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등나무 꽃의 약속

"우콩, 엽전 받아줘!"

"우끼!"

"미, 미안. 착하지?"

마계온천의 종업원, 메이의 하루는 항상 바쁘다.

만두를 찌고, 수건을 나르고, 엽전을 받고 온갖 물품을 파는 하루.

그런 힘든 일상이었지만 메이는 환한 웃음으로 이겨냈다.

그녀가 그렇게 힘을 낼 수 있는 건

자신과 계약을 한 그 악마 덕분이었다.

'저는... 저는 당신을 지켜주고 싶어요.'

흐드러지는 등나무 꽃 아래에서
소원이 무엇이냐는 그 악마의 질문에

메이가 한 대답이었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악마를 떠올려서인지 기분이 좋아진 메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수건을 하나 하나 개켜나가기 시작했다.

"우콩. 악마는 등나무꽃의 꽃말을 알까?"

"우끼! 우끼끼!"

"후훗. 맞아... 악마는 착하지만 섬세하지는 않지."






"엣취!"

"꼬마 주인님. 감기라도 걸리신 건가용?"

"훌쩍... 그런 거 아니거든? 누가 내 욕이라도 하나... 헉. 설마 프레이 녀석이?"

"다비가 했어. 모나 언니 옆에서 사라지라고."

"요 녀석이!"

"꺄아악! 상아 언니!"

다비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악마를 피해 상아의 치마뒤에 쏙 숨었다.

"어머. 악마, 무슨 일인가요?"

"으으... 당장 다비 내놔!"

"저는 다비 못 봤는데요?"

생글생글 웃으며 다비의 나비 머리장식을 숨겨주는 상아.

그 모습을 보며 악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못된 뿔쟁이를 물리쳤다! 상아 언니, 하이파이브!"

상아는 다비와 눈높이를 맞춰주며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다비는 그럼 놀이터 놀러갔다 올게. 주인, 집 잘 지키고 있어!"

"예, 예."

"다비는 언제 봐도 참 귀여운 아이네요."

"그래. 너무 귀여워서 문제지."

상아는 멋쩍게 웃고선 악마에게 물었다.

"악마. 차 한 잔 할래요?"

그것이 잠시 얘기를 하자는 말이라는 걸 아는 악마는

"응. 미지근하게 해 줘."

하고선 의자에 앉아 상아가 차 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 눈길을 뺏긴 악마는

눈 앞에 상아가 다가올 때까지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기요. 그렇게 뜨겁진 않을 거예요."

"어? 응. 고마워."

찻잔에 천천히 입을 가져다대는 악마를 보며

상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악마. 우리가 계약했던 곳, 기억하나요?"

"계약했던 곳? 그게 어디더라?"

"......"

한 손으로 차를 마시며 자신을 살짝 째려보는 눈빛에 악마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아, 알아. 그 연보라색 꽃 엄청 핀 거기."

"알면서 왜 그런 거예요?"

"그냥. 장난치고 싶어서."

단순한 악마의 대답에 상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악마가 정말 잊어버린건가 싶어서 조금 서운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뭐... 그런 걸 잊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서."

"후훗. 그런가요?"

차를 마시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상아.

'잊어버렸으면 진짜 혼났겠다...'

"그런데, 거긴 왜?"

찻잔을 내려놓은 상아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악마. 괜찮다면 내일 오후 그 장소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내일?"

"바쁘다면 안 나와도 괜찮아요."

"아니야 그러지 뭐. 내일은 아르바이트도 없고. 그럼 난 다비 좀 봐주러 갈게."

악마는 휴대폰을 들고 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집을 나섰다.

"...고마워요, 악마."

그리 오래 얘기를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차는 다 식어있었다.







"오늘 날씨가 왜 이리 좋지?"

"우끼, 우끼!!"

"너도 좋지, 우콩?"

원숭이를 품에 안은 소녀는

화관을 쓴 채로 흐드러지는 등나무 꽃 아래 앉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만끽했다.

"아, 저기 온다. 우콩, 얌전히 있어."

"우끼!"




마계 온천으로 향하는 발걸음.

갈림길을 지나 나무가 울창한 길을 지나니 연보라 꽃이 잔뜩 피어있는 쉼터가 보인다.

약간 세게 비추는 햇빛에 눈살을 조금 찌푸린 악마는 그 밑의 소녀를 발견했다.

살랑이는 바람, 고요한 눈동자.
흔들림 없는 눈빛은 틀림없이...






