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04년 2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내가 6살이 되던 무렵, 옆나라 조선이 이제는 일본 땅이 되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기뻐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젠 일본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감정적 측면에서 기쁠 뿐이었고, 일본 땅이 넓어졌다고 하여 우리에게 실제로 돌아온 이득은 없었기에 우리는 얼마 안 가 평상시 그대로 일상이 찌들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일본이 영토를 넓혀나가는 것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시는 걸로 보였다. 서방권 국가들은 이미 영토가 많은데 일본만 참고 있을 수는 없다 뭐 그렇다고 하신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학업에 열중하여 어느덧 15살이 되었다. 지금 도쿄는 떠들썩한 것 같다. 내가 어릴 적 일본의 점령 하에 들어간 조선의 유학생들이 2월 내내 반자이(조선에서는 만세라고 한다고 했다)를 외치며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고 있댔나. 그래서 나는 진짜로 조선이 일본에서 벗어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께 여쭤보니 아니랜다. 그저 자신들의 염원을 표출하는 거란다.

밖에 나가보니 순사들이 다 해산시키고 소리지르고 하는 것 같던데, 실제로 독립된 것도 아닌데 저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학교에선 조선 문화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뒤쳐지고 가난했다고 배웠는데 그런 나라를 일본이 구제해주는데 왜 싫다고 하는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내 기억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이 터졌다. 내가 일본에서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지진이었다.

내가 사는 도쿄에서도 건물은 맥없이 무너졌고 목조주택가는 화염에 휩싸여 사람들이 불타죽었다.

지진 피해로 우리집도 성하지 못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무렵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풀어 일본에 해악이 가도록 저주했다는 것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그런 내용을 만들고 믿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심한 경우는 조선인들이 모두 일본열도를 영차영차해서 밀었다라는 정신나간 소문까지 돌았다. 

나는 이 소문을 단순한 정신병적인 프로파간다 일 뿐이라고 여겼지만 며칠 후 도쿄에 광란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소문을 믿는 이들이 조선인을 '박멸'하기 위해 나선 것. 

그 행위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일단 의심되는 자들에게 찾아가 "쥬고엔고짓센" "다이콘"등 발음이 어려운 단어를 물어보고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죽였다. 얼마나 잔혹한지 도호쿠에서 온 사람이나 류큐인, 중국인들도 피해를 입게 되었다.

남자들은 강물에 던진뒤 기어나오는 이는 도끼로 죽였으며 여자는 윤간하고 사타구니에 유리병을 꽂아 밟아 골반을 깨뜨려 죽였다. 스미다 강과 아라카와 강은 시신들로 인해 피로 물들었다. 

얼마나 미쳐돌아가는지 반조선 우익 간부까지 막아 나섰다. 천황의 신민을 함부로 죽이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라는 이유였나. 길거리 야쿠자까지도 조선인들을 도우는 판국까지 왔다. 또 소문에 의하면 이러한 소란을 타 사회운동가들도 모조리 끌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여튼 그 일이 있던 후 다이쇼 시대 막판인 1920년대 초중반에도 조선사람들의 독립무장운동은 계속 되었다. 매일 일본 간부 누가 죽고 누가 다치고 터지고 하는 것 같았다. 쇼와 시대가 되어서도 그리고 일본 정계 내에서도 군부 세력과 기존 세력 간 다툼이 크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죽하면 총리가 군장교에게 암살되었겠는가.

그렇게 군부 세력이 일본을 장악한 후 일본은 뭔가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내가 30살이 조금 넘을 때 중국군의 시비로 일본군이 실종돼서 그걸 이유삼아 일본이 중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대번에 일본에는 중국을 응징하자는 여론이 들끓었고 내 동생도 거기에 휩쓸려 기꺼이 참전했다.

떵떵거리며 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던 동생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종이 한장과 함께 뼛가루가 담긴 상자 하나가 왔다. 그렇게 하는 내 아래로 하나 뿐인 동생과 헤어졌다.

나는 국가에 불충성하는 비국민이 되는 건 원치 않았지만 과연 이 국가에 복종함이 나에게 최소한의 합당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수많은 전사자를 보며 그러려니 했고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행보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거란 것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몇년 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또 전쟁을 벌였고 그동안의 행보로써 당연히 치르리라 했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전쟁을 치르며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유골가루가 되어 돌아오는데 라디오에서는 오늘 일본이 무슨 무기를 개발했고 어디서 양키 몇명을 죽였는지 내용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944년부터 우리는 전쟁을 체감하게 되었다. 미국이 본토 공습에 나선 것. 하지만 민간인 거주지역에 떨어지는 일은 드물었고 우리는 경보가 울리면 방화대로 나와 숨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그나마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5년 3월 초, 도쿄 하늘에서 무수한 삐라가 내려왔다. 경찰은 그걸 주워보는 이들을 두들겨패서 끌고갔다.

나는 조용히 우리집 마당에 떨어진 삐라를 주워보인다.



"일본국민에 알림!"이라는 문구와 함께 3일 뒤 도쿄를 공습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미 지독한 소방훈련과 공습경보를 지겹도록 많이 경험했기에 그냥 발뻗고 잤다.

그리고 3일 뒤, 우리 옆동네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으로 그 일은 시작되었다. 미군이 이젠 민간인 거주지역에 공습을 시작한 것.

