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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인조 시기까지 실록에서 이순신이 언급된 것에 대해 알아봤음.


그럼 인조 다음부터도 한 번 찾아봐야겠지? 이번 시간에는 효종 시기에 이순신이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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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시기, 부사과 민정중이 왕도, 외직 임용, 언로 확대, 기강 확립에 대해 긴 상소를 올림. 효종 2년 6월 6일 신해 3번째 기사다.

※ 부사과는 5위에 속한 종6품의 무관직인데,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라고 하기도 함. 


기니까 빨갛게 강조한 부분만 읽으면 됨.


부사과(副司果)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반드시 형세를 얻은 뒤에 이루어진다 합니다. 이제 형세를 얻은 초기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서둘러 그 성취를 구해야 하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형세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잃어버렸고 이제 또 두 형세가 눈앞에 당했습니다마는 이것까지 잃어버리게 되면 국가는 끝내 다스릴 수 없고 종사는 끝내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병란(兵亂)을 여러 차례 겪다보니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백성이 태평 성대를 고대하기를 마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과 불을 찾듯이 하는데,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군으로 아름다운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났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으시자 사방의 만백성이 가슴이 부풀어 춤을 추며 밤낮으로 어진 정사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전하께서 떨쳐 일어나 정사를 닦고 밝히어 지치(至治)를 도모하셨더라면 손바닥을 뒤집는다느니, 앉아서 천하사를 주무른다느니 하는 말보다 더 손쉽게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난 뒤로는 시행하는 일이 적절하지 못하여 크게 중망(衆望)과 어긋나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를 다스릴 하나의 큰 형세였는데 전하께서 이미 그것을 잃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두 가지 형세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천성으로 타고나신 효성으로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예를 지키어 애통해 하시는 정성이 원근을 감동시켰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우러러 보며 ‘우리 임금의 효성은 천고에 으뜸이다.’고 말합니다.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나가 국사에다 적용한다면 이상적인 정치를 꾀할 수 있고 군왕의 덕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민의 기대는 당초보다 더욱 간절한데 해와 달은 자꾸 가고 슬픔과 사모의 정은 끝이 없으실 것이며, 3년의 복제는 모든 군왕이 바꾸지 아니한 일로서 대례(大禮)를 장차 마치고 길례로 들어갈 시기가 다가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일대 분발하시어 친히 국정을 잡고 크게 왕도 정치를 실현하고픈 뜻을 가지고 그러한 정사를 행하신다면 이는 신이 이른바 형세를 얻는 첫 번째의 일입니다.

하늘이 인애(仁愛)로워 재변으로 인한 경계를 자주 보이고 있으니 별들이 요기를 부리고 홍수와 가뭄이 정도에 지나쳐 우리 전하를 경계하는 것이 지극합니다. 옛날 상(商)나라의 중종(中宗)과 고종(高宗)은 뽕나무와 닥나무가 갑자기 크게 자라나고 꿩이 제물을 담은 솥 위에서 우는 이변을 만나 삼가고 두려워하여 정사를 닦고 덕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왕도 정치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중종과 고종의 치화(治化)는 재변이 있기 이전에는 그에 관한 말이 없고 공구 수성한 뒤에야 크게 드러났으니, 전하의 오늘은 곧 상나라 군왕처럼 뜻을 새롭게 고칠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실 줄을 알고 이상 정치를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시어 선왕(先王)의 진실됨을 거울로 삼고 후세 군주들의 허위를 물리치신다면 이는 신이 이른바 형세를 얻는 두 번째의 일입니다.

아, 이미 잃어버린 형세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 닥치는 형세는 또다시 놓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얻기 어려운 대세를 당하여 진정 떨쳐 일어나 뜻을 새롭게 고치지 않으신다면 다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것이 곧 신이 안타까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대략 몇 가지 조항을 진달하여 조그만 충성을 바치려는 이유이며, 한사코 그 형세를 얻는 방도를 먼저 밝힌 것은 일반 사람의 뜻은 혹시 형세를 얻어 가다듬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기 쉽고 나라를 꾸려가는 도는 혹시 형세를 얻어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해이해지기 쉽기 때문이니, 이는 진실로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이들이 모두 간파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잘 살피소서.

그 조목은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외임(外任)을 가리는 것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을 삼는 것입니다. 왕도 정치에서 큰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인데, 백성을 사랑하는 도는 먼저 수령과 감사를 가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삼대(三代)의 태평 성대 때는 순임금은 국정을 십이목(十二牧)에게 물었고, 주(周)나라는 육경(六卿)이 나누어 다스려 치화(治化)가 융성하고 원만하였으며, 그 이후로 치평(治平)한 세상은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선제(宣帝)만한 때가 없었는데 그 또한 순전히 순리(循吏)079) 를 썼을 뿐입니다. 그때에는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나가서는 고을의 자사(刺史)가 되고 들어오면 보상(輔相)이 되었기 때문에, 조정은 민생의 고통을 알고 지방 고을은 조정의 정령(政令)을 알아 나라를 다스리기가 매우 손쉽고 교화와 은택이 빨리 미쳐가 마침내 국력이 풍부해지는 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당 태종(唐太宗)의 문교 정치로도 여기에는 미칠 수 없었으니, 이는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그렇게 하지 않아 수령의 자리를 하찮은 벼슬로 간주하여 수령을 하는 자들은 음관(蔭官)이나 무부(武夫)가 아니면 반드시 문사(文士) 중에 명망이 없는 자이거나 청의(淸議)에 죄를 얻은 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 공로를 보답하거나 귀양보내는 소지로 삼을 경우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처음 벼슬길에 들어설 때부터 손가락을 꼽아 달 수를 세어가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승진할 날만 기다리고, 겨우 자급이 뛰어오르면 동분 서주하며 요직을 간절히 구하다가 제 소원대로 되면 제 몸을 살찌게 할 것만 힘쓰면서 한번 그 자리를 잃으면 다시는 얻지 못할 것처럼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 사이에 혹시 명류(名流)로서 수령이 된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하는 말이 ‘잠시 한가한 고을에 부임하여 바람을 쏘이겠다.’고 하며, 부임한 뒤에는 호사스럽게 먹고 마시면서 안으로는 제 집의 재산을 챙기고 밖으로는 정사를 팽개치며, 이웃 고을을 능멸하여 누가 나를 감히 어찌하랴 합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채 안 되어 흥미가 없어지고 싫증이 나면 곧 스스로 버리고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안팎으로 미관호작(美官好爵)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가 있으니 몇 년간 벼슬이 없더라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합니다.

감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책임이 한층 더 무거운데 한갓 그 기세만 믿고 각 고을을 유람삼아 돌면서 기생을 곁에 끼고 술을 실컷 마시며 멀고 가까운 관계에 따라 제 사심을 자행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정화(政化)가 흘러갈 수 있고 민생이 보전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조정의 신하들은 다 민사(民事)가 어떠한지를 모르고, 혹시 근시(近侍)의 직에 있는 신하가 폐막을 진달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풍문에 의해 들은 그대로 진달한 것이므로 나중에 사실을 조사해 보면 대체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백성을 어루만져 돌보는 책임은 오로지 무식하고 수탈을 일삼는 손에 맡기며 조정에서 국정을 설계하는 선비는 농사를 모르는 사람이니, 어찌 능히 백성이 임금의 은택을 입고 관리가 그 직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렇습니다. 문사(文士)의 출신으로서 처음 6품으로 승진한 자와 무사나 음관으로서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현(縣)의 수령으로 제수하여 선정(善政)을 책임지우고, 천성이 강인하고 확실한 자는 대간(臺諫)·시종으로 뽑아들이며, 교육과 훈도를 잘하는 자는 성균관 직책으로 발탁하여 제수하고, 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강령을 아는 자는 차츰 주(州)·부(府)로 올리고, 주·부에서 올려 감사로 삼고, 다시 감사에서 조정으로 들여와 경상(卿相)으로 삼으며, 혹시 고을은 잘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문재(文才)·기절(氣節)·유학(儒學)이 있는 자는 각기 그 소장에 따라 임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뽑아들이는 법은 반드시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험을 한 다음에 재주를 헤아려 수용(收用)하여 침체된 자를 소통시키고 흐린 길을 맑게 하는 계제로 삼아야 합니다.

감사의 경우는 반드시 2품 이상으로서 방정하고 엄중하며 바르고 곧아 공보(公輔)의 명망을 지닌 자를 가려서 삼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아뢴 것처럼 그 기한을 늘리고 가족을 인솔하게 하여 오랫동안 맡겨 공을 이루도록 책임지우고 관하 수령에 대한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고 고과(考課)의 법을 엄중히 하게 하며 수시로 어사를 보내 아(阿)·묵(墨)080) 을 염탐하여 그 상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전관(銓官)이 사람을 쓸 때도 감사가 보고한 고과(考課)에 따라 오르내리고 조정한다면, 10년이 넘기 전에 군읍(郡邑)에 제수되는 것을 세상 사람이 중요시하고 그 직을 맡은 자도 모두 스스로 힘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각 고을의 수령들은 다 재능이 있는 관리이고 경연과 대각(臺閣)의 직에 있는 신하들도 다 지방관을 역임하여 민생의 사정을 잘 알아 위로는 임금의 자문에 도움이 되고 아래로는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 힘이 있을 것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있어서 참으로 제일가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인재를 헤아리는 것으로 책임을 맡기는 방도를 삼는 것입니다. 나라를 꾸려나가는 도는 오직 적격자를 얻는 것에 있는데, 오늘날을 위하여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인물이 없다. 세상에는 너무도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는 한 세상을 그르치는 말로서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재주가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제각기 장점이 있는 법으로서, 다만 인재를 쓰는 자가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재를 쓰는 것이 그 법도를 잃어 한 가지 재주가 있다고 소문이 난 자는 그 힘에 벅찰지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부리며 발탁하여 쓰는 것이 분수를 넘어 사람과 벼슬이 서로 걸맞지 않습니다. 그 능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맡겨 마침내 일을 그르치면 또 으레 말하기를 ‘인재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은 제각기 능한 것도 있고 능하지 못한 것도 있다는 것을 몰라서일 뿐입니다. 그 능하지 못한 것은 사실 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곧 재주를 헤아려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

