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드밀라는 놀란 눈치였다.

내게 모포 대신 건넨 코트. 그 탓에 가슴팍이 다 드러난 민소매 제복. 그리고 그런 가슴 속에서 용케 살아남았구나 싶은, 전투식량들. 그걸 품에 안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시야는 검게 되돌아오며 주변을 비춘다. 적막, 옆에 피워진 불 하나. 그리고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어둠. 입가를 닦는다. 다행이야. 토는 안 했어. 꿈이었구나.


그런 꿈...


그딴 꿈...



"..."


"그래, 억제제를 놓았다고 하더라도 몸에 이상이 있을 수는 있지."


"그래도 다행이로군. 그대로 얼어 죽을까봐서, 이렇게..."


그녀는 턱으로 옆을 가르킨다. 어둠, 모닥불이 피우고 있는 어둠. 이건...


"바람막이도 설치 해뒀거든. 가위에 눌렸다는 건 아직은 살아있다는 거니까. 하하"


건물의 잔해. 어쩌면 함선, 또는 전차의 장갑일지도 모른다. 류드밀리가 옮겨 온 건가. 하긴, 전차를 들고 쥐불놀이를 해대는 그 염동력이라면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어딘가 엉성한 게, 천장은 뚫린 상태. 그야말로 바람막이다. 뭐랄까, 생각이 1차원적이라 그런가.

솔개의 탄생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류드밀라는 어설프게 웃으며 모닥불 근처에 식량들을 내려놓는다. 라기보다는 눈 위에 내던지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가슴에 한아름 품고 온 주제에 어딘가 모자른 모습이 전혀 따스하지 않는 이 불빛처럼, 일렁이고 있다.


"운이 좋았어. '멀리 숨길수록, 더 쉽게 찾는다고' 하지. 설마, 바람막이로 쓰려고 잔해를 들어 올린 곳에 이렇게 식량이 있을거라곤 상상도 못했단 말이지. 조금 볼품 없지만, 물도 있어. 이걸로 보르시치를 만들 수 있겠군."


"비록 소재도 도구도 형편 없지만, 기대 하도록. 이 보르시치만큼은 자신이 있어. 전대원들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



스치는 기억. 너무 오래 전에, 1년도 더 된 기억. 하지만 선명하게 가로지른다. 그 탓에 더더욱 선명하게 피어나는 감정.

하,


하고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어처구니가 없다. 유통기한이 15년도 더 지난 식량을 들고서,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쭈그려서 식량을 살펴보고 있다. 백금발을 흐트리듯 일렁이는 모닥불. 진하게 남는 나무의 탄 내. 분홍빛 눈동자에는 어딘가 기쁨이 서려있지만, 불꽃은 일렁이며 불길하게 만들고 있다. 뭐가, 보르시치야. 그렇게 환한 표정을 지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걸 나는 안다.

나만 알고 있다.



"..."


"...아, 그렇지. 잘 모를 법도 한가?"


" 멀리 숨길수록, 더 쉽게 찾는다. 라는 건 내 고향의 속담이지. 그래, 관리국은 주로 이렇게 말하더군."



"등잔 밑이 어둡다."


"...!"


쭈그려서 식량을 쥐고 있던 류드밀라가 엎어진다. 뿌국, 하고 눈이 뭉개지는 소리. 그보다 바람막이를 가져다 놓을 생각이 있으면, 바닥에 깔린 눈부터 치우지 그랬나. 여기저기 녹아서 진탕이잖아.



"마, 말을 할 수 있는 거였어?"


"..."




-오, 이 새끼 말도 하네?

-야~ 애들아 조용히 해 봐~ 찐따가 할 말 있대~




"..."




아프네. 류드밀라의 적의 없는 말 한 마디가.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낸 뒤에 펼쳐진 이 묘한 적막이. 부스스, 하고 나무가 타는 진한 내음. 아마 머리를 감아도 이틀 동안은 계속 남겠지. 타닥, 하고 지금도 일렁이는 불꽃만이 우리 둘 사이를 놀리듯이 춤을 추고 있다. 



"..."


"히끅"



그리고 그 적막을 깬 것은, 류드밀라의 딸국질이었다.

하, 하....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오히려 화가 난다.

