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호들갑도 유분수지. 무시하며 술이나 따르려는데 상인의 낯빛이 심상치 않다.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니었나? 이쯤 되자 이쪽도 덩달아 기분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대체 뭔데? 용사가 뭐 어쨌다고?




"이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확실히 덜 민감한 년이겠지?"


"어? 어어. 그렇진 않은것같은데."


"어느정도인가?"


"음마라던가 그런애들에 비교할정도는 안되겠지만, 그래도 슥 건드리면 바로 몇번 절정할정도는 .. "


"이런 미친!"




농담이 재미가 없다지만 욕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사람 무안하게.




"건드리기만 해도 가버리는 용사라고?"




그런데 상인은 내 농담에 놀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보게. 정신 차려. 아직 집에 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구매를 취소하란 말일세."


"취소라니? 이미 열흘 전부터 우리 집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멍청한! 자네는 용사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모르긴 왜 몰라. 늘씬하고 예쁘고 강하고 오래 살고 허리 잘 흔들고... 생각해보니 잘 모르긴 하네.




"호들갑 그만 떨고 왜 그러는지 말이나 좀 해줘봐. 대체 왜 그러는데?"


"하아. 알겠네. 내 쉽게 설명해줌세. 기본적으로 용사들은 일정량의 힘의 총합을 가지고 태어나네."


"그거야 나도 알지."


"자. 그럼 잘 생각해보게. 만약 용사가 더욱 강해지기 위해서 스스로가 민감해지는 제약을 건다면? 단순히 감도가 2배 늘어나는것만으로도 신체능력과 마력은 2배로 늘어날 정도일세. "


"어... 진짜?"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나. 거기다 자네가 들인 용사가 그렇게나 민감하다면... 이미 마왕조차도 몇 합 이내에 녹여버릴수 있을걸세."




듣다보니 식은땀이 흐른다.




"그럼 왜 노예로 잡힌 건데? 그정도로 강하다면 진작 마왕을 무찌르고 부유하게 살면 될텐데."


"잡힌 게 아니라 잡혀준 걸세.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원."


"잡혀줘? 대체 왜?"


"일상에 권태로움을 느낀 게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던 거고."


"그렇다고 노예를 자처해?"


"성정이 좀 변태적인 용사일수도."




그러니까, 상인의 말은 어느 변태적인 용사가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미삼아 노예를 자처했다는 소리였다.


그게 말이 되나?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바람에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찻잔에 담긴 홍차가 식어가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던 내가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아? 노예 각인을 찍어놓았으니 무슨 수를 써도 나한테 반항하지 못해."


"자네는 상인을 안 해서 다행이야. 그런 머리 수완이면 일 년 안에 패가망신 했을 테니."


"그건 또 뭔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하. 알겠네. 자네는 노예 각인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그야 마족들의 기술에서...?"




어, 잠깐만. 마족이 아니라 마왕조차 그냥 조져버리는 강함이면 각인같은건 그냥 무시할수 있는것 아닌가?




"끽해봐야 일당백에 불과한 마족의 권위로 유지되는 각인을, 한손으로도 마왕을 죽이는 용사가 풀지 못하리라 보는건가?"


"그럼 왜 노예 각인을...?"


"아까 말했지 않은가. 자네를 가지고 노는 거라고."




섬칫 어깨가 떨린다. 내가 근처에 가기만 해도 벌벌 떠는 암컷 용사가 사실은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말도 안 돼.


그래.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저 상인은 나를 골려주기 위해 헛소리를 하는 게 틀림없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홍차를 비워버렸다.






*






저택에 들어오자 거적대기나 마찬가지인 옷을 입은 용사가 도게자를 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서오세요 주, 주인님..."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 어눌한 말투는 여전히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그래도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상인의 호들갑 때문인지 오늘은 뭔가... 주의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식사부터 하지."


"네, 네에..."