당(唐)·우(虞) 시대에는 고요(皐陶)·직(稷)·설(契)과 같은 어진 사람은 의당 능하지 못한 것이 없을 것이지만, 사도(司徒)니 사구(司寇)니 하는 직을 제각기 따로 맡겨주었으니 이는 요(堯)임금이 인재의 임용을 잘한 것입니다. 이제 비록 직·설과 같은 사람은 얻을 수 없더라도 모든 관직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골라 직책을 주고 그 재주를 시험하여 일을 맡기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자는 거두어 쓰고 감당하지 못할 자는 물리치신다면, 사람마다 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 수많은 시책이 전부 성과를 거두고 사방에서 재주를 갈고 다듬어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옛날 전국 시대의 유협(游俠), 서한(西漢)의 순리(循吏), 삼국(三國)의 장사(將士), 이당(李唐)의 문재(文才)는 어찌 천운에 의해 어느 한 시대에 우연하게 배출된 것이었겠습니까. 각기 그 시대의 숭상한 것에 따라 사람들이 다 스스로 힘을 다한 것일 뿐입니다. 임금은 풍화(風化)를 좌우할 만한 권한을 잡고 있으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취사와 배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장수 노릇을 잘하고 태평한 세상을 만나면 재상 노릇을 잘하는 등 자신이 만난 경우에 따라 적응하지 못하는 바가 없지만,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면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조조(宣祖朝)의 인재로 말한다면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유성룡(柳成龍)과 같은 신하들은 평소에 문장가로 이름났을 뿐이니, 이들로써 위급한 난리를 안정시키고 중흥의 공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온 나라 사람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기다가 그들이 큰 공로를 세운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재주와 공이 한(漢)나라의 등우(鄧禹)와 마원(馬援)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비록 그 재주를 지녔더라도 관직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세째는 신하들을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을 소통시키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신하들을 드물게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이 소통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조종조에는 임금이 경연에 자주 납시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공사(公事)가 있을 때는 승지가 반드시 들어가 품의하여 직접 성지(聖旨)를 받았기 때문에 군신 사이에 정분과 의리가 서로 단단해지고 꾀하는 일이 올바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연산군(燕山君) 때부터 이 법이 영원히 폐지되었고, 요즘에는 경연에서 신하를 접견할 때에도 입대(入對)하는 관원이 따로 있기 때문에 비록 대관(臺官)과 시종(侍從) 벼슬을 여러 번 지낸 사람이라도 한번도 용안을 뵙지 못한 자가 있으며, 혹시 소견이 있을 때는 그저 약간의 문자로 아뢸 말을 얽어 만들 뿐이므로 말이 명백하지 않고 뜻을 전부 표출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임금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그럭저럭 낡은 습관을 답습하여 오랫동안 서로 버티다가 혹시 위에 신용을 얻지 못하여 성상의 뜻을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는 엄중한 분부가 거듭 내려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뭇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지닌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면서 해당된 사람을 접해보지 않고 다만 직무 가운데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그 사람됨을 단정하시는데, 사람이 요순이 아니고서 어찌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잘못된 일이 있으면 본인의 본심과 행위가 어떠한가는 따지지 않고 다짜고짜 물리쳐서 아깝게 생각하지 않으시니, 또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시는 도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날마다 법전(法殿)에 납시지는 못하시더라도 편전(便殿)에서 시사(視事)할 때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승지가 다 직접 품의하게 하여 재결하시고, 간관(諫官)이 아뢰는 것도 직접 아뢰게 하여 간신(諫臣)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면전에서 따지며 비록 중대한 일이라도 그와 같이 면담하는 속에서 결정하고 글로 아뢰지 말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요컨대 군신 상하가 서로 성의가 통하여 모든 일이 올바른 사리대로 진행된다면 저절로 의사가 막히고 어긋난다는 탄식이 없고 뭇 신하들의 간사하고 올바른 것, 재주있고 용렬한 것도 또한 성상의 안목에서 그 본색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시사를 말하고 싶어하는 자가 있으면 대궐에 들어와 아뢸 수 있도록 허락하여 사방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다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절반은 넘어간 것입니다.

신이 옛 역사를 살펴보니, 한(漢)·당(唐) 시대의 군주라도 나라가 태평한 세상에는 군신이 서로 접촉하여 구애를 받는 일이 없었으며 신희(愼姬)가 원앙(袁盎)의 배척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군자(君子)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내외의 구별이 엄하지 않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그러한 법이 쇠퇴하여 예법이 엄하지 않으면서도 절차는 극히 까다롭고 스스로 높고 크게 처신하지만 실제적으로 차츰 낮아집니다. 일반 가정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는 자는 반드시 미천한 노비에게도 그 법을 물어 반드시 실수없이 일을 해내는데, 하물며 크나큰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깊숙한 궁중에 거처하여 부인과 내시로 하여금 임금의 분부를 전달하게 하고서도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조종의 옛법을 회복하고 혼조(昏朝)의 나쁜 습성을 개혁하신다면 사람들이 다 충성을 바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네째는 인륜을 밝혀 교화를 여는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요즈음 천재와 시변이 끊임없이 나타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다만 강상의 변과 윤기의 악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고 도성 안에까지도 그러한 일이 있으니, 신은 아마도 1백 년이 되기 전에 오랑캐와 금수의 지역으로 차츰 빠져들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으로 봅니다. 말을 하자니 매우 추잡하여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가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인륜이 밝혀지지 못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반역이 자주 일어나 난신(亂臣)이 꼬리를 물고 강상이 두절되어 적자(賊子)가 나오고 있으니, 만약 시급히 바로잡아 오륜의 가르침을 다시 밝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고 아비를 아비로 대하지 않는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진정으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서글픈 마음으로 분발하시어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열어 이 세상을 망해가는 상황에서 구하고 이 백성을 물 속에서 구제하신다면 그런대로 인륜이 사라지지 않아 왕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실시하는 법은 서책에 실린 성현의 법이 있으므로 신이 감히 지리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섯째는 명분을 엄하게 하여 예모(禮貌)를 높이는 일입니다. 명분은 성인이 중시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상하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조정의 위신이 높지 않아 군상(君上)의 명이 조정에 행해지지 않고 조정의 지시가 주군(州郡)에 행해지지 않으며, 심지어 하급 관리가 상관을 능멸하고 서리배가 장관을 무시하여 관아에서 공식적으로 모인 좌석이라도 미관 말직들이 조심하여 복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서로 겨루려는 생각에서 거만한 빛이 얼굴에 역력하고 건방진 말이 입에서 터져나와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서슴없이 비방합니다. 그 마음속에는 ‘저자가 비록 자급이 뛰어올라 벼슬이 나의 위에 있긴 하지만 내가 어찌 저자를 두려워할소냐.’라고 생각하는데, 그 아랫사람도 그에게 그와 같이 하고 하민(下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습속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실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폐단은 장차 군상(君上)이 있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조정에서부터 그 명분을 바르게 하여 삼공(三公)은 육경(六卿)을 총괄하고 육경은 이경(貳卿)을 총괄하고 이경은 또 그 아래를 총괄하여 서리 무리들까지도 각기 통할하는 곳이 있어 모두 살피고 경계하기를 한결같이 조종조의 제도처럼 한다면, 그런대로 사람들이 다 명의(名義)를 두려워하고 분수에 만족하여 한계를 벗어나는 풍조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여섯째는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는 일입니다. 대체로 기강이 무너져 염치가 완전히 없어진 뒤로는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세상이 모두 사욕에 빠져서 스스로 명사(名士)니 정인(正人)이니 하는 자도 그 속에 흘러들어감을 면치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예를 들어 한두 가지 폐습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고위직에 있는 자는 누구나 세력으로 사람들을 협박하여 구차하게 제 집을 이롭게 할 계산을 하고 있으며, 대간(臺諫) 등 법을 집행하는 관리의 경우 밖에 나갈 때는 도로에서 호창(呼唱)을 행하고 집에 들어오면 그 전도(前導)를 맡은 군졸에게 법사(法司)의 권위를 빌려주어 남에게 준 빚을 징수할 계산을 하는데, 그 과정에 불법을 자행하는 폐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것이 상습화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친족과 친지들까지도 빚을 징수하고 싶으면 모두 전도 군졸을 빌려달라고 청하기를 마치 남의 집의 기물빌리듯 하고 그러면 또 즉시 빌려주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으니, 전도를 설치한 목적이 어찌 이들을 위하여 남에게 완력을 행사하라는 것이겠습니까.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미 나쁜 풍조가 이루어져서 겉으로는 모리배의 짓이라고 칭탁하여 세상의 비방을 피하고 속으로는 청탁하는 권한을 쥐어 그 이익을 나눠먹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시정의 무리와 연줄을 맺어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심지어 역관(譯官) 무리의 장례에도 호상(護喪)하는 관리를 정하는 일까지 있어 그 하리(下吏)된 자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분하게 생각하여 그 관원을 무식한 촌사람보다 못하게 보니, 무슨 이유로 그 지시를 따르고 직무를 받들어 행하겠습니까.

아, 온 세상이 한 모양으로 함께 목욕하는 마당에 누가 발가벗었다고 비난할 수도 없게 되어 한번 벼슬길이 트이면 마침내 서로 붕당을 짓습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함께하는 사이에는 감싸주는 것을 일삼고 자기와 뜻을 달리한 자를 보면 곧 싫어하여 비방을 가하니, 조금이라도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 하면 이미 형세가 고립되어 뭇사람들이 시기하고 배척하므로 피차간에 용납이 안 됩니다. 이러한 나쁜 풍조가 이미 습관이 되어 감히 서로 경계를 해주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멸망은 머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곱째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왕자(王者)가 인정(仁政)을 베풀 때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현재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므로 뭇생령이 제각기 뜻을 성취하여 애초에 억울함을 품는 일이 없고 억울한 자가 생기면 풀어주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신이 한편으로 염려하는 바가 있으니, 그 억울한 자가 혹시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일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정태제(鄭泰齊)를 귀양보낸 사건은 당초에 그의 이름이 난적(亂賊)의 입에서 나왔으나 별다른 증거가 없고, 그 무리들 몇 사람 가운데 혼자서만 무거운 벌을 받은 것은 벌이 공평하지 못한 듯하며, 또 폐역(廢逆)과 비록 인척관계이긴 하나 역시 죄를 범한 일이 없는데 벌을 받았고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전후 사실을 살펴볼 때 사실 물을 만한 죄가 없으니, 태제의 경우 국법상 용서해 줄 만한 자로서 혹 억울한 점이 없겠습니까.

유계(兪棨)에 대해서는 전후에 걸쳐 대신과 재신(宰臣)이 그의 근본 마음을 여러 번 아뢰었으므로 신이 다시 진달할 일이 아니고, 또 신하들 중에 유계의 일을 말한 자는 모두 사적인 일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공격하고 엄중한 벌로 단죄하였으므로 신의 한 마디 말로 능히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인정은 누구나 비슷한 것이니 유계가 아무리 형편없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하의 하교처럼 그런 자는 아닐 것인데, 처음에 이미 석방하고서 나중에 다시 귀양보내는 등 매번 아랫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석방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였으니, 어찌 한 사람의 죄가 말하는 사람에 따라 깊어지고 얕아지고 한단 말입니까. 당초에 상소한 신하는 세 사람으로서 근본 마음은 똑같이 그저 어리석고 망령된 데서 나왔을 뿐인데, 유독 유계에게 대해서만은 임금의 노여움이 한층 더 크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전조(銓曹)의 끌어댄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슬렀고 여러 신하의 구제해 주는 말이 지리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유계가 시론(時論)을 조종하고 요로에 친분을 맺은 것으로 의심하셨기 때문인데, 신자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로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사물을 각기 사물 그 본연에 맡기는 성인의 도가 아닌 듯합니다.

