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어. 오빠, 이번에 재화를 얻어내면 반드시 도우러 달려갈께. 난 여전히 오빠를...]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레이첼은 황급히 펜을 내려놓았다.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편지를 숨길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가슴의 앞섶을 풀고 편지를 몇 번 더 접어 대충 밀어넣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사내는 말없이 싱글거렸다. 탐색하는듯한 눈빛을 참지 못한 레이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밤에 여성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무슨 무례한 짓인가요? 지휘관."


"노크를 했지 않소? 아무 반응이 없길래 나와 계약을 포기하고 훌쩍 가버린 건 아닌가 걱정했소만."


"... 제가 말도 없이 가버릴리가 없잖아요."


레이첼은 남자를 올려보았다. 서밋 아레나의 핵과금러로 알려진 지휘관이다. 찢어진 뱀 같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계약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각성자들에게 재화를 아끼지 않고 퍼준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계약은 내일 다시 협상하기로 했잖아요."


"그 꼬질꼬질하고 꽁꽁 싸맨 옷이 영 거슬려서 말이지. 레이첼 양은 어디 이름 모를 시골 출신이라고 들었소."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상관이 있지. 나는 강함과 아름다움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이오. 앞으로 내 사람이 될 수 도 있는 여성에게 그런 옷과 머리는 어울리지 않소."


"......"


지휘관이 손가락을 탁 튀겼다. 그러자 드레스 한 벌과 이런저런 도구들을 갖춘 하녀들이 나타났다.


"이건 차후 원만한 계약을 위한 선물... 아니, 성의니까 받아주시오."


"아니..."


"거절하면 계약은 포기하는 걸로 간주하겠소."


레이첼은 말문이 탁 막혔다. 그녀라고 예쁜 옷을 입고 꾸미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였다. 그 나이대 소녀들이 다 그렇듯.


지휘관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흐음, 그럼 나는 나가있도록 하지. 다들 잘 부탁하오. 귀중한 손님이니까."




***




"이... 이게 나야?"


레이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조명에 탐스러운 금발이 반짝였다.


"내, 내가 이렇게 피부가 좋았나?"


과연 소문난 트럭이라 그런지, 대저택을 보유한 부유한 지휘관이라 그런건지 하녀들의 메이크 업 실력은 대단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볼을 만져보았다. 도자기 같이 하얗고 매끄럽다. 작고 예쁜 얼굴에 사슴같은 눈망울, 잘록한 허리와 보기 좋게 부푼 가슴. 새하얀 드레스에 포인트를 준 귀여운 리본까지.


그녀는 거울속의 자신이 어디 귀족 영애라도 된 거 같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과거 예레스 대륙에 살던 시절, 레이첼은 천진 난만한 시골 소녀였다.


의붓 오빠를 따라 여행 중 만난 카콘시스 왕국의 공주들과 우정을 나누긴 했지만, 애초에 태생이 다르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


레이첼은 왕녀들 같이 타고난 품위를 지닐 수 없었기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녀들을 멀리했다.


'하지만 여긴 달라... 내가 하기에 달렸어."


이미 몇백년이나 지난 일이다. 최강의 마법 재능도 기자로프에 납치되는 바람에 별로 발휘해보지도 못했다.


'여기라면 할 수 있어. 앞지를 수 있어.'


엘사리아 대륙에서는 이렇게 선물까지 주며 호감을 표하는 지휘관도 있는 것이다.


"과연 아름답군. 훨씬 보기 좋지 않소?"


"그, 그렇긴 하네요."


"그럼 레이첼 양. 잠시 장비를 보여주실 수 있겠소? 이것도 계약을 위해서 중요한 사안이오만."


레이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들의 장비는 전투 능력만큼이나 지휘관들에 중요한 참고 요소이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더라도 장비가 부실하면 실력의 반도 발휘할 수 없다.


"흐음, 그럼 실례하겠소. 어디 무기는 +40 푸른달, +30 마도방호복, +30 어둠의 법모, 이건 뭐야... SR 진리의 펜던트?"


레이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도 자신의 장비가 부실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엘사리아에 소환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요."


지휘관은 턱을 쓰다듬었다.


"후후, 멍청한 지휘관들이 많군. 이런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 그런가요?"


뭔가 달랐다. 그동안 만난 지휘관들은 레이첼의 장비를 보고 어떻게든 몸값을 깍으려 들었다. 하지만 이 지휘관은 레이첼이 지닌 마력의 포텐셜을 알아본 건지도 모른다.


"비록 장비는 이렇지만, 마력 하나는 자신이 있어요. 저랑 계약하셔서 잘 키워주신다면...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거에요."


"흠, 그런 입바른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 확실히 말하시오. 원하는 것이 무언지."


"루... 룬스톤 3개에요."


레이첼은 결국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룬스톤은 귀하디 귀한 재화다. 거기에 각성자들의 포텐셜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아이템이기도 했다.


솔직히 3개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1개라도 얻어내면 다행인 것이다. 무리한 요구라는걸 레이첼도 모르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로 되겠소?"


