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분량 조절에 실패하여 배경 부분이 좀 긴 편입니다. 전쟁 전개나 빨리 보고 싶으신 분들은 알아서 스킵하시기 바랍니다.

  배경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가 공손연과의 교섭을 시도하다

위(초록색) · 촉한(노란색) · 오(분홍색) 삼국의 지도. 위나라의 영토로 표시된 요동 일대는 238년까지 공손연의 영역이었다.


3세기 초중엽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한 말의 혼란 이후 중원을 분할한 위 · 촉 · 오 3국은 수십 년에 걸쳐 서로 천하의 자웅을 겨루었으며,

중국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요동의 공손씨 정권(이하 공손연)과 고구려는 어느 국가와 협력할지 고심하던 중이었다.

한편 오나라는 화북 지방을 차지한 위나라에 비해 지리적 여건도 열악하고 내부 통합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상대적으로 국력이 약한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손권은 외국의 힘을 빌려 위나라와 대적하기로 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일환으로 시작한 첫 번째 교섭의 대상은 요동 일대에서 할거한 공손연이었다.

229년 5월, 손권은 교위 장강(張剛)과 관독(管篤)을 사신으로 삼아 공손연으로 파견했다.

이 당시 공손연은 요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위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오나라와 섣불리 손을 잡고 위나라를 견제하기에는 많은 위험 부담이 따랐기에 그저 주저할 뿐이었다.

허나 이 애매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손권은 공손연과의 군사 동맹을 기정사실화하여 오판을 하고 만다.


232년 3월, 오나라는 또다시 장군 주하(周賀)와 교위 배잠(裴潛) 등을 파견해 공손연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동년 9월에 공손연의 사절단과 함께 귀국하던 도중 위나라 장수 전예(田豫)에게 발각당해 처형되었다.

본래 오나라는 바다 건너 사신을 보낼 때 위나라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주로 먼 바다를 통해 왕래했지만,

시기가 늦가을이다 보니 선박이 풍랑을 만나 산에 부딪쳐 침몰 후 해안으로 떠밀려온 탓에 손쉽게 붙잡힌 것이었다.

공손연은 일단 교위 숙서(宿舒)와 낭중령 손종(孫綜)을 보내 번국을 청했으나, 오나라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다.


오나라의 문신 장소(張昭) 또한 "공손연이 돌연 마음을 바꿔 위나라에 붙으면 우리는 망신당할 것"이라 우려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이듬해인 233년 3월, 400명 규모의 사절단을 1만 명의 군대와 함께 공손연에 파견했다.

역시나 공손연은 위나라를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 총책임자 장미(張彌)와 허안(許晏) 등을 죽이고 그 목을 위나라에 바쳤으며

나머지 400여 명의 오나라 사신들은 잡아들인 뒤 요동 각지에 분산해서 유폐 · 감금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대로라면 모든 사신들이 영락없이 죽을 기세였으나 희망은 있었는데, 바로 관리가 소홀한 현도군 지역의 사신들이었다.


현도군에 감금되었던 진단(秦旦), 장군(張群), 두덕(杜德), 황강(黃疆) 등 60명은 민가에서 묵으며 누추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은 40여 일이 지났을 때 "8월 19일 밤에 같이 성곽을 불태우고 관리들을 죽여 설욕하자"는 계획을 세웠고,

19일 당일날 이를 실행하려 했으나 낮에 장송(張松)이라는 자에게 발각되어 현도태수 왕찬(王贊)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 진단 일행은 황급히 성을 넘어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공손연의 추격자들을 따돌린 채 산골짜기 사이로 이동했다.

도중에 장군은 무릎에 종기가 생겨 두덕과 함께 낙오되었으며, 진단과 황강은 고된 여정 끝에 한 낯선 나라에 도착했으니...



  • 오나라와 고구려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파국

오나라의 사신 진단과 황강이 도달한 곳은 바로 동천왕 치하의 고구려였다.