조익(趙翼)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 출송한 것도 성명의 흠결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만약 조익이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산을 하였다면 그 죄는 여지없이 주살하여야 하고 이와 같이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노병(老病)으로 인해 잘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죄는 고의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너무 무겁게 죄를 줘서는 안 됩니다. 신은 ‘조익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하가 어찌 임금을 떠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되니, 이는 필시 잘 살펴보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보지 못한 죄는 본가의 사람과 크게 서로 다를 것이 없는데, 윤이지(尹履之)는 이미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귀양을 면제하고 그 관직만 삭탈하였으니 조익이 문외 출송된 것은 이미 과중한 것이며 본심 밖의 하교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밖에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죄인 중에도 혹시 억울한 자가 있을 수 있으니 전하께서 한두 대신과 그 경중을 상의하여 그 억울함을 씻어주신다면, 이는 참으로 인정(仁政)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요즈음 억울하다고 하는 것으로는 김익진(金益振)을 삭과(削科)한 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실로 개탄하고 있으니, 익진이 만약 사심을 행한 자취가 있다면 삭과만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중한 벌을 받아야 하고 그 당시 고관(考官)도 그와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만약 사심을 행한 자취가 없다면 삭과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름을 봉한 부분이 넓다 하더라도 본디 정식(定式)이 없었으니, 만약 앞으로 정식을 엄격하게 세워 그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삭제하는 것이 옳겠으나 이제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봉한 부분이 넓다고 하여 과목(科目)을 삭제하였으니, 실로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그 억울함을 알아 직명(職名)을 제수하기까지 하셨으니, 비록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신은 그 조치를 온당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만약 억울하다고 생각하셨으면 직명을 제수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 과목을 복구시켜야 하고, 마땅히 삭제해야 한다면 또한 직명을 제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줘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어떤 거자(擧子)가 국휘(國諱)를 잘못 썼다가 삭과된 일이 있었는데, 과장(科場)의 규칙상 국휘를 쓴 자는 삭과한다고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어 봉함한 부분이 넓은 익진의 경우와는 비할 바가 아닌데도 그 당시 연신(筵臣) 중에 애석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선왕(先王)께서는 즉시 복과(復科)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과거의 법이 생긴 뒤로 유능한 자나 어리석은 자가 함께 응시하여 합격을 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 영광과 몰락이 판가름되며 비록 세상에 도를 행해보려는 뜻을 지닌 자라도 반드시 이 길로 말미암아 나아가는데, 궁벽한 시골의 미천한 선비가 흰머리가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다행히 합격한 것을 가지고 또 죄를 진 일도 없이 억울하게 삭제된다면 그 억울함이란 더 이상 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군주가 인재를 만드는 도리로서도 마땅히 이 점을 우선 살펴보아야 하니, 성명께서는 유념하소서.

여덟째는 전례(典禮)를 중시하는 일입니다. 종묘 세실(世室)에 관한 의절은 신과 사람의 거룩한 예이자 국가의 큰 전례로서 조종(祖宗)을 존숭하고 그 은택이 만대에까지 미쳐가는 것이니, 옛 예절 3천 가지 중에 이보다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묘(成廟)를 세실에 모시자는 논의가 처음 승하하시자마자 일어났는데 그 당시에 대신·예관(禮官)과 간신(諫臣) 김극뉵(金克忸)·김일손(金馹孫) 등이 헌의한 글이 있습니다. 그 당시 대신·예관·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다 의논에 참여하게 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예를 중시했던 경향은 이와 같았으며, 그 후 선조(先朝)에 헌의할 때에는 그때의 헌의를 상고해 낸 다음에 뭇사람의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었습니다. 대체로 열성(列聖)의 세실은 자손의 입장으로 그 조종을 사사로이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조종의 공덕이 인심에 흠뻑 젖어들어 한 평생 잊지 못함으로써 그러한 예를 자연적으로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중종 대왕께서는 어지러운 조정을 쓸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깊고 후하신 은택이 이제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니, 신민의 추모하는 정성으로서는 마땅히 만세토록 흠향하실 성대한 예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들으니 조정이 처음에 예관(禮官)이 아뢴 것으로 인해 대신에게 문의하여 그렇게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고 했는데, 뭇사람의 마음이야 말할 수 없이 기쁘더라도 예문(禮文)으로 보아서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대체로 예를 중하게 하지 않으면 일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조정에 있는 2품 이상의 중신에게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게 하거나 혹은 성묘 세실에 관해 당초 헌의한 절목을 상고하여 강정(講定)하게 한 다음에 중외의 인민에게 널리 고하여 그들과 이 경사스러운 예를 함께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을 천성적으로 타고나 3년간의 복제(服制)가 이미 끝났는데도 슬퍼하고 사모하는 정이 시들지 않아 삭망(朔望)의 제의(祭儀)까지도 다 몸소 행하시니, 이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하는 지극한 뜻으로서 신민들이 매우 감동하고 기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절을 하며 곡하는 예가 옛 예경(禮經)의 강쇄(降殺)하는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요즈음 예관과 대신들의 계사로 인해 전하께서도 그것이 지나친 예라는 것을 아시고서도 오히려 ‘나는 정에 따라 무턱대고 행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너무도 생각없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은 아무리 끝없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어찌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할 때 도리에 꼭 맞게 하였다는 가르침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정이야 끝이 없더라도 예는 반드시 절제하는 법인데 이미 최복(衰服)을 벗은 뒤에도 계속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은 예에 있어서 과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만약 상사(祥事)를 마친 뒤에도 강쇄하지 않다가 담제(禫祭) 때에 가서야 갑자기 전부 복을 제한다면, 정을 단계적으로 절제하는 일이 없어 근엄한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찌 뒷사람이 본받을 만한 도리이겠습니까.

예가 비록 정에 따라 생긴 것이라 하지만 옛날 성인이 정을 참작하여 예를 정해 법으로 만들었으니 거기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큰 효자는 나이 50세가 되어도 부모를 사모하는데 만약 정에 따라 무턱대고 행하기로 한다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을 어찌 3년만 하고서 그만두겠습니까. 성인의 생각에는 3년 뒤에 갑자기 길례로 돌아간다면 효자의 슬프고 그리는 정이 아직 쇠해지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결국 한 달을 건너뛰어 지내는 담제의 법을 둠으로써 정과 예문이 완전하게 갖춰졌던 것입니다.

이제 상사를 마친 뒤에 마땅히 어떠한 예를 써서 이 정을 강쇄해야겠습니다.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이미 대상이 지났으면 그 후 담제 사이의 삭제(朔祭)에는 마땅히 배례(拜禮)만을 써야 할 듯합니다. 어찌 담제에 곡례(哭禮)가 있다고 하여 담제 이전의 삭망 제사에도 곡례를 쓴단 말입니까. 그 강쇄로 말한다면 담제와 대상의 절목 역시 한 등급의 강쇄만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담제 때 곡례가 있는 것은 3년의 복제가 그날로 전부 끝나므로 효자의 마음에 슬픔과 그리움이 반드시 갑절이나 되어 저절로 곡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또한 이 예를 끌어다가 삭망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문(禮文)에 ‘정에 지나친 것은 예가 아니다.’고 하여 옛 성인의 훈계가 준엄하니 빨리 예관으로 하여금 예문을 자세히 고찰하게 하여 다시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예를 중시하는 뜻에 부합할 듯합니다. 그러나 신은 예를 아는 자가 아니고 다만 개인의 견해를 진달한 것일 뿐이니, 성명께서는 살펴보소서.

아, 오늘날의 폐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큰 관리는 우유 부단하고 작은 관리는 일을 다잡아 하지 않아 국사에 관한 모든 것을 서리에게 일임하면서 서리가 문서를 안고 와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종이 말미에다 서명만 하여 내보내고 주위 사람이 혹시 그 곡절에 대해 말해주더라도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다만 농지거리를 맑은 멋으로 삼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고상한 버릇으로 삼아 국가가 날로 위망(危亡)으로 치닫고 있는 줄을 모르니, 이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이에 감히 우선 절실하고 시급히 해야 할 일을 위와 같이 조목별로 거론하였습니다마는, 그 추진하는 방도는 오직 전하의 입지(立志)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입지란 것은 지성 한 가지 마음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선왕(先王)의 정치를 반드시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후세의 어수선한 정사에 구애되지 않고 세속의 그럭저럭 넘어가는 의논에 흔들리지 아니하면서 반드시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시대처럼 나라를 다스려야겠다고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한 개인의 몸이라도 입지가 독실하지 않으면 제 몸을 스스로 닦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크나큰 한 나라를 가지고서 먼저 성상의 뜻을 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군주라면 어느 누가 그 나라가 다스려지길 원치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혹은 그와 같이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혹은 처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다가도 끝을 맺지 못하고, 혹은 오랫동안 쌓인 폐단에 안주하여 개혁하지 못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하는 많은 의논에 정신이 팔려 어느 것을 취택해야 할 지 모르는데, 이는 다 군주의 뜻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먼저 뜻을 정하여 표준을 세우고 아랫사람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신다면, 바람에 쓸려가듯 그림자가 따라가듯 호응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어 비록 백에 하나도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신 같은 자도 마땅히 노둔한 힘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성상의 뜻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을 할 것인데, 하물며 유능하고 뛰어난 선비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뜻이 있는 자들이야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비록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반드시 배우고 물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힘과 본연의 천성을 보존하고 과실을 살펴보는 공이 있는 다음에 그 뜻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천하의 일은 정성이 아니면 확실하게 되지 않는 법이니,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스스로 반성하여 노력하소서.

옛날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을 훈계하기를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의지를 잃어버린다.’ 하였고 대우(大禹)는 대성인임에도 맛있는 술을 싫어하였으니, 성상께서는 스스로 힘쓰소서. 신은 듣건대 잠저(潛邸)에 계실 때 이따금 술잔을 가까이하여 실컷 마시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셨다가 세자로 책봉된 뒤로는 이미 술맛을 끊으시고 경연에서 누누이 술을 경계하셨다고 하니, 신민의 기쁜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간절한 마음은 정자(程子)의 사냥을 좋아한 데 대한 경계가 없을 수 없어 함부로 진달한 말이 여기에까지 미쳤습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는 그 망령되고 참람됨을 벌주시고 어리석은 충정을 받아들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그대는 나이 어린 학사로서 사무를 통달하고 세태를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해박한가. 사안에 따라 할 말을 다하고 숨기는 것이 없으니, 내 마음에 더욱 가상하게 여겨진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대도 또한 나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이 충직한 기개를 잘 길러나가 원대한 성취를 기약하도록 하라. 그리고 소장에 이른바 ‘세속에서는 다만 농지거리하는 것을 맑은 멋으로 삼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고상한 버릇으로 삼아 국가가 날로 위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로서 재삼 경탄하고 이어 한숨을 쉬었다. 국가가 날로 위망의 길로 나가는데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니, 아, 동진(東晋)의 풍조와 불행히도 비슷하도다. 우리 신하들은 마땅히 이로써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며, 말단에 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비유한 것은 그 뜻이 더욱 깊으니 어찌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사과(司果) 민정중(閔鼎重)은 나이 어린 하급 관리로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말이 시의에 절실한 것이 많았다. 그 충직함은 참으로 가상하니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나의 가상히 여기고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고, 그 소를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에서 복계하기를,

