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그 얘기 들었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빨리 묻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는 무기질한 움직임으로 시체위에 흙을 덮고서는 땀을 닦았다.

"그러지 말고 들어보게. 왜, 지난번 붉은 지팡이 조직의 수장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거 자네도 알지 않나?"

그 얘기가 나오자 사내도 조금 관심이 생겼는지 팔짱을 끼며 노인의 얘기를 들을 자세를 취했다.

"그 수장을 죽인 것이... 요즘 유명한 '청소부'라고 하더군."

"청소부? 난 들어본 적 없는데."

"예끼 이 사람아. 자네도 뒷세계에 발을 담근 사람인데 그리 소문이 늦어서야 쓰나?"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 청소부라는 작자는 돈만 받으면 누구든지 죽여준다 하더군. 그 빨간 지팡이의 수장도 파란 모자 조직의 청부였다는 소문이 자자해."

노인은 한 번 쿨럭거리고서는 시체를 묻은 땅을 살폈다.

"형광색으로 빛나는 후드에 검은 우산을 들고, 로봇 원숭이를 어깨에 올리고 다닌다더군. 더 놀라운 건, 아직 애 티도 못 벗은 여자애라는 것이야."

"여자애가?"

"그래. 뭐가 목적인지는 몰라도 실력 하나는 확실한 모양이야. 그 빨간 지팡이의 수장을 해버렸을 정도니."

그 정도면 얘기를 다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사내는 몸을 돌렸다.

"뭐, 우리 같은 사람이 그 년의 목표가 될 일은 없겠군."

"하하. 그건 모를 일..."

갑자기 끊긴 노인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사내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 얘기 하니까 재밌어?"

붉게 빛나는 검정 후드와 치마. 검은 우산. 로봇 원숭이... 그리고 몸이 반으로 갈라져있는 노인.

"네, 네가 그 청소부?"

"별명 참 뭣스럽게 지었네. 그치, 우콩?"

"끼이익!! 끼익!!!"

"사, 살려줘. 난 돈을 받고 시체를 묻는 말단일 뿐이야. 너도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거잖아? 그, 그래 내가 돈을..."

하지만 목에 바람구멍이 난 사내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랑 나랑 같냐? 병신."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에 조심스럽게 우산을 편 소녀는 나타날 때처럼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어둠이 깔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뒷골목.

후드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 소녀는 커다란 대문을 거칠게 열며 건물로 들어갔다.

"이 계집이 미쳤나..."

그 소리에 험상궂은 사내가 인상을 쓰며 다가왔지만 소녀는 모자를 벗고선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껌으로 풍선을 크게 불며 눈 하나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사내가 팔을 들려 할 때, 안쪽에서 요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두라는 것이다."

"누님!"

"누님은 무슨. 이 쪽은 내 손님이니까 너는 들어가서 쉬라는 것이다."

"그,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사내를 가만히 쳐다보던 소녀는

씹던 껌을 그 머리에 뱉어냈다.

"아줌마 얼굴 봐서 이 정도로 봐준다. 꺼져."

사내는 치욕스러운 얼굴을 하며 다시 인사를 하고선 사라졌다.

"아줌마라고 하지 말랬을텐데."

실내에 만들어둔 수영장에서 가슴을 밖으로 내놓은 여인을 바라보던 소녀는 쯧 하고 혀를 차고선 우산을 벽에 세워두었다.

"당신이 부탁한 두 놈. 처리했어."

"오호. 부탁한지 하루, 아니 반나절도 안 됐는데?"

"의심되면 애들 보내서 확인해보든지."

소녀의 말에 여인의 뾰족하게 솟은 귀가 쫑긋거렸다.

"뭐, 거짓말은 아닌듯 하네. 돈은 이미 보내놨으니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여인을 한 번 째려본 소녀는 어깨에 있는 우콩에게 눈짓했다.

"우끼!"

"...거래 끝.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달라고."

"어머. 이렇게 가는 건 좀 아쉽지 않아?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는게 어떻냐는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더 할 말 없으면 간다."

"잠깐. 마음에 없는 소리는 맞는데, 할 말은 있다는 것이다."

"일 얘기 아니면 안 해."

"눈치도 빠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몇 번이나 거래 했는데 질문 하나 쯤은 괜찮지 않아?"

"그럼 딱 하나. 빨리 질문해. 시간없어."

"까칠하긴. 그래. 이 일은 왜 하냐는 것이다. 너 정도라면 이쪽 세계에서도 먹어줄텐데."

