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5348953


2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5350263


3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5350455


4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5350792


5편: https://arca.live/b/counterside/45351344?category=%EC%B0%BD%EC%9E%91&p=1










그리고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현재에 이르렀다.



출근하면서 똑같은 광경을 봤고, 똑같은 잔소리를 들었다.

서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고, 동일한 답변을 받았다.



언제쯤 이 고장난 시계뭉치의 시곗바늘이 다시금 원래의 시각을 가리키게 될까.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릴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보고서는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써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슬슬 선배가 회사를 돌아다니고 있을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거닐고 있으니 멀찍이서 선배가 보였다.

그를 보고 그녀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그녀를 보고 그도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곧 그들은 복도에서 마주쳤다.

어제 얘기했던 것을 회상하며 유미나는 말했다.




"선배, 오늘이 며칠이지?"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녀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주시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이요? 원래였으면 한 12월 26일쯤이었을까요?"


유미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무심한 남성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벌써 세 번째라...확실히 보통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거."


"선배는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유미나가 궁금한 눈초리로 질문했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잠시 천장을 응시했다. 

10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는 난데없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일단 카페라도 갈까요?"


"으,응?"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다소 완고한 듯 보였다.


"다시 말해드릴까요? 우리 오늘은 회사 땡땡이 치자고요, 미나양."











난데없이 주시윤과 카페의 2인석에 앉게 된 유미나는, 긴장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지금, 근방에서 꽤나 유명한 매니아들의 성지, <카페 스트레가>에 와있었다.


그녀는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 걸린 화려한 고딕풍의 장식들과, 무슨 코스프레라도 한 듯 요상한 고깔 모자를 쓰고 다니는 여성 직원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주는 커피를 행복하게 음미하는 곳곳에 널린 손님들. 

개중 몇몇은 음식 자체보다 직원들의 모습을 보고 헤벌쭉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미나는 난생 처음 보는 그 광경이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남자들은 저런 모습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 애당초, 평범한 카페 직원들이 왜 저런 옷을 입고 다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앞에 앉아있던 주시윤이 싱글벙글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신가요, 미나양?"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뭔가...평범한 카페랑은 다르다 싶어서..."


"여기가 이래봬도 이 근방에서는 가장 이름있는 카페에요. 음료들도 하나같이 맛있다고 정평이 나있고요."



"그...그래?"


선배는 왜 그렇게까지 이곳에 대해 잘 아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그녀였지만, 구태여 그것을 물을만한 용기가 샘솟아오르진 않았다.


그도 저런 요상한 복장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잠시 뒤, 작은 체구의 붉은 머리 소녀가 주문을 받으러 그들에게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손님! 주문은 어떤 걸로 하시겠나요!"


쓸데없을 정도로 쾌활한 그녀의 태도에 유미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보통 카페에서 종업원들이 직접 주문을 받으러 와주던가?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시고요, 음...미나양은 뭐 드실래요?"


그녀의 질문을 받은 주시윤이 익숙한 태도로 주문을 하고 유미나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원체 카페라는 장소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나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그런 메뉴는 없는데요?!"


종업원 소녀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미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오랫동안 그렇게 질문을 못하고 끙끙 앓고 있으니, 친절한 종업원 소녀는 메뉴판을 내밀며 그녀에게 말했다.


"손님, 그렇다면 이건 어떠세요? 제가 만든 메뉴인데 요즘 손님들 사이에서 '맛이 독특하다'며 호평이 자자해요!"


그 말을 듣고, 유미나는 소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민트향 10배 민트초코 스무디...?"


"네! 그거요!"


소녀는 뭐가 그리도 신나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그래도 아마 그녀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준 것이겠지.

강매라고 생각하기엔 가격도 나쁜 편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그것을 주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그럼 그걸로 줘."


"네, 알겠습니다! 아주 빠르게 갖다 드릴게요!!"