"민정중은 나이 어린 신진으로서 국사에 마음을 다할 뿐만 아니라 시무(時務)에 능한 것이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시세의 득실을 논하면서 수령을 가려 제수하고 감사를 오랜 기간 유임시키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이는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백성과 가까운 관리는 수령만한 자가 없고 수령을 통섭하는 것은 감사만한 자가 없으니, 처음에 수령을 가려서 맡겨 먼저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행하고 감사를 오랫동안 유임시켜 그의 재주를 전개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백성이 이미 잘 다스려지는 마당에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백리의 땅에도 수령은 오히려 3년 혹은 6년 동안 유임시키는 일이 있는데, 천리의 땅을 관할하는 감사가 어찌 1년만에 그 재주를 펼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법을 논한 선유(先儒)는 모두 오랫동안 맡겨 성공을 책임지우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6도의 감사는 모두 양계(兩界)처럼 본영(本營)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고 병사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행한다면 반드시 성과를 이룰 가망이 있고 영접과 전송을 자주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는 변통해야 할 일 중에서도 우선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재주를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방도입니다. 과연 이 방도를 잘 이행한다면 인재가 반드시 배양되고 성취되는 실적이 있을 것입니다. 매일 경연에 납시어 아침과 낮으로 강독하는 기회를 갖으시면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까지 통하게 될 것이고, 엄중한 분부를 자주 내리심과 아울러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하신다면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다 성상께서 스스로 힘쓰실 일로서 신하들이 다함께 기대하는 바이니, 시종 태만히 하지 마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명분을 엄중히 하는 것은 기강을 일으키는 데에 있고 예모를 높이는 것은 염치를 가다듬는 데에 있으므로 이 조목은 두 가지이나 실은 하나입니다. 원통함을 품고 억울한 처분을 받는 것은 성왕들께서 민망히 여기고 측은해 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죄를 입은 사람은 그 경중을 막론하고 거의 다 풀어줬으며 이제까지 억울한 처지 그대로 있는 자는 유계(兪棨) 한 사람 뿐인데, 구언(求言)한 뒤로 진언한 자는 이것을 가지고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공론이 다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석윤(趙錫胤)의 상소에 대해 회계할 때 신들의 생각은 양이(量移)의 명을 내리시길 청하고 싶었으나 서로의 말이 통일되지 않아 며칠간 지연되었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근도(近道)로 옮길 것을 명하여 특별히 억울함을 씻어주는 은택을 베푸시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김익진(金益振)의 삭과(削科)에 대해 바깥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심을 행사한 자취가 있다면 고관(考官)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하니 어찌 익진이 관계될 일이겠습니까. 그전부터 삭과되었다가 도로 원상 회복된 자가 한두 사람만이 아니니, 바라건대 억울함을 씻어주어 그 과목(科目)을 복구하소서. 중종 대왕께서는 혼란한 조정을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꾀하셨으므로 당연히 백대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는 제향을 누려야 하는데, 그 이른바 예를 중하게 하지 않으면 일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한 것은 신들이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혼전(魂殿)의 삭망 제사에 곡례(哭禮)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이미 결정된 예로서 이제 새삼 거론할 것은 없습니다. 그 아래 이른바 먼저 성상의 뜻을 정하여 아랫사람을 격려하시라는 것과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의지를 잃어버린다느니, 우임금은 맛있는 술을 싫어했다느니 하는 경계는 그 마음이 성상을 더 노력하시게 하자는 데 있는 것으로, 정자처럼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싹틀까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한층 더 유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종 태만히 하지 말고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혹시 싹틀지 모른다는 경계는 내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수령을 가려 맡기고 재주를 헤아려 벼슬을 제수하는 일은 해조에 엄중히 당부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거행하게 하라. 감·병사를 오래 유임시키는 일은 국조(國朝) 이후로 없었던 법일 뿐만 아니라 만약 적임자가 아닐 경우에는 도리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고굉(股肱)의 대신과 이목(耳目)의 대관(臺官)에 대해서도 그 유능 여부를 살펴 만약 유능하다면 비록 여러해를 넘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체차하지 말고 잉임시켜 그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하고 유능하지 못하다면 1년이 채 되지 않았더라도 빨리 제거해야 할 것이니, 굳이 이 법을 새로이 만들 것은 없다. 유계와 김익진 등의 일은 이미 결정된 일로서 이제 와서 고칠 수는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낮은 하급 관리가 올린 상소에도 효종은 매우 적절하다고 칭찬하면서 논의해보고 상을 내리도록 한다.


그런데 그 상소에도 인재를 적절히 등용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이순신과 권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즉, 재주 있는 사람이 관직이 없어 놀고있을지도 모르니 살펴달라는 이야기다.


와 근데 이거 하나만 해도 엄청 기네. 걍 세상사 전체를 망라해서 올린 상소라 그런가.


그리고 효종 4년에도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재변을 물리치기 위해 해야 될 일을 상소하는데, 여기서도 이순신이 언급된다. 효종 4년 7월 2일 을축 2번째 기사를 보자.


역시 더럽게 기니까 빨갛게 강조한 부분만 읽기를 바람.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접때 연영전(延英殿)에 납시어 많은 관원을 접견하셨을 때에 재변을 당하여 몹시 절박하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이 말씀에 넘치고 뭇 신하에게 하문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셨으니, 입시한 신하들이 누구인들 반가워하고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은 식견이 천박하고 고질병이 낫지 않아 정신이 어두운 상황에 갑자기 주대(奏對)하느라고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로써 책임을 면하려 하여 끝내 성대하신 뜻을 저버린다면 신의 죄가 더욱 클 것입니다. 또 뜻은 만사의 근본이고 뉘우침은 착한 것을 회복하는 기틀이니, 전일의 일은 반드시 과거를 뉘우쳐 깨닫고 장래를 무사하게 하려는 의도가 일념에서 분발하여 이런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태평이 오늘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은 전후에 은혜를 받은 것이 월등한데 지척에서 하문하실 때에 고루한 생각을 다 아뢰지 못하였으므로 애타는 마음이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예전에 들은 것을 대략 주워 모으고 진심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뢰니, 성심(聖心)·성학(聖學)·제가(齊家)·효제(孝悌)·돈종(惇宗)·임상(任相)·추성(推誠)·예하(禮下)·애민(愛民)·근정(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綱]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상벌을 살피고[審賞罰] 형옥을 돌보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기르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입니다.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仁)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중주(中主)의 소강(小康)도 이를 빌려서 다스렸을 것이니, 다니기가 험한 산길에서 애쓰고 초목이 무성한 곳에서 배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경중을 재제(裁制)하는 일을 거론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신기한 것만 일삼고 고원(高遠)하기를 힘쓰며 몸과 마음에 절실한 생각이 없이 옆으로 굽은 길을 달려간다면, 버려두고 게을리하는 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치가 이미 밝지 못하니, 어찌 정치에 보탬이 있겠습니까.

또 시강(侍講)하는 관원은 실로 옛 사부(師傅)와 같은 직임입니다. 이 때문에 세종(世宗) 때의 집현학사(集賢學士)인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김종직(金宗直) 같은 무리는 다 한때의 선발을 극진히 하여 진심으로 맡겼으므로 물고기와 물처럼 합치하여 예절은 간이(簡易)하면서 성의는 서로 미더웠습니다. 총명이 어찌 넓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위 아래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인재가 적어서 그러한 몇몇 신하들을 갑자기 얻기는 쉽지 않겠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다 하겠습니까. 임금이 늘 유신(儒臣)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예절이 엄격하여 접견할 때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데 어찌 번잡한 격식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세종 때의 옛일처럼 때없이 출입하고 강독할 때에는 조용히 모시고 차분히 점점 닦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궁녀 환시를 가까이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생각하건대, 원자(元子)는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하니, 더욱더 바른 선비를 친근히 하여 덕성을 훈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종(哲宗)을 보도하는 일 때문에 선인 태후(宣仁太后)에게 정자(程子)가 청한 곳에는 바름을 기르는 길과 기미(幾微)를 방지하는 뜻이 두루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으니, 그 전서(全書)를 상고해서 참작하여 행하므로써 보도하는 방도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뛰어난 자질이 본디 여느 사람과 다르더라도 지금의 춘추를 생각하면 겨우 성동(成童)이 되었으니, 가까이 두고 부리는 사람은 다 노성한 자를 가려서 거동하는 절도를 늘 삼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또 조정에서 물러나오신 여가에 자주 와서 모시게 하여 친히 독서를 권하고 이끌어 마지않으시어 이것으로 공경한 예절을 익히고 효순한 마음을 기르게 하고 거처와 복용(服用)도 되도록 소박하게 하여 검덕(儉德)을 삼가 닦는 것이 천성처럼 익혀지게 하소서. 그리고 의장(儀章)의 도수(度數)와 기거하는 예절이 대조(大朝)와 매우 닮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조심하여 한결같이 조종 때에 근습(近習)·영신(佞臣)이 아첨하는 것을 제거한 옛 규례를 따라, 어버이를 공경하고 임금을 높이는 도리와 스승을 높이고 자기 권세를 잊는 의리를 어린 나이에 교양할 때에 터득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종사(宗社)의 그지없는 복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제가(齊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자(周子)의 말에 ‘집에서 어려우면 천하에서 쉬워지고 집에서 친근하면 천하에서 멀어진다.’ 하였는데, 대개 집안에서는 은애가 늘 의리를 가리므로 소원하면 공도(公道)가 행해지기 쉽고 친근하면 사애(私愛)에 빠지기 쉬우니, 이것이 어렵게 하는 까닭입니다. 어려운 것을 먼저 하지 않고서 쉬운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경(易經)》 가인괘(家人卦)에 ‘위엄이 있으면 마침내 길(吉)하다.’ 하였으며, 그 상(象)에 또 ‘위엄이 있는 것이 길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이키는 것을 뜻한다.’ 하였습니다. 은의가 도탑더라도 윤리는 바루지 않을 수 없고, 정의가 통하더라도 안팎은 정숙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근일 궁금(宮禁)이 엄하지 않다는 말이 자못 외간에 전파되므로 신이 전에도 늘 아뢰었습니다. 지금 인아(姻婭)의 족속은 다 사대부로 자처하는 자들이니, 어찌 굽은 길을 열어서 청명한 정치를 해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합문(閤門)의 기거와 속절(俗節)의 주식(酒食)은 오히려 잘못된 풍습을 따르면서 혹 남보다 더하려고 힘쓰기도 하며, 성심(聖心)에도 친소의 구분을 두시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신하가 예라고 하면서 사사로이 바치고 임금이 개인적인 일이라 하여 너무 가깝게 대하면 위 아래가 서로 잘못하여 그 조짐이 반드시 총애를 베풀어 업신여김을 받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법전을 준수하여 궐내에 출입하는 자에게는 모두 신부(信符)를 지급하고 병조(兵曹)를 시켜 문호(門戶)의 방금(防禁)을 엄하게 하여 옛 제도를 회복시킴으로써 궁인이 감히 밖에 나가지 못하고 족속이 감히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기도(祈禱)하는 무격(巫覡)과 규외(規外)의 직염(織染) 따위 일이 궁정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며, 액정 안팎의 사환도 다 순박하고 근신하여 말이 없는 자를 선택하여 각각 그 직분을 지키게 하되,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유사에 내어 주어 범법 사실에 따라 벌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공주궁(公主宮)에 공급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랑하여 넉넉하게 해 주려는 것이 실로 부모의 마음입니다마는, 사치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곧 천리의 바른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은 완전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대(臺)를 높게 하고 관(館)을 진기하게 하여 탐욕을 조장해야 하겠으며, 재산을 두는 것은 쓸 만하게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전토(田土)를 넓게 하여 백성과 쟁탈해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멈추지않으면 제궁(諸宮)이 사방에서 비방을 받을 뿐더러 국가에도 원망이 돌아올 것입니다. 더구나 집의 간살은 본디 《대전(大典)》의 상제(常制)가 있으니, 모두 성헌(成憲)에 맞추고 감히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연안(延安)에 둔전(屯田) 8백 석지기를 새로 설치한 것이 있어서 네 궁(宮)에 나누어도 오히려 2백 석지기가 되는데도 적다고 여겨 다시 공전(公田)을 보탰다 합니다. 둑을 쌓고 새로 설치하는 모든 의논을 일체 그만두는 것은 은의가 아울러 행해지고 공사가 모두 이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선조(宣祖) 때에 한 왕자(王子)의 집 곧 남별궁(南別宮)을 지었는데, 중국 장수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너희 작은 나라로서 왕자의 집을 이렇게 짓다니, 황실(皇室)의 친왕(親王)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의 환난을 가져온 까닭이다.’ 하였다 합니다. 선조께서 이 말을 듣고는 난이 일어난 때부터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영선(營繕)을 벌이지 않으셨다 하니, 아마도 이 말에 대하여 느낌이 있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허형(許衡)이 ‘천지 간의 인물에는 저마다 분한(分限)이 있으니 분한 밖에 지나치게 바라서는 안 된다. 마구 써 없애는 것이 많고 보면 하늘에 죄를 얻는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치를 다하고 탐욕을 다하는 것은 실로 복을 꾀하는 방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漢)나라의 상시(常侍)는 정중(鄭衆)을 봉후(封侯)할 때에 비롯하였고 당(唐)나라의 중위(中尉)는 고 역사(高力士)를 3품(品)으로 삼을 때에 비롯하였는데, 처음에는 어찌 미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다시 억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척촉(蹢躅)의 교훈을 생각하여 미리 금니(金柅)의 계책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환관(宦官)이 자못 성한 것을 식자가 다 근심합니다. 양덕(陽德)이 바야흐로 형통하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마는, 적간(摘奸)을 조종하고 진공(進供)을 막는 일같은 것은 성사(城社)의 으슥한 곳에 소굴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장차 굳은 얼음의 계절이 오게 된다는 경계야말로 뒷날의 근심에 절실하니, 중신(中臣)을 엄히 단속하여 충근(忠勤)하도록 가르쳐 악하지 않기를 기대하되 일을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효우(孝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상의 효성이 천성에서 나오고 우애는 본심에서 말미암으니,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을 깊게 하여 형제의 정을 도탑게 하는 것이야 본디 전하의 여사(餘事)일 것입니다. 효심을 미루어 다스리면 천하도 문제가 없을 것인데, 더구나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전(傳)에 ‘어버이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악할 수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교만할 수 없다. 애경(愛敬)을 어버이 섬기는 데에 다하고서야 덕교(德敎)가 백성에게 입혀진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애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확충하기 때문입니다. 《시경(詩經)》에 ‘과처(寡妻)의 모범이 되고 형제에게 이르고서 가방(家邦)에 받아들여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천륜의 친속에 대해 반드시 지극한 사랑이 깊더라도 교훈이 그 안에서 지켜지고, 사사로운 은혜가 도탑더라도 의리가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게 하고서야 교만하고 사치한 것이 일어나지 않고 두터운 경사가 바야흐로 오게 되니, 인애가 극진하고 의리가 지극한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달리 없습니다.

