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갤도서관 채널

지민은 입고 들어온 옷은 구석에 개어두고 알몸으로 솜이불 한 장만 둘둘 싸맨 채였다. 외출복에 다른 사람의, 그것도 아저씨 수인의 쿰쿰한 냄새가 배면 안 된다는 이상한 고집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맛본 짐승 같은 섹스로 기운이 쏙 빠진 탓인지, 앞으로 떨어뜨린 고개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휙 고꾸라질 듯 연거푸 꾸벅거렸다.


그런데 마악 선잠이 들려던 그때, 지민은 앞에서 휙 날아온 잠옷 바지에 얼굴을 얻어맞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야, 니가 털 달린 짐승이냐? 생닭이지? 너 같이 맨들맨들한 애들이 떡 치고 옷 안 입으면 감기 걸려 인마.”


“이, 이게 뭐예요…? 무슨 사이즈야 이게?”


“허리? 그게 40이었나, 38이었나? 아무튼 일단 그거라도 입고 있어 봐, 더 작은 거 있으면 찾아줄라니까. 그래도 그게 사이즈가 크니까 부랄이 깔깔해서, 그것만한 게 없을걸?”


“말을 해도 진짜….”


지민은 눈살을 찌푸린 채 구시렁거리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꼼지락거리며 바지를 입었다. 거의 힙합바지 수준의 오버핏이라 허리끈을 한계까지 꽉 조이고도 여전히 바지가 훌렁훌렁 내려갔다. 그나마 골반에 겨우 걸친 채로 한숨을 푹 내쉬려니, 이번에는 웃옷이 휙 날아왔다.


이번에는 얼굴을 얻어맞기 직전에 가까스로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직후 옷에서 훅 끼쳐온 개 수인 특유의 털 누린내에, 지민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로 내뱉었다.


“아우, 냄새…! 이거 빨아놓은 거 맞아요?”


“응? 그거 빨았을걸? 아마?”


세탁했으면 세탁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아마’는 또 뭐란 말인가? 지민은 우거지상을 한 채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었다. 그나마 조금 전에 익숙해진 냄새라서 그런지 코가 무뎌서, 비위가 상할 정도는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놓고 싫어하는 것치고는 성환이 던져준 촌스러운 아저씨 조끼까지 살뜰하게 주섬주섬 주워 입은 그때였다. 겨우 숨을 돌리려는데 느닷없이 벨소리가 울렸다.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인가 싶어 흠칫할 법도 하건만, 지민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기도 했거니와, 다 늙어빠진 아저씨답게 트로트를 벨소리로 해놓은 탓이었다.


성환은 정신 사납게 서랍장을 뒤적이다 말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어, 여보쇼?”


-“왜 전화했어요? 그새 여러통 하셨던데.”


“아~ 정씨?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어?”


-“일이 있어서요. 왜 전화했냐니까요?”


“아~ 별건 아니고, 내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랬지. 그, 저기 뭐야, 내 옆집에 사는 세입자 알어?”


-“옆집이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아요. 몇호인데?”


“몇호…? 그건 나도 모르지? 내 집도 아닌데.”


-“그럼 아저씨 호수가 몇인데?”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무책임하게 중얼거린 성환은 곧바로 지민을 돌아보며 책임을 떠넘겼다.


“야, 지민아. 내가 스피커폰으로 할라니까, 니가 좀 얘기해봐 봐. 오케이?”


“네? 누군데요? 누구랑 얘기를 해요?”


“너 귀 좀 파야 쓰겄다. 누구긴 누구야, 건물주지.”


성환은 핀잔과 함께 대뜸 핸드폰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만큼 당황할 법도 했지만, 지민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핸드폰을 덥석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대놓고 다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 저 지민이에요. 유지민이요. 107호인데 기억하시죠?”


-“지민? 아~ 유지민? 그 대학생, 맞지? 근데 왜 학생이 박씨 아저씨랑 같이 있어?”


“그게요, 제가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창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그 아저씨가 갑자기 저를….”


그때였다. 잡종견 수인 특유의 굼뜬 외모와는 달리, 성환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곤 잽싸게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그러더니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허허 웃어넘겼다.