지휘관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자신이 들고온 장비를 꺼냈다. 그 휘황찬란한 장비들에 레이첼은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50 붉은달, +50 천녀의 드레스, +50 천녀의 티아라..."


레이첼이 넋 나간듯 중얼거렸다. 이 바닥에서 얼마나 굴러야 저런 장비들을 마련할 수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강화 수치는 둘째치고 모두 희귀한 레어장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워... 원하시는게... 하읏!"


지휘관은 갑자기 손을 뻗어 레이첼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가느다랗고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귀 옆으로 삐져나온 잔 머리털을 헤치고 지휘관은 그녀의 귀에 귀걸이 한 쌍을 걸어주었다.


"이, 이건?"


레이첼은 귀걸이를 만져보았다. 육 각의 뾰족한 돌기가 손가락을 자극했다.


"별... 귀걸이?"


역시나 희귀한 장비다. 특히 전장에서 암살자들의 위협에 몸을 지킬 수 있는 옵션이 부여된, 레이첼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


지휘관의 손이 레이첼의 목덜미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내려왔다. 그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레이첼의 등을 쓰윽 훝었다.


"하읍!"


레이첼이 헛바람을 삼키며 경련했다.


'민감한 몸이군. 별로 경험은 없는거 같은데... 역시 처녀인가? 하긴 철이 들 무렵에 납치되서 세뇌된 채로 마도 골렘을 탔다고 했었지.'


레이첼의 귓가에 대고 지휘관은 나지막히 속삭였다.


"굳이 긴 말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만..."


레이첼은 몸을 바싹 움츠렸다. 레이첼은 양 팔을 교차해 봉긋 솟은 가슴을 눌렀다. 거대한 사내의 몸이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지휘관은 투명한 레이첼의 팔뚝을 마치 건반치듯 두들겼다. 레이첼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 무슨...?"


"비명이라도 지르시겠소? 여기는 내 저택이오."


이상하게 몸이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난 피로감과는 다른, 뭔가 기묘한 느낌이었다.


서... 설마?


"으,음식에 이상한 걸 넣었거나 차에..."


"아니, 그런 비열한 짓은 하지 않소."


지휘관은 레이첼을 풀어주고 물러났다. 그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당신들은 각성자요.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지. 나는 목숨이 하나인 평범한 인간이오. 예쁜 여자 한 번 안아보겠다고 목숨을 걸 거 같소?"


지휘관은 양 손을 좌우로 넓게 펼쳤다.


"나는 부자요. 여자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지."


"......."


"있는 놈이 더 하다고 했던가. 나는 서밋 아레나에서 승리를 원하고, 명예를 원하고 더 많은 재화를 가지고 싶소. 물론 레이첼 양. 당신이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지."


"장난이, 너무 지나치신거 같은데요 지휘관."


레이첼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의붓 오빠인 란디우스를 동경하긴 했지만 그건 철없는 여자아이의 한 때의 치기였다. 남자대 여자로서의 성숙한 감정이 아니였다.


그것도 수백년이 흐른 현재에는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레이첼은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소환된 후 계속 되뇌여왔다.


나는 란디우스 오빠를 사랑해.

나는 란디우스 오빠를 좋아했어.

나는 란디우스 오빠를 동경했어.

나는... 란디우스 오빠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물론 란디우스는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태생이 외계인이고, 주변에 여자도 많다. 그동안 어리숙한 척 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란디우스 오빠와 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지휘관이 룬스톤을 하나 꺼내 허공에 놓았다. 룬스톤은 공중에 둥실 뜬 채, 빛을 발하며 웅웅 거렸다.


"당신들이 살던 세계와 이세계는 많이 다르지. 레이첼 양.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뭐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은 줄 수 있소."


"......"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젊음과 전투력을 줄 수 있겠지. 그것이 계약이라는 거요."


지휘관이 문을 닫고 나갔다. 문 밖에서 그의 건조하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계약을 수락하겠다면, 내일 협상 테이블에 그 별 귀걸이를 끼고 나오시오. 참, 그 룬스톤은 장난을 친 선물이오. 내일 계약이 성립되지 않더라고 주는 거니까 부담없이 가지시오."


지휘관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레이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위에 아까 옷을 갈아입고 놔둔 마도 방호복이 보였다.


전장에서 항상 그걸 입고 다녔기에, 마도방호복은 꼬깃꼬깃하고 더러웠다.


'란디우스 오빠...'


그건 엘사리아 대륙에 소환 된 후 란디우스가 선물해준 아이템이었다. 성능은 뭐.. 그냥 그랬지만.


'오빠가 해준 첫번째 선물.'


그것에 의미가 있었다. 레이첼은 한숨을 내쉬고 별 귀걸이를 풀었다. 그리고 옵션을 살펴본 그녀는 다시 한 번 트럭 핵과금러의 위엄에 놀랐다.


"옵션이 무슨, 지력 10%, 생명 10%, 치명타 15% 야...."


이 정도 마부라면, 엘사리아 대륙 전체를 뒤져도 한두개 있을까 말까 할 것이다. 확실히 저 지휘관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있을 터였다.


레이첼은 창가로 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가운 밤 공기와 둥근 달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레이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