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역사진지 커뮤니티 haruwikidic.com




아이누 민속학의 분류와 서술(The classification and description of Ainu folklore)

Richard W. Howell


 아이누 민속학(Ainu forklore)의 후속 연구를 위한 시발점으로서 저술된 이 논저의 제한된 범위 내에서 ‘반드시 그럴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더욱 문학적으로 적절한 자료를 살펴보려 시도하는 것은 가능할 뿐더러, 아마도 대단히 갈피를 잡기 어려운 문제; 아이누 민족에 관한 아주 어려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몇 던져 줄 것이다. 아마도 특정한 문화 속 영웅 서사시(epic poetry) 발생의 시작은 대략적으로 그 문화가 원시적으로 여겨지는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는 의견에 의하면 예상 밖의 일이다. 만약 이러한 태도가 정당화된다면, 그것은 이중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첫 번째로 아이누 민족의 영웅 서사시는 실존하는 것인가, 두 번째로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바와 같이 아이누 민족이 원시적인 것인가의 문제에 당면한다. 아이누 민족 학설에 관하여서는 각각 두 명의 주목할 만한 학자 (Pilsudski 와 Kindaichi) 들이 그들을 위한 문학 형식을 주장해 왔다. 다른 학자들 그 누구도 아이누 사이의 서사 형태가 아마도 이렇게 쉽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아이누 연구는 지금껏 비교적 좁은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예컨대 킨다이치(Kindaichi)는 주로 일본어를 사용하였지만 바첼러(Batchelor)는 일본어가 아닌 일차적 사료에 관련된 것이었다. 바첼러가 일말의 특정한 구비설화와 그 구전 방식의 내용에 있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가정하였기에 그는 유카라(yukara)라는 것을 단순한 ‘노래(songs)’로서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1912년 브로니슬라우 필스드스키(Bronislaw Pilsudski)는 사할린 아이누(Saghalien Ainu)의 민속 설화를 아이누인들 스스로가 만든 구분점에 의거하여 부분적으로 구분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와 비슷한 홋카이도 아이누(Hokkaido Ainu)의 민속 설화 연구는 20년 정도가 지난 1933년에 이르러서야 킨다이치 쿄스케(Kindaichi kyousuke)에 의해 간행되었다. 물론 홋카이도 아이누와 사할린 아이누는 방언지리학적으로도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지만, 그 스타일, 구전 방식, 심지어는 각각의 내용까지도 두 아이누 민속 설화의 유형이 꽤나 일치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두 주요 그룹 간의 대응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닐 뿐더러, 하나의 그룹 내에서도 여러 민속 설화 간의 명확한 분별점이 잡히지 않는고로,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유형의 예시들 중 대부분은 사용할 수 없다.

 필스드스키가 ‘서사시(epic)’라고 정의한 총 12개의 카테고리 중 4개의 항목은 우선 가장 ‘서사시스럽게(epic)’ 보이는 순서대로 논의될 것이다. 가장 흥미롭고 중요하며 현존하는 최고(最高; ancient)의 아이누 문학 형식은 바로 홋카이도에서 유카라(yukara; songs), 사할린에서 하우키(hauki; make-voice)라고 불리우는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그 길이가 수백 단어에서 수만 단어까지 다양하고 각각 대략적으로 다섯 음절로 이루어진 더 많은 행으로 구성된 영웅적인 이야기들이며, 종종 이야기를 위해 밤을 지새워야 할 필요도 있다. 그것들은 구식의(archaic) 언어로 전달되어 오직 노인들 혹은 언어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데, 한때 사할린에는 늦은 시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이와 다른 형식의 서사시를 읊는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명하거나 혹은 어떤 지역 내에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이미 필스드스키의 시대에 와서는 모두 더욱 문명화된 추구를 시작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곡조에서는 특별히 인위적인 리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사할린에서는 손을 이용하는 한편 홋카이도에서는 짧은 막대기를 이용하여 상당히 리드미컬한 울림을 만들어 내곤 하였다. 이는 부채를 이용하여 리듬을 맞추는 일본(japan)의 코와카마이(幸若舞; Kowaka no Mai)와도 닮았고, 각 행의 마지막 음절은 여느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es)의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plain chant)와 다르지 않게 항상 떨림을 주거나 트릴(trill)로 이어진다.

 또 서술자는 가끔 느긋느긋해 질 때 일종의 레치타티보(recitative) 비슷한 것에 빠지기도 한다. 필스드스키는 홋카이도에서 이러한 형식은 ‘간격 발화(speech having intervals)’라는 뜻의 사 코로 이타(sa koro ita)라고 불리어 왔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였다. 킨다이치는 유카라의 일종으로 ‘간격이 있는 것(things having intervals)’이라는 뜻의 사코로베(sakorobe) 개념을 언급하지만, 두 경우 모두 아쉽게도 자세한 사항은 누락되어 있다.

