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류큐의 신사라 불리우는 우타키(御嶽)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습니다. 또 앞서 분명히 말한 바와 같이, 적어도 류큐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그들의 토착 종교가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한편 니가미(ニガミ)의 예시를 든 것과 같이 먼 류큐 사회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른바 '여성 정치'가 실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미야기 신지(宮城真治)의 주장을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물론 여성 중심의 정치가 실제로 존립하였던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이런 기이한 논란은 비단 류큐 사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이야기는 조금 더 북쪽, 조몬(縄文) 이전의 원시 일본 사회에도 적용됩니다. 과거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고전적 사회 진화 이론을 정설로서 수용하였고, 그 결과 수없이 많은 논의에서 일본의 모계제 이론이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마카스 켄(甘粕健)과 오카모토 이사무(岡本勇)의 그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조몬 사회를 계급 사회에 앞선 평등 사회로서 인식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계 사회와 모권 사회를 명백히 구분해야 합니다. 옛 통설에 따르면, 원시 류큐 사회는 모계 사회인 동시에 모권 사회였습니다. 반면 원시 본토 사회가 모권 사회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빙증해 줄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계 사회와 모권 사회가 사회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근거 또한 전혀 없습니다.

한편 일본의 민족학자 타카무레 이츠에(高群逸枝)는 고대 본토의 츠마도이콘(妻問婚) 따위를 근거로 원시 일본은 모계제 사회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 역시 너무 예전의 것으로,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거의 완전히 부정되어 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원시 일본이 모계 사회였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사장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일본이 모권 사회였다는 주장은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모계 사회의 경우 조금 애매하지만, 이제는 결국 마찬가지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필요성은 절대로 간과되어서 안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지금에 들어서는 거의 사장되어 사라진 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민속학이란 결국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견해를 달리 하는 학문으로, 일차적이거나 사료적인 가치의 자료를 읽을 때 특히 큰 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동시에 사학자로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요 참고문헌]

Wakita et al(2011). "日本女性史", 吉川弘文館.
宮城真治(1987). "山原 : その村と家と人", 日本民俗文化資料集成.
甘粕健(1986). "總論 生産力發展の諸段階", 岩波講座:日本考古学3.
岡本勇(1986). "先土器·縄文時代の食糧生産", 岩波講座:日本考古学3.
高群逸枝(2019). "日本婚姻史", Nextpublishing Author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