2. 달콤한 의리초콜릿

악마가 계약을 위해 나간 날,

간만에 쉬게 된 상아는 늦잠을 자고선 해가 뜬 후에야 일어났다.

"흐아암... 응? 무슨 냄새지?"

작게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고 나오자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악마가 없는 틈을 타 또 암브로시아가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상아는 부엌으로 향했다.



"베스? 뭐 하는 거예요?"

"응. 악마가 오면 줄 초콜렛을 만들고 있어."

냄새를 쫓아 상아가 도착한 주방엔

노란색 앞치마에 초콜렛이 잔뜩 튀어있는 베스가 있었다.

"어머나, 착하기도 하지. 그런데 이 재료들은..."

베스의 뒤를 보자 집에서 초콜렛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생크림, 코코아가루, 각종 초콜렛 시제품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암브로시아가 준비해줬어. 초콜렛을 만든다고 하니까 꼭 도와주고 싶다면서."

"그런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가져다 준 거지?'

상아는 그런 의문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재료 하나하나를 자신에게 보여주는 베스가 사랑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선 펄펄 끓고있는 냄비를 쳐다보았다.

"어..."

냄비는 저주라도 받은 솥처럼 초콜렛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넘쳐흐르고 있었다.

'암브로시아...도와줄거면 끝까지 좀 도와주세요.'

나중에 암브로시아에게 해 줄 잔소리는 일단 넣어둔 채로

상아는 초콜렛 범벅이 되어가는 냄비를 구해냈다.

"이건 못 쓰겠네요. 베스, 제가 도와줄게요."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너무 센 불에 직접 녹여서 초콜렛이 다 타버렸어요. 초콜렛은 약한 불에서 오래 녹여야 한답니다."

"그렇구나... 고마워 상아. 나 조금만 더 도와줄래?"

"물론이죠. 그런데, 왜 악마에게 초콜렛을 주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그건 다 만들고나면 말해줘도 돼?"

"혹시 말해주고 싶지 않은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으응.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다 만들면 말해주기에요?"

"응.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

"약속~"



"우선, 생크림을 먼저 녹여야 해요."

초콜렛 만드는 방법을 떠올리며 움직이는 상아의 손을, 베스의 작은 손이 꼬옥 잡았다.

"왜 그래요?"

"내가 직접 할래. 상아는 옆에서 알려줘."

"베스가 직접 다 하기엔 좀 힘들 것같은데요?"

"힘들어도 괜찮아. 못 하겠으면 도와달라고 할게. 응?"

"알았어요. 그럼 생크림부터 녹일래요? 아, 그 전에 여기 장갑부터 껴요. 데이면 위험해."

"알았어."

평소엔 안 그러는 베스가 고집 부리는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상아는 의자를 꺼내 앉아 옆에서 초콜렛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초콜렛을 만드려는 의지는 강했지만 무거운 냄비를 들고, 주걱을 한참동안 젓는 건 아담한 베스의 신체로는 조금 힘든 일이었다.

계속해서 실수를 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베스가 안타까워 몇 번이나 도와주려 했지만

그 때마다 베스는 괜찮다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래서 암브로시아가 재료를 저렇게나 가져다 둔 거구나...'

결국 초콜렛이 완성된 건 냄비를 열여덟 번 다시 씻고, 초콜렛을 몇 킬로그램이나 태워먹은 뒤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글자를 적고... 상자에 넣으면 마무리에요."

베스는 한참동안이나 초콜렛을 만들어 후들거리는 팔로 상아의 말을 따라서 글씨를 써넣었다.

"이제 다 된 거야?"

"네. 정말 잘 했어요 베스. 악마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음... 그랬으면 좋겠다."

"아, 마침 지금 악마가 오네요."

"정말? 그럼 나 나갈래!"


외투도 안 걸치고서 초콜렛만 가지고 나가려하는 베스를 붙잡은 상아는

따뜻한 노란색 토끼 외투를 입혀주고 벙어리 장갑도 끼워주었다.

"그럼 진짜 나갈게, 고마워 상아."

손인사로 베스를 배웅해준 상아는 호기심이 일어 악마와 베스가 알아채지 못 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베스? 추운데 왜 나왔어?"

눈길을 달려온 베스를 발견한 악마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지만

베스는 악마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 발그래진 뺨으로 활짝 웃으며 초콜렛 상자의 뚜껑을 열어 악마에게 보여주었다.

