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 상경용천부 궁성

면적 자체는 고구려 왕궁에 비해 크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내부에 거대한 건물들이 일렬로 서있는 구조를 통해 당시 당나라도 최고 경계대상으로 바라봤던 발해의 국력과 위상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발해의 멸망과 함께 상경용천부는 완전히 몰락한다.

후백제 - 추정 궁궐지 3곳

조선시대 전라감영지, 인봉리 유적, 동고산성 3가지 후보가 존재하지만 현재로서는 인봉리 유적에 후백제 궁궐이 존재했다는 설이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다만 아직 완벽한 발굴을 끝마친게 아니라서 자세한 구조는 확정되지 않았다.

태봉 - 태봉국 철원성 궁성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하고 지었다는 철원성 내부에 건설한 궁궐이다. 문제는 이 궁궐이 나라의 사정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사치스럽게 지어졌다는것. 이는 사서에서도 기록된 사실이며, 이러한 사치가 후고구려의 멸망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 만월대

919년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새운 왕건이 개경에 지은 고려의 정궁. 대다수 한반도 왕조의 정궁은 평지를 다듬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동반되지만, 만월대는 산을 따라 높게 쌓은 축대와 언덕을 따라 배치된 건물이 특징이다. 이는 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궁을 지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의거한 건축이라고. 한때 북송과 함께 동아시아의 선진국으로서 황제의 나라를 자처할 정도로 강성했던 고려의 궁궐 답게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이 있을때마다 화를 당해서 중축과 수리를 거듭했고, 결국 공민왕 10년(1360년) 홍건적에 의해 완전히 전소되어 정궁으로서의 지휘를 잃었다.

여말선초 - 수창궁

만월대가 완전히 전소된 이후 정궁으로 사용된 궁궐. 사실 공민왕 이전부터 있던 궁궐이지만 공민왕 시대부터 정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고려의 마지막왕 공양왕이 왕좌에서 물러나고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선포했다.

조선 초기 - 경복궁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한성으로 천도한 후 한성에 지은 조선의 첫번째 정궁이자 법궁. 유교 교리와 풍수지리에 입각한 설계와 배치로 각잡힌 형태의 궁궐을 지어서 왕조의 위엄을 돋보이고자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2년 경복궁이 전소됨에 따라 경복궁은 한동안 상징성만 존재하는 터로만 남아있게 된다.

조선 중, 후기~흥선대원군 집권기 이전 -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던 궁궐이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경복궁의 거주지 로서의 부족함과 조선 초에 있던 피바람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왜란이 끝난이후 조선왕들은 창덕궁을 본격적인 정궁으로 삼고 거주하게 된다. 때문에 정궁으로 사용된 시간은 경복궁 보다 창덕궁이 훨씬 더 길다.

흥선대원군 집권기~고종전기 - 경복궁

흥선대원군은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높히는 사업의 일환으로 경복궁 재건사업을 벌였으며, 재건이 완료된 후, 경복궁은 다시 정궁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여전히 창덕궁을 오가며 생활하는 등 창덕궁도 여전히 중요한 궁궐이었다.

대한제국 고종시대 - 덕수궁

명성황후가 죽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던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여기서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이후 구한말 대한제국 황조의 굵직한 사건은 전부 덕수궁에서 일어나 사실상 기울어져가던 조선왕조(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비운의 궁궐로도 유명하다. 결국 일본이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면서 덕수궁은 정궁의 지휘를 잃고만다.

대한제국 말기 - 창덕궁

고종이 퇴위하고 황제에 오른 순종은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허나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등 더이상 국가의 구실을 재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였고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는 순간 한반도에서 왕조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