동평(東平)이 선행(善行)을 하고 성기(成器)가 공근(恭謹)한 것이 황의(皇矣)의 순지(順祉)를 누린 까닭입니다. 진진(振振)한 인지(麟趾)의 노래는 국가를 위하여 축하한 것인데, 아, 오늘날의 변을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관숙(管叔)·채숙(蔡叔)을 제거하여 공의(公義)는 절로 행해졌더라도, 인인(仁人)이 아우에 대하여 어찌 원한을 쌓고 분노를 감추었겠습니까. 예전에 주공(周公)이 관숙·채숙이 합심하지 않는 것을 민망히 여겨 상체(上棣)를 지었는데, 창연히 불쌍히 여겨 슬퍼하는 뜻과 따뜻이 도타운 인정을 베푼 은혜는 지금도 반복하여 읽으면 오히려 눈물이 흐를 만합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처변(處變)하신 방도는 부득이한 것이었더라도, 안개·이슬에 병들 걱정을 늘 연충(淵衷)으로 염려하시는데, 이미 나타난 이 단서를 말미암아 더욱 친애하는 정을 다하여 죄인으로 보지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돈종(惇宗)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돈서(敦敍)한다.’ 하였는데, 돈(敦)은 그 은혜를 두텁게 하는 것이고 서(敍)는 그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지위를 높이고 녹(祿)을 많게 하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하는 것이야말로 본디 친족을 친근히 하는 의리입니다마는, 사치를 금지하고 방자한 것을 억제하여 간사한 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친족을 바루는 도리입니다. 오늘날의 종친들은 다 과거에 어육(魚肉)이 되었던 후예들인데, 선왕의 인육(仁育)에 힘입어 이제까지 무사하였으니, 아, 지극한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것이 이미 오래 되어 은혜를 믿고 뜻을 방자하게 하는 자도 절로 적지 않습니다. 공위(公威)는 사문(私門)에 빼앗기고 국세(國勢)는 귀가(貴家)에 나뉘어 천 길의 산기슭과 만 리의 바다 물결을 구역을 지정하여 나누어 갈라서 자기 소유로 못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땔나무를 베어 올 길이 끊어져 원근이 폐해를 받아도 공법(公法)을 감히 행하지 못하고 헌리(憲吏)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니, 이른바 법을 뜻대로 결단하여 꺼리는 게 없다는 것이 불행히도 이에 가깝습니다. 접때 이미 국가의 엄단이 있었으나 명령이 나가도 되돌아오고마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유사(有司)의 법이 만약 중간에서 흔들리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이 절로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방자한 버릇을 금단하는 것은 제절(制節)에서 비롯해야 하고 제절하는 방도는 친자제(親子弟)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봉록(俸祿) 이외에 일용하는 의복·음식은 넉넉히 대우하되 외람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염분(鹽盆)·어전(漁箭)의 이익이 얼마입니까. 궁노(宮奴)가 사방으로 나가서 저마다 각도를 맡아 수령을 욕보이고 어부에게서 마구 빼앗으므로, 해부(海夫)가 생업을 잃어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납니다. 이 뒤로는 궁차(宮差)를 금하되 법을 어기고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그 도와 그 고을에서 잡아 가두고 엄중히 구핵(究覈)할 수 있게 하고, 어염선세(魚鹽船稅)를 모두 호조에 붙여 한 해의 수입을 물어 수량에 맞추어 셈하여 주고, 의정부·충훈부·기로소 등 각 아문(衙門)도 마찬가지로 시행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해묵은 고질적 폐단을 조금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임상(任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은 홀로 세공(歲功)을 이루지 못하고 임금은 홀로 치도(治道)를 이루지 못하는 법입니다. 삼대(三代) 군신(君臣)의 이야기는 오랜 것이거니와, 이를테면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또한 송 태조(宋太祖)가 조보(趙普)에게 천하의 중임을 맡겨서 일대(一代)의 정치를 이루었으니, 어찌 보필하는 신하 중에 맡길 사람이 없는 데도 임금이 공을 이룰 수 있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성의가 서로 미뻐서 제 몸처럼 여기고서야, 가부에 대한 의논을 드려도 뜻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임용하여도 붕당으로 여기지 않고, 간사한 자를 물리쳐도 독단으로 여기지 않고, 이익을 꾀하고 폐단을 없애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과 궁금의 은밀한 일로부터 골육 형제 사이의 일에 이르기까지 또한 참여하여 잘잘못을 의논하며 정신을 모아서 안팎이 한결같게 하고, 이어 널리 준재(俊才)를 불러 서위(庶位)에 벌여 두어 경박한 자를 억제하고 경망한 의논을 진정시키게 하고, 또 혹 임금을 속일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바루어 백료를 격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육경(六卿)으로 말하면 서정(庶政)을 나누어 총괄하고 서사(庶司)의 관원은 각각 천공(天工)을 대신합니다. 아침에 제수했다가 저녁에 바꾸어 마치 여관에 든 듯이 된다면, 모든 공적이 이루어지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육관(六官)의 장(長)을 정밀하게 가리고 각각 그 관속(官屬)을 천거하게 하되 당(唐)나라 대성(臺省)의 제도처럼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해야 반드시 그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조종(祖宗)께서는 관리를 구임하고 이서(吏胥)를 번가셨으므로 관리가 그 권세를 잡았는데, 지금은 관리를 자주 갈고 이서를 원정(元定)하므로 이서가 그 권세를 빼앗았으니, 주객(主客)의 구근(久近)의 형세는 본디 그러한 것입니다.

이른바 납간(納諫)이란 뜻을 겸손히 한다는 말인데, 이윤(伊尹)은 ‘뜻에 맞는 말은 도리에 어그러지는지를 살피라.’ 하였고, 장손흘(臧孫紇)은 ‘계손(季孫)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질진(疾疢)이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옳다 하는 것을 따라서 옳다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는 것을 따라서 그르다 한다면,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기쁘더라도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약을 먹고 어지러운 것은 병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일에 이로우니, 이것이 주사(周舍)가 입바른 말을 하던 일을 조앙(趙鞅)이 사모한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고 허물을 고치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셨으니 막힘이 없는 아름다움을 뉘라서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뻐하고 노여워하실 즈음에 나를 속이리라 억측하는 병통을 면하지 못하시어 바람·천둥같은 위엄이 갑자기 진동하고 귀양보내는 일이 조정에서 계속되니, 상하가 놀라 돌아보고 기상(氣象)이 서글피 막힙니다. 귀양보내는 법은 예전에 사흉(四凶)을 처치한 방법입니다.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문득 이 벌을 주니 누가 언짢은 낯빛을 무릅쓰고 바른 말로 간쟁하려 하겠습니까. 당 태종이 일찍이 위징에게 노하여 ‘이 시골 늙은이를 죽여야겠다.’ 하였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태종으로서도 죽이려고까지 하였으니, 포용하는 도량은 이처럼 어렵습니다.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수 있고서야 언로(言路)가 소통되는 아름다움을 이룰 것입니다.

