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시간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 움직였다.

또각, 또각. 하이힐의 굽소리가 산산조각난 땅 위로 울려 퍼졌다.

시간의 감시자 오로 크로니는 싸늘한 눈길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강자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스럽구나."


크로니가 손가락을 튕기자,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몸을 숨겼던 누아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진 안경을 품에 넣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동맹을 맺은 미스의 일원과 아이리스는 계획을 눈치챈 카운슬의 기습에 항전하느라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카운슬의 모두가 규격 외의 존재라는 것은 상정하고 있었지만, 실체는 누아르의 상정을 초월했다.

그들은 전략은 물론, 논리조차 통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맞은편, 매그니는 머리를 다친 채 기절한 리지스와 팔이 부러진 악셀을 간호하고 있었다.

특히 리지스는 물을 투여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위험해질 중상이었다.


"누아르, 방법은... 정말 없어?"


매그니가 물었다.


"...안타깝게도. 당장 떠오르질 않는군. 하다못해 아멜리아의 지원이라도 있었다면 86가지 정도의 방법이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로선 무리다."


"여전히 통신은 안 돼?"


누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은 저런 괴물을 셋이나 상대하고 있다. 사신이 붙어있으니 전력은 비등할지라도, 이쪽을 도울 여력은 없겠지."


악셀은 분통함에 으르렁거리며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씨발...! 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얘기하는 거야!"


"악셀..."


"템퍼스의 지장이잖아. 여기서 제일 머리 잘 쓰는 건 너 뿐이잖아! 어떻게든 생각하라고!"


"악셀!"


매그니가 악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악셀은 이를 뿌득 갈며 고개를 떨구었다.

곧, 격동하던 악셀의 어깨에서 떨림이 잦아들었다.


"말이... 심했어. 미안."


느와르는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그 말 대로다. ...미안하다."


숙연해진 잔해 너머로, 크로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전회의는 끝났나? 그만 숨고 나오지 그래. JP 침공도 남아있는데, 시간 낭비는 질색이거든."


충격에 빠진 느와르는 눈을 부릅뜨고, 크로니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JP 침공이라고...? 설마, 오메가알파가 있는 한 JP의 포탈은 열 수 없을 텐데?"


느와르는 동료들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EN의 중재자 오메가알파는 기본적으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말 그대로 중재자이기 때문에.

때문에 미스와 템퍼스를 향한 직접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일절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파괴 행위가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스와 템퍼스, 개개인에 대한 공격이라면 개입하지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세계가 파괴되는 행위가 나타난다면, 오메가알파는 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등장할 것이다.


애당초 이 계획은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막강한 카운슬을 처치할 수는 없더라도, 한 명 정도라면 오메가알파가 등장하는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는 자신감 아래, 오로 크로니를 유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순간까지 오메가알파는 등장하지 않았다.

조건이 더 있는 것인지 생각하고 계획할 틈도 없이, 템퍼스는 당해버리고 만 것이다.


문득, 느와르는 생각했다.

조건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면.

조건은 이미 충족됐는데,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전제에, 크로니가 말한 'JP 침공'이 가능하다는 조건을 덧붙인다면.


누아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먼지 덮인 살갗 위로 피가 응어리지며 흘러내렸다.


"오메가알파를... 먼저 쳤군."


잔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째깍이는 초침소리와 함께 크로니가 빙긋 웃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빙고."


시계침을 닮은 검이 느와르를 향해 찔러 내려왔다.

매그니는 긴급히 코트의 주먹을 내뻗어 검을 붙잡고, 다른 팔로 느와르를 당겨 리지스, 악셀과 함께 감쌌다.

크로니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매그니를 바라보곤, 붙잡힌 검을 힘주어 휘둘렀다.

갈기갈기 찢어진 채, 주먹은 천조각이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다들 한심하지만, 느와르.  당신은 역시 달라. 어때? 카운슬에 들어와보는 건. 마침 한 자리가 남아있는데."


느와르는 피식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 오로 크로니. 그 자리는 영구결번이잖나."


"...역시 아까운 인재야."


"...JP침공은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뭘. 죽인다거나 그런 살벌한 얘기는 아니야. 그냥, 지배하고 싶을 뿐이지."


"지배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오로 크로니. 언어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른 JP를 침공하고 지배해서 너희들이 얻는 이득은 없을 텐데?"


"맞아. 네 말대로 JP를 침공해서 우리가 얻는 이득은 없지. 오히려 관리해야 할 범위가 넓어지고, 귀찮을 거야. 음, 아니. 정신 사나운 걸 좋아하는 벨즈한테는 이득이 있겠네."


"그럼 대체 무엇때문에...!"


"본능이야."


적막 속에서 초침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화신이자 관리자로서의 본능이야. 모든 자연을, 모든 시간을, 모든 문명을, 그 모든 것에서 비롯된 혼돈을 지배하고 관리하고 싶은 본능이 그렇게 이끌고 있어."