화가 나서 웃음이 나오려는 거지만.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


아...아...하하.하하하하....





아...











아~ 알렉스 젖통 쥐고 아득바득 질싸하고 싶다~

-12















정말 쓰잘데 없는 시간. 류드밀라는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신이 났는지 이것저것 말을 걸어대며, 신나게 보르시치라는 걸 만들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전투식량 자체도 애초에 그런 거라는 건 나도 안다.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잘 아는데. 한데 넣고 이른바 꿀꿀이 죽을 만들면 그 냄새가 강해질 뿐이다. 하지만 의외로 멀쩡했다. 그건 아마, 나도 그녀도 이미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아니다. 인간이 아닌거고, 사람은 사람이다. 적어도 류드밀라는.


할머님이 알려주신 레시피라는 둥, 그래도 많이 괜찮아보여서 다행이라는 둥, 알고 싶지 않은 발레리와 예고르 외의 전대원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류드밀라. 마치 오랫동안 '대화'하지 못한 듯한 그 갈망이 엿보여서 더 싫었다. 어떤 의미로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저 꿀꿀이 죽보다 싫어. 군대는 싫은 기억 밖에 없다.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의 군생활은 뻔하잖아.


죽고 싶었다. 죽지 못해서 여기에 있다. 죽지 않으려고 바퀴벌레처럼 아득바득 버틴 주제에, 결국 이 꼬라지다.


흐흐흐, 그런 의미로 우리 둘은 닮았구나 하고. 어느새 나무에서 냉장고로 바뀐 내 침상에서 그녀를 내려다 본다.

그러면 나를 보면서 '조금만 기다려주겠나? 곧 완성이야. 후훗'하고 웃는 그녀의 모습. 그걸 보자마자 토악질이 일 것 같았다.



그녀와 나, 둘 다에게.




미쳤다.






아마, 류드밀라는 아직도 모르고 있겠지.

맞아. 이수연이 와서 알려 준 다음에야 알았으니까.


이미 본체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전대원을 위해서'라는 마음만이 남아 지금 류드밀라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뱉는...




"할머님은 꽤 억센 분이셨지. 마을에 있는 양아치 같은 놈들도 할머님을 보면 마치 병정인형처럼 허리를 굽혔어."


관심 없다.

애초에 니 기억도 아니잖아.



"하지만 내게는 줄곧 다정하신 분이셨어. 하하, 깊은 밤 어쩌다가 깨어나면 할머님이


'쉿, 우리 공주님. 밤에는 나쁜 사냥꾼이 돌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니~'


하며, 코코아를 타주셨지."



관심 없다.

그 어설픈 할머니 연기도 그저 역겨울 뿐이다.



"후훗,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말을 늘어놓게 되는 군. 이것 참. 알렉스가 봤다면,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을지도 모르겠군."




...




"아, 알렉스란 말이지? 내 부관이다. 처음엔 그저 겁에 질린 소녀인줄로만 알았지만..."





"어느새 자라, 그녀의 부관이 되고. 순식간에 자아를 확립하고, 카운터 능력에 눈을 떠서. 그녀를 지탱하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겠지."



"..."



"실패작이었던 폐기물이, 너의 부관이 되어서 관리국 최고의 생환률을 자랑하는 메이즈 전대의 부전대장이 되었겠지."



"그리고, 지금. 저기, 코핀 함 안에 갇힌 채, 그저 하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너... 너는..."



우습다. 우습기 짝이 없다. 놀란듯이 나를 올려다보는 분홍색 눈동자에 불꽃이 춤을 춘다.

동요. 하고 있다. 류드밀라를 보고 있으면, 그 강철같던 각오 아래의 근저를 모두 알고 있는채로 이 모습을 본다면...

내 뒤틀린 심성으로 이제서야 보고 있자면, 그냥 화가 난다.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소용없어. 류드밀라. 개네들은 이미 침식증후군 말기야."


"뭐...?"


"아니, 그 보다 너는 도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거지? 알렉스와 나... 어떻게..."


"뻔하잖아."



불꽃이 춤을 추고, 나무 탄 내가 진하게 코끝을 스친다. 어쩌면 탄 내가 아닐 수도 있다.