공손하게 대답한 용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러 떠났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간 뒤 간단한 세면을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식탁에는 용사가 한 요리들로 진수성찬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에 용사가 먹을 음식은 식탁 아래에 마련되어 있다. 어제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대충 비벼넣은, 개밥만도 못한 것이다.


용사를 한 번 흘겨본 나는 식탁 앞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먹지."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용사가 바닥에 납짝 엎드려서 개밥을 먹으려 들었다.


평소와도 같은 행동이지만 오늘은 뭔가 껄끄럽다. 내가 손을 들어 제지한 다음 용사를 붙잡아 일으켰다.




"오늘은 식탁에 앉아 먹도록 해라."


"네, 네에...? 아니, 아니에요... 저 같은 되먹지 못한 쓰레기는 감히 주인님과 겸상할 수 없는 거예요... 부디 주인님의 발치에서 어제 주인님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처리하게 해, 해주세요..."


"괜찮다. 혼내지 않으마."


"그, 그런..."




용사는 묘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깨작깨작 음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기쁘지 않은 건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마쳤다.




"와인."




에프터로 먹기 위해 와인을 가져오라 시키니 용사는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와인을 들고 돌아왔다.


문제는 중간에 발이 엇갈린 모양인지 넘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앗...!"




외마디 비명과 함께, 와장창! 내가 아끼던 와인병이 박살나며 노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주, 주인님 제가 죽을 짓을...!"




용사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복한다. 익숙한 뒷머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어떠한 벌이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죄에, 죄송합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으나 이번 한 번은 봐주기로 하였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되었다. 내가 치울테니 너는 방으로 들어가 있어라."


"넷...? 주인님...?"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하지만 저는 벌을 받아야...!"


"토달지 마라."




내가 말을 끊어버리니 용사의 표정이 단번에 싸늘해졌다.


창백해진 것이 아니다. 싸늘해진 것이다. 미묘한 차이였지만 나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주인님은 어쩐지... 상냥하시네요..."




짜내듯 내뱉은 말. 용사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때를 노려서 용사의 방에 설치해두었던 감시 오브젝트를 가동시켰다.


혹시 몰라 설치해뒀는데 이번 기회에 써보는 것이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 뒤이어 용사가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는 게 보인다.


용사는 공허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더니 경멸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제 역할도 제대로 못하네. 건방진 새끼가. 죽여 버릴까."




더없이 냉소적인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설마. 설마 상인이 했던 말이 전부 정답이었나?


이 용사는 학대당하는 것을 즐기기 위해서 나한테 팔려온 거라고? 목격한 진실이 너무나 터무니없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낮게 침음하였다.




"다른 주인을 알아봐야 하나..."




용사의 손에 피어오른 마나가 날카로운 예기를 띈다.


이런 씨발! 당황한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근처의 서랍을 뒤적거렸다.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하나 꺼내들고 계단을 타고 올라 용사가 있는 방을 벌컥 열었다.




"엣...?"




방금 전까지 나를 씹고 있었던 주제에, 엘프는 순진무구한 눈방울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 주인님... 어째서... 오늘은 쉬게 해주신다고..."




처음에는 저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역겨운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티를 내면 내가 저 용사한테 죽는다. 이제 여기서 뭘 해야하지? 머릿속 주판을 최대한 굴리던 나는 손에 개목걸이가 잡혀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서랍 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나는 평소와 같은 억양을 내뱉으며, 용사를 향해 개목걸이를 집어던졌다.




"오늘은 알몸 산책이다. 버러지 같은 년."


"아, 알몸 산책이요...?"




용사가 경악한다. 아니, 경악을 연기하고 있었다. 입 꼬리가 미묘하게 히죽거리는 게 그 증거였다.




"주... 주인님 그것만은... 제발 용서해주세요..."




미친년. 나는 억하심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말문을 열었다.




"알몸 산책 이후에는 성고문 시간을 갖도록 하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 정신나간 용사를 조교해야만... 아니, 조교하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