“에이 뭐여, 옆집 사는 게 맞았구먼~? 난 또 좀도둑이라도 들어왔나 해서, 그래서 잠~깐 잡아 두고 있었지.”


-“하이고, 참 오지랖도 넓지. 그거 알아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맞어, 내가 경찰이잖어. 민중의 작대기가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 근데 이제 다 됐네, 다 됐어. 상황 끝이니까 끊는다? 그 뭐야, 메리 크리스마스?”


제 할 말만 일방적으로 늘어놓은 뒤, 성환은 냅다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 뒤에야 숨을 돌리며 지민을 돌아보니, 눈꼬리가 축 늘어진 두 눈이 불만으로 가득했다. 언뜻 봐서는 꼭 심통이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무고하게 잡아온 사람은 일단 달래는 게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성환은 따갑게 쏟아져 오는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슬며시 냉장고로 향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문을 열어보니, 바나나우유가 딱 하나 남아있었다. 목욕하고 나서 마시려 아껴둔 우유였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차라리 지민에게 주면서 달래는 게 맞지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환은 한숨과 함께 바나나우유를 꺼냈다. 그러곤 얼굴에 비굴한 미소를 띤 채 지민에게 다가가, 우유를 불쑥 내밀었다.


“…뭐예요?”


“뭐긴 뭐야, 빠나나 우유지.”


“…아저씨 거는요?”


“허이구, 어른 생각도 할 줄 알고, 기특하네. 난 맥주나 더 마실라니까, 이건 니 먹어라. 요즘 애들도 빠나나 우유는 좋아하지?”


평소 같았으면 본체만체했겠지만, 지금처럼 수분이 다 빠진 몸에는 그 시원하고 달콤한 바나나 우유가 마시자마자 몸에 스며들 것만 같았다. 자존심과 우유 사이에서 한참을 줄타기하던 지민은 기나긴 고민 끝에 우유를 골랐다.


“빨대는 없어요?”


“에이 빨대는 무슨. 이건 이렇게 먹는거여. 봐봐, 아저씨가 해줄라니까.”


성환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따봉부터 내밀었다. 그러더니 뭉툭한 엄지손톱으로 구멍을 뻥 내버리곤, 손가락을 쪽 빨며 우유를 내밀었다.


“자, 됐지? 마셔봐 얼른.”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꾹 참았다. 그는 마지못해 우유를 받아든 뒤, 깨작깨작 홀짝였다.


그러는 사이 성환은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화를 받느라 달랑 팬티 한 장 걸친 채였다. 워낙 오래된 드로즈라 그런지 실밥이 거의 뜯어져 있었고, 고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지나 불알, 무엇 하나 제대로 잡아주지도 못하고 축 늘어진 윤곽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그놈의 성적 지향 때문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한참을 힐끔거리던 지민은 결국은 고개를 돌려버린 채 바나나 우유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한편 성환은 그런 지민을 마치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코앞에서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뇌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툭 내뱉었다.


“근데 이상하네? 열쇠 잊어버린 건 그렇다 치고, 지갑이랑 핸드폰까지 싹 다 잃어버린겨?”


“잃어버린 거 아니거든요? 도둑맞은 거지.”


“뭐…? 에이, 니가 잃어버려놓고 남부터 의심하면 쓰나. 기운 차려 인마, 누가 찾아줄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러냐?”


“제가 장담하겠는데 절대 그럴 일 없을걸요?”


“뭐여…? 어린놈이 지금까지 사기만 당하고 살았나? 너 말이 좀 이상하다? 그걸 니가 어떻게 확신해?”


“…알 거 없잖아요. 어쨌든 그거 절대 못 돌려받아요, 절대로.”


둔해 보이는 외모일지언정 촉까지 둔한 것은 아니었다. 성환은 가만히 그 말을 곱씹어보더니, 이내 떠보듯 툭 내뱉었다.


“지민아, 너 설마 퍽치기 당했냐?”


“…네…?”


“아니지, 술 마신 건 아니니까 그건 아닐 거고. 그럼 소매치기? 소매치기구만?”