그러고 그녀는 주방을 향해 뛰쳐갔다.








주문도 했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맞은 편에 앉아 시종일관 미소를 보이는 주시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는 질문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야? 여기가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거야?"


그녀는 그의 입에서 무언가 당위성이 충분한 답변이 튀어 나오길 기대했지만, 튀어 나온 것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었다.


"네? 아무 상관도 없는데요?"


그녀는 순간 앞으로 자빠져 책상을 엎을 뻔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뻔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당황의 감정을 얼굴에 표출했다. 그리곤 그에게 연달아 질문했다.


"저기 선배, 내가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만 말해줄래?"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


"그럼 여긴 왜 온 거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유미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짓눌렀다.


"전부터 미나양이랑 한 번 와보고 싶었거든요."


움찔.


그 말을 듣자마자 유미나의 몸에선 잠깐동안 부르르 떨리는 진동이 발생했다.


나랑? 여기를? 선배가?


왜?


이런 당연한 물음들이 그녀의 뇌를 갉아먹어갔다. 이 남자는 대채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걸까.


나랑 이런 곳에 와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럴때마다 보이는 저 능구렁이 같은 태도에 대해선 그녀도 이렇다 할 말 없이 그저 의구심만을 더해갈 뿐이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여유롭게 생글생글 웃고만 있는 걸까.


그녀가 이빨을 서로 맞부딪히며 생각했다.




그리고 커피가 나왔다.

아까와는 다른 종업원이 음료가 넘실거리는 두 개의 잔을 들고 그들에게 걸어왔다.


그녀는 초록색 머리에다가 얼굴엔 여유가 넘치는 성숙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약간 선배와 같은 느낌이랄까?


그녀가 그들의 식탁에 음료를 놓으며 말했다.


"여기,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그리곤 컵 뒤에 숨겨져 있던 이상한 물체 또한 식탁에 같이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이건 언니가 주는 서비스. 둘이 너무 잘 어울려서 주는 거니 맛있게 먹으렴~."


그녀가 유미나를 보며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둘이 잘 어울려보인다고?


이게 무슨 소리일까, 하고 유미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도 아까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만큼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방금까지는 미처 몰랐던 광경이 이제야 눈에 보였던 것이다.



기분 나쁘게 직원들을 염탐하는 손님들 외에도

서로 마주앉아 수다를 떨거나, 한 컵에 빨대 두 개를 꼽고 음료를 마시거나, 케이크를 다른 상대에게 먹여주는 연인들이 가게 곳곳에 매복해있었다.


유미나는 갑자기 식은 땀이 났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모습이 그리 비쳤다는 말인가?


그녀는 점원이 놓은 물체를 빤히 내려다봤다.


조형들이 치렁치렁 붙어있는 몇 조각의 조각 케이크. 서비스라며 주기엔 상당히 가격이 나갈만한 물품처럼 보였다.


이런 것을 줄만큼이나 자신들의 모습이 알콩달콩한 커플과도 같았단 말인가.


머리도 거친 더벅머리에, 옷차림도 출근할 때마다 돌려입는 먼지 투성이 옷을 입은 자기가?


그러고보니 선배의 옷차림새가 유난히 깔끔하게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일부러 차려입고 온 것처럼.


아니, 그럴리는 없겠지.


맨날 만나서 시시콜콜 성질이나 내는 나같은 녀석이 뭐가 좋다고 선배가 그러겠어? 그녀는 자조적으로 되물었다.



이러고 있는 꼴도 창피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보다도,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냥 빨리 음료수나 먹고 나가야겠다'라며 그녀는 아까 자신이 시켰던 초록색의 이상한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우우우우웨에엑!"


그리고 그것이 입속이 들어가는 즉시 음료를 모두 뱉어냈다.