뒤에 이어지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린 소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소중한 걸 위해서. 그리고 이 일이 힘들어도 당신처럼 몸은 안 팔아."

"......"

"그럼 난 간다. 참, 그 병신같은 말투 좀 고치고."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청소부."

소녀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벽에 세워둔 우산을 들고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구미호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쯤 수면을 마구 내리쳤다.

"언제까지 그 도도한 모습을 지킬 수 있는지 보겠다는 것이다. 내 앞에서... 그래, 제발 몸이라도 팔게 해달라고 빌 때까지."





"끼이..."

"우콩? 괜찮아. 조금...긴장했나봐."

구미호의 집에서 나온 상아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래가 끝났을 뿐, 아직 구미호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기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아무 말이나 늘어놓았지만

상대는 환락가의 뿌리라고까지 불리는 구미호다.

수가 틀린다면 이 골목을 채 나가기도 전에 자신의 목이 달아나겠지.

긴장을 유지한 소녀는 신중하게 걸음을 내딛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그녀의 영역에서 벗어난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그래도 오늘 일은 대충 끝났네. 우콩, 비도 오는데 얼른 집에 가자."

"끼이!!"

그제서야 소녀는 우산을 펴 썼다.

타닥타닥 들려오는 가벼운 빗소리 아래 소녀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소녀의 집은 도시의 변두리 허름한 빌딩의 2층에 있었다.

겹겹이 설치된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들어간 소녀는 현관에 있는 거울 앞에서 한참동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선 신발을 벗었다.

"저 왔어요. 당신, 오늘 하루는 잘 지냈나요?"

"......"

"밖에 비가 왔는데 다행히 우산을 챙겨나갔어요. 후훗. 맞아요. 당신이 준 그 우산이에요."

"......"

"밥은 잘 챙겨먹었죠? 저 없다고 끼니 거르시고 하시면 안 돼요."

"......"

"저는 이제 그만 씻고 잘게요. 오늘 하루도 피곤했거든요."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캡슐안의 인물과 혼자만의 문답을 한 소녀는 외투를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종일 추운 밖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아서였는지 소녀의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서 한참동안 눈을 감고 있던 소녀는 갑작스레 자신의 팔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욕조는 그녀의 피로 가득차 비린내가 풍겨왔다.

그제서야 몸의 떨림이 멈춘 소녀는 물을 끄고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텅 빈 냉장고 안에서 커다란 약통을 꺼낸 소녀는 약을 한주먹 집어 씹어먹고서는

별다른 가구도 없이 매트리스만 하나 덩그러니 있는 방에 들어가 털썩 누워 잠에 들었다.




"우끼! 우끼끼!"

"으음... 지금 몇 시지?"

우콩의 얼굴에 7:20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이 시간부터 누가..."

'아아. 들리냐는 것이다.'

"듣고 있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큰 건이 생겼다는 것이다.'

"얼마짜린데?"

'지난 일의 50배.'

"겨우 그 정도로 큰 건이라고 하는 거야?"

'어제 일이 아니라. 빨간 지팡이 건보다 50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건은 구미호를 통해 받은 의뢰가 아니었다. 이런 미심쩍은 거래는 피하는게 상책이었지만

그러기에는 구미호의 말대로 건수가 커도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 안 할 거냐는 것이다.'

'......'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상아는 이내 입을 열었다.

"할게. 누굴 죽이면 되는데?"

'잘 생각했다는 것이다. 상대는 검은 스카프 조직의 간부 주피터와 메티스라는 것이다.'

그 말에 상아의 인상이 있는대로 구겨졌다.

"내 능력 밖이잖아! 그것들을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그래서, 안 하겠다고?'

빨간 지팡이 조직의 수장을 죽이는 것고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조직보다 훨씬 위험한 검은 스카프 조직의 간부를? 그것도 둘이나?

소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실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돈만 있으면....

이내 마음을 굳힌 그녀는

그녀 인생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말았다.







"메티스. 검은 스카프 조직의 간부. 조직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으며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다. 다른 간부인 주피터와는 모종의 관계가 있는듯 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세한 모습은 첨부한 사진을 참고 바람. ...어린애잖아?"

사진을 본 소녀는 그런 말을 내뱉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만한 상대는 아닐거라 생각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 주피터의 정보를 열람했다.

"주피터. 검은 스카프 조직의 간부. 조직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으며 특수한 기능을 가진 가방을 가지고 있다. 다른 간부인 메티스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외관은 첨부한 사진을 참고 바람."