 한때 사나운 전사였던 그들의 성격으로부터 예상할 수 있듯, 유카라는 종종 어떠한 여성으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받는 전쟁적 성격의 영웅 설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 영웅은 보통 그의 누나 또는 이모에 의해 길러지는 한편, 그들로부터 가족이 무참히 파괴된 복수의 원동력을 제공받곤 한다. 아래는 바첼러에 의해 조사된 짧은 유카라 중 하나이다 :

 “나는 누나에게 길러졌소. 매일 밤 반짝이는 검의 모습이 나의 눈앞을 가린다네. 나는 쿠나시리(Kunashiri)와 슈마시리(Shumashiri)의 전사들이 얼마나 용감한지 듣고 보고 알았으니, 지금에 와서야 근심 속에 잠이 들 수가 있겠소. 그래, 어느날 밤 누나가 잠든 사이 조용히 집을 빠져나와 싸움을 하러 가던 중 늑대신의 여동생과 마주쳤다오. 그녀는 쿠나시리와 슈마시리 전사들의 용맹함을 경고하였고, 만약 내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여동생과 약간의 선물을 약속하였지. 아아, 분노한 나는 그녀를 죽여버렸소. 늑대신이 나타나 내 앞에서 분개하기 전까지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네. 그는 나를 죽이려 덤벼들었으나 이길 수는 없었으며, 용맹한 쿠나시리와 슈마시리의 전사들조차 가신(家神)의 가호를 받아 홀로 덤벼든 나를 막아내지 못하였다오. 집으로 오는 도중 신에게 듣기를, 나는 오키쿠루미(Okikurumi)의 아들이요. 헌데 어찌 늑대신과 그의 여동생을 찢어 죽였는고. 이에 대한 보복일지니 나의 누님은 끌려가 버린 것을 어찌 하리오. 그렇게 슬픔에 잠긴 어느 날 늑대신이 나타났고, 나는 마침내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네. 저녁이 되면 심상(picture)들은 생기를 되찾고, 운동하며, 옛 이야기를 하게 될테니.”

 조상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러한 유형의 유카라는 사할린에서 ‘조상의 노래(songs of the forefathers)’라는 뜻의 헨기-하우키(hengi-hauki)라고 불리우며, 현세의 시인들이 고대의 발화와 삶의 형태를 모방하여 작곡한 치타라-하우키(chitara-hauki), 즉 ‘꿈의 노래’라는 또 다른 유형이 존재한다.

 킨다이치에 따르면 유카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마츠미야 칸산(Matsumiya Kansan)이 1709년에 쓴 예조 단 힛키(Yezo Dan Hikki)에 있는데, 이것은 요시츠네(Yoshitsune)가 에조 지역의 귀중한 두루마리를 훔친 것과 연관이 있는 이야기로서, “일본의 죠루리(joruri)”와도 같이 불려졌다고 전하는 것이다.

 1737년에는 사카쿠라 겐우에몬(Sakakura Gen-uemon)의 예조 즈이히츠(Yezo Zuihitsu)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그 형태를 자세히 서술한다. “술이 한창일 때 그들은 노래를 불렀고, 죠루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선언문의 그것과도 같아 … 그것은 천천히, 센다이 죠루리(Sendai joruri)의 형태를 닮아가고 있었다.” 또 다른 설명은 타테마츠 토모(Tatematsu Tomo)가 1784년 저술한 토유키(Toyuki)에서, “그것은 술해 취한 채 엎드려서 양손으로 가슴을 치며 노래하였다” 고 서술하였다.

 유카라는 일본에서 모가미 토쿠나이(Mogami Tokunai)의 시기부터 ‘에조 죠루리(Yezo joruri)’, ‘에조노 나가우타(Yezo no nagauta)’, ‘사이몬(Saimon)’ 등의 그것으로 알려져 왔다. 1789년 토쿠나이의 예조 소시(Yezo Soshi)에서 아주 짧고 시험적인 구절이 제공되는 한편, 1808년 같은 저자가 다른 이름으로 작성한 와타리시마 힛키(Watarishima Hikki)에서는 훨씬 더 자세한 내용이 발견된다. 바로 이곳에서 유카라 발화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으로서, 토쿠나이에 의해 주로 ‘고전적인 고대어(ancient classical language)’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문자로 기록된 실질적으로 최초의 아이누어 텍스트는 우에하라 쿠마지로(Uehara Kumajiro)가 1804년 모시오구사(Moshiogusa)에서 채집한 ‘유가리, 죠루리노 코노(Yugari, Joruri no Koto)’ 일 가능성이 높다. 그 텍스트는 총 13페이지로 구성되어 약 500 줄의 분량으로 나뉘어 있지만 언어적인 측면에서 절반 정도는 일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이 섹션(section)에만 번역문이 첨부되어 있다. 번역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은 북부 방언으로 구성되어, 약간의 오류가 있는 순수한 아이누어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메이지 유신 이전 마지막 아이누 문학의 정통적인 기록은 쇼코 칸쇼조(Shoko Kanshozo)가 발행한 예조-곤(Yezo-gon), 차랑케(Charanke), 나라비니 죠루리(narabi ni Joruri)라는 제목의 작은 필사본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작가도 연대도 분명하지 않다는 점에서 흠이 있다. 그것의 백 번째 줄과 56번째 행은 상당히 정밀하고 번잡함 없는 아이누 민족의 노래를 제공하고 있지만, 번역이 없을 뿐더러 내용조차 위에서 언급한 와타리시마 힛키에 등장하는 유카라 중의 하나와 같다.

 1883년 혹은 1884년경 토요 가쿠게이 잣시(Toyo Gakugei Zassii)에서 나가타 호세이(Nagata Hosei)에 의하여 아이누 유카라의 아주 간략한 부분이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존 바첼러(John Batchelor)는 1888년과 1889년, 그리고 1892년에 일본 아시아 학회 회보 시리즈에서 유카라의 여러 표본들을 기록하고 발표하는 데 성공하였다. 킨다이치는 이들 중 일곱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총 네 개의 표본이 예조노 나가우타(Yezo no nagauta) 또는 사이몬(saimon)의 주요한 예시들이라고 설명한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