동천왕은 재위기 초반 왕후 우씨의 지속적인 모함마저 눈감아줄 정도로 관대하고 인자한 사람이었다 하며,

이러한 성품 때문인지 갑작스레 찾아온 누추한 차림의 오나라 사신들을 매우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

사신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손권이 고구려에게 주려던 선물을 공손연이 빼앗았다"고 보고했는데,

원래 목표는 공손연과의 교류였으므로 사실과는 달랐으나 고구려 입장에서는 딱히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당시 고구려 또한 약소국으로서 위나라와 공손연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던지라 동맹을 맺을 국가가 필요했다.

마침 오나라와 화친할 기회를 얻은 동천왕은 크게 기뻐하며 산속에 낙오된 장군과 두덕을 다시 찾아오게 한 뒤,

담비 가죽 1,000장과 멧닭 가죽 10장, 호위무사인 조의(皁衣) 25명을 딸려서 사신단을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오나라 땅을 밟게 된 사신단은 손권을 만나 슬프면서도 기뻐하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으며,

손권 또한 공손연에게 한 번 배신당한 후의 좌절감을 이겨내고 고구려를 새로운 교섭 대상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35년, 오나라는 사신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 등을 고구려에 파견했으며,

이번에는 각종 옷감과 보배를 사여하고 동천왕을 흉노 선우(單于)로 책봉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안평(현 단둥시)에 정박한 사절단은 먼저 교위 진봉(陳奉)을 국내성에 보내 동천왕을 직접 알현하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위나라 유주자사가 고구려에 보낸 "오나라 사신을 붙잡아 공을 세우라"는 교지를 우연히 염탐하게 되었다.

자칫 2년 전처럼 배신당할까봐 두려워진 진봉은 황급히 서안평으로 돌아가 사굉 일행에게 첩보 내용을 전달했다.


당시 고구려는 혹시 몰라 위나라와의 통로도 열어놓았을 뿐, 당장 오나라를 배반하고자 하는 뜻은 없었다.

때문에 동천왕은 주부 착자(笮咨)와 대고(帶固) 등 수십 명의 관리를 서안평으로 보내 해명하도록 했는데,

사절단의 총책임자 사굉은 배신감과 분노에 차 그 자리에서 고구려 관리 30여 명을 밧줄로 묶고 인질로 삼았다.

갑작스레 반전된 상황에 당황한 동천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 사죄의 뜻을 전한 뒤 군마 수백 필을 보내 달랬으니,

사굉은 그제서야 관리들을 풀어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오나라의 조서와 사여품을 대신 동천왕에게 전달하도록 요구했다.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오나라 사절단이 돌아갈 때 동천왕에게 받은 수백 필의 말을 배에 싣고 가려 했으나

선박의 크기가 너무 작았던 탓에 군마 수백 필 가운데 고작 80필만을 가져가야 했다는 사실이다.

어쩔 수 없이 사절단은 많은 말들을 서안평의 항구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허둥지둥 오나라를 향해 출항했다.

그렇게 오나라와 고구려의 공식적인 첫 번째 교섭은 도발적이고 황당한 해프닝 속에 어영부영 막을 내렸고,

때마침 위나라의 강한 압박을 받기 시작한 고구려는 점차 오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른다.



  • 자극받은 위나라의 대외 확장 및 고구려와의 갈등

오나라의 손권이 고구려에 사절단을 보내기 1년 전인 234년은 북벌을 추진하던 제갈량이 사망한 해이다.

촉한의 북벌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은 위나라 입장에서 더 이상 남쪽 방어에 신경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였으며,

남쪽의 위협으로부터 한숨 돌린 위나라는 서서히 동북방의 요동 방면으로의 확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공손연을 토벌하기 위해 234년에는 고구려와 화친했으며, 상술했듯 235년에는 오나라 사신의 사살을 요청했다.

손권이 무리하게 공손연 및 고구려와 교섭을 시도한 일을 일종의 전술적 도발로써 받아들인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충돌이 잦았던 공손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위나라와의 친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236년 2월 고구려에 도착한 오나라의 사신 호위(胡衛)를 7월에 처형하고 그 목을 위나라에 바쳐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성립한 위나라는 237년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공손연을 정벌하도록 했으나,

구루돈(寇婁敦) 등 오환족과 선비족을 동원했음에도 공손연의 반발에 요하를 넘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위기가 코앞에 왔음을 직감한 공손연은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오나라에게 지원군을 요청하는 등 침략에 대비했다.