폭탄도 얼마나 지독한지 한번 떨어지면 그 사방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화염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다니는지 자동차보다도 빠르게 사람과 건물을 집어삼켜대고 있었고, 불을 끄려고 양동이를 들고 모였던 사람 50명 정도는 순식간에 불 속으로 사라졌다. 화재현장을 겨우 피하며 피하며 도망다닌 우리 가족은 강한 열기로 가까이만 가도 불이 붙어버리는 옷을 손으로 때려가며 세타가야로 도망쳤다. 피난 온 집 2층에서 본 도쿄쪽은 불지옥이었다. 하늘에서 용암같은걸 미군이 공중에서 부어대고 있었고, 니혼바시와 스미다강 주변은 빈틈없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 뒤 바닷가에는 삶겨져 죽은 시신이 가득했다. 퍼부어댄 폭탄으로 스미다강과 아라카와강이 열기로 인해 끓어올라 강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꼼짝없이 죽고 바닷가로 떠내려온 것이다. 그렇다, 20년 전 조선인들이 죽어가던 그곳이 시간이 흘러 일본인을 삶아죽인 강이 된 것이다. 현실에 침통했지만 어느정도 인과관계였음을 그 당시 일본인들은 알게 되었다. 다시 도쿄로 돌아온 우리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달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대 폭탄이 투하되고 나의 조부모는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유해도 물론 남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일본은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나는 천황에 실망하다 못해 허탈했다. 아마테라스 여신의 어쩌고 하면서 온갖 난리법석을 피우던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여왔던 천황이 인간선언을 하는 장면은 나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중 가장 참혹한 부분은 비겁하게도 일본국민이 지게 되었다. 천황을 조부모의 영정, 아니 희생된 일본인들 앞에 데려와 앉히면 과연 그는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왜 국민들이 그간의 전쟁을 몇몇이 한 몫 챙겨먹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음을 깨닫지 못했는가? 물론 한 몫 챙기려 했던 놈들이 쫓겨나고 망한 신세가 되었지만 더불어 어느 몫도 바라지 않은 일본인들도 똑같이 되지 않았는가? 물론 길거리에 나가보면 결사항전, 반란을 주장하며 대일본 만세를 외치는 정신나간 무리들이 있기는 있었다.

8천만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이것에 문제제기하지 못하고 묵인 하에 단결한 것은 정말로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본은 내가 기억하는 시점 이전인 일본열도에 갇힌 나라가 되었다. 이젠 조선도 일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은 패망한 가난한 국가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폐허였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미군들에겐 많은 아이들이 달라붙어 간식을 달라고 구걸한다. 자신들의 국가를 이렇게 굴복시켜놓은 대상인지도 모르고 참으로 순수한 것 같다.


그러던 중 이제 한국이 된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반사 효과로 일본에는 온갖 공장이 다시 재건되고 미군들이 돈을 써대기 시작했다. 

일명 '조선 특수'로 복구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은 또 '베트남전 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그 뒤 전쟁 전 거대했던 기업들이 미군정의 압력과 전후 가난에서 벗어나 다시 일본경제의 주역들이 되었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으로 두차례 경제특수을 경험한 일본은 이제 절망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이미지를 망칠대로 망친 일본이지만 쇼와 시대 중반을 지나 도쿄에서 올림픽도 치뤘다.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가는 신칸센도 올림픽과 함께 개통하며 이젠 일본이 복구되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는 게 차츰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쇼와 50년대 중반 나는 전쟁 후 잠깐이나마 경제에 기여하기 위해 다닌 직장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 희망을 가지며 은퇴했다.



 그리고 그 후 십년 간 일본은 내가 가진 기억 중 가장 잘살았고 가장 장및 빛이었다. 기업들은 세계를 호령했고 모든 나라가 일본을 부러워 했다. 우리 세대나 그 윗 세대는 패전의 아픔을 경제호황으로 조금 보상받는 듯 했다.



쇼와 막바지 일본의 풍경

나는 모은 돈으로 도쿄 외곽에 집 한채를 더 샀다. 일본의 땅값이 오르면 올랐지 내린적이 없었기에 한번 투자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후 수년 뒤 일본 전국의 부동산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는 그것을 쇼와 시대가 끝나기 직전에 팔았다. 그리고 헤이세이 시대까지 붙잡던 사람들은 모두 막대한 손해를 보았다. 기업이 흔들리고 은행이 도산하며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내가 부동산으로 축적해놓았던 돈이 많아서 다행이지만 우리 손주들도 직장을 제 때 구하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렇게 불황기가 도래하고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며 주변 분위기도 흉흉해졌다.

경제가 안좋아지니 사람들까지 흉악해지는지 꽤 자주 반한/전쟁옹호 시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 배가 곤궁해지면 정신도 곤궁해진다더니 헤이세이 시대가 되자 "전쟁하는 일본"을 찬양하는 무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릴 적 핍박을 받던 일본제국 치하 조선인들의 기억이 나에게 있었기에 차마 저 시위를 옹호할 수가 없다. 자기들이 뭘 안다고 저러는지 전쟁을 경험한 세대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지만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내가 살아있을때까지의 일본은 패전 이후 크고 강하게 되었지만, 21세기, 헤이세이 시대 이후의 일본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쇼와 시대와 그 이전 시대 일본인들이 바라던 21세기의 일본이 아니게 된 것은 확실했다. 힘들고 어두운 오늘의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다소 시덥잖고 무례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써 당신들이 우리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또한 오늘날의 번영, 그리고 미래에 이어져야할 일본과 세계의 번영은 20세기의 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일본이 헤이세이 시대의 상실감을 상쇄할 수 있는 일본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기를 기대해 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2007년 12월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