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위 시대의 종결과 합스부르크 왕조의 탄생


알폰소 10세(Alfonso X, 1252~1284)


 콘월백(Cornwall伯) 리처드(Richard)


 대공위 시대 가운데, 제후들은 크게 2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한 쪽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을 다스리던 알폰소 10세(Alfonso X, 1252~1284), 다른 한 쪽은 영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백(Cornwall伯) 리처드를 지지하였다. 이 두 후보는 모두 1257년에 독일 왕의 지위를 획득했으나, 알폰소 10세는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하여 아들인 산초 4세(Sancho IV, 1257~1295)에게 쫓겨났고, 리처드는 그를 지지하던 제후가 라인란트 지방의 제후들 뿐이었단 점에서 지지층이 약소했고, 모국인 영국의 과도한 귀족 반란으로 인해 독일 왕의 자리를 온전히 취할 여유조차 남지 않았다. 두 후보 모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에 오를만한 재목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홀란트(지금의 네덜란드) 백작 빌렘(Wilhelm)이 1254년부터 1256년까지 독일의 1인 국왕으로 있었지만, 그마저도 짧은 재위 기간이었기에 입지와 왕권 모두 다지긴 역부족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271~1276)


 제국의 황제위가 비어있다는 것은 곧 무질서 상태를 의미했다. 이것은 교황조차도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다. 도둑과 강도들이 교회 영지를 습격하고 마음껏 약탈했으며, 교황은 아무리 적대하고 용납할 수 없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 했을지라도, 그 황제의 군사력에 기대어 왔기에 그것이 부재하여 일어나는 무질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콘월 백작 리처드가 1272년 세상을 떠난 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 1271~1276)는 독일에 있는 제후들에게 새로운 국왕을 선출하라는 서신을 보냈다. 만약,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선출하겠다는 내용 또한 있었다. 그러던 중 왕권을 강화하던 프랑스 왕가가 대공위 상태에 뛰어들며 황제의 후보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프랑스 왕을 제국의 황제로 인정한다면, 프랑스가 동유럽과 이탈리아에 절대적 패왕으로 거듭날 것이 분명했고, 그것은 교황에게 있어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선제후 즉, 국왕을 선거하는 제후들의 존재가 대두된다. 작센 왕조의 초대 국왕 하인리히 1세는 카롤링거 왕조가 힘을 잃고 혼란했던 동프랑크 왕국의 정세 속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왕이었다. 애초부터 왕은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기에, 이 선제후라는 존재는 독일사에 있어 특이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이런 왕을 선출하는 권리를 가진 제후는 처음엔 40여 명 정도였다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제후를 삭감하면서 그 숫자가 현저하게 줄었고 이 대공위 시대에는 유력한 제후 7명으로 한정됐다. 15세기의 프리드리히 3세까지 독일 왕은 교황의 손에 의해 황제에 올랐기에, 국왕 선거인은 곧 황제 선거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7인의 유력 제후는 7선제후(七選帝侯)라 불리게 되었다.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쾰른 대주교, 라인 궁중 백작,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 백작, 보헤미아의 국왕이 이 7선제후였으며, 이 가운데 교회 제후의 우두머리인 마인츠 대주교가 선제후 회의를 소집해서 선거관리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이 선제후들 중 대주교들은 대재상직도 겸임했다. 마인츠 대주교는 제국 대재상의 최고 관직을, 트리어 대주교는 부르고뉴 왕국 대재상, 쾰른 대주교는 이탈리아 왕국 대재상의 관직을 각각 겸임했다. 사실상 제국 권력의 공동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다른 제후들은 이런 선제후들이 못마땅했지만, 적어도 절대 왕권을 확립해가던 프랑스가 제국을 차지해서 생길 디메리트에 비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허나 곧 그들은 다음 고민이 생겼는데, 국왕을 누구로 선출하냐의 문제였다. 선제후 중에서 왕을 선출한다면, 반드시 불만이 나올 것이 자명했고, 프랑스 왕처럼 중앙집권의 의지가 강한 군주가 제위에 오른다면 그것대로 제후들의 권력은 축소될 것이 분명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황제는 제후들의 영방들을 잘 묶어줄 대표자면 충분했다.

 교황의 서신을 받고 나서 선제후들은 황제의 선출을 위한 선거전에 돌입했다. 우선 첫 번째 후보자는 튀링겐의 지방 백작인 프리드리히였다. 외할아버지가 프리드리히 2세였던 그는 고작 나이가 16세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적이었기에 반대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음 후보는 바이에른 공작 겸 라인 궁중 백작인 루드비히가 거론됐다. 실력은 충분했고, 슈타우펜 집안의 마지막 적자인 콘라딘의 외가 쪽 숙부라는 혈통적 정당성도 어느 정도 확보했기에, 여기까지만 본다면 황제로 즉위해도 나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쾰른과 트리어 대주교와 토지 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두 제후의 표를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게다가 동생인 하인리히와의 골육상쟁으로 발이 묶였기에 입후보를 포기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Rudolf von Habsburg, 1273~1291)


 어디서도 적당한 재목을 찾을 수 없었던 가운데, 주도권을 가진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펜슈타인과 뉘른베르크 백작 하인리히가 선거권을 가진 라인 궁중 백작을 통해 선거를 주도했다. 두 사람은 한 인물을 추천했는데, 그가 바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였다. 

 그들이 루돌프를 추천한 이유 중 하나는 전 왕조 호엔슈타우펜에 충성하던 의리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뒤 즉위한 아들 콘라트 4세를 지극정성으로 섬겼고, 이 정성이 지나친 나머지 교황에게 파문당할 정도였다. 이것만 본다면, 의문이 들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오토 대제와 같은 유능한 황제보다는 적당히 자신들의 영방을 대표하면서도 구심점 역할을 해줄 황제가 필요했기에, 상술한 두 후보와는 연관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 루돌프를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1273년 선제후 회의에서도 루돌프를 선출하자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합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 루돌프 1세는 이렇게 탄생했다. 더불어 그들은 교황령에 대한 황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여 교황의 지지도 얻었다. 이제 황제가 로마를 완전히 장악할 여지가 없어진 셈이었다. 

 루돌프 폰 합스부르크는 자신의 황위에 반대한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Ottakar II 1253~1273)에 승리하여 슈타이어마르크, 오스트리아, 케른텐의 영지를 접수하고, 이를 아들들에게 상속하는 등 왕가의 영토를 넓히는 것에 집중했다. 이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이 후일 창대해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한 것은 없었으며,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독일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제후들이었고, 그들은 더 이상 오토 대제와 같은 절대 왕권 위에 군림하며 황위를 세습하는 왕조를 배출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이로 인해 독일은 더 이상 통일된 나라가 아닌, 선출된 왕의 미약한 종주권 아래 만들어진 제후들의 연방이 되어버렸다. 


※ 괄호 안 연도는 재위기간


참고 문헌

브라이언 타이어니 외 저, 서양 중세사, 이연규 역, 집문당, 1991

기쿠치 요시오 지음, 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이경덕 옮김, 다른세상 출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