"드디어 성공했어요, 악마! 이걸로 우리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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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마중을 마친 베스는 집으로 돌아왔고 악마는 집에 잠시 있다가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하루종일 부엌에 서 있던 피로 때문인지 외투도 벗지 않고 소파에서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조는 베스를 업어든 상아는 자신의 침대에 그녀를 눞혀주웠다.

"고마워... 상아..."

"푹 자요."

베스의 위에 이불을 덮어준 상아는 불을 끄고서 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 때, 베스가 상아의 치맛자락을 가볍게 잡았다.

"베스? 왜 그래요?"

"상아... 내가 초콜렛 만든 이유... 듣고 가..."

"네? 아뇨, 나중에 들어도 돼요."

"으응. 듣고 가 줘..."

잠에 취해서 그런지 어리광을 부리는 베스의 모습에 상아는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ㅇ느......응..."

베스는 옹알옹알거리며 무슨 말을 하긴 했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말을 해주고싶은 모양이다 생각한 상아는

이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베스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 있지? 상아. 어제 동화를 읽었는데... 진심을 다한 선물을 주면... 친구가 될 수 있대..."

"그 동화를 보고 초콜렛을 만든 건가요?"

"응. 나도.. 악마랑 친구가 되고 싶어서......."

간신히 말을 마친 베스는 잠이 들었다.

조용히 베스의 말을 들어주던 상아는 잡고있던 손을 조심스레 놓고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잘 자요."



3. 알 수 없는 마음


비가 오는 날은 좋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는 것도

가만히 눈을 감고서 비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것도

비가 오는 날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오늘 그녀에게

비는 그다지 달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주인이 걱정하겠네."

잠시 산책을 나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메티스는 눈에 보이는 버스정류장 벤치로 달려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문제는 소나기인 줄 알았던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집이 어느정도 가깝다면 비를 좀 맞더라도 뛰어가면 되겠지만

비가 안 오는 날에 뛰어도 10분은 족히 걸릴 거리를 가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혹시 비 오는 날이면 꼭 우산을 쓰고 외출하는 주인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가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이런 폭우 속을 뚫으면서까지 나올 리는 없으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잠이라도 자고있겠지.

그렇게 어두캄캄한 밤에 한참을 혼자 앉아있으니

몸도 으슬으슬 추워지고 조금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버림받은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자신의 처지가 서글픈건지

메티스는 그만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따뜻한 생각을 해보려해도 자꾸 계약자의 기억이 떠올라 그녀의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자네, 여기서 뭐 하고 있는건가."

그런 메티스의 마음에 불씨를 지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피터? ... 당신이야말로 여기 왜 있는 거야?"

"주인의 부탁으로 마객상점에 들렸다 오는 길이라네."

주피터는 품에서 책을 꺼내보이며 대답했다.

"모습을 보아하니 한참동안 여기 있었던 모양이군. 일어서게. 주인이 걱정하지 않겠나."

"어? 응, 고마워 주피터."

한참을 감상에 빠져있어서인지 메티스는 약간 멍한 상태로 주피터의 우산 밑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너무 빠르면 말하게."

"알았어."

메티스의 걸음걸이도 느린 편은 아니었지만

보폭의 차이 때문에 둘의 걷는 속도에는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메티스가 조급하게 걷지 않아도 됐던 건

주피터의 무심한 배려 덕분이었을까.

말 없이 걷기만 하던 둘은 집으로 가는 건널목에 서 있었다.

빨간 불이 초록 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는동안

메티스는 아무 생각 없이 주피터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옷에는 물 한 방울 튀지 않았지만

주피터의 오른쪽 소매와 바지는 비가 잔뜩 튀어있었다.

자신은 괜찮으니 우산을 더 가까이 써도 된다고 말하려던 순간,

주피터의 양 어깨 위로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아까 보여준 그 책도 눈에 익은 책이었다.

'......'

메티스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혹시, 주인의 부탁은 핑계일 뿐이고

나를 찾으러 나온걸까?

주피터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고
만약 정말 주인의 부탁으로 나온거였다면?

어느새 신호등은 초록불로 바뀌어 있었다.

주피터는 여전히 한쪽으로는 비를 맞으며 자신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그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메티스는 고개를 숙이고서 횡단보도를 보며 걸었다.

비에 젖어 검어진 아스팔트와 흰색 선이 번갈아가며 메티스의 눈을 어지럽혔다.

주피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까?

고개를 들고싶지 않았다. 이 사람의 진심을 아는 것이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