가게를 더럽힌 것을 사과하며 연신 점원들에게 사과한 그녀였지만, 신기하게도 점원들은 그녀에게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가게의 점장이라며 나온 어린아이 체형의 여성은 오히려 그 음료를 추천해준 점원을 '그딴 거 멋대로 팔지 말라고 말했지!'와 같은 소리를 하며 나무랄 뿐이었다.


초록머리의 여성은 괜찮다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던 유미나는 자신이 뱉은 액체를 모두 정리한 뒤, 가게를 나왔다.





가게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생각했을지도 문제였지만, 선배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였을지가 현재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매너도 없고, 남자 앞에서 구역질이나 하는, 정말 최악의 여성으로나 보이겠지.


그녀는 땅이 꺼질 듯 숨을 내쉬며 옆에서 걷고 있던 주시윤의 동태를 살폈다.


"하하하! 정말 재밌었어요, 미나양."


그러나 지금까지의 걱정이 우습게도, 주시윤은 외려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호탕히 그녀의 행동을 웃어 넘겼다.


"민트향 10배 민트초코 스무디라니! 그런걸 먹는 사람은 그 점원 분하고 미나양밖에 없을 거예요! 하하하!"


"저기 선배...? 너무 웃는 거 아니야?"


유미나는 적잖이 당황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자신에게 혐오감을 품기보단 저렇게 크고 웃는다고? 

보통 이들이라면 그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인지해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었겠으나, 유미나가 지금 드는 생각은 그저 안도감 뿐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다행이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가느다란 눈에서 새어나오는 실낱같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며 주시윤은 말을 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미나양.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아, 아냐. 내가 미안하지, 뭐."


"그럼 다음 장소로 가볼까요?"

주시윤이 검지 손가락을 허공으로 치켜올렸다.


유미나는 또 뭐가 튀어나올까 하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다음 장소?" 유미나가 물었고,


"네, 다음 장소요." 주시윤은 대답했다


"거기가 어딘데?"


"글쎄요, 노래방은 어떠신가요?"







엥?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방에서 간단한 노래를 부른 후, 그들은 보드게임 카페를 가 보드게임을 즐겼다.


그 뒤로는 주시윤의 권유로 영화관을 갔다.


영화는 전부터 유미나 자신이 보고 싶다고 징징거렸던 바로 그 영화였다.


유미나는 지금 이 상황의 흐름이 이해가 가지않는 한편, 자기가 예전부터 보고 싶다고 했던 것을 기억해준 그에게 감동스런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영화를 모두 보고 나온 뒤,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어느새 밤이 짙어졌다. 

땅거미는 그늘을 드리운지 오래가 되었고, 검게 물든 창공에 펼쳐진 별들은 거대한 도화지에 그림을 수놓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광경은 역설적이게도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밤이 깊어갈 수록 짙어지는 가로등과 건물 곳곳에 놓인 트윙클 장식들, 그리고 트리의 광채는, 아래에 수북히 쌓인 눈에 반사되어 그 선명함을 더해갔다.


마치 대지에서 발산된 태양빛이 하늘이라는 수면에 그늘을 담아내 듯.



3번의 12월 24일을 겪었음에도 올해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 광경에 유미나는 감격하여 입을 벌렸다.





그녀는 길거리에 놓인 시계를 흘깃하고 쳐다보았다.

오후 10시. 시곗바늘은 정각을 외치고 있었다.



그녀의 살갗을 스치는 밤공기는 조금 서늘했다. 입에선 입김이 새어놔왔고, 손의 끝자락엔 봉숭아라도 물 들인 마냥 봉긋 붉은 빛이 돋아났다.


그녀는 손을 한데 모아 입김을 불었다. 

그리곤 잠시 손을 비빈 뒤, 주머니에 손을 박아 넣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라고.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행복하고 만족스런 하루라고 말하는게 이치에 더욱 타당하겠지.


좋아하는 상대와 하루종일 같이 있고,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차가운 밤공기를 함께 들이킬 수 있다니.