“…몰라요.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얼씨구? 이놈 또 사람 복장 뒤집어지게 하네. 뭔데? 자세히 말을 좀 해봐봐, 말을 해야 알지!”


그러잖아도 입맛이 없는데 재촉까지 들으니 그나마 있던 입맛도 뚝 떨어졌다. 지민은 마시던 바나나 우유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조금 전에 성환이 뚫어놓은 껍데기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냥…, 나와보니까 누가 다 훔쳐가서….”


“나와? 어디서? 만화방 같은 데? 아님 뭐, pc방?”


“아뇨. 그런 덴 아니고….”


“그럼 어딘데? 말을 해야 가서 cctv든 뭐든 돌려볼 거 아녀?”


자신이 경찰이라고 주장하던 게 마냥 헛소리는 아니었는지, 성환은 벌써부터 바지를 챙겨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민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허둥지둥 손사래를 쳤다.


“아, 안 돼요! 거긴 쪽팔려서 절대, 다신 못 간단 말이에요!”


“야, 지민아.”


“…네?”


“아저씨가 경찰이여, 경찰. 지금 피해자가 와서 누가 자기 물건을 훔쳐 갔다는데, 내가 그 말 듣고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갈 것 같냐?”


“…그럴 수도 있잖아요.”


“어, 경찰서 가보면 그런 놈들 많지? 근데 난 아니여. 내가 여기 근방 cctv 싹 다 뒤져서 니 동선 따고 범인 찾으러 갈까? 아님 그냥 얌전히 같이 갈래? 어떡할래?”


말려본 것이 무색하게 성환은 벌써 웃옷에 점퍼까지 주섬주섬 챙겨입은 지 오래였다. 다 차려입은 개 수인이 특유의 떡대로 으름장을 늘어놓으니, 압박감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지민의 고집을 꺾은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성환이라면 정말로 도둑놈을 잡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듬직한 신뢰감이었다.


그것을 느낀 직후, 지민은 망설임 끝에 비로소 입을 우물거리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모텔이요.”


“…뭐여?”


“모텔이요, 모텔…! 거기서 씻고 나와보니까 다 털려있었다고요. 지갑이랑 핸드폰도 아깝긴 한데, 점퍼가 되게 좋은 거였는데….”


“…가만있어봐,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남자랑 원나잇 할라고 방을 잡았는데, 같이 떡치려던 놈이 니 물건 다 갖고 도망갔다, 이거 아니여?”


“…왜 남자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럴 거 같으니까는.”


“…….”


“근데 왜 너는 첨부터 말을 안 했냐? 내가 경찰이라는데? 설마 사기꾼처럼 보였냐?”


“경찰은 둘째치고 남자랑 같이 자려다가 그렇게 됐다는 걸 옆집 아저씨한테 어떻게 말해요…! 그러다 주변에서 다 알면 어쩌려고….”


“…듣고 보니까 그렇긴 하네. 근데 왜 지금은 또 말을 해줄까?”


“그야….”


“아 맞어. 우리 볼 거 다 봤지?”


지민은 수치스러운 마음에 차마 맞장구치지는 못하고 어느새 발개진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성환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곱씹어보더니, 창피함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대뜸 말을 뱉었다.


“야, 애기야. 얼른 일나라.”


“에? 지금 저더러 뭐라고…?”


“아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얼른 일어나. 지금부터 그 새끼 잡으러 간다.”


“네에!? 지금 바로요!?”


“니가 모르나 본데, 수사는 속도가 생명이여. 영화나 드라마 보면 나오잖어, 골든타임. 그거 놓치면 끝이라니까? 그러니까 일어나 얼른.”


“잠깐만요, 저 지금 다리에 힘도 안 들어가는…!”


“하이고, 사내자식이 고작 몇 판 했다고 다리가 풀려? 가만 있어봐 인마.”


성환은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지민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쑥 넣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엉덩이를 받친 채로 제 가슴팍까지 번쩍 안아들었다. 


“아, 아저씨! 잠깐만요…! 위치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성환은 대답도 없이 탁자에 놓아둔 차 키를 집어다 지민의 신발 속에 던져넣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꿈치 부분을 입에 물고,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