흐흐흐, 우린 이미 인간이 아니니까. 류드밀라가 놀란 표정을 거두고서 일어선다. 뽀꼽, 하고 어디선가 주워 온 찬합 안의 보르시치가 숨을 내뱉는다. 



"도플갱어...인가..."



"아니, 그냥 침식체야."



이걸 말하면, 부정하겠지.





"너랑 똑같은."



"..."




그러니까, 오히려 망쳐버리고 싶다.

그런거다. 어... 자랑은 아니지만, 스비갤 분탕이었던 나. 나는 그저 슬펐다. 아팠다. 게임을 망치는 금태 상연이 미웠지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없어서 그런 거였다. 포장해봤자 뭐해. 그냥 추한 욕심이라는 거 알아. 그렇지만, 내 감정을 토해내는데 그만한 게 없지. 즐겁게 게임하는 놈들이 잘못 된 거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씨발.




"20년이 흘렀어. 니가 뜯은 식량 유통기한을 봐 보라고. 15년이 넘게 흘렀지?"


"..."


"나를 속이려고 접근 했군."


"그럴만한 지능이 있었으면 20년 동안 너 하나 못 잡아서 이러고 있었겠어?"


"거짓말이다. 20년이 흘렀다고? 난 아직...!"


"싸울 수 있겠지. 너 혼자라면 얼마든지."



흐흐흐, 병신년.



"함선 외벽에다 새긴 탈리마크 있지? 그거 세보긴 했어?"


"어, 어떻게 그것까지...!"


"알려줄게 류드밀라. 아니, 그림자 류드밀라."



"곧, 관리자랑 존나게 늙어버린 이수연이 올 거야."


"도플갱어 류드밀라가 '류드밀라'행세를 하고서. 데리고 올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일어 날 일. 그리고 이 이야기의 내막. 모든 것을 토해냈다. 믿을 수 없다고 부정하며 어느새 대포까지 염동력으로 가져 와 나를 노리던 류드밀라였지만 소용 없다. 뭐 어쩔건데. 나야 죽으면 그만이다. 아, 그랬구나. 이제서야 그 자살하면 그만이라는 광대짤이 무슨 심정인지 알 것 같아. 흐흐흐흐, 즐겁다. 분탕을 치는 건 즐거워. 즐겁지 않아. 내 마음까지 송두리째 모욕하는 느낌이 장난이 아니야. 


하지만, 눈 앞의 그녀에게 말을 내뱉는 걸 멈출 수가 없다.

이 묘한 우월감이, 나를 뒤덮는다.

익명을 뒤집어쓰고 남의 마음을 짖밟는 쾌감이, 억눌러져 왔던 갈 곳 잃은 억울함이

무고한 여자애한테 쏟아진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내가 여지껏 싸워왔던 건..."



"설마? 존나게 자애로운 관남충이 이제 널 구원하러 올 거야."



"흐흐흐흐흐흐, 빨리가서 보자마자 자지라도 빨아 줘. 그럼 좀 더 스무스하게 넘어갈 지도 몰...크앗..!"



아, 꿀꿀이 죽이다. 류드밀라의 보르시치와 찬합이 날아온다.

뜨겁지도 않다. 그렇게. 흐흐흐흐, 그랬구나. 점점 실감하게 된다. 내가 이미 미쳐있다는 걸.

반쯤 침식체니까. 아빠! 나도 반쯤은 엄마니까!


내가... 내가, 류드밀라를 화나게 만들었다.

울게 만들었다.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없다.



"...미안하군."


"침식증후군에 걸렸었지. 내가 그만, 간만에 하는 대화라서 들떴어."


"크게 데인 곳은 없나?"




글쎄, 크게 데인 곳은 없지만 데인 곳은 많아.

주로 담배빵이었지만.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흐른다.

이게 맞다.

이게 더 친근하다.

익숙하고, 오히려 이제는 편안함마저 감돈다.




"정식으로 사과하지. 전대장으로써 부끄러울 따름이다."



"흐흐흐흐, 그럼 보지라도 보여주던가~"




그렇게, 나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안심하며, 밤이 스쳐지나간다.

애초에 밤이 아닐지도 모른다. 여긴 이면세계. 나도 모르는 이세계.


금태가 밤이 없다고 설정 했으면 그대로 따라야하는...


어라, 한 가지. 마음에 걸린다.

왜 함선의 암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