이듬해인 238년, 위나라는 명장 사마의를 필두로 40,000명의 대군을 공손연으로 보내 정벌을 명했다.

이때 고구려에서도 주부(主簿)와 대가(大加) 및 군사 1,000여 명을 지원하여 동맹국으로서 위나라를 도왔다.

사마의는 진군하면서 관구검의 군대까지 편입한 뒤 6월에 요동에 도착했고, 이후 몇 달 간 공손연과 대치하다가

공손연의 본거지 양평성을 포위한 끝에 결국 8월 23일, 급박해진 공손연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뒤늦게 달아나던 공손연과 그 아들 공손수는 참수되었고, 관원과 장군 2천 명 및 15세 이상 남자 7천 명이 학살당했다.


그렇게 요동 지역의 위협적인 세력이었던 공손씨 정권은 창건 이후 50여 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허나 공손연의 몰락 이후, 이전까지 유지되던 위나라와 고구려의 동맹 관계는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위나라의 공손연 정벌에 지원군을 파병했는데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위나라는 새롭게 차지한 한군현을 이용하여 요동뿐 아니라 한반도 일대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국 간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으니, 이제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전개

  • 고구려의 선제 공격과 이상하리만치 계속되는 승전

242년, 고구려의 동천왕은 마침내 압록강 하구의 요충지인 서안평을 기습 공격 후 점령하였다.

이는 최근 위나라가 차지한 요동 반도와 낙랑군을 잇는 교통로를 차단하여 위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으로,

비슷한 시기 촉한의 장완(蔣琬)이 위나라로의 북벌 재개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틈을 노린 군사적 전략이었다.

동천왕은 당시 고구려군이 위나라의 군대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당연하게도 고구려 내부에서는 상식적으로 위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며 전쟁에 회의적인 여론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제3등 패자(沛者)의 벼슬을 지냈던 고구려의 관리 득래(得來)의 경우가 있는데,

그는 단식투쟁까지 일으키면서 동천왕에게 위나라와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수 차례 간언하였다.

결국 동천왕이 습격을 강행하자 "이 땅이 머지않아 쑥대밭으로 변하는 꼴을 보겠구나!"라며 한숨을 내뱉은 뒤

그대로 굶어 죽었다고 하는데, 이후 다른 고구려인들이 그를 현명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여론 또한 득래의 일갈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로 인해 위협을 느낀 위나라의 관구검은 244년 8월 1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이는 불과 3개월 전 위나라가 흥세 전투에서 촉한에게 대패한 것을 만회하기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현도태수 왕기(王頎), 낙랑태수 유무(劉茂), 대방태수 궁준(弓遵) 등 고구려 주변의 지방관들은 죄다 동원되었으며,

토구장군 구루돈을 필두로 한 오환족 및 모용목연(慕容木延)을 필두로 한 선비족의 군사들도 위군을 따라 참전하였다.

고구려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부여의 대사 위거(位居)는 부족장에 해당하는 대가(大加)를 통해 군량을 지원했다.


동천왕은 이에 질세라 위군의 2배에 달하는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양군은 비류수(현 부이강) 가에서 맞붙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반전이 일어나는데, 바로 고구려군이 위군 3,000여 명의 머리를 벤 뒤 격파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는 전투가 자국에서 벌어졌으므로 지형적 이점이 있었으며, 병력 차이도 2배나 났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위나라의 군대라 할지라도 지극히 불리한 조건 속에서 고구려의 군대를 돌파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고구려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근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도 승전하여, 또다시 3천여 명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관구검의 1만 병력 중 무려 60%에게 인명피해를 안겨준 동천왕은 기세등등하여 장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은 그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이후 동천왕은 철갑기병 5,000명을 직접 지휘하며 마지막 남은 위나라 군을 격퇴하러 호기롭게 진격했다.



