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채널을 찾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미 만들어진줄 처음 알았네요..


그래서 좋아하실만한 글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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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대체로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많으면 피곤하고 반대 의견을 내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갈등은 품고 삭히고 드러냐지 않아야 그릇이 크다고 여긴다. 자기생각을 이야기하는 건 가벼운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논쟁수업을 할 때 가장 힘든 부분이 이런 모든 편견을 깨는 일이다.


집단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선 자신만의 의견을 가져도 되는지 의심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부딪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의견보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의견이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렇게 생긴 자신만의 의견을 표현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으로부터 논쟁 수업은 시작한다.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라 사회 발전의 긍정적인 에너지로서 변증법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도출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의 사회에서 의견끼리 부딪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지혜롭게 해결하면 된다고 가르쳐야 한다.


...(중략)


우리와 달리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인들에게 논쟁은 학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스리에서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가 격렬한 논쟁을 통해 수사학의 정체성을 탐색해 들어갔고, 소크라테스는 '산파법'이라고 불리는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했다..


정당은 격렬한 토론 속에서 정책을 탄생시켰고, 오랜 기간 정치 토론을 통해 후보의 경쟁력을 감별해왔다. 각종 사건의 진위를 가리는 법정 공방은 기원전 5세기부터 있어왔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우리식의 정의구현 방법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싸움이나 논쟁이 생산적일 수 있는 이유는 '만남'에 있다.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어느 부분이 다른지는 서로 견주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논쟁은 싸움 같지만 사실은 상호이해의 장이요, 청중들에게는 즐거움과 교육의 장이다.


서로 부딪치는 지점을 논쟁 용어로는 '접점(stasis)'이라고 하는데 '상호 갈등 해소를 위한 개념적 장소' 쯤으로 의역될 수 있다.


다른 의견과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메아리 방에서 살 듯 자신의 소리만 듣고 살 공산이 크다. 아니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 만나 동종교배 하듯 서로 동의하며 기존의 입장을 기형적으로 견고하게 다질지 모른다.


의견 양극화의 골은 깊어만 갈 것이다. 만약 그룹에 속해 있으면 의견 강화의 경향성이 더욱 강해진다. [넛지](Nudge)의 저자로 잘 알려진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은 이런 현상을 '동조', '쏠림현상', '집단편향성'이라고 불렀다.


'집단편향성'은 토론의 과정을 거친 후 의견이 강화되는 것을 뜻하는 반면, '쏠림현상'이란 토론과정이 없이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남을 설득하거나 스스로 설득당하는 일은 요원하다.







우리사회는 여러 가지 종류의 치열함을 안고 살지만, 치열한 논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건국을 둘러싼 국가정체성의 문제도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논쟁이 뜨겁지 않는 편인다. 상호 이견과 반목은 있으나 서로 맞부딪쳐 조목조목 논쟁하려하지 않는다.


상대편이 들으려 하지 않으니 굳이 설득하려 힘쓰지도 않는다. 각종 정책 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찬•반 의견이 제시되는 것 같지만 논쟁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찬성하는 사람은 찬성의 이유를 나열하고,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의 이유를 나열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찬성하는 사람이 반대하는 사람의 이유에 답하는 형식이 되어야 제대로 된 논쟁이고 '대화'인데, 그런 방식으로 논쟁하면 왠지 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논쟁 교육을 받은 적이 별로 없으니 더욱 그리 생각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토론에 서툰 것은 대개 아는 바다. 그러나 토론 부재와 논쟁 불능 사회가 가져오는 부작용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John Stewart Mill, 1806~1873)은 "사회 자체가 횡포를 부린다고 할 때, 다시 말해 사회가 개별 구성원에게 집단적으로 횡포를 부린다고 할 때, 그것은 정치적 권력기구의 손을 빌린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정치 권력자의 횡포를 방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그런 통설과 다른 생각과 습관을 가진 이견 제시자(dissident)에게 사회가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면서 통설을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대비를 해야한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 다른 의견이 묵살되는 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 사회에서 소수의 권익도, 다수를 위한 합리적인 정책도 보장되기 어렵다.






의견 양극화를 부추기는 주범중 하나는 인터넷이 주도하는 미디어의 발달이다.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대중매체 시대에는 수용자가 일방적으로 메시지에 노출되는 일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주를 이루었다.


편집권을 가진 쪽에서 콘텐츠를 결정하면 수용자가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수용자가 직접 콘텐츠를 결정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정보를 선별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인터넷에는 사용자들이 만들어서 올린 UCC(User created contents)와 그들이 올린 갖가지 상품평이 시장을 좌우한다.


킨(Andrew Keen)과 같은 학자는 이 현상을 '아마추어 컬트'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아무튼 '오피니언 리더' 대신 '파워 블로거', '파워 트위터리안'과 같은 '영향력자(influencer, 인플루언서)'들이 활약하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맞춤형으로 구해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상품 뿐 아니라 의견에도 맞춤형 소비 시대가 열렸다.


그들은 소수의 여론 주도자에 의해 끌려 다니지 않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고공명하여 함께 여론을 주도해 나간다.



사실 다양한 정보에 노출되면 오히려 사람들이 균형 잡힌 사고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초기의 기대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정보과잉 시대에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기존의 의견을 강화하는 경향이 각종 연구결과에서 발견되었다. 정보의 과부화에 따른 정보의 불균형, 그리고 그에 따른 정보의 편식이 가져온 '의견 양극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모든 소통이 그러하듯 논쟁의 출발점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논리에서 허점을 찾아내고 상대방이 납득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논쟁의 규칙이다. 그러자면 어울리기 싫어도 생각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의 입장을 들어야한다.


선스타인은 "'나는 너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집단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강화된 자기 의견 속에 안주한다"라고 했다.


반대의견을 내고 기꺼이 논쟁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이유이다. '침묵의 나선'보다 더 무서운 '의견의 나선'에는 논쟁은 없고 자기합리화와 시니컬한 상호 비방만 있다. 이들을 흔들 생산적 논쟁이 더 나와야 한다....


의견의 묘미는 변한다는데 있다. 토론과 설득이 주효한 민주사회는 의견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이싿.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태도변용이론'이라는 멋진 이름으로 각종 설득 현상을 연구한다.


의견은 형성되고 변화하며 소멸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태도와 행동도 변할 수 있다. 사회변화와 발전이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논쟁이 활발한 사회는 의견 스펙트럼의 중간층이 두터운 사회이다. 의견 양극화와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 곳에서는 집단 내 공유되지 않은 정보가 많아지고 소수의 침묵이 이어진다.


사람들의 의견이 잘 드러나지 않는 지식위증(knowledge falsification) 사회가 되기 쉽다. 그런 곳에서는 의견의 양극단만 보이고 중간이 보이지 않는다.


중간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극단의 결정이 횡행하게 된다. 한국사회는 과연 어떤가.


-철학과 현실 140-147,  "생산적 논쟁이 의견의 양극화를 해소 한다" 박성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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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채널이 건전하고 생산적인 논쟁과 토론의 장이 되어갔으면 하는 바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