오늘의 자신은 축복 받은 여성이라고. 그녀는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걸까?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모를 일이었겠지만, 그녀가 지금 속해있는 세상을 '일반적'이라는 단어와는 궤를 달리하는 곳이 아니었던가.


한시라도 빨리 이 미지의 공간을 탈출해야할 시간에,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옆에 나란히 걷고 있던 주시윤을 쳐다봤다.


뭐가 그리도 좋은 걸까. 그는 하루종일 행복한 웃음기로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그에게 질문했다.



"선배...근데 우리 이렇게 하루를 보내도 괜찮은 거야? 이러면 또 의미없이 하루가 반복될 뿐이잖아?"


그러나 그는 너무나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무 걱정마세요, 미나양. 그렇게까지 큰 일은 아닐테니까요."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기색에 유미나의 의문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잠깐, 선배!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어?!"


"아뇨? 없는데요~?"


"그럼 지금 이게 뭐하는 거야! 하루종일 이상한데만 다니고! 나갈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유미나가 따지듯이 말했다.


주시윤은 그녀를 응시했다가 하늘을 봤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진심이에요, 미나양. 한 번도 거짓으로 미나양을 대했던 적이 없어요."


"그럼 지금 이게 뭐하는 거냐고!"


평소였다면 이 즈음에서 일갈을 멈추었겠지만, 지금의 유미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루종일 속내를 감추고 능청스런 모습만을 보인 그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뻗친 탓이었다.


그녀의 태도에 주시윤은 잠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얼마간의 정적이 밀착해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을까.


주시윤이 무겁게 윗 입술을 들어올리며 주변의 압박감을 걷어냈다.


"이거이거, 저를 의심하고 계신 것 같으신데, 조금 서운하긴 하네요. 좋습니다. 제가 아는 것들은 모두 말씀드리죠."


"...뭔데."

유미나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사실 전 그 구슬이 뭔지를 알고 있습니다."


"...잠깐, 뭐라고?!"

유미나가 눈을 치켜떴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실눈 사이로 감춰져 보이진 않았지만, 주시윤의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자 하고있음은 분명했다.


"정확히는, '대충 짐작이 간다'정도 지만요. 전에 사장님께서 그걸 만지고 계신 걸 본 적이 있 거든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유미나가 성난 얼굴로 울분을 토해냈다.


주시윤이 미안하다는 듯 그녀를 진정시켰다.


"원래 비밀은 비밀로 남겨놓는게 재밌는 법이잖아요. 화가 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하....


유미나의 횡경막이 거대한 상하 작용을 반복했다.


이 주시윤이라는 인간의 근본이 이렇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만, 이런 상황에서마저 이딴 저급한 장난을 칠 줄이야.


그녀는 이리저리 날뛰는 마음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에게 실망한 한편, 그럼에도 그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한탄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유미나가 앞머리를 쥐어 뜯으며 말했다.


"저도 정확히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아마 내일 모레쯤이면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내일 모레?"


"네, 제가 생각하기론 말이죠."


내일 모레라.

지금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 그정도라면 어느정도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선배가 아무리 글러먹은 인간이라도 긴급한 상황에서까지 허무맹랑한 짓을 일삼을 사람은 아니다.


그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데는 아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유미나는 그로 인해 솟아난 화를 그 장본인을 생각하며 가라앉혔다.



"그나저나, 오늘 어떠셨나요?"


그녀가 혼자만의 추론에 빠져있던 찰나, 주시윤이 말을 걸었다.


급작스레 바뀐 이야기의 주제에 그녀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나쁘진 않았어."


나쁘지 않은게 아니라, 정반대로 좋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실은 미나양이랑 이렇게 한 번 다녀보고 싶었 거든요. 이렇게 둘이 동시에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도 드무니까요."


"뭐, 그렇긴하지."


"제 고집에 억지로 어울리게 했다면 죄송하네요."


