다."
밖에선 불꽃놀이가 터져나왔고, 관람차의 위치는 어느덧 정상에 다다랐다.
그러나 너무나 조용했다. 숨이 막힐만큼이나, 바깥세상과 그 관람차의 칸에는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져만 있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선배가? 나를?
유미나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화면이 암전됐다 다시 켜진 것처럼 세상이 깜빡였다.
얼굴은 달아오른 용암과도 같이 빨갛고 뜨거웠다.
1초가 1분과 같았고, 관람차가 지상에까지 내려가는 시간은 영원과도 같았다.
그 둘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관람차가 지상에 내려올 때가 되자 주시윤은 꽉 다문 손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들은 관람차에서 내렸고, 놀이공원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계속 걸었다.
아무 말도 없이.
풍경은 어제와 똑같았다.
거리는 밝았고, 바닥에 쌓인 눈은 포근했다. 서늘한 입김이 숨을 쉴때마다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풍경조차 너무나 어색해질 정도로, 그 둘은 걸어갔다.
계속해서.
눈에 파묻히는 푸석푸석한 발자국 소리만이 그들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어느덧 그들은 유미나의 기숙사 앞에 도달했다.
자신이 딱히 어떤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주시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중했다.
그러나 유미나의 속내는 전혀 그 표정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속에 있는 모든 장기가 뒤집힐 정도로 울렁거렸다.
그를, 이대로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주시윤이 뒤를 돌고 떠나가려고 하는 찰나, 유미나가 주시윤의 황갈색 코트의 끝자락을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당겼다.
"선배, 밤도 늦었는데... 오늘은 그냥 같이 있을래...?
유미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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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마니 올려서 제성함니다,,,,
하나 남았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