또 예전에는 백공(百工)이 기예(技藝)에 관한 일을 가지고 간언하였고 보면, 안으로는 공상(公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다들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고(卿孤)의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나름대로 해사(該司)에 미룹니다. 만약 서사(庶司)의 장(長)이 각각 그 직책에 관한 일을 말할 수 있게 한다면, 보고 듣는 것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간(臺諫)의 직임은 그 중함이 재상(宰相)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유온수(劉溫叟)가 어사 중승(御史中丞)이 되었을 때에 10년 동안 옮기지 않다가 죽게 되어서는 이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며 오래도록 그 자리를 비워 두었습니다. 옛 흥왕(興王)이 이 벼슬을 중히 여기고 마땅한 사람을 찾기 어려워 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은 대부(臺府)의 선임을 보통 임용처럼 여기고, 갈기를 잦고 쉽게 하여 두어 달 동안이라도 일을 맡는 자가 드무니, 공론(公論)을 넓히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 바란들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르고 곧은 선비를 극진히 가려 삼사(三司)에 두고서 어렵게 여기고 삼가며 오래 두고 오로지 맡겨야 할 것이니 책임이 일단 중해지면 사람들도 스스로 힘쓸 것입니다.

또 은대(銀臺)의 직임은 곧 옛 문하(門下)의 직임이니 그 임무가 매우 중대합니다. 당 태종이 일찍이 문하를 경계하여 ‘일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다 아뢰어야 한다. 문서를 봉행하기만 한다면 누군들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정밀하게 가리고 구제(舊制)를 더욱 밝혀 정교(政敎) 중 공의(公議)에 맞지 않는 것을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함으로써 나타나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게 하고, 정원(政院)의 계사(啓辭)는 조보(朝報)에 내지 말아서 들어가 임금에게 고하고 밖에서 순행(順行)하는 뜻을 보존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추성(推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한 사람의 몸으로 만 백성 위에 임어(臨御)하여 만기(萬機)의 번다한 것을 응대하니, 정성을 다하지 않고 홀로 사사로운 지혜를 부린다면, 이목(耳目)과 심려(心慮)가 미치는 것이 얼마나 될 수 있겠습니까. 두루 막고 상세히 살피는 것은 먼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어떻게 남이 나를 속이는 것을 막겠습니까. 예전부터 살피기를 좋아하는 임금으로는 당 덕종(唐德宗)만한 이가 없는데, 건중(建中) 때의 일에서 역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활달하여 인후(仁厚)함으로 일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사물을 주재하실 즈음에 평온한 마음으로 순탄하게 응대하지 못하시어, 악한 자를 탄핵하면 뜻을 달리하는 자를 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어진 자를 천거하면 뜻을 같이하는 자를 편드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며, 대신(大臣)은 옹폐(壅蔽)하지 않나 의심하고, 소관(小官)은 의탁하지 않나 의심하는 나머지 천 갈래 만 갈래 길에 상호간에 장치를 해놓고 있습니다. 속이리라 억측하는 마음이 신충을 감아 둘러 마음 속에 이미 본체가 가려졌는데, 어떻게 활협(闊狹)을 재처(裁處)하여 과불급의 어긋남이 없게 하고 정성껏 사물을 극진히 처리하여 사방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엿보는 자는 공교한 술책을 부리고 뜻을 맞추는 자는 아첨하는 술책을 부려서 고요하려 하여도 더욱 시끄럽게 되고 증익하려 하여도 도리어 감손되니, 머리를 돌려 길을 바꾸지 않으면 그칠 수 없을 듯합니다. 증자(曾子)가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 하였는데 지키는 것이 간약(簡約)하지 않습니까.

이른바 예하(禮下)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은 예(禮)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忠)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본디 천경(天經) 지의(地義)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명분은 엄하더라도 상하가 만날 때에 예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작록(爵祿)과 위형(威刑)으로 신하를 분주하게 하여 당폐(堂陛)가 날로 낮아지고 염치가 날로 없어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가의(賈誼)가 일찍이 문제(文帝)를 위하여 호소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중병(重柄)과 대권(大權)을 잡고도 노예의 염치없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것이 참으로 이것입니다. 그때 주발(周勃)이 한 번 하옥되었는데 가의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가의가 오늘날의 일을 다시 본다면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반드시 그때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에는 매때리고 욕하는 벌이 대부(大夫)에게 가해집니다. 아침에 금자(金紫)를 벗기고 저녁에 조시(朝市)에서 매질하니, 기기(忌器)의 도리가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을 하옥하고 매 때리려 할 때에 장열(張說)이 ‘형장(刑杖)을 대부에게 가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임금에게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士)는 죽일 수는 있으나 욕보일 수는 없습니다.’ 하니, 명황(明皇)이 곧 멈추었는데, 이것은 본받을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어떤 사람은 들락거리며 수근거리는데 어떤 사람은 못하는 일이 없구나.’ 하였습니다. 충신의 의리상 감히 고병(告病)할 수는 없으나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노고를 고르게 해주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테면 유경창(柳慶昌)은 변방에서 돌아오자 마자 곧바로 변방의 병부(兵符)를 차게 되었는데, 혼자 노고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은 인정이 다 같은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은 깨끗하고 고요하여 지키는 것이 있고 여러 해 동안 외방(外方)에 있었으니,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기는 하나 신하를 거느리는 뜻에 방해될 듯합니다.

이른바 애민(愛民)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대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은데, 자식이 굶주리고 추우면 부모로서 예사로 여기는 자가 있겠습니까. 신은 아직도 경인년의 수교(手敎)를 기억합니다. 송(宋)나라 조후(曺后)가 ‘천하에 이롭다면 내가 어찌 머리털이나 피부를 아끼겠느냐’고 한 말을 인용하셨으니, 본말과 경중의 구분을 전하께서 이미 스스로 아셨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명(明)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 때 봉사(奉使)하고 강회(江淮)에서 돌아온 자가 기근을 말하니, 드디어 강관(江關)의 수백만 섬의 쌀을 내어 구제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사농(司農)과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나, 인종이 ‘유사(有司)가 걱정하는 것은 경비(經費)이니, 함께 의논하면 일이 시행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선인(宣仁)의 마음으로 인종의 정치를 행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동(河東)에서 곡식을 옮기는 것으로 마음을 다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책은 미미해서 구제하는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해마다 잇따라 흉년을 만나 홍수와 가뭄이 서로 이었는데 다행히 이제 씨뿌리는 시기를 잃지 않고 비도 조금 내려서 추수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해묵은 기근 끝에 미납된 조세가 참으로 많고 공사(公私)가 곤궁하여 곡식을 화매(和賣)한 것이 필시 배로 늘어났을 것이니, 옛사람이 풍년의 폐해가 흉년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신이 지금 미리 아뢰는 것은 전하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유사의 청에 대비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가 위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이천석(二千石)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나주(羅州)·영암(靈巖)·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상주(尙州)·진주(晋州)·안동(安東)과, 기타 제로(諸路)에 있는 각각 번요(煩要)한 곳은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백성이 그 폐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을 당할 경우 어디를 믿겠습니까. 신중히 선임하는 법을 더욱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묘당(廟堂)을 시켜 전관(銓官)과 함께 의논하여, 반드시 시종(侍從)에 출입하고 명성과 공적을 이미 나타내고 꼿꼿하고 재국(才局)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반드시 의의(擬議)하게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정사 때에 가려 차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마땅한 사람을 얻은 뒤에는 인재를 양육하기를 아울러 요구하여 반드시 호령(湖嶺)이 예전처럼 번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사 때에 임박하여 구차하게 채우는 식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른바 근정(勤政)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위사(衛士)에게 음식을 먹이라 명하거나 날마다 입계한 문서의 일정한 양을 스스로 재결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으니, 이를 몸받는 자가 조금이라도 간단(間斷)이 있으면 만화(萬化)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이 해가 중천에서 기울 때까지 밥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탕(商湯)이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린 것이 어찌 일할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晋)나라의 경(卿)이었을 때에 일영(日影)을 보며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마침내 잘 끝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경건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투박해진다.’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은 곳에서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연안(宴安)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성시(盛時)에는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근시(近侍)가 때없이 뵈었으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양명(陽明)이 날로 나아질 뿐더러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를 더욱 아실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박문(博聞)한 선비에게 힘입어 예지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적었겠습니까.