첨부된 사진의 주피터라는 남자는 검은 양복에 한쪽 눈에는 안대를 끼고있었다. 메티스의 능력과 주피터의 가방이 신경쓰인 소녀는 정보를 더 찾아보았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소녀가 긴장하며 열어본 정보는 주피터와 메티스의 정보보다도 비싼 돈을 주고 산, 검은 스카프 조직에 관한 정보였다.

"검은 스카프 조직. 비교적 최근에 결성된 조직이다. 창립자인 access denied와 간부진의 능력을 바탕으로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전뇌마약 , 청부업, 인조신체, 무기 밀수입 등의 활동을 하며 산하 조직으로 빨간 지팡이, 파란 모자, 노란 리본 조직이 있다. 명실상부한 뒷세계의 2위 조직. 오는 창립일 -----에서 간부들만이 모이는 파티를 연다고 한다."

정보를 읽어내려간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중요한 파티의 날짜와 장소가 명시돼있지 않다.

"시프트업 네트워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인가."

비싼 돈을 낸 것 치고는 흡족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걸 아는 소녀는 후드의 충전기를 빼 몸 위에 걸쳤다.

"우콩. 구미호한테 전화 걸어줘."

"끼이! 끼이이!"

"괜찮아. 이번 일만 끝나면... 그 아줌마랑, 아니 이 세계랑은 작별이니까."




'우리 잘난 청소부께서 무슨 볼일이냐는 것이다.'

"정보가 필요해. 아줌마가 맡긴 의뢰에 대한 정보야."

'무슨 정보가 필요한지 말해보라는 것이다.'

"검은 스카프 조직의 창립일. 그리고 파티가 열리는 장소. 건물이라면 설계도까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이 구미호를 너무 얕보지 말란 것이다. 그래, 알고 있어. 그 정보라면... 값은 -----'

이어지는 말에 소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장난해? 당신이 맡긴 의뢰에 필요한 정보인데 돈을 내라고?"

'그것까지 감안해서 부른 가격이란 것이다.'

이 씨발년이...

'아, 보수에서 떼라는 말은 하지 말란 것이다. 알지?'

"...기다리고 있어. 돈 준비해올 테니까."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이어지는 말을 듣지 않고 연락을 끊은 소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싼 돈이지만 이번 일을 성공한 뒤 받을 보수에 비하면 적은 돈이었다.

외출 채비를 마친 소녀는 거실로 향했다.

"당신, 저 다녀올게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요."

"......"

"가자, 우콩."

어깨에 우콩을 올려주고 우산을 든 소녀는 현관을 나섰다.




소녀가 긴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뒷세계와 윗세계의 경계에 걸쳐있는 집이었다.

본분은 사채업자지만 뒷세계와 윗세계에 넓게 발을 걸치고 일하는 통칭 '여제'. 그녀를 만나러 온 소녀는 얌전히 문에 설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나야. 돈 좀 빌리러 왔어."

이내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소녀는 자연스레 그 안으로 들어갔다.



"콜록! 콜록콜록!"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담배연기에 소녀는 연신 재채기를 해댔다.

"오랜만이구나."

"으... 여기 쳐박혀서 담배만 피는 거야?"

붉은 치파오를 입고 다리를 꼰 여성은 벽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비벼끄고선 웃었다.

"이 연기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가보구나. 용서해주렴."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콜록! 요즘은 좀 어때?"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단다. 그보다... 너를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 나도 여기 또 올 줄은 몰랐네."

손으로 연기를 휘휘 물러내고 소파에 소리나게 눕는 소녀를 바라보던 여성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잠시 이리 와보겠니?"

"......"

여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걸 아는 소녀는 얌전히 그녀의 앞에 가 섰다.

"벗어보렴."

"당신, 그런 취향이었어?"

"어서."

무신경함을 가장하던 소녀는 표정을 무너뜨리며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맨 살이 드러난 그녀의 팔은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진물로 끈적끈적해져있었다.

채 아물지 못한 흉터 위로 계속해서 상처를 낸 결과였다.

그런 소녀의 팔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쉰 여성은 찬장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뭐 하려는 거야?"

"가만히 있으렴. 움직이면 돈 안 빌려줄 테니까."

"... 알겠으니까 의자라도 하나 줘."

여성은 소녀에게 작은 의자를 주고선 최대한 조심스레 소녀의 팔에 약을 발라주었다.

