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대체 왜 산중턱에 있는 거야?"

언덕 입구에 선 아우로라는 툴툴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살 찔 일은 없잖아."

에르제베트는 바닥에 주저앉을 듯한 기세인 아우로라를 달래듯이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데차학개론 교수님 무서우니까 빨리 가자."

"힝... 힘들게 올라가서 재미없는 수업 듣는 거 싫어..."

"오늘 강의 다 듣고 닭갈비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그거 생각하면서 힘 좀 내."

"맞다! 헤헤. 에르르도 술 마실 거지?"

"너 하는 거 봐서. 그리고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어느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진 아우로라는 에르제베트의 팔짱을 껴왔다.

"닭갈비~ 제일 맛있는 닭갈비~"

신나서 노래까지 부르는 그녀를 보며 웃은 에르제베트는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갔다.






"얘들아~ 안녕~"

"아우로라, 왜 이렇게 늦었어?"
"올해는 엠티 갈 거야?"
"이따가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강의실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모두에게 인사를 받는 아우로라와 달리

에르제베트는 마음에 드는 자리로 가 가방을 내려놓고 이어폰을 귀에 꼽았다.

"......!"

그런 에르제베트의 옆 옆자리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편안하게 들려오는 기타소리에 빠져있던 에르제베트는 자신의 책상을 가리는 그림자를 보고서야 이어폰을 빼며 그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안 쳐다봐?"

에르제베트는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이어폰을 툭툭 쳐보였다.

"소리 크게 하고 듣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귀 상한다니까?"

"카카는 잔소리가 너무 심해. 그치?"

어느샌가 둘의 중간 자리에 앉은 아우로라는 책상에 엎드린 상태로 말했다.

"근데 나는 왜 부른 거야?"

"다다음주 엠티 있잖아. 너도 갈 건가 싶어서."

"아니. 귀찮아."

에르제베트의 대답에 카카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면 재밌다니까. 왜 안 가려고 그러는 거야?"

"에르제베트는 부끄럼쟁이라 그래."

"아, 아우로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같이 가자. 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웬 일로 끈질기게 매달리는 카카의 모습에 고민하던 에르제베트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간신히 대답을 내놓았다.

"생각 좀 해볼게."

"그게 뭐야... 그럼 그 얘긴 됐고, 이 강의 끝나고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응."

"맞다! 카카, 에르제베트. 오늘 학식 왕맛있대! 돈까스랑 수프 나온다니까 학식 먹으러 가자!"

"너는 그 쪼그만 몸에 먹을 게 어떻게 그리 많이 들어가는 거야?"

카카는 아우로라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카카도 작은데 가슴은 크잖아. 그런 거 아닐까?"

"그 얘기가 왜..."

"교수님 오셨어, 카카."

입을 뻥긋거리던 카카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로 돌아갔다.




"데차학개론 너무 재미없어..."

강의가 다 끝나고 초췌해진 얼굴을 한 아우로라는 카카의 무릎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나 좀만 잘래 카카..."

"자기는 뭘 자! 점심 먹고 오후에 도서관 가야 되니까 얼른 일어나."

"아직 11신데 잠깐만 눈 좀 붙이라고 해."

"에르제베트도 그렇다잖아."

아예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본격적으로 자려 하는 아우로라의 행동에 카카는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었다.

"그럼 딱 30분만이야. 더 졸라도 안 돼."

"응..."

강의가 정말 지루했는지 아우로라는 금새 새근새근하는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정말 내 동생보다 더 어린애 같다니까?"

그러면서도 카카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참. 카카, 저녁에 닭갈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너도 갈 거지?"

"닭갈비? 그래. 어디 있는 가겐데?"

"여기 밑에 골목 있잖아. 거기 새로 생긴 데야."

조용히 카카와 잡담을 나누던 에르제베트는 시계를 한 번 보고선 아우로라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우로라. 일어나. 밥 먹으러 가야지."

"으응...."