"아냐, 그런 생각하지마. 나도 재밌었으니까. 오랜만에 정말 편하게 놀았던 것 같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그것은 의도했다기보단 무심코 흘러 나왔다.


그의 말이 진심이었든 진심을 가장한 가식이었든, 

그의 진중한 태도에 이전까지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새벽감성이라는 것일까.


광활한 밤거리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 말할 때마다 새어나오는 입김을 관찰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나란히 걸으며 심장이 쿵쾅대는,


지금 이 상황이 그녀조차도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도록 이끈 듯 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주시윤은 뭔가 놀란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뭐야, 그 표정은?" 유미나가 심통이 난 것처럼 말했다.


"아뇨. 다름이 아니라, 미나양이 오늘 처음으로 웃으시는 것 같아서요."


"그런가? 난 딱히 기억이 안 나는데."


"네, 그랬어요. 만약에 웃으셨다면 제가 기억하지 못했을리가 없을 테니까요."


"하하. 뭐야, 그 오글거리는 멘트는?"


그의 말에 조금 설레긴 했지만, 굳이 그 사실까지 수면 위로 드러내진 않았다.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한참을 웃고, 주시윤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제가 하자는 대로 했으니, 내일은 미나양이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하는 건 어떠신가요?"


"뭐? 그래도 괜찮겠어?" 유미나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요. 어차피 지금 우리한텐 남는 게 시간인 걸요."


유미나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의 틈새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곧 그 속에서 마음 한켠에 간직했던 소원을 담은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저기 그럼, 나 가보고 싶은 곳이 하나 있어."

유미나는 말했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거기가 어딘가요?"


주시윤이 물음을 듣고 유미나는 그를 뻔히 쳐다봤다.


어떤 의미로는 사랑스럽게, 또 어떤 의미로는 소녀의 동경을 담아.


그녀는 주시윤이 쓸데 없는 말을 하지 못하게 오른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그의 윗입술을 눌렀다.


"그건 비밀! 선배가 말했잖아? 비밀은 비밀인 채로 냅두는 게 재밌는 거라고 말이야."


그녀의 대담한 행동에 주시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해했다.


우왕좌왕, 좌불안석, 수각황망. 

지금의 그를 표현할만한 성어들은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이는 유미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자신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지 3초간 이해하지 못했다. 



흰자와 검은자가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서로 혼잡히 섞여 새로운 색깔을 자아내는 듯 했다.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무마해야한다. 아니, 그냥 어서 빨리 탈출해야한다.


그녀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허리춤으로 옮기고 말했다.


"내일 9시까지! 회사 앞으로 와! 회사는 당연히 땡땡이 치는 거로 알고!"


땡땡이 친자는 걸 이렇게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이야기하다니.

부사장님이 알고 노발대발하며 온갖 잔소리를 퍼붓는 화면이 눈동자에 선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지만 어떠한가?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자신들이 땡땡이쳤다는 사실 자체가 없어져있을 텐데.


그리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이만! 내일 봐, 선배!"


그녀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재빨리 뒤를 돌아 기숙사를 향해 뛰어갔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점점 멀어지는 선배의 형체로 보이는 아지랑이는 그녀를 향해 오른손을 흔들었다.













이 미친년...미친년...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자조적인 욕설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간 다음, a4용지를 펼쳐놨다.

그리고 그곳에 내일 계획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하루 전날 데이트 코스를 기다리는 중학생 소녀처럼.



하늘의 호수에서 밝게 빛나는 또 다른 12월 24일의 달 밑에서, 그녀는 행복히 반복될 하루를 기다리며 밤을 지새우다 잠에 들었다.




















띠리리리리리리리-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그녀는 평소보다 약 10분 일찍 일어난 상태였다.


날은 바꼈지만, 그녀가 할 행동은 지금까지와 동일했다.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깍지를 끼고 스트레칭을 몇 분간 진행했다.