소녀는 참을 수 없는 쓰라림에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약해보이기 싫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여성의 그 행동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픔을 참느라 식은땀이 온 몸을 적셨을 쯤, 여성이 손을 떼고서 붕대를 꺼내왔다.

"아까보다 더 아플테니 참으렴."

약을 발라주던 때와 달리 붕대를 감는 여성의 손길은 거칠다고 할 정도로 빨랐다.

붕대가 상처를 자극하는 아픔에 소녀는 읏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진짜 뒤지게 아프네... 이상한 거 발라준 거 아니야?"

그 말이 멋쩍음에 튀어나온 말이라는 것을 아는 여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돈을 빌리러 왔다고 했던가?"

"응. ----만큼 필요해."

적지 않은 액수에 여성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본 소녀는 즉시 입을 열었다.

"안 떼어먹을테니까 빌려줘. 알잖아, 그것보다 더 큰 돈도 갚은 거."

"흐음... 그랬지."

잠시 고민하던 여성은 종이를 하나 꺼내들었다.

"뭘 써야하는지는 기억하고 있겠지?"

"기억하고 있어."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한 소녀는 여성이 건낸 펜을 들고 길지 않은 글을 적었다.

"저번엔,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였던가?"

"옛날 얘기는 해서 뭐 해."

"그 말, 지금도 유효한거니?"

"...응."

소녀가 쓴 글을 본 여성은 책상 위 화면을 몇 번 두들겼다.

"이제 나가도 된단다."

"고마워. 돈은 꼭 갚을게."

"가기 전에 질문 하나 해도 되니?"

어제와 다른 상대, 비슷한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녀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해봐. 당신이니까 성심성의껏 대답해줄게."

"후후, 고맙구나. 돈은 갚으러 오는 거니?"

농담같은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녀의 눈은 진지했다.

그 질문에 여러가지 의미가 섞여있다는 걸 아는 상아는

"물론이지.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고, 성심성의껏 대답하겠다는 자신의 말과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여성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표정을 풀더니 자신의 목에서 목걸이를 끌러 소녀에게 건냈다.

"뭐야 이건."

"네 앞길이 험해 보여서 주는 부적이란다. 차든지 말든지는 네 마음대로 하렴."

그걸로 말을 마친 여성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흔드는 여성을 본 소녀는 모자를 뒤집어쓰며 방을 나갔다.

"돈 가져왔어."

"역시 청소부라는 것이다."

소녀가 건내는 돈뭉치를 받은 구미호는 코를 킁킁거렸다.

"왜, 돈에서 냄새라도 나?"

"아니... 별 것 아니라는 것이다. 정보는 보내둘테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오늘 내로 보내."

더 말을 섞기 싫었던 소녀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 숨을 내쉬었다.


목적을 마친 소녀는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가,

평소처럼 캡슐 앞에서 혼자만의 문답을 하고서

후드를 벗고선

휑한 방의 매트리스에 누워 쓰러지듯 잠들었다.




"..., 여기서 벗어나면 뭐 하고 싶어?"

"음... 잘 모르겠어요. 전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뭘 해도 좋아요."

...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는 윗세계로 가면, 행복한 가정을 만들 거야."

그 말에 소녀는 움찔하며 ...의 눈치를 살폈다.

"가정이라면..."

"예쁜 부인이랑 애도 낳고 그렇게 사는 거지."

꿈을 꾸는 듯한 그의 모습에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소녀는 그 선택을 지지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정했으니까.

설령 자신이 행복해지지 못 한다 해도.

"그 때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그럼요. 언제든 당신 곁에 있을게요."

...의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소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거실의 캡슐에서 소녀의 땀과 피를 댓가로 목숨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으니까.




"...! 집으로 들어가!"

"안 돼! 당장 ...한테서 손 떼 개새끼들아!"

소녀의 거친 말에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가 몸을 돌렸다.

"우콩! ... 데리고 집에 들어가있어!"

"이거 놔! ...! ...!!"

정신을 차린 후 눈에 들어온 것은 사지가 비틀리고 온 몸이 고깃덩이처럼 으깨진 ...의 모습이었다.




"......"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난 소녀는 팔에 감긴 붕대를 풀려 했다.

그것까지 예상했던 것인지 붕대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괴성을 지른 소녀는 팔을 입으로 가져가 붕대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자신의 살도 함께 물었지만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붕대를 모두 찢어버린 소녀는 조금 가라앉으려하는 상처를 다시 긁기 시작했다.