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자문하고 저녁에는 앞으로 내릴 명령을 생각하고 밤에는 몸을 쉰다. 그래서 그 기(氣)를 적당히 발산하여 이 마음에 모여 막힌 것이 있게 하지 말라. 군자(君子)에게는 이 네 가지 때가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하면 병이 난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루 동안에 환관(宦官)·궁첩(宮妾)을 대할 때가 적고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가 많게 한다면, 어찌 성명(性命)을 기르고 보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기강을 세운다[立紀綱]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내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임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충성을 다하고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 혹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합니다. 이는 임시 미봉책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치더라도 왕승종(王承宗)이 팔짱을 끼고 땅을 갈라 차지한다면 어찌 조정의 힘이 그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처치를 마땅하게 하여 그 마음을 크게 감복하게 할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참으로 처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간사한 짓을 하여 과조(科條)를 범한 자와 충선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 붙여서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히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서 또한 공사(公私)에 대하여 스스로 피차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국가의 형세가 공명(孔明)이 살던 시기에 비해 또한 어떠합니까.’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이 둘로 갈라져 무릇 일이 외척·후궁에 관계되거나 옥사가 내시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유사에 붙이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아끼는 것이 없다면 큰 근본이 이미 바로잡힐 것이니, 어찌 기강이 펴지지 않겠습니까. 상께서 성지(聖志)를 굳게 정하시어 사은(私恩)이나 소인(小仁)에 흔들리지 말고 고식이나 구습에 얽매이지 말아서 먼저 내옥(內獄)을 폐지하고 모든 송사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형조에 돌려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하고 궁가에 관계되는 것도 모두 국법에 맡겨 친소에 따라 달리 베풀어 법을 막고 변동하지 못하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찌 진작하고 숙정(肅整)하는 요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명기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名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금이 유지하고 고무하여 한 세상을 어거하는 것은 오직 명기뿐입니다. 명기가 중하면 몇 말이나 몇 되 밖에 안 되는 녹(祿)으로도 호걸(豪傑)을 전도시킬 수 있으나, 명기가 가벼우면 날마다 경상(卿相)을 제수하더라도 사람들이 힘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부자(夫子)가 번영(繁纓)을 아까워한 까닭입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가난한 나라이므로 무릇 상줄 것이 있을 때에는 청자(靑紫)로 금백(金帛)을 갈음하는데, 일이 많아진 이래로 외람됨이 날로 심해졌으므로 사람들이 금옥(金玉)의 반열(班列)을 그리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조종의 성시에는 자급(資級)을 가장 중히 여겼으므로 통덕(通德)으로 사인(舍人)을 삼은 것을 지금도 일컫습니다. 당상(堂上)의 선임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지내야 하고 아장(亞長)·동벽(東壁)을 거치고 문지(門地)와 명망이 다 높아야 비로소 초배(超拜)될 수 있고, 당상을 거쳐서 아경(亞卿)에 제수되고, 아경을 거쳐서 재상에 발탁되었는데 다 한때의 명망 있는 자를 극진히 가렸습니다. 그러므로 덕망 있는 자를 임명하는 명기가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금옥이 뜰에 가득해도 인재가 부족한 것을 늘 걱정합니다. 이는 지름길이 많아 덕망으로 선임하는 것이 실로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한산(閑山)에서 이기고 권율(權慄)이 행주(幸州)에서 이긴 그 공로는 중흥(中興)을 연 것이었는데도 그때의 논공(論功)은 한 자급을 올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번 군기(軍器)를 장만하거나 한번 도둑을 잡은 공도 다 금옥으로 자급을 곧바로 올려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선치한 수령은 첫째라 일컬어져도 의복만을 줄 뿐이니, 그 경중을 잃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대(漢代)에는 현(縣)에서 치적이 가장 뛰어난 자는 군수(郡守)에 초배(超拜)되고 군수가 성적이 있으면 구경(九卿)에 입배(入拜)되었으므로, 격려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재를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감(都監)의 상격(賞格)은 글씨를 쓰는 작은 기예도 다 자급을 높이고 품계를 바꾸어 마치 큰 공로가 있는 듯이 하므로 기를 쓰며 덤비는 풍습을 조장하고 염양(廉讓)하는 절조를 잃게 하니, 이 규례를 고치지 않으면 관방(官方)을 엄숙하게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하던 것을 크게 바꾸어 잘못된 규례를 따르지 말고 도감의 관원에게는 다른 상을 주고 쉽사리 벼슬을 올리지 말며 천례(賤隷)의 무리는 임민(臨民)하게 하지 말고 천역에 종사하는 무리에게는 사은(私恩)을 베풀지 말아서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굽은 길이 닫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치도(治道)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이른바 붕당을 없애야 한다[去朋黨]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뿌리박은 것이 이미 굳고 여파가 점점 퍼지므로 본디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갓 그 이름을 미워하여 모두 없애려 하면 백마청류(白馬淸流)의 화(禍)가 될 것이고, 양편을 다 보존하면서 조정하려 하면 우이(牛李)가 서로 반목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직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기며 어진 자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기며 덕을 헤아려 지위를 주고 재능을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죄가 있는 자는 형벌하고 착한 일을 한 자는 상주어 공정하고 밝은 것이 다 지극하고 피차가 모두 잊을 수 있다면 사물이 각각 마땅한 데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붕당을 맺을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피차를 견주어 먼저 색목(色目)을 나눈다면, 군자는 그 뜻을 행할 수 없고 소인은 그 사사로운 것을 들일 수 있으므로 혐의스러운 것을 염려하여 자취를 감추거나 아부하여 더러워질 것이니, 또한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백성에 간사한 무리가 없고 관리가 사욕에 치우친 덕을 가진 자가 없는 것은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 하였고, ‘치우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표준에 모여 표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는데,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평탄하며 기울지 않고 넓고 멀어서 사사로운 것을 끼우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자신을 삼가서 조림(照臨)하신 지 이미 5년이 지났으니, 조신(朝臣)의 사정(邪正)·현우(賢愚)와 논의의 시비·곡직을 어찌 통촉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사정(邪正)이나 시비에 대하여 반드시 다 그 정상을 알지 못하여 혹 서로 어그러지게 하는 점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붕당을 미워하는 일념에 먼저 가려져서 사람들이 엿보고 헤아려 그 자취를 감출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훤히 크게 공정하여 사심이 없게 하여 시비를 판별하는 본체를 잃지 않으시어, 미추(美醜)와 경중(輕重)이 각각 그 바른 것을 얻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아첨을 멀리해야 한다[遠讒佞]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사한 무리는 흔히 임시변통하는 술수가 넉넉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꾀가 넉넉하나 오직 그 마음먹는 것이 바르지 않으므로 착하려 하지 않고 악하려 하며 충직하려 하지 않고 속이려 합니다. 따라서 참으로 호오를 밝히고 정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어떻게 우정(禹鼎)에서 이매(魑魅)를 가려내고 일월(日月)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겠습니까. 오늘날의 조정은 임금의 덕이 청명하고 뭇 인재가 모여 나오므로 아첨하는 폐해를 성대(盛代)에서 논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금은 높고 깊은 데에 있으므로 듣고 싶은 것은 바깥의 말이고, 임금은 위세가 무겁고 크므로 늘 좋아하는 것은 아첨하는 무리이니, 세상을 다스리는 근심에 어찌 단주(丹朱)와 같지 말라는 경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사람은 싫어하는 낯빛을 무릅쓰고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에서 찾아야한다.’ 하였으니, 임금이 이것을 알면 얻은 것이 벌써 많은 셈입니다.

무릇 아첨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의향을 엿보아 뜻을 미리 알아서 받들고, 임금의 마음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헤아려 곡진히 헐뜯거나 칭찬하며, 기세(氣勢)가 좋은 자에게는 기어 붙어 결탁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겉으로는 칭찬하되 속으로는 배척하는 등 정태(情態)가 은밀하고 계책을 쓰는 것이 여러 가지이니, 받아들일 즈음에 그들의 행동을 살피고 치우치는 내 마음을 끊으면 영예(英睿)가 비추는 바에 자취를 숨길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옥을 삼가야 한다[恤刑獄]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상을 묻지 않고 법에만 맡기는 것은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에 크게 해롭고, 빨리 판결하지 않고 오래 지체시키는 것은 옥사를 결단하는 데에 크게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과실로 지은 죄는 커도 용서하고 고의로 지은 죄는 작아도 죄주며,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재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과실 또는 재앙 때문에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천고(千古)의 성왕(聖王)이 형옥을 삼가는 바른 뜻입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그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게 지극하여 반드시 그 정상을 살피는 것이 이러하였던 것이니, 천하에 어찌 원망하는 백성이 있었겠습니까. 예전에는 중요한 죄수를 판결하는 것도 4∼5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우연히 법망에 걸린 것도 반드시 가두어 때를 넘기니, 옥사를 결단하는 체례가 어찌 이러해야 하겠습니까. 형옥을 맡은 관원이 다른 일을 겸하지 말고 옥사를 살피는 일에 전념하여 빨리 판결하도록 힘쓰게 하여 옥사를 지체시키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낭리(郞吏)의 선임도 학문이 있고 공평한 선비를 가려서 옛 정리(廷吏)의 제도처럼 논의를 도와 옥사의 평결을 아뢸 수 있게 한다면 작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제 기강이 쇠퇴하여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세상에 혹 최식(崔寔)의 논의가 있으니, 이것은 그럴 듯합니다. 최식 때에 환관(宦官)이 권병(權柄)을 훔치고 외척(外戚)이 조정(朝廷)을 마음대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론(政論)》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으로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가 끼친 해독을 지극히 고통받는 백성에게 베풀 만하다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천조(天祚)를 길이 누린 자는 반드시 인심을 굳게 매는 방법이 있어 깊고 두터운 은택을 백성에게 입혔습니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구가(謳歌)할 생각을 세상이 다하도록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왕께서 기강을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고 하루 아침에 흙이 무너지는 걱정을 없게 만든 방법입니다.

한 고조(漢高祖)가 삼장(三章)의 법을 약정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태배(笞背)의 형(刑)을 폐지하고 삼복(三覆)의 제도를 만들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가 오래 간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송 태조(宋太祖)로 말하면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것이 전대(前代)보다 뛰어나거니와 늘 《우서(虞書)》를 읽고 ‘사흉(四凶)의 죄도 유찬(流竄)에 그쳤는데 어찌하여 후세의 법망은 엄밀한가.’ 하였습니다. 너그러운 정치가 송나라 2백 년의 가법(家法)이었으니, 남도(南渡)한 뒤에도 인심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 어찌 문덕(文德)이 있는 조상에게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삼가 살피건대 선왕의 지극한 인애가 두루 미쳐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인 적이 없었으므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천리에 널리 입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난리에 세 번 파천하여 국세가 거의 망할 뻔하였으나 민정(民情)의 향배는 끝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 인자하십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임어하시어 정치는 너그러움을 숭상하니,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에는 신이 비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고 숙정하는 데에 뜻을 둔 나머지 속으로는 인자한 마음을 갖되 겉으로는 엄한 법을 베푸시므로, 법에 맡겨두지 않고 되도록 중벌하기를 힘써 면직(免職)으로 감정된 벌이 혹 도배(徒配)까지 되기도 합니다. 위엄을 오래 보이면 익숙해져서 보람은 없고 폐단만 생기는 법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전철(前轍)을 고쳐서 모든 옥사의 평결은 한결같이 아뢴 대로 따르고, 억울한 옥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은 유사(有司)가 신품(申稟)할 수 있게 하며 너무 규례에 얽매이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경외(京外)의 옥에 갇힌 사람도 유사와 각도가 빨리 결단하게 하며, 역옥(逆獄)이나 강상(綱常)에 관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겨울이 되기를 기다려서 처형하여 임금이 천도(天道)를 따르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교화를 밝힌다[明敎化]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세울 때에는 각각 한 나라의 규모가 있어서 조종(祖宗)이 이를 새로 세우고 자손이 이를 이어 지키는 법입니다. 하(夏)나라의 충(忠)과 상(商)나라의 질(質)과 주(周)나라의 문(文)과 서한(西漢)의 패도(霸道)와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조송(趙宋)의 충후(忠厚)는 이것으로 비롯하여 이것으로 마쳤는데, 우리 나라가 이제까지 유지한 까닭은 과연 어느 도(道)를 따라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명교(名敎)일 뿐입니다. 아, 천지가 크게 변하여 관상(冠裳)이 바뀌어 놓였으나 한 조각 우리 동방만이 의관(衣冠)을 보전하였으니, 어찌 관(冠)을 훼손하고 면(冕)을 찢어 구구한 명교를 아울러 못쓸 물건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면 슬퍼서 다시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른바 교화라는 것은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군신·부자·부부·붕우가 각각 그 도리를 다하면 망국(亡國)·패가(敗家)가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가정의 더러운 일과 집안끼리 다투는 변과 상기(喪紀)의 문란이 이따금 사족(士族)에서 나온단 말입니까. 어찌 세교(世敎)가 쇠퇴하고 풍화(風化)가 밝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너진 풍속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명(聖明)께 달려 있으니, 예(禮)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는 일은 치우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또 학교의 정사(政事)는 소략하기가 또한 심하므로 동몽(童蒙)의 교양이 바르지 않아서 경박하고 사치한 것이 드디어 조장되고 세도(世道)가 점점 투박해져서 지도하는 방도를 잃었으니, 맑은 명망과 도타운 학문이 있는 선비를 얻어 성균(成均)의 직임을 맡겨 부박한 버릇을 통렬히 억제하고 오로지 실행을 숭상하게 하면 성취하는 보람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의 풍류(風流)는 진대(晋代)와 같은 점이 있습니다. 술마시며 농담하고 다른 일은 다시 하지 않으며 예의 염치는 자신과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니, 표준을 세우는 임금의 자리에서 그 취향을 바로잡지 않으면 이미 대세가 글러진 것을 만회할 수 없을 듯합니다. 중외에 신칙하여 상중에 예를 다하게 하고, 효성 우애스럽고 화목하게 지내는 선비를 찾아 아뢰게 하여 특별히 장려하여 정표(旌表)하고 제직(除職)하며, 혹 슬픔을 잊고 풍속을 어겨 복상(服喪)을 삼가지 않고 더러운 짓을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고 다투어서 우애하지 않는 무리가 있으면, 또한 적발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1년상을 입을 자가 장사지내기 전에 과거에 응시하거나 가장(家長)으로서 3년상 안에 혼인하는 자도 법을 세워 금단해야 합니다. 명관(名官)으로서 술에 빠져 직무를 폐기하거나 예법을 폐기하는 자는 타일러 경계하되 한결같이 세종(世宗) 때의 고사를 따라 두렵게 생각하고 고치게 한 뒤에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는 법사(法司)와 전조(銓曹)를 시켜 심한 자는 거론하여 탄핵하고 경한 자는 좌천시켜야 합니다. 수령(守令)으로서 읍비(邑婢)를 몰래 간통하고 이어서 데려온 자도 각도를 시켜 사실대로 아뢰게 하여 적당히 벌주어 선비의 풍습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풍속을 변화하는 데에 작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살피건대 전 부사(府使) 임유후(任有後)는 어미를 모시고 병란을 피하여 영외(嶺外)의 해변에서 객지에 오래 있는 중에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고, 어미가 죽게 되어서는 관(棺)을 가지고 서쪽으로 돌아와 여묘살이하며 죽을 먹고 조석으로 무덤에 가되 3년 동안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제는 복을 벗었으나 곡읍(哭泣)하는 슬픔과 호모(號慕)하는 정성이 이웃을 감동시키니, 이것은 근일 조신(朝紳) 사이에서 드물게 들리는 행실입니다. 또 그 사람은 평소에 염정(廉靖)을 실천하고 진취할 뜻이 없으나 문사(文辭)가 넉넉하여 무리에서 뛰어나니, 재행(才行)을 찾으려면 남보다 앞설 것인데 조정에 그 무리의 후원이 적어서 아직도 묻혀 있으므로 신은 아깝게 여깁니다. 장려하여 발탁하는 은전을 베풀어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인재를 기른다[養人才]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재예장(杞梓豫章)같은 훌륭한 재목들은 하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언덕에는 송백(松柏)이 없고 근교에는 미목(美木)이 없으니, 가꾸어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동량(棟樑)이 될 만한 것을 성취하겠습니까. 천 그루 큰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어서 썩은 그루 약한 들보가 번번이 나라의 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자라면 어찌 인재를 미리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문장은 하나의 작은 기예일 뿐이나, 선조(宣祖) 때에 뭇 인재를 미리 길러서 마침내 그 힘을 얻었는데, 중흥(中興)의 큰 공은 사명(辭命)이 그 반을 차지하였습니다. 전일과 같이 호당(湖堂)의 설치를 청하는 것은 본디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닌 줄 압니다마는, 문풍(文風)을 격려하여 일으키면 반드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석사(碩士)·굉유(宏儒)로 말하면 뒷날 장상(將相)이 될 그릇이니, 더욱 널리 찾아 두루 시험하여 과연 남들보다 나은 조행이 있고 월등한 재능이 있다면 기량이 빼어난 것을 깊이 인정하여 보전하여 기르고 완전하게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선조 때의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신흠(申欽)·이정귀(李廷龜) 등은 다 성상의 마음으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 발탁하였습니다. 평소에 그 사람들을 알지 못했다면 변란에 임하여 어떻게 효용(効用)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선조 초년으로 말하면 김우옹(金宇顒)·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으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일대(一代)의 고관(高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호(湖) 령(嶺)의 선비가 조관(朝官) 명부의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명문(名門)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어질다고 할 수 없듯이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어진 자라면 누구든 벼슬시켜야 할 것인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그저 더욱 개탄할 따름입니다.