"대답은 잘하네."

일어날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품으로 더 파고드는 아우로라를 일으킨 카카는 벗어놓은 인경을 다시 쓰며 일어섰다.

"자, 아우로라! 돈까스 먹으러 가야지! 늦게 가면 저번처럼 식권 다 떨어진다!"

"어? 알았어!"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아우로라는 가방을 메고서 뒷문으로 달려갔다.

"얘들아, 빨리 가자!"






"여기 치즈 닭갈비 2인분이랑 전통 닭갈비 2인분이요! 아, 그리고 처음처럼 두 병도요!"

밝은 목소리로 주문하는 아우로라를 본 종업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지갑을 뒤적거려 신분증을 보여주고 물을 홀짝거리는 아우로라를 보며 카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나도 담배 살 때는 신분증 검사하던데..."

"나는 신분증 검사받는 거 싫어. 에르제베트는 좋겠다. 에르제베트가 신분증 검사 받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아우로라의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에르제베트는 조용히 웃으며 옆에서 수저를 꺼냈다.

"나 많이는 안 마실 테니까 둘이 많이 마셔."

"또 그런다. 그냥 많이 마시면 안 돼?"

"나까지 취하면 둘이 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건 그렇지. 나 잠깐만."

카카는 외투를 입고 나가고 둘만 남은 자리에서 아우로라는 슬며시 물었다.

"에르제베트. 엠티 갈 거야? 난 올해는 갈 거 같은데."

"카카는 꼭 가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나도 가야지. 고민해본다는 건 카카 좀 놀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왜?"

"카카는 삐치면 귀엽거든."

잠시 후 돌아온 카카는 외투를 벗어놓으며 둘의 눈치를 살폈다.

"둘이 내 얘기했지?"

"아, 아닌데?"

"맞구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꺄아악! 카카, 담배 냄새나!"

사이 좋은 둘을 보던 에르제베트는 서빙되어 오는 음식들을 받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둘이 그만 하고 밥 먹을 준비 해."

"네~"

에르제베트의 말에 아우로라는 한 손에는 숟가락을, 한 손에는 젓가락을 쥐고선 군침을 흘렸다.

"에르제베트. 거기 반찬 좀 안 쪽으로 넣어줄래?"

작은 키로 낑낑대며 휴대폰 화면 안에 테이블을 모두 넣은 카카는 간신히 사진을 찍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자마자 닭갈비를 하나 집어먹은 아우로라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어! 에르제베트. 나 쌈 하나만 싸주라."

"왜 가만히 있는 애한테 쌈을 싸달라 그래?"

"남이 싸주는 쌈은 더 맛있단 말이야. 그리고 에르제베트가 해주는 건 더 더 맛있고."

"정말? ... 나도 하나만 싸줘."

밑반찬부터 맛을 보던 에르제베트는 아기새처럼 자신의 쌈을 기다리는 둘의 시선을 받으며 정성스레 쌈을 쌌다.

"맞다! 먹기 전에 잔부터 채워야지."

소주병을 신나게 흔들고 까득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을 딴 아우로라는 둘의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주었다.

"카카, 내 것도."

"오늘은 천천히 마셔라."

"알았어."

"대답은 잘 해요."

자신의 것까지 쌈을 싼 에르제베트는 잔을 들었다.

"건배할까?"

"응!"

"건배!"

에르제베트는 조용히 잔을 넘겼고
아우로라는 크 하는 소리를 냈고
카카는 입술만 축이고서는 잔을 내려놓았다.





브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엘~~~~르~~에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얘는 술버릇만 아니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

카카의 양쪽 귀에 꽂혀있는 숟가락을 빤히 쳐다보던 에르제베트는 닭갈비를 하나 집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먹었어?"

"응. 근데 우리 가져온 총이 어딨지? 아까 여기다 놔뒀던 것 같은데."

쌍으로 사이좋게 헛소리를 하는 둘을 보고 에르제베트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술 좀 깨면 가자."