이불이 피투성이가 되고 손톱 밑이 자신의 살로 가득 찼을 때쯤에야

소녀는 흐느끼며 손으로 무릎을 모으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우끼!"

"빨리 도착했네."

무덤덤하게 말한 소녀는 홀로그램으로 떠오르는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창립기념일은 22xx.10.27. 파티장소는 라인호텔. 시간은 17:00. 라인호텔의 설계도는 별첨. ...잘못된 정보를 주진 않았겠지."


소녀는 알약을 씹어먹으며 건물의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출입구는 총 네 곳이지만 두 곳은 현재 공사중. 1층의 안 쪽에 커다란 홀. 창문...없음. 홀의 출입구는 한 곳 뿐.

애초에 그 두 명을 죽이는 것도 힘들지만 성공한다 해도 빠져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상황에 소녀는 눈을 감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지만 그 둘을 죽이기 위한 준비를 하기엔 너무나도 짧았다.

"...그래도 할 수 밖에."

중얼거리던 소녀는 후드를 걸쳐입고선 라인호텔로 향했다.

한 달 가량의 기간동안 소녀는 라인호텔에 잠입하기 위한 루트를 물색하고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고

둘을 처리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결행일,

라인호텔의 인식표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소녀는 거실의 캡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 우리 옛날에 했던 말, 기억나요?"

"......"

"맞아요. 돈을 많이 벌면 윗세계로 가서 살기로 했잖아요."

"......"

"당신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싶다 했을 때... 그 자리에 제가 있으면 했어요. 너무 과분한 욕심인가요?"

"......"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신발장 앞에 있는 우산에 손을 뻗다 멈칫한 소녀는 그대로 손을 후드주머니에 넣고선 집을 나섰다.



22xx년 10월 27일. 라인호텔의 종업원들은 아 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녁에 있을 봉사단체의 행사를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소녀는 이불카트를 끌고다니며 호텔의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까지 수상한 사람이 보이진 않았지만 평소에는 모든 일을 남에게 맡기려 하는 연차가 높은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구미호의 정보가 틀리지는 않은 듯 했다.

오전과 오후, 가슴을 마비시키는듯한 긴장감 속에서 카트를 끌던 소녀는 마침내 호텔 입구에서 들어오는 거구의 검은 스카프를 한 사내를 발견했다.

움직일 때라는 걸 알아챈 소녀는 주위를 살피고선 코너에서 휙 돌아 카트에서 열쇠를 꺼내 손님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그 방에서 나온 건 흑발의 소녀가 아닌 금발에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아, 에이다씨. 한참 찾았습니다. 이제 홀로 가셔야 할 때에요."

느린 발걸음으로 홀 주위를 맴돌고 있으니 자신을 관리하던 종업원이 말을 걸어왔다.

"벌써.. 그렇게 됐나?"

"네. 아, 손 주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고마우이."

홀에 도착한 소녀는 빠르게 눈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4시 30분.'

홀에 도착한 것은 아직 아까 그 거구의 사내뿐이었다.

홀의 측면에 있는 의자에 자신을 데려다준 종업원은 다른 관계자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1분, 2분. 점점 시간이 흐르고 검은 스카프를 한 사람들이 한 두명씩 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녀의 목표인 안대를 한 사내와 금발의 소녀는 들어올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간부들과의 전투까지 고려하던 소녀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게으른 여인의 행세를 하고 있던 소녀는, 마침내 홀로 들어온 주피터와 메티스를 발견했다.

홀 입구와의 거리는 약 100걸음.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답답하리만치 천천히 걷기 시작한 소녀는 들키지 않게 그 둘을 곁눈질했다.

마치 연인처럼 손을 잡고 얘기를 나누는 둘은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기적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일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고있었다.

이대로라면 스쳐지나가는 사이 둘을 죽이고 그대로 빠져나가면 된다.

아무리 간부들이라 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고있는 자신을 따라잡지는 못하리라.

둘과 소녀의 거리는 둘의 걸음으로는 열 걸음. 소녀의 걸음으로는 스무 걸음이 남아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소매에 감춰둔 무기를 꺼내려 할 때,

검은 드레스의 소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눈치챈건가?

아니. 아직은 모른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라도 기회는 있다.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고...

"주피터. 이 년, 족쳐."

순식간에 머리를 강타하는 둔탁한 감각에

소녀는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이후 소녀가 눈을 뜬 곳은 작은 조명만이 있는 밀실이었다.

의자에 묶인 팔이 쓰라렸지만 그건 자신이 낸 상처 때문이었다.