또, 신이 삼수(三水)에 있을 때에 육진(六鎭) 사람으로서 변장(邊將)이 된 자를 보니, 궁마(弓馬)에 익숙하고 기력이 씩씩하여 뇌물을 바쳐 선발된 장수와 같지 않았습니다. 신이 보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산서(山西)에서 장수가 난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 듯합니다. 각도의 감사를 시켜 마음을 다하여 찾아서 아뢰게 하고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듣고 본 바를 참고해서 등용하여 인재를 버려두었다는 한탄이 없게 하고 사방의 인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서북(西北)의 무사(武士)는 본도(本道)를 시켜 먼저 궁마를 시험하고 다음에 인물을 보아 등급을 매겨 보고하며, 금려(禁旅)에 편성하여 예속시키고 재능에 따라 임용하였다가, 과연 특이한 재능이 무리에서 뛰어나면 곤수의 부월이나 변장의 병부를 맡긴들 어찌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감사는 수령의 벼리[綱]이다.’ 하였습니다. 반드시 명성이 평소에 나타나고 재국(才局)이 남보다 뛰어난 자를 얻어야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묘당(廟堂)과 전조(銓曹)가 함께 의논하여 팔도의 방백(方伯)을 크건 작건 마땅한 사람을 얻도록 힘쓰라고 거듭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묘당이 한 감사를 택하여 한 도가 절로 맑아질 것입니다. 신은 본디 감식안이 없으므로 전후에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을 때에 한두 집안의 행실만으로 우러러 명지(明旨)에 답하였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이응시(李應蓍)는 평소에 정직하다는 명성이 드러났으니, 한번의 과실이 어찌 방해되겠습니까. 윤문거(尹文擧)는 청렴을 스스로 지키며 일찍이 경력도 있는데 법을 지키고 굽히지 않습니다. 다만 고요한 것을 지키고 물러가기를 좋아하여 교유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절로 알지 못하는데,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욱 취할 만한 점입니다. 두 사람은 다 죄적(罪籍)에 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의논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인재를 찾는 이때에 두 신하와 같은 자는 실로 얻기 쉽지 않기에 감히 이처럼 외람되게 아룁니다.

이른바 병정을 닦는다[修兵政]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을 가리니 병위(兵威)가 드디어 떨쳤습니다. 그렇다면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도태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각도 속오군(束伍軍)에서 뽑고 훈국(訓局)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쳐 통틀어 10만의 병액을 만들어 어린아이까지 등록되는 걱정이 없게 하고,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꿰뚫어 쏘고 명중하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군사가 이미 정하게 가려졌으므로 강하지 않을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훈국의 군졸은 쓸데없고 늙은 자가 반을 차지하고, 삼수(三手)의 본래 정해진 양식은 3천 석에 지나지 않는데 액수를 늘린 것은 갑절 더하니, 경비가 어려운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또 어영군(御營軍)의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양식을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나온 것이긴 합니다만, 또한 병기(兵器)를 대 준다는 당초의 뜻에 어그러집니다. 훈국의 군사 1천 명을 도태하고 그 양식으로 어영을 돕는다면 반드시 따로 거두지 않아도 군사의 양식이 넉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하의 폐단에는 모두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을 찾지 않고 말류를 다스리려 한다면 어지러이 무너지는 것이 갖가지로 나와서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병정의 폐단도 양민(良民)이 적어서 군적(軍籍)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公)은 적고 사(私)는 많아서 날로 점점 줄어갑니다. 임금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다만 백성일 뿐인데, 나라 안의 생명 있는 무리를 도리어 사실(私室)에게 반을 나누어주니, 어떻게 나라에 양민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천(公賤)·사천(私賤)·양천(良賤)으로 하여금 모두 모역(母役)을 따르게 한다면 10년이 넘지 않아서 양민이 반드시 많아질 것입니다.

이른바 절검을 숭상해야 한다[崇節儉]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액수가 있고 사람이 물건을 만드는 데에 정해진 한도가 있으니,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있으면 늘 넉넉하겠으나 가져다 쓰는 데에 절도가 없으면 늘 모자랄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재물도 우리 백성의 고혈(膏血)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천물(天物)을 마구 써 없애서 백성의 생업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세종(世宗) 때에는 궁인(宮人)이 1백 인이 못되고 구마(廐馬)가 수십 필에 지나지 않고 복어(服御)·기용(器用)도 되도록 검소하기를 힘쓰셨으므로 열성(列聖)께서 대대로 지켜서 가법(家法)으로 삼으셨다 합니다. 신이 일찍이 목릉(穆陵) 터를 고쳐 잡을 때에 삼가 유의(遺衣)를 보건대, 다 무명 옷과 두꺼운 명주였고 비단으로 된 것이 없었으니, 예전에 비의(菲衣)라 한 것이라도 어떻게 이보다 더하였겠습니까. 궁액(宮掖)이 좋은 옷을 입는 폐단은 광해(光海) 때에 비롯하였는데, 선조(先朝)에 더러운 풍습을 고쳤으나 끼친 해독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한가하실 때에 조종 때의 정간(井間)을 상고하시면 전성(前聖)께서 사욕을 누르고 백성을 사랑하신 지극한 뜻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궁중의 용도는 긴급하지 않은 비용을 덜고 몸소 검약으로 이끌어 사치한 버릇을 크게 바꾸고 법관에게 명백히 경계하여 분수를 넘는 것을 금지하여 위로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분수를 무릅쓰고 제도를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신의를 중히 여겨야 한다[重信義]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夫子)가 ‘예로부터 누구나 죽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에게 믿음이 없으면 설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옛 왕자(王者)는 사해(四海)를 속이지 않고 패자(霸者)는 사린(四隣)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속이지 아니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와 반대로 하여 속임수가 날로 더하므로 상하가 서로 어그러지니, 이로운 것이 얼마나 되겠으며 손상되는 것은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 소열제(漢昭烈帝)가 패망한 끝에 강한(江漢)을 유리(流離)하였으나 형초(荊楚)의 선비가 구름처럼 따른 것은 다만 신의가 평소에 섰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호령을 낼 때마다 신중하지 않아서 혹 이미 내렸다가 곧 그만두거나 명령하였더라도 시행하지 않으니, 이것은 믿음을 잃을 조짐입니다. 덕음(德音)이 때때로 내려져 백성이 바야흐로 귀를 기울여도 곧 유사에게 막혀서 은택이 내려지지 않으므로 백성이 들어도 믿지 않으니, 이것은 의리를 잃을 조짐입니다. 신의가 일단 무너지고 나면 장차 어떻게 백성을 부리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호령을 낼 때에 반드시 익히 강구하여 한 사람의 말을 치우치게 듣지 말고 한갓 작은 이익을 탐내지 말며 널리 경사(卿士)에게 묻고 널리 민정을 물으며 공론을 참작하고 묘당에서 결단하여, 명령하지 않을지언정 명령하면 반드시 시행하고,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가 일단 맺어져 백성이 듣고 의혹하지 않으면 임금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응하여 뜻을 받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마지막에 또 아뢰기를,

"재이(災異)의 도(道)는 그 이치가 아득하나,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음(陰)이 성할 조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군도(君道)가 성하고 부도(父道)가 성하고 부도(夫道)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도(臣道)가 성하고 자도(子道)가 성하고 처도(妻道)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하고 이적(夷狄)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 여장(女壯)083) 을 미리 경계하여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눌렀으니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가 늘 성하고 소인이 늘 사라지게 하며 충직한 자를 가까이하고 참녕한 자를 멀리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 하여 이것으로 국가의 원기를 도와서 끝없는 큰 복을 터잡으소서."

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이겼을 때도 1계급 특진이었는데 요새는 별것도 아닌 걸로 특진을 시키고 있으니 개판이다 라는 내용임.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기사 2개만 인용하고 여기까지.


효종 시기는 계속 이어서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