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절대 안정.

그게 의사가 강요한 처방이었다.

배리어를 펼쳤다고 해도 마법 소녀의 신체에 피해가 누적되지 않는 건 아니다.

마력으로 신체를 수복하고 상처를 없앤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그 자잘한 충격들은 언제나 마법 소녀의 신체에 남아 둔탁한 통증을 일으킨다.

그리고 지금 내 몸은 그 통증이 쌓일 대로 쌓여, 거동하는 것이 기적인 상황.


농담이 아니라 최소한 며칠 정도는 여기서 푹 쉬면서 적신호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나타나는 괴수나 그런 것들은 후배나 다른 마법 소녀에게 맡기라는 말까지 들었다.

또한 정신과 상담도 권유받았다.

몇 개월 동안 그렇게 괴수를 사냥하고 다니다 보면, 자연히 정신에 문제가 생기는 법이라면서.

나만 한 아이가 있을 중년의 의사는 쩔쩔매며 그렇게 고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물리는데,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병실에는 별냥이와 늑댕이 말고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늑댕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내 손에 턱을 얹었다.

별냥이는 무엇이 그리 중요한지 계속해서 공책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별냥아.”

“왜 그러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


별냥이가 정색했다.

내가 하려는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질문은 간단했다.

마법 소녀가 만전인 상태를 100%라고 할 때, 마력으로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 있는 곳이 어디까지냐고.

되도록 수치로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물었다.


“60%… 에서 70%다냥.”

“생각보다 높네.”

“매번 그렇게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냥?”

“그 정도면 충분해.”

“슬슬 질린다냥…”


별냥이가 정색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하루빨리 이 사태를 끝내고만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했다. 경험이 필요했다.

발언권이 필요했다. 쥐려는 게 많다면, 놓아야 하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기꺼이 일상과 건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별냥아.”

“왜 그러냥…”

“일정 같은 것, 잡아줄 수 있어? 아무래도 밖에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잡고 있었다냥. 간추리고 있으니 기다리라냥.”


별냥이가 허공에 공책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인제 보니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별냥이는 가만히 있는데, 볼펜과 공책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으니.

설정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별냥이는 그렇게 공책에 계속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그러곤 다 기록했다는 듯, 나한테 일정을 보여줬다.


모르는 이름투성이였다.

무슨 무슨 당 대표 아무개 의원님.

무슨 무슨 기업 아무개 회장.

무슨 무슨 방송사 아무개 기자.

그렇게 적힌 이름을 보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는 마법 소녀에게 그리 관심이 많았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른 나라면 모를까, 한국에서의 마법 소녀는 경찰관이나 소방관 같은 유형이었다.

목숨 걸고 괴수를 잡아낸다고 해서, 칭찬만 받을 수 있는 일 따윈 없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마법 소녀를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마법 소녀는 신분을 쉬이 밝힐 수 없다.

그러니 누가 사칭하거나 권리를 침해해도 나서기 힘들었다.

그런 마법 소녀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코트들도 어디까지나 말하는 동물 정도였다.

존중 정도야 해주겠지만, 단지 그뿐인.

발언권이 평범한 시민 단체보다 약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니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켰다.

마법 소녀라고 남을 속여 먹는 보이스 피싱이 유행했다.

자기가 마법 소녀라고 주장하며 돈을 타 먹는 사기꾼들이 성행했다.

그 사기꾼들이 동영상 사이트에서 행동하며 망친 이미지 때문에 아직도 밤에만 활동하는 마법 소녀도 있었다.


기자들은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마법 소녀를 성토했다.

정치인들은 유감이라는 말만 토해낼 뿐, 표가 되지 않는 마법 소녀들의 인권은 무시했다.

기업인들은 그런 마법 소녀들을 악용해 앞다투어 등쳐먹었다.

일반인이라고 해서 선량한 건 아니었다.

마법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종종 일어났으니까.

신분을 밝히지 못하며 발언권도 약하단 허점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이용하는 것이다.


“별냥아.”

“왜 그러냥.”

“총대를 멘다는 표현이 있어. 알아?”

“대충 알고 있다냥.”

“이제는 슬슬 얼굴마담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냥. 언제까지나 지원 없이 괴수만 잡을 수는 없다냥. 발언권이 좀 더 있어야 한다냥.”


지혜와 희수 희영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신유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박수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아쿠아마린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내가 총대를 멜게.”

“…”

“왜 그래?”

“기분이 이상하다냥. 마냥 좋아할 수도 없고, 마냥 싫어할 수도 없다냥.”


별냥이는 눈치가 좋았다.

내가 이걸 수락하는 게,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마냥 반길 수는 없다면서 속내를 토하라고 하는 거겠지.

