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미야미즈 류(宮水龍)이다. 길이라는 뜻이다. 나는 1910년, 일본 제국 홋카이도 하코다테 구에서 태어났다. 태몽에서 용이 나왔기 때문에 내 이름은 저렇게 되었다. 사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다. 바로 쿠슈르. 우리 민족 말로 길이라는 뜻이다. 엄마는 내가 사람들을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면서 저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나를 포함해서 모두 6명이다. 내 밑으로 동생이 2명 있고, 할머니까지 같이 산다. 


1920년대, 우리는 참 차별받으며 살았다.


요즘들어 학교에 가기 너무 싫다. 본섬에서 올라온 카즈토 아이들은 나를 보고 자꾸 이누라고 놀린다. 어차피 따로 분리되어서 교육받는 마당에 굳이우리 학교 앞까지 찾아와서 놀린다. 내가 아이누 족이라고 거기서 아만 빼서 놀리는데, 내가 그 뜻이 개라는 걸 모를 줄 아나?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정부에서는 홋카이도 토인 보호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름만 보호법이지 사실상 우리를 차별하는 법이다. 엄마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먼저 이 섬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본토 일본인들이 올라오더니 여기를 무주지로 간주해 일방적으로 홋카이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고 이상한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집도 농사 잘 짓고 있다가 땅을 뺏겼다고 한다. 이래서 우리 집이 가난한 거 였구나.. 거기다가 농사도 못 짓게 하니 물고기라도 잡거나 사냥이라도 해야 되는데 저 토인보호법 때문에 그것마저도 불법이라도 한다. 정말, 우리보고 살라는 걸까 말라는 걸까? 


1930년대,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어


이제 어엿한 20대가 되었다. 난 열심히 공부해서 홋카이도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세상은 나한텐 너무 각박했다. 전쟁의 마수는 이곳 홋카이도에도 뻗쳐서 여기는 완전히 병참기지화되었다. 물론 나는 아직도 우리 아이누 마을에 계속 살고 있다. 삿포로 시내로 가기에는 카즈토들이 너무 많아서 무섭고 싫기도 했고, 정든 이곳을 떠나기는 싫어서 그냥 기차 타고 다니고 있다. 마침 우리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단체를 내 친구들과 몇몇 사람들이 만든다길래 나도 그곳에 가입할 예정이다. 이름은 홋카이도 아이누 협회로 할 예정이다.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고,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릴 예정이다. 또한 샤모들이 없애려는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도 하려고 한다. 우리 문화는 너무나도 소중한 거니까. 동시에 우리말도 보존해야 한다. 

1940년대, 조선인이라는 민족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동질감을 느꼈다.



점점 일본은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전쟁에서 질 기미가 보이니까 조급했나 보다. 거기다가 다들 징용을 나가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다행히도 저번에 다리에서 실수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는데 제 때 치료를 못해서 다리를 살짝 절게 된 탓에 징용이 되진 않았다. 30대가 된 나는 삿포로의 전기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 사람들은 모두가 샤모들이라 나를 벌레 보듯 보았고, 또한 나랑 스치기만 해도 아주 경기를 일으켰다. 익숙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딱히 좋진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던 찰나에 명절이라서 다행히 고향에 가게 되었다. 고향이라고 해봤자 결국 이 홋카이도 안에서긴 하지만. 집으로 갔는데 웬 처음 본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 사람은 일본인은 아닌 것 같아. 이상한 말을 써. 일단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집으로 데려와서 밥을 주긴 했는데, 너 이 사람 말 알아들을 수 있겠니?'' 흠, 순간 고민이었다. 일단은 일본말이라도 해보기로 했다. ''どこからいらっしゃいましたか?(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私は鉱山へ強制的に連れてこられた朝鮮人で、監督官に内緒で脱出し、ここにちょっと隠れました。'' 듣자하니 이 사람은 말로만 듣던 조선인이었다. 광산에서 일하다 탈출했다고 한다. 와, 우리만큼 심한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었구나. 어머니께 ''이 사람은 광산으로 강제로 끌려와서 노동했던 사람이래. 일본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래.'' ''조선인이라니, 참 신기하구나.'' 몇 개를 더 물어보았다. 갈 데는 있는지, 어쩌다 끌려왔는지 등등.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은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곳에서 왔고, 갈 데가 없다면서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라도 하면 안되냐고 말했다. 난 느꼈다. 이 사람한테서의 동질감을. 똑같이 차별받는 그 설움을. 또한 그 절박함을. 그래서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엄마, 이 사람은 갈 데가 없어서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같이 살고 싶대. 괜찮겠어?'' 그러자 어머니는 말했다. ''난 상관없단다. 저 사람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해라.'' 그 사람에게 여기서 같이 살자고 하니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참, 이 사람도 인생을 힘들게 살았구나. 생각하던 찰나에 막내동생이 시장에서 장을 봐서 들어왔다. 오자마자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다. ''조선인이래. 앞으로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사람이야.'' ''아 그래? 알았어.'' 그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다시 회사를 평소처럼 다니다가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결국 휴직에 들어가게 되었고, 본가로 오게 되었다. 본가로 오고 나서 계속 집에 있다 보니, 그 조선인도 자주 보게 되었다. 보다 보니 사람이 참 성실하고 일도 잘했다. 또한 사람이 착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동생이 와서는 나한테 ''오빠, 나 저 사람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 나도 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서 살짝 떠봤다. 내 동생 좋아하냐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 예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동생이 밝고 힘차서 그런 게 좋았다고. 그래서 내가 둘을 연결해주었고, 1945년 8월 15일 그 둘은 결혼했다. 알고 보니 내 동생 부부 말고도 이렇게 조선인과 결혼한 우리 아이누들이 제법 있었다. 참, 차별받는 사람들끼리 서로 애틋함을 느꼈나??