가격당한 머리에서 통증을 호소해왔고 알몸이 된 몸은 추위를 호소했지만 그 사이에 다른 일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명 아래에서 종이책을 사락사락 넘기던 금발의 소녀는 눈 앞의 소녀가 움찔거리는 걸 보고선 책을 덮고 입을 열었다.

"안녕, 청소부. 잘 지냈니?"

"...우리, 구면이었던가."

"그럴 리가.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한테 으레 하는 말이야."

"......"

"뭐. 잘 못 지냈으니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겠지. 안 그래?"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죽어야지."

소녀가 담담하게 내뱉는 그 말은 협박도 허세도 아닌 진실이었다.

"내가 너를 죽이려한 건 어떻게 알았지?"

"글쎄. 네가 구미호의 청부를 받고 나와 주피터를 죽이려고 한 걸 알아내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어."

"......"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장난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

"어떻게 네 마음을 아냐고? 네 마음이 들리니까."

소녀는 살짝 웃더니 다리를 꼬아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언제부터인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리더라고. 이 얘기, 주피터랑 그 분한테 밖에 한 적 없는데. 왜 너한테는 이렇게 쉽게 얘기하게 될까?"

"낸들 아냐."

떨리는 그 목소리에 소녀는 까르르하고 웃었다.

"맞아. 내 맘을 나도 모르겠는데, 네가 어떻게 알겠어? 음... 그래도 쉽게 표현해보면 네가 좀 마음에 들었나봐."

"나는 그런 취향 없는데."

"나도야. 그런데 그 팔, 아프지 않아?"

"...안 아파."

"거짓말."

"......"

"있지. 나는 네가 왜 청소부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이 뒷세계에서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

"너는 나나, 구미호나, 주피터나 다른 사람들과는. 그래, 우리와는 결부터 다른데 말이야."

"내가... 다르다고?"

"그래.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쳤다고 해도 전혀 신경쓰지 않아. 오늘 아침 사람을 죽였어도 점심에는 즐겁게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뜨거운 향락을 즐기지. 그런데, 너는 어떻지?"

"아는 척 하지 마. 나라고 다를 것 같아?"

"그러면 그 팔에 상처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생긴 죄책감의 증거겠지. 그게 그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 너의 소중한 그 사람을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소녀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냥. 네가 좀 마음에 든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아쉽게도 이 오붓한 시간은 이제 끝이지만."

화중시계를 꺼내 확인한 소녀는 벽에 놓인 가방에서 주사를 꺼내들었다.

"마음에 든다면서. 한 번 살려주는 건 어때?"

"너... 진심이구나. 미안, 그건 힘들어. 그렇다고 울면서 빌지는 말아줘.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야."

주사기 속에 무언가를 주입한 소녀는 천천히 다가와 소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하나 알려줄게. 이 방에서, 이렇게 편하게 죽는 건 네가 처음이야. 참, 그리고 구미호가 너한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시체 가지고 장난 못 치게 할게. 어때, 고맙지?"

"그것 참 더럽게 고맙네."

그 말에 빙긋 웃은 소녀는 주사기를 들이밀었다.

"이 주사를 놓으면 기적이 일어나도 10분이면 죽어. 대신, 그 시간동안 너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거야. 어때,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

대답이 없는 소녀의 모습에 소녀는 어깨를 으쓱 하고선 소녀의 목덜미에 주사바늘을 쑤셔박았다.

이물감에 소스라치게 몸을 떠는 소녀를 한 번 바라본 소녀는 미련없이 방을 나갔다.




"처리는 끝났나?"

"응. 하아... 오늘은 좀 지치네."

"왜, 반항을 하던가?"

"그런 걸로 내가 지치겠어? 그냥. 걔는 좀 마음에 들더라고."

"그랬군."

"응. 뭐랄까... 그래. 꽃 같은 아이였어. 양지에서 곱게 자라나 예쁘게 피었어야 했는데. 진흙 속에 묻혀서 죽어버린 꽃."









"당신. 아이들 이름은 뭘로 할까요?"

"그을쎄... 그래. 딸은 메이. 아들은 미트라로 하자."

"그건 또 어느 책에서 본 이름이에요?"

...는 미소지으며 짖궂게 물었다.

"왜, 왜? 내가 고심해서 지은 이름인데."

"장난이에요. 예쁜 이름이네요."

입을 삐쭉 내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 행복해?"

"네?"

"아니. 그냥 궁금해서."

곰곰이 생각하던 소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행복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과 쭉, 행복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