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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들이 소리를 내며 울고 있다.


거칠게 내리는 눈물을 맞고 있노라면, 언젠가 내 기억속에서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며 상처받는 것은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고.

사람은 내리는 비를 그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를 피할 장소에 숨어 비가 그칠 때 까지 기다리거나, 우산으로 비를 막아내야 한다.

그 사람은, 그걸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받지 않는 요령이라고,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비를 피할 장소도, 도구도 주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비가 내리지 않는 곳까지 걸었다.

꿈 속에서,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 기억속에서 나는 빗속을 정처없이 걷는다.

신용할 수 없는 이정표를 따라서, 그저 하염없이 걷는다.

난 우산도, 비를 피할 공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 장소조차 모르기에.

나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온기를 빼앗아가는 비에게서 나를 지켜줄 우산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를 봐주지 않아서, 사랑받을 능력이 없어서. 그저 홀로 무너질 때를 세어가며 걷기만 한다.


내 구원은, 그저 비를 피하는 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것.



내 소원은,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에 드는 것.




기억해내는 것 조차 해낼 수 없는 기억 속에서,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알 수 조차 없는 그 세월 속에서.

난 그저 비가 닫지 않는 곳까지 가고싶었다.










추적스럽게 내리는 소나기가 내 상판을 쳐내며 지나간다.

철충이 태양빛에서 에너지를 얻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레아가 합류한 이후로 새로운 전략을 도출했다.

메이로 하여금 주요 거점에 폭격을 갈기고, 레아의 기상조작 능력을 이용해 주요 거점에 태양빛을 거둔다.

갑작스럽게 구름을 모으려하면 레아에게 무리가 가지만, 긴 시간에 걸쳐서 야금야금 기후를 조작한다면 그녀의 능력안에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무너진 잔해로 먹구름을 이용해 빛을 가린다.

에너지가 다 떨어져 태양빛을 얻으려 그들이 기어나온다면 발할라와 주요 지정사수들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적을 유린한다.

사냥꾼이, 사냥감으로 역전당하는 순간이다.

철충들이 더이상 기어나오지 않을 때 즈음 스틸라인이 투입되어 철충 잔당 청소를 진행한다.

부셔진 AGS에서 철충이 빠져나온다면 빗물을 먹여주거나, 유탄같은걸 사용해서 부셔주면 된다.

빗물에 장시간 노출되면 망가지는 철충의 특성상 빗물을 다니는 것은 눈을 감고 작두를 타는 심경이리라.

여기까지가 나의 그림. 나의 계획.

무너진 잔해 너머로 발할라 부대가 철수하고, 오르카호에서 군장을 싼 부대원들이 상륙하여 서로를 교차했다.

그 풍경속에서 나는 그저, 비를 피하는 것을 포기한 채로, 멍하니 있다.


“주인님?”

거칠게 내리는 소나기 속에서 오베로니아 레아가 내 아래로 떨어졌다.

“레아씨...”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당장 비를 거둘게요.”

땅에 내려온 레아는 어쩔줄 몰라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다 드론을 올려 전자기장을 발생시켰다.

“전 괜찮은데.”

그런 내 말을 들으면서도 레아는 드론을 움직여 내가 있는 위치만 하늘에 구멍을 내어 비를 그치게 했다.

“으윽.”

너무 급박하게 기후를 바꿔버리면 무리가 심하기 때문에 권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녀는 기어이 나를 중심으로 구름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바로 비가 그칠거에요.”

애써 괜찮은 척 하려 했지만 레아는 그렇게 말하다 균형을 잃어버리고 쓰러지려 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잖아.”

나는 레아를 급히 안아들어 내가 앉던 바위에 앉혔다.

그러고 나도 자리에 앉자 레아는 검지를 들었다.

“으음, 주인님. 그럼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떤거죠?”

“조금만, 어깨를 빌려주세요.”

그정도야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고개를 끄덕이자 레아는 툭,하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주인님. 여기서 비를 맞고있으면 다들 걱정할거에요.”

“....제가 비를 맞고 싶어서 맞고있다고 하면 이해해주실건가요?”

“후훗, 그러고싶지만 그러지 못하겠어요.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떡해요.”

레아는 느긋하게 미소지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오르카호로 돌아가요. 돌아가서 기분좋게 샤워하고 코-낸네 하는거에요.”

“지금은,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실 비가 그쳐서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지만, 내리는 비를 쫒아가면 기겁하고 쫒아오겠지.

“그러면 레아가 곤란하다고요? 저는 주인님이 편히 쉬셨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보니, 레아도 어느정도 완고한 면이 있었지.

‘지금은 한 수 접어주는게 좋을까.’

잠시동안 생각을 쭉 하다가 묘안을 내놓았다. 능글맞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리라.

“그렇다면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후훗, 좋아요. 무슨 내기인가요?”