크로니는 나지막한 한숨을 흘렸다.


"우리라고 뭐 좋아서 이러겠어? 숨  쉬는 게 좋아서 숨 쉬는 건 아니잖아? 생명이라면 응당 들이마시고 내뱉어야 하는 게 숨인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화신이라면... 모든 것을 지배해야하는 거야."


크로니의 몸에서 다시 한 번 투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해해주길 바라. 그 뒤에 숨은 겁쟁이 세 명은 그렇다치고, 느와르 당신이라면 분명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아니."


느와르는 크로니를 노려보았다.


"그건 핑계다."


"...핑계?"


"그게 본능이라면 이런 일은 진작에 일어났겠지. 말 그대로, 본능은 참을 수 없는 거니까."


느와르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 다시 썼다. 깨졌지만, 안경을 쓰자 마음이 다소 편안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제까지 그런 징조조차 보이지 않았지. 즉,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그래. 시기적으로 봤을 때..."


크로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


"...공간의 대변인, 츠쿠모 사나가 떠난 이후로군."


순간, 크로니의 칼날이 매그니가 대응할 틈도 없이,  느와르의 목을 향해 찔러 들러왔다.

느와르의 목에 칼침이 닿기 전, 매그니의 코트 뒤에서 체인에 감긴, 주황색 건틀렛이 칼날을 붙잡았다.

체인에 감긴 칼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겁쟁이 등장이다, 시계녀!"


"...똥개 주제에 말이 많구나."


크로니는 두번째 칼을 꺼내 들어, 악셀에게 내질렀다. 그러나 두번째 칼 역시, 매그니의 주먹에 가로막혔다.


"아무리 개새끼여도 우리집 개새끼니까 신경 끄십쇼!"


"뭐! 누가 개새끼야!"


"여기 개새끼가 너 말고 더 있어?"


매그니와 악셀은 기합과 함께 크로니의 칼을 밀쳐냈다.


크로니는 뒤로 물러나 이를 갈며,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크로니의 공격은 이전과 달리 섬세하지 못했다.

무엇때문에 흥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1차원 적인 공격이 이어진다면 해볼만한 승부다. 매그니와 악셀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느와르는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추리가 정확했나보군. 오로 크로니."


"닥쳐."


"애석하게도 입을 다물면 템퍼스에서 나는 그냥 시체인지라."


"닥치라고!"


돌진하는 크로니의 양 팔을, 악셀의 체인과 매그니의 코트가 붙들었다.

무지막지한 힘이었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이 막무가내로 힘을 쓰는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었다.


"무슨 이유 말인가. 아. 츠쿠모 사나가 떠나고, 그 '공간'의 상실감에 너희들이 폭주했다는 이유 말인가? 그것 참."


느와르는 피식 웃었다.


"사나가 슬퍼하겠군."


"..."


크로니가 고개를 떨궜다. 미동조차 없이, 악셀과 매그니에게 붙들렸던 팔이 어깨와 함께 축 늘어졌다.


느와르는 긴장을 놓치지 않고 침을 삼켰다.

츠쿠모 사나. 몇 달 전, 이별을 고하고 모습을 감춘 카운슬의 공간의 대변인.

가장 엉뚱했어도, 그만큼 온화했던 그녀가 사라진 시점부터, 카운슬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사나가 사라진 직후 카운슬의 내란이 시작됐다면, 그것은 사나가 사라졌기 때문에 내란이 일어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자연, 문명, 시간, 그것에서 비롯된 혼돈. 그 모든 것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공간이 사라진 지금, 크로니의 말대로 그들은 원초적인 본능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다지 억측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것이 정답이라면 사라진 그녀의 이름은 카운슬에게 있어 지금의 내란의 근거를 뒤흔들 역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역으로 근거삼아 협상의 테이블 위로 올리는 것이 느와르의 급조한 계획이었다.


잠잠해진 크로니를 보며 느와르는 계획이 성공했다고 판단했다.


"...이제 이야기할 생각이 좀 들었나, 오로 크로니."


크로니에게서 반응은 없었다.

악셀과 매그니도 긴장하며, 상태를 관망했다.


"...오로 크로니. 역린을 건드린 것은 사과하마. 하지만 알았겠지. 이 내란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다. 동료와 이별한 것은 유감이지만, 그래도 떠난 동료의 유지를 망치는 건..."


푹. 느와르는 천천히, 복부에 무언가가 스며드는 기분을 느꼈다.

내려다보자 피로 물든 크로니의 칼이 자신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느와르는 다시 크로니를 바라보았다.

악셀은 고쳤던 팔이 다시 부러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매그니는 다리가 짓이겨져 있었다.


"마음이 변했어."


"오로... 크로니..."


크로니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싸늘한 표정으로 칼을 뽑았다.


