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혈에 사로잡힌, 망집의 마룡이 날뛰었다. 결국 구도자라 불리던 그는 번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그 길에 빠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럴 운명이였다.


마룡이 그 아가리를 벌리며,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던 한 남자를 향해 흉폭하게 날아갔다. 남자는, 일그러트린 얼굴로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룡이 남자의 앞에 다가왔을때.


서걱.


한 소년이 쏜살같이 달려와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들고있던 마룡의 몸을 두동강내었다. 용혈이라는 변종 클리포트 인자를 지닌 존재의 말로치곤 꽤나 허무한 죽음이였다.


''...피해계시지, 왜 굳이 지켜보시는 겁니까?''


소년이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고, 이에 남자가 답했다.


''...내가, 지켜봐야할 것일세.''


''...그래도 위험했습니다.''


그 말에 소년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풀었으나, 여전히 부루퉁한 어투로 입을 삐죽였다.


''자네가 있으니까. 자네덕에 내가 안심할 수 있는거야.''


남자는 일그러진 표정을 갈무리하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구르드.''


******


''......''


관리자가 눈을 떴다. 꿈이라는 것을 꿔본것이 언제던가. 아니, 이렇게 된 나라도 꿈을 꿀 수가 있었던 것인가.


관리자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날이 아직 어두웠다. 해가 막뜨기 시작한 여명이 보였다. 그 모습은 실로 아름다워서, 무심코 보게되는 풍경이였다.


여명. 이 세계에서는 찾지 못한, 시구르드란 이름을 지닌 소년이 좋아하던 것이였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시작한다는 희망이 가득한 풍경이 좋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그 작은 소년은. 그것은 어느세계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


관리자는, 하염없이 여명을 바라보았다. 해가 다 뜨기까지, 그저 하염없이.


******


''오늘도 엿같은 하루의 시작이구나.''


리플레이서 폰은 여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여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시절 그가 보았던 여명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보았던 한줄기 절망과도 같은 것이였다. 이 엿같고 절망적인 하루가 또다시 시작된다는 절망.


''오늘이네.''


리플레이서 비숍, 신나래가 죽는것은 오늘일것이다. 그녀가 서윤을 납치했으니까. 곧 있으면 유미나와 알트소대 일행이 예전에 그녀와 비숍이 다녔던 학교로 향할거다. 그래, 바로 저기.


''...여긴 뭐하러 온거야.''


목에 드리워진 칼날. 아니라다를까, 비숍이 사나운 얼굴을 한채 뒤에서 칼을 드리밀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지?''


''그동안 수고했다고 작별인사는 했지만, 그럼에도 미련은 남으니까. 난 너를 꽤 친구처럼 생각했거든.''


''...친구?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의 말에 비숍이 으르렁거렸다.


''너가 간부가 되기전에 한 일을 귀에 가시가 박히도록 들었어. 그뿐이야? 러시아에서 한 그 행동들도, 전부다 내 눈앞에서 일어났어!''


아, 그거. 참 오래전의 이야기다. 내가 간부가 되기전에 했던 일. 그 일로 친하게 지내던 윤서나 다른애들도 나를 혐오하게 됐다. 나이트도 자기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분해했었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래야.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


''미안한데 비숍, 너는 아니라는듯 말하네.''


''......''


''손에 피를 묻힌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안그래?''


비숍은 아무말없이 내 목에 드리워진 칼을 더더욱 들이밀었다. 그녀도 적지않은 생명을 그 손으로 앗아갔고, 그런 자신을 혐오했다.


[당황, 혼란, 혐오, 의심, 슬픔]


''비숍. 유미나 손에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것 같아? 오히려 더 힘들어 질 뿐이지.''


''...너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데.''


''유미나가 행복했다는 마지막 증거지. 넌 리플레이서 비숍이 아니라, 신나래야.''


이건 진심이다. 난 이곳에서 살아온 모든 시간동안 그녀를 신나래라고 생각했다. 나나 나이트같은 악인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어가는 몸이야.''


''그걸 내가 고칠 수 있다면?''


''그만, 그만!!''


비숍, 아니 신나래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내 목에 살짝 피가 흘러져 나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부짖었다.


''드디어 죽기로 결심할 수 있었어!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그리고 미나에게, 내 친구에게 악당으로서 끝내려고 했는데, 왜, 왜...이제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건데? 도대체 왜!!''


처절한 말이였다. 죽지못해 살아가는, 그야말로 시체같은 삶.


''내 어린시절은 절망이였어. 부모도 없이 고아새끼로 살았지.''


나의 어린시절과 같이.


''그로니아 외곽의 어느 마을이였는데, 마을 사람들 정신이 완전 돌아버렸거든. 부모도 집도 없이 굶어가는 애새끼한테 더럽다고 발로 걷어찰 정도였으니까.''


''......''


''그때의 나는 죽지못해 살아갔지만, 지금의 난 지금 여기 똑바로 서있어. 확연한 목표를 가지고.''