당연히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이 사태를 온전히 끝내고, 모든 마법 소녀가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원한다는 걸.

이 세계에 녹아들어 종족의 안위를 위해 아득바득 살아가는 마스코트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단지 웃었다. 미소를 머금고, 눈을 감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아쿠아마린의 감촉이 제법 기분 좋았다.


그 뒤로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학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마스코트들의 암시와 다른 능력을 이용해 체험 학습으로 빼게 해줬다.

어차피 고등학교 3학년에 수시 모집도 다 끝나가겠다.

학교는 어렵지 않게 내게 체험 학습을 허가해 줬다.

그게 4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후배 마법 소녀들은… 아직은 비밀로 했다.

그녀들에게 처형에 대해 미리 알릴 수는 없기에, 적당한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비밀이라고 했다.

신유영은 퇴근한 아버지랑 같이 어머니 병문안을 갔을 거라고 별냥이가 말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며 나중에 약속을 잡았다는 것도 덧붙여 말했다.


“…”


그러는 동안 모처럼의 휴식을 즐겼다.

아니, 휴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종의 고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정치인들 따위를 상대하며 심력을 쏟아야 할 거다.

그러니 꼭 도살장에 갇힌 가축 같았다.

도축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내는.


별냥이는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를 공책에 적었다.

무얼 적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적을 일이 있던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별냥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사고였다냥.”

“박수아?”

“그렇다냥. 원래라면 그녀가 그렇게 변한 것도 예측할 수 있어야 했다냥.”

“그러지 못한 이유가 있어?”

“…”


별냥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고양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냐고 생각하다가 웃었다.

이 세계는 내가 짠 세계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설계한 세계였다.

당연히 내가 알고 있어야 했다. 모르면 안 되었다.

그래서 잠시 뒤, 그럴듯한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마스코트 중의 누군가가 협력했구나?”

“그렇다냥. 우리 종족이라고 해서, 모두 생각이 같은 건 아니다냥.”

“누구 편을 든 거야?”

“그건…”


별냥이가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괴수 편을 들었든, 마법 소녀 편을 들었든.

마스코트와 마법 소녀의 지위가 뒤바뀔 수도 있는 큰 사건이란 건 변하지 않았다.

차라리 조곤조곤 설득을 빙자한 협박으로 무마할 수 있다면 모를까.

별냥이 앞에 있는 상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마법 소녀였다.


예거.


독일어로 사냥꾼.

여태껏 괴수들을 사냥했으니, 이제는 마스코트들을 사냥해도 좋으리라.

물론 지나치게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그들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파악할 필요는 있었다.

결국, 시선을 못 이긴 별냥이가 실토했다.


“그 마스코트는 마법 소녀와 깊은 관계였던 것 같다냥.”

“아하.”

“그리고 마법 소녀가 복수하려고 했을 때, 협력했다냥.”

“어떻게 협력했어?”

“마법 소녀가 괴수랑 합쳐지게 되면, 일반적으론 몸의 주도권이 빼앗긴다냥.”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육체는 괴수가 움직이고, 기껏해야 얼굴과 성대 정도만 마법 소녀에게 주어졌다.

그러니 괴수가 된 마법 소녀는 일반적인 괴수라고 상대하고 처리하는 게 좋았다.


“우리가 너희에게 부여하는 힘은, 괴수가 쓰는 것과 유사한 힘이다냥. 그것도 알고 있지 않냥?”

“격발 말이지?”

“…아마 그 마스코트는 마법 소녀가 괴수에게 침식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마법 소녀에게 넘겨준 것 같다냥.”

“그거.”

“…?”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별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마스코트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웃음만 나왔다.

가뜩이나 환경 자체가 마법 소녀들에게 좋지 않은데.

주민 등록 번호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정체를 유추하기도 쉬운데.

마법 소녀들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이익 집단들만 넘쳐나는데.


이제는 마법 소녀를 적대시할 만한 이유도 생겨 버렸다.

괴수와 마법 소녀의 융합.

인간의 지능을 가진 괴수의 출현.

그것만큼이나 끔찍한 일은 거의 없을 터였다.

여태까지 인간형 괴수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지능은 고작해야 어린아이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런 괴수를 잡는 데 부단히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지능적인 괴수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마법 소녀였던 괴수를.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황이 너무나도 안 좋게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 세계로 와야 했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꾹 참았다. 울음을 삼키고, 눈물을 닦아내고.

억지로 활짝 웃으면서, 별냥이에게 말했다.


“마법 소녀 예거는, 언제나 그런 괴수들을 사냥할 준비를 마치고 있을게.”


당연히 별냥이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