"JP를, 파괴하겠어.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아. 모조리... 모조리 이 세상에서 '졸업'시켜버리겠어."


느와르는 바닥으로 무너져 쓰러졌다.

느와르는 크로니의 말을 되뇌었다. 슬픔. 상실감. 절망감.

그렇구나. 카운슬의 고독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깊고, 어두웠구나.

계획은 실패했다.

희미해지는 시선 속에서 크로니가 다시 한 번 칼을 치켜드는 것이 보였다.

느와르는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카앙! 

쇳소리. 마찰음. 느와르는 힘겹게 다시 눈을 떴다.

크로니의 칼이 무언가에 휘감긴 채, 공중에 멈춰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크로니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똥개..."


그 틈을 타, 무언가 느와르의 몸을 감싸 옮겼다.

포근함 속에서, 복부에 차가운 무언가가 들이부어졌다.

매그니였다.

너덜너덜한 다리는 공중에 떠있었고, 넝마가 된 코트의 일부로 바닥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매그니... 괜찮...나..."


"괜찮을 리가 있나. 존나 아파. 그래도 당신만큼은 아니니 입 다물고 있어. 남은 약품 다 쏟아부었지만 리지스만큼이나 댁도 위험해."


매그니는 코트로 리지스도 감싸 안고, 크로니로부터 멀어졌다.


"매그니... 악셀은..."


매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멍청한 놈이야."


"안돼... 안돼, 매그니... 돌아가줘... 악셀을 이대로 두고 갈 순..."


매그니는 이를 뿌득 갈았다.


-


크로니는 이해할 수 없었다.

힘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자신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다시 이성을 찾은 지금, 자신이 이런 하등한 것에 붙잡힐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크로니는 몸을 휘감은 체인을 쉽게 벗겨낼 수 없었다.


"...똥개, 힘을 감추고 있었나?"


악셀은 크게 비웃었다.


"하! 네가 약해진 거겠지. 난 처음부터 전력투구였어."


"조금은 다시 보게 되는걸."


"안타깝게도 지금 다시 봐도 늦었어, 망할 시계녀야."


"물론 똥개에서 품종견 정도로 봐주는 정도지만."


다소 자존심 상했지만, 크로니는 힘을 집중하고, 단숨에 해방했다.

체인은 나뭇가지처럼 쉽게 부서지고, 터져 쇳가루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렸다.

악셀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 이런 괴물을 상대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미쳤어."


"그래, 미쳤지. 특히 너는. 넷이 달려들었어도 박살났는데, 혼자 나를 상대하겠다고?"


악셀은 부러진 팔을 강제로 끼워 맞추고, 체인을 감싸 고정했다.

금방이라도 이성의 끈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전신에 퍼졌지만, 이를 악물고 오직 근성으로 그 끈을 붙잡았다.


"난 말이야. 느와르 아저씨처럼 머리가 좋질 못해서 본능이니, 역린이니, 뭐 전제니 그딴 거 몰라. JP침공? 하든지 말든지. 당장 내가 뒤지겠는데 씨발 알게 뭐야."


"편하게 사네."


"맞아, 정말 편하게 살지. 그런데도 내가 용납 못하는 게 있어. 네가 JP를 침공하든, 거기서 다 패고 부수고 다니든, 그건 상관 없는데 말이야."


악셀은 건틀렛을 고쳐 쥐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아는 사람이 엄청 슬퍼할 거 같거든. 난 그게 너무 싫어. 존나 싫어. 개 씨발, 절대, 그 사람이 슬픔에 빠지는 건 내가 죽는 것보다도 싫어."


"..."


'사나가 슬퍼하겠군.'

크로니는 머리를 흔들어 느와르가 했던 말을 지웠다.


"...아. 그래. 그래서, 막아보겠다고?"


악셀은 씨익 웃었다.


"아니. 네 말대로 널 막는 건 나 혼자선 무리겠지."


-


매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악셀 그 새끼, 자기도 팔 하나 뭉개진 주제에, 다리 박살 나서 입도 뻥긋 못하고 있던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남자는 무적이니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테니 먼저 도망가라고. 가서... 오메가알파를 찾아서 이 사태를 멈춰달라고."


느와르는 매그니를 책망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이런...!"


"그래. 말도 안 돼. 씨발,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 새끼가... 남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같은 남자로서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냐고!"


-


"근데 너한테서 노도카씨를 지키는 건 나 혼자서 충분해. 아니."


악셀은 양손의 건틀렛을 쾅쾅 치며, 자세를 잡았다. 


"나니까 가능하다."







-

번견(番犬)은 집 지키는 개라는 의미임



그냥 악셀의 순애로 소설 써보고 싶었음

제물이 된 크로니 악역행 ㅈㅅㅈㅅ

걍 삘받고 써서 맛춤뻡이랑 개연성 개발새발임 ㅅㄱ람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