''...목표?''


나는 내 목표에 대하여 신나래에게 말했다.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서서히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미친놈.''


''살아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잖아?''


''그 말을 들으니까 널 여기서 죽여야 할 필요가 확실해지네. 그런짓을 하게, 내버려둘 것 같아?''


''하지만 성공한다면 너도 유미나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겠지.''


''......''


''너나 유미나나, 서로가 행복했던 과거를 이어주는 유일한 사람들이야. 둘다 구원받을 수 있겠지. 사과하고, 화해하며 전처럼 둘도없는 친구로 지내는 거야.''


''......''


어느 한쪽밖에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던지고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내 주특기였고, 그렇기에 난 신나래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인간성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라면,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다분히 인간적인 선택을.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난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 잘했어, 신나래.''


******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다. 샤오린이 붕대를 감은 손으로 저격총을 들어올렸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추출기. 리플레이서 시설에 있었을 때 겪었던, 실로 끔직하고 참담한 것. 그 안에, 대장이 있다. 그것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완전추출모드로.


죽여야 한다. 리플레이서 비숍은 자신이 데드맨 트리거라고 했다. 그러니, 그러니 죽여야 한다. 저격수답게 냉정하게, 차갑게 머리를 식힌다. 그리고, 방아쇠를─


''...아.''


틀렸다. 손목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지난번 리플레이서 나이트와의 전투에서 다친 손목의 부상이 다 나아지지 않은 탓이였다. 제발, 제발 멈춰. 대장을, 대장을 구해야 한단 말이야.


''윤서를 구하고 싶어?''


''...!''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샤오린이 저격총을 떨구고, 곧이어 허리춤에 맨 권총을 빠르게 꺼내 겨누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그녀의 뒤에 서있던 남자가 검붉은 검으로 총을 두동강 냈다.


''...너...''


''도와주러 온거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남자, 리플레이서 폰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땅에 떨구어진 저격총을 주워들며 말했다.


''린. 한마디. 한마디면 돼. 도와달라고. 윤서를 살려달라고.''


''......''


간절하게 들리기 까지한 말. 무슨 수작일까? 샤오린은 눈앞의 남자가 한 짓을, 잘 알고있다. 역겹다고, 혐오스럽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리플레이서의 간부. 그런 그가 얼터너티브 실험체인 자신들을 도울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것도, 같은 리플레이서의 간부를 죽이면서 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도, 샤오린은 대장이 더 중요했다. 유진도, 김소빈도. 이 알트소대라는 곳이, 샤오린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도, 와줘.''


탕!


그 말이 끝나고, 그가 들고있던 저격총이 울려퍼졌다. 어느새 비숍은 쓰러져 있었고, 유미나는 그런 비숍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린.''


저격총을 내려놓고, 리플레이서 폰이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너가 죽인거야. 알았지?''


''......''


그대로 그는 등에 맨 레바테인의 에너지를 추진력 삼아 리플레이서 비숍이 쓰러진 학교의 운동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너─''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 떨어진 그를 본 유미나가 멍한 표정으로 앞을 보았으나, 남자는 그대로 주먹으로 그녀의 턱을 쳤다.


자신의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것을 직접 목도한 유미나의 정신은 극히 혼란스럽고 현실 부정적 사고를 하고 있었고, 그만큼 반응하는 속도가 느렸다.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진 유미나를 본 폰은 그대로 비숍의 시체를 낚아채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등뒤에 들린 서늘한 목소리의 주인 때문이였다.


''네놈이 리플레이서 폰이군?''


힐데. 그의 뒤까지 다가온 그녀가 등뒤의 검들을 뽑아들었다.


''방금 주시윤에게 들었다. 내 앞에 나타나다니, 간도 크군.''


그녀는 으르렁거리며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정체불명의 남자. 이곳에서 잡아 족쳐서, 그 정체를 밝히겠다.


''...큭!''


남자가 등뒤에 맨 검붉은 검을 뽑아들어 그녀의 공격을 막았다. 구관리국의 장비인 레바테인인가. 관리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위력을 가진 검이였다. 저것도 회수해야 겠군.


잠시 검에 시선을 둔 힐데는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 내가 아는 놈인지 면상을 좀...


멈칫.


''...어?''


폰의 얼굴을 본 힐데가 멈칫했다. 검을 휘두르려던 손을 멈추고, 멍하게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럴리가. 그럴리가 없어. 너가 왜. 너가, 왜 여기에 있는거냐.


''...시구르드?''


''...?''


남자, 리플레이서 폰은 잠시 뭔 말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곧이어 힐데가 방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연막탄을 터트렸다. 이어서 운동장 외곽에 설치한 폭탄도.


그리고 연막탄과 폭탄으로 일어난 흙먼지와 연기가 걷어졌을 때.


그는 사라져있었다. 비숍의 시체를 가지고,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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