"난 안 취했는데?"

"나도 알아. 아우로라가 깨야지."

"난 유리 깬 적 없는데?"

카카와 말도 안 되는 대화를 나누던 에르제베트는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입구를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보라색 머리를 찰랑이며 들어온 손님은 곧장 에르제베트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빨리 왔네."

"어? 카쿠스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자신에게 서스럼 없이 안겨오는 아우로라를 대충 안아준 카쿠스는 확 올라오는 술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에르제베트 언니, 얼마나 마신 거예요?"

"둘이서 다섯 병."

"저희 언니는요?"

"두 병 쯤?"

"나한텐 그렇게 마시지 말라고 해놓고선..."

"우웅... 말하지 마 카쿠스. 속 울려..."

아우로라가 엉겨오는 상황에 카쿠스는 자연스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녁은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진작 먹었죠."

"혹시 배고프면 이것 좀 먹으라고."

"어. 먹어도 돼요?"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젓가락을 꺼낸 카쿠스는 다 식은 닭갈비를 한 점 두 점 집어먹었다.

"술은?"

"오늘 과제 있어서 안 돼요. 다음에 시간 맞으면 같이 마셔요."

"맛있어?"

"네. 사실 오늘 기숙사 밥 엄청 맛없었거든요. 그래서 야식이라도 사러 나갈까 하던 참에 딱 메시지가 온 거예요."

에르제베트는 닭갈비를 먹으랴 말을 하랴 바쁜 카쿠스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안 남아있었으면 아쉬울 뻔 했네. 하나 시켜줄까?"

"아뇨 아뇨. 있어서 먹는 거지 배 안 고파요. 참, 언니. 지금 몇 시에요?"

"지금 9시 반."

에르제베트의 대답에 남은 닭갈비까지 박박 긁어먹은 카쿠스는 물을 마시며 벌떡 일어섰다.

"꺄아악!"

"이제 슬슬 통금 시간이라서요. 언니 일어나!"

"아우로라. 이제 우리도 집에 가자."

"싫어! 2차에 노래방까지 갈 거야..."

"카쿠스. 아우로라 업게 좀 도와줄래?"

자신의 허리를 감고있는 아우로라를 에르제베트의 등에 업힌 카쿠스는 카카의 어깨를 툭축 쳤다.

"으음... 카쿠스?"

"참나. 술 잘 마시지도 못 하면서 왜 이렇게 마신 거야?"

"카쿠스. 내 총 못 봤어? 계속 찾고있는데 안..."

"그거 우리 방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자, 빨리 가자. 이제 통금시간이야."

카카를 부축한 카쿠스는 아우로라를 업고 카운터에서 기다리고 있는 에르제베트에게 갔다.

"얼마 나왔어요? 언니 카드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서 일단 제 걸로..."

"계산 다 했어. 저번에 카카한테 얻어먹은 거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랬어요? 그럼 다음엔 제가 언니들 모시고 한 번 살게요."

"그럼 사양은 안 할게."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 둘은 각자의 짐덩어리를 데리고 가게를 나왔다.

"그럼 저는 언니랑 먼저 가볼게요. 저번에도 통금시간 아슬아슬하게 가서 혼났거든요."

"그래. 카쿠스,카카. 우린 가볼게."




"으응..."

"아우로라. 이제 좀 깼어?"

"으으으응."

"안 그래도 집까지 업어줄거야."

"히히. 에르르 너무 좋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아우로라를 업고 집까지 온 에르제베트는 곧장 아우로라를 그녀의 침대에 눕혀주었다.

정신이 든 줄 알았던 그녀는 여전히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옹알이를 하고있었다.

"멀쩡히 말하길래 다 깬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아우로라의 머리를 정리해주고 이불을 덮어준 에르제베트도 술기운이 도는지 어지러운 발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양치질 하고 자야 되는데..."

이윽고 들려오는 고른 숨소리와 함께

둘의 하루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