  • 관구검의 전략으로 한순간에 격파된 고구려의 2만 대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고구려군의 행운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고구려군에게 지속적으로 밀리던 관구검은 결사항전하며 보병 방진을 펼쳐 돌격해오는 기마병 부대의 기세를 꺾었고,

그 틈을 노려 시작된 위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고구려는 그대로 패퇴하며 2만 명 중 무려 18,000여 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종전에 위군이 입었던 60%의 피해보다도 더한 90% 가량의 병력을 전투 한 번만으로 모조리 잃어버린 셈인데,

동천왕은 자신의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기병 1,000명과 처자식을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도주해야 했다.


심지어 이 전투에서 동원된 2만 명의 대군은 동천왕이 말 그대로 전국에서 탈탈 긁어모은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비류수 전투 전후 고구려의 인구 수가 30,000호(戶)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낙랑군의 인구 기록을 참고하여 호(戶) 하나당 5~6명 정도를 책정하면 15만~18만 명 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리 고구려가 호전적인 국가였다 할지라도 당시에는 국력도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인구도 20만명 미만이었으니,

전체 인구의 13% 정도나 되는 병사를 잃어버린 것은 차후 위나라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도 지대한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남쪽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백제는 위나라가 바쁜 틈을 타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군을 습격했는데,

진충이 낙랑군 변경의 주민들을 잡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낙랑태수 유무는 분개하여 백제에 항의하였다.

이에 백제의 고이왕은 자기네들도 침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꼬리를 내린 뒤 낙랑군 주민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 불타는 환도성과 학살되는 백성들,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천왕

1906년 길림성 집안현 환도산성 서북쪽 판석령(板石嶺) 부근에서 도로 공사 중 발굴된 〈관구검 기공비〉의 파편.


244년 10월, 관구검은 동천왕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기양양하여 고구려의 전시 수도 환도성으로 진격했고,

상술하였듯 병력 대부분이 전사하여 혼란에 휩싸여 있던 고구려군은 위군이 환도성을 함락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위군은 성을 불태운 뒤 한중 양측의 사서에서 "성을 도륙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참획하였는데,

《삼국지》 〈위지〉 및 《한원》에서는 수천 명을 참수했다고 하였으며 《양서》 〈동이열전〉에서는 아예 10,000여 명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전시 수도인 환도성이 박살나 버렸으니, 인근에 위치한 평상시 수도 국내성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이듬해인 245년에 위나라가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자 위협을 느낀 동천왕은 아예 동쪽의 옥저 지역으로 도망갔다.

이 소식을 들은 관구검은 앞서 참전했었던 현도태수 왕기를 군대와 함께 보내 동천왕을 끝까지 추격하도록 명했으며,

고구려 침공에 동원되었던 나머지 병사들은 245년 5월 관구검의 지도 하에 위나라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열었다.

관구검은 떠나기 전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공적비를 건립하고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불내성은 옥저 혹은 동예 일대의 지명이므로 동천왕이 옥저로 피신한 사실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로 새긴 것이었다.


한편 위군에게 쫓기던 동천왕은 어느새 남옥저의 죽령(현 황초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다 없어진 상태였다.

이때 동부 출신 밀우(密友)라는 자만이 홀로 남아 동천왕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그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가까이 닥쳐오니, 이 형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왕께서는 달아나소서. 

그렇게 동천왕의 배후를 지키기로 한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추격해오는 위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으며,

이 덕분에 동천왕은 샛길을 통해 산과 계곡으로 숨어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은 뒤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다.

당시 밀우의 결사대가 옥저에서 홀로 견뎌내야 했던 위군의 공격은 실로 어마무시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지》 〈위지〉에 따르면 위군이 옥저의 읍락을 모두 격파하고 3,000여 명을 참획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때문에 밀우는 어찌저찌 위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기는 했지만 완전히 격파시키지는 못했으며, 전장에서 그대로 쓰러지고 만다.


군사를 재조직한 뒤 북옥저로 다시 몽진한 동천왕은 하부 출신 유옥구(劉屋句)를 시켜 밀우를 데려오게 했다.

유옥구가 전장에서 밀우를 구출한 뒤 업은 채로 돌아오자, 동천왕은 그가 깨어날 때까지 무릎에 눕혀 보살폈다고 한다.