완전히 잠의 여운에서 깨어난 뒤,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 전화의 전원을 끄는 일이었다.


부사장님의 그 지긋지긋한 전화에 오늘의 행복을 방해받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그녀는 옷장의 앞으로 발랄한 발걸음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녀는 신나는 얼굴로 옷장의 문을 활짝 열어재꼈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옷 좀 미리미리 사놓을 걸..."


오늘은 표면적으로 가고 싶은 곳을 간다는 계획이었지만, 실상 그 속내에 숨어있는 것은 공식적으로 허가된 선배와 자신의 둘만의 데이트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한껏 스스로를 꾸미고 싶었다.

평소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조금은 자극적인 향수도 뿌리고, 여러 액세서리로 몸의 구석구석을 치장하고 싶었다.


이는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과시욕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금전적인 여유는 그 욕구를 따라갈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왜 똑같은 옷밖에 없는 거냐고..."


옷장 안에 있던 것은 회사에 출근할 때마다 입는 여러벌의 검은 셔츠와 치마, 이전에 사장에게 받은 수트핏의 옷 한 벌, 그리고 1주년때 받은 드레스 한 벌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파티용 드레스를 입고 그곳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실망한 채로 옷장의 옷을 그저 뒤적거렸다.


그러다 문득 옷장의 옷들 아래에 있던 박스 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무엇인가 하고 그녀는 그 상자를 열어봤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을 보자마자 그녀는 직감했다. 다른 것은 필요없다. 무조건 이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고.











서늘하고 날카로운 바람이 맞부딪히는 것을 베어내는 한겨울의 아침, 유미나는 코핀 컴퍼니의 정문 앞에서 주시윤을 기다렸다.



복슬복슬하게 난 검은 털이 목덜미를 덮는 칠흑의 폴라 니트에, 액세서리를 매달은 회색빛의 타이트한 치마. 그리 두껍진 않지만 얇지도 않은 짙은 군청색 코트까지 곁든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기다렸다.


다가올 신년에 입으라며 회사 차원에서 자신에게 보너스로 지급해준 옷들이었다.


지금 그 옷을 입은 채로 회사를 땡땡이까지 쳐놓고, 회사 앞에서 다른 이를 기다리고 있다니.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귓가엔 다른 이들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듯 했다.


'선배는 언제 오는 거지? 선배보다 부사장님이 먼저 오면 안 되는데...'


그녀가 쓸데없는 걱정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쯤, 어느새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주시윤이 슬며시 말을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나양."


"으갸아아아악!"

도무지 여성의 소리라고는 할 수 없을만한 괴성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곧장 상대가 주시윤인 것을 파악하고 그녀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뭐야, 선배. 장난치지 말라니까." 그녀는 토라진 투로 말했다.


"하하, 죄송해요. 멀뚱멀뚱 서계시길래 그만."


유미나는 발끝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그의 옷차림을 훑어봤다.


그런데 아마 금일 그의 드레스 코드는 자신과 동일한 모양이었다.

옷의 색만 다를 뿐, 그는 하얀색 폴라 니트에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나마 차이점이라 할만한 것은 검은 슬랙스 바지를 입었다는 점 정도였을까.


"선배, 그 옷 설마..."


"맞아요. 회사에서 연초에 입으라고 준 옷이에요. 보니까 미나양도 똑같은 것 같네요?"

주시윤이 싱글벙글 댔다.


됐다. 이제와서 무슨 상관이냐.

비슷한 옷을 입은 것쯤 아무 일도 아니다. 설령 그것이 커플룩 비스무리한 것쯤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둘이서 갈 장소'에 유사 커플룩을 입을지라도 문제가 될 일은 없다.



그리 생각하며 그녀는 앞장섰다. 

그러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선배, 오늘이 며칠이지?"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글쎄요. 아마 미나양과 제가 맞이하는 올해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닐까요?"


그녀는 다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길을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