1950~1960년대, 전쟁은 끝난 지 제법 되었지만 아직도....

전쟁은 끝나간지 제법 되어 간다. 이곳 삿포로는 마찬가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내 친구만 봐도 그런게, 내 친구가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하려고 하니까 그 집에서 아이누 족이랑 결혼하지 마라고 해서 결국 헤어졌다. 결정적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홋카이도토인보호법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우리는 토인이 아니고 아이누인이고, 똑같이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왜 아직까지 토인보호법으로 우리를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차별하려고 하는건지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홋카이도 100년 행사에는 아이누 왜 넣은거임?

1970년대, 우후죽순 개발되었지만 인식은 개선되지 않았다.

올림픽이 열린다고 내가 사는 삿포로에도 지하철도 들어오고 여러가지가 많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올림픽은 잘 치러졌다. 하지만 토인보호법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쩌다 혼슈에 가게 되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남은 아이누어 억양이 살짝 섞인 말을 구사하면 사람들은 참 벌레 보듯 본다. 심지어 나한테 부라쿠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차별은 없어져야 할텐데. 조상이 천민이었다고 신분제가 폐지된 지금 그 사람의 후손들은 천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일본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배격한다. 부라쿠민이든, 우리 아이누든, 저기 오키나와의 류큐인이든.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차별하는 이 사회는 어디서부터 꼬인걸까? 우리 옆옆동네인 아사히카와에서 폐지운동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문제는 우리 아이누 중에서도 이 토인보호법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아이누 보호를 위해 대체할 다른 법이 당장 없는 상황에서 저게 없어지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20년대를 겪었던 나로선 저 토인보호법이야 말로 없어져야 할 악법이라고 본다. 우리 문화, 우리의 혼을 말살시키려 한 악법, 이젠 지긋지긋하다. 몇십년째 지속되는 거냐.

1980~90년대, 우리를 옭아매던 토인보호법이 없어졌다. 하지만...
1983년 홋카이도 대학교 동물실험실에서 처음 아이누족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지 10년이 지났다. 우리를 옭아맸던 토인보호법이 드디어 없어졌다. 일본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아이누족 중 국회의원이 된 가야노 시게루가 이 악법을 없애주었다. 동시에 아이누 문화의 진흥 및 아이누 전통 등에 관한 지식의 보급 및 계발에 관한 법률(1997년(헤세이 9년 법률 제52호, 아이누 문화 진흥 법)은 만장일치로 국회에서 통과되어다. 거의 백년을 우리 문화를 없애려 했으니, 당연한 처사라고 본다. 나는 우리 아이누들의 문화가 오래오래 전파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무리겠지만 아이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 보기를 기대해 본다. 그게 우리의 혼이고, 정신이니까 . 다만 최근에 충격적인 기사를 봤다. 1995년에는 무려 10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거다.  대부분 아이누족이었고, 윌터를 포함한 소수민족과 조선 동학군 유골도 이곳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홋카이도 대학이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서 발굴해 모아둔 유골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이것에 대해 제대로 해명하고 있지 않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차별했던 역사를 숨길 셈인걸까.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