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장제스를 중심으로한 국민당 우파가 국민당 좌파,중국 공산당 상대로 일으킨 군사쿠데타


쑨원이 1차 국공합작을 채결했을 당시 중국 공산당의 규모는 200명 밖에 안되는 지식인 동아리에 불과했음. 그러나 더 큰 세력인 쑨원의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 협력하면서 공산당은 빠르게 세력을 불려나가는데 성공함. 이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게 바로 국민당 우파진영 이었는데 국민당 입장에선 신과도 같은 쑨원이 국공합장을 지지해서 찍소리도 못함. 1년뒤 쑨원이 사망하고 우파는 기지개를 펴나 싶었느나 곧바로 랴오중카이 암살사건이 일어나며 공산당과 좌파를 견제할 우파 자체가 와해되어버림. 이로인하여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는 중산함 사건(나중에 자세하게 다룰예정) 이전까지 신나게 독주하고 있었음. 그러나 1926년 중산함 사건이 터지고 국민당 우파가 개같이 부활하기 시작하며 공산당과 좌파의 독주는 잠시 저지됨. 이후 얼마뒤 장제스의 주도로 국민당 1차 북벌이 진행되고 공산당은 표면적으로 협조는 했으나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우한 정부의 수장 왕징웨이와 접촉해서 이를 견제하고자 했음. 하지만 이러한 견제도 얼마못가 막히게 되는데 국민당 좌파가 대거 실각하고 우파인 장제스가 국민당의 1인자로 떠오르기 시작한거임. 당연히 공산당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김.

그러던중 국민당 좌파가 대다수인 광저우에 있던
광저우 국민정부가 우한 천도를 선언 왕징웨이 중심의 우한 국민정부가 수립됨. 이로인하여 국민당 내에서 좌파의 영향력이 다시 강해짐 결국 우파는 다시 밀려나게 되고 좌파가 국민당을 장악 우파에 대하여 칼을 겨눔.

이렇듯 국민당이 분열되는 상황에서 공산당은 상하이 군벌 쑨촨팡을 몰아내기 위해 저우언라이 주도 하에 상하이 폭동을 일으키고 1927년 3월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함께 상하이를 장악하는데 성공함. 상하이 시민들은 국민혁명군을 환영했고 바이충시를 중심으로 내부 치안을 잡아가기 시작함. 근데 그해 4월 난징사건이 일어나 난징의 외국인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 분노한 미국이랑 영국은 상하이 항구에 포격을 가하는등 무력행위를 주저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신중하게 판단하여 무력행위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한 영국과 미국을 말리고 중재하며 좃될뻔한 국민당을 살림.


하지만 위기는 끝이 아니었는데 우한 국민정부는 여전히 장제스를 견제하고 있었고 공산당은 연일 장제스를 비난하고 있었음. 이렇듯 우한정부 휘하의 군대들은 장제스를 체포,제거하려고 시도하는등 좃될뻔한 일이 많았음. 그러던중 중산함 사건 이후 프랑스로 빤스런친 왕징웨이가 1년만에 다시 귀국했는데 이미 국민당 좌파에선 장제스의 견제를 위해 왕징웨이의 귀국을 촉구하고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