그사이 밀우의 결사대를 제치고 다시금 추격을 시작한 위군은 기어이 북옥저의 동쪽 경계 끝까지 다다랐는데,

현도태수 왕기는 동북쪽으로 1,000리를 더 진격하여 만주 지역 읍루인들의 남쪽 경계에 도달해 공적비를 건립했다.

또한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고구려에 복속해 있던 동예를 정벌하고 불내후(不耐侯)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처럼 위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가고 있었고, 고구려에게는 이를 타개할 만한 결정적인 돌파구가 필요했다.



  • 유유의 사항계로 인해 성공한 고구려의 대반격

동천왕이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찰나, 동부 출신 유유(紐由)가 직접 나서서 동천왕에게 자신의 계책 하나를 제안하였으니,

적진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대접한 뒤 그 틈을 엿보아 왕기의 부하 장군을 찔러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동천왕은 유유의 계획을 승인했고, 이윽고 유유는 위군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우리 임금이 큰 나라에 죄를 짓고 달아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귀국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고 죽음을 법관에게 맡기려 하는데, 먼저 소신(小臣)을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이라도 드려 군졸들의 음식거리나 되고자 합니다.

위나라의 장군이 항복을 받으려고 하자, 유유는 식기에 칼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간 뒤 칼을 빼서 장군의 가슴을 찔렀다.

이후 유유는 주위에 있던 관리들에 의해 붙잡힌 뒤 살해당했지만, 위군은 유유의 예상대로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군사를 수습한 뒤 세 갈래로 나뉘어 최대한 신속하게 기습을 감행하였고,

위군으로부터 간만의 승리를 거둔 뒤 전국 각지의 병력을 최대한 모아 왕기의 군대를 낙랑군 방면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위군은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여 위나라 본토로 돌아갔다.


  결과

최종적으로는 위군을 몰아내긴 했으나, 고구려가 비류수 전투 이후 일련의 사건들로 입은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이전까지 운영하던 정예 병사들 중 태반이 사망했을 뿐더러 수도 환도성과 국내성은 불타고 백성들은 학살되었으니...

결국 동천왕은 247년 2월, 어쩔 수 없이 수도를 평양성(현 지안시의 평지 지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251년 4월에 왕후 연씨가 "선왕이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서 전란을 당하고 달아나 사직을 거의 잃을 뻔했다"며

위나라에 장발의 미인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고구려 왕실에서도 흑역사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전후 동천왕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식읍과 관직을 하사하도록 했는데,

밀우에게는 거곡(巨谷)과 청목곡(靑木谷)을, 유옥구에게는 압록원(鴨淥原)과 두눌하원(杜訥河原)을 주었으며

위나라 장군과 함께 전사한 유유에게는 구사자(九使者)라는 관직을 추증하고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로 삼았다.

한편 위나라에서도 관구검이 좌장군에, 모용목연이 좌현왕(左賢王)에 임명되는 등 공적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다.

앞서 고구려의 참패를 예견했던 득래의 무덤은 환도성 함락 당시 관구검에 의해 보존되었고, 그의 처자식들도 전부 풀려났다고 한다.


약 13년 후인 259년 12월, 위나라의 장수 울지해(尉遲楷)가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이번에는 동천왕의 아들 중천왕이 친히 정예기병 5,000명을 이끌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맞붙어 대승을 거뒀다.

이때 울지해의 병력 중 참수당한 사람만 8,000여 명이었다고 하니, 선대 왕이 겪은 치욕적인 패배를 제대로 복수한 셈이다.

이후 고구려는 중원에서 가중되던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성장하였고 미천왕 대에는 한군현을 병합하기까지 했으며,

소수림왕 대의 내부 개혁을 거쳐 광개토대왕 대에는 외부의 상황을 적절히 활용해 동아시아의 패자로 올라서기도 했다.


동천왕은 비록 위나라를 과도하게 자극하다가 쓰라린 패배를 통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러한 사례는 후대 왕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어 고구려가 국제 정세를 이용해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무엇보다 동천왕 대부터 고구려의 대외 전략이 본격화되고 정치 상황을 바라보는 안목이 발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왕기군이 고구려와 옥저, 동예, 읍루 등지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정보를 상세히 수집하게 되었고,

그 정보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소중한 고대사 사료로 전해진다는 점 또한 거론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