“스틸라인과 발할라 부대가 저를 찾고있어요. 레오나씨와 마리씨 중 누가 먼저 저를 찾을까요?”

“으음. 주인님이 먼저 정해주세요.”

“음? 자신 있으세요?”

“네에. 저는 이래뵈도 꽤 운에 강하거든요.”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나는 멍하니 생각을 시작했다.

스틸라인은 지금부터 수색작업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마리는 당장 수색 조율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반대로 발할라부대는 귀환중이라 아무래도 여유라면 레오나쪽이 더 높겠지.

“저는 레오나씨에게 걸겠습니다.”

“후훗. 그러면 저는 마리양에게 걸게요.”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하늘에서 드론이 내려와 레아의 무릎에 앉아서, 드론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그 곳에는 마치 신화속에서만 나올 것 같은 풍경이 일었다.

구멍난 하늘에는 광명이 내리고, 그 광명은 나와 레아가 앉은 바위를 비춘다.

세상 모든 것이 끝나 무너져도 우리를 비추는 그 빛은 너무나 따스하면서도 상냥해서. 잠시동안 생각했던 시름들을 모두 내려놓고야 만다.

“레아씨. 비냄새는 좋아하시나요?”

“네에. 아주 좋아해요.”

“그러면 비냄새가 무슨 냄새인지 아시나요?”

한달 반 동안 작전을 진행하며 쪽잠도 자기 힘들었던 탓일까. 볕을 쬐며 멍하니 앉아있노라면 졸음이 밀려 올라왔다.

그녀의 억양이야 원래부터 나긋했지만, 그녀 역시 작전의 키 유닛으로 활약했던 만큼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어 있으리라.

나는 내 어깨에 기댄 그녀의 머리에 내 머리를 올리고서 멍하니 눈을 감았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비냄새는 사실, 동물들이 죽고난 다음 퇴적되어 생긴 단백질 냄새에요. 지오즈민이라고 했던가. 그럴거에요.”

“후훗, 주인님은 박식하시네요.”

레아는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 드론을 쓰다듬었다.

따스한 손의 온기가 싫지는 않다.

“비를 좋아해서 그래요.”

“그렇군요.”

그 상태로, 나른한 것인지 둘은 다시 말을 잃었다.

사실 나른한 것인지, 이 시간을 그저 느끼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페어리 자매들은 요새 잘 지내나요?”

“네. 리제를 빼고는 모두 잘 지내요.”

“리제씨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평소에도 자주 문제가 일어나는 바이오로이드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얼마전에 리리스양과 마찰이 있었거든요. 그 다툼 도중에 목이 꺾여서 수복실에 있어요.”

“......리리스씨가 목을 꺾었다고요?”

평소에도 리리스와 리제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둘에게 동료를 해하지말라고 명령을 걸어놨을텐데, 어떻게 된걸까.

“아뇨 아뇨. 리제가 스스로 목을 꺾었어요.”

“예?”

정말 상상도 못한 전개다.

“후훗, 설명을 좀 해드려야겠군요.”

레아가 잡았던 손을 때어 내 손등에 검지를 비비기 시작했다.

“얼마전에, 리리스양이 리제에게 도발을 했어요. 주인님이 당직을 서셨을 때, 리리스양이 같이 경호를 섰는데, 그걸 악의적으로 꼬아서 리제에게 ‘난 주인님과 같이 밤도 보낸 사이인데 넌 가위를 빼면 뭐지? 넌,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도발을 했어요. 그걸 들은 리제는 화가나서 가위를 뽑아 리리스양을 해치려 했고요.”

“그거랑 목이 돌아간거랑 무슨 연관이 있나요?”

“제가 가위를 뽑기전에 황급히 리제를 안아서 막았어요. 그러면서 제가 ‘리제야, 사령관과 리리스양이 밤을 같이 보낸건 맞지만 악의적으로 비틀어서 얘기한거고, 그 밤에는 아무일도 없었잖니?’라고 말했는데, 제가 밤을 같이 보낸건 맞지만, 까지 듣고 잡힌 그대로 스스로 목만 180도 돌려서 섬뜩하게 저를 쳐다보던거 있죠?”

“와오....” 환장하겠군.

“그대로 꺾인 목을 감당하지 못한건지, 리제는 그대로 뻗어서 수복실에 누워있어요.”

“고개가 돌아간 채로요?”

“네, 목이 꺾인 채로요.”

“등과 가슴이 바뀌었군요. 쨔쟌, 리제가 나이트앤젤로 변하는 마법.”

“네?”

“농담이에요. 농담.”

알고있기론 둠브링어는 시원하게 폭격을 꽂아준 뒤 작전 내내 오르카호 안에 있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나이트앤젤은 절대로 이 말을 들을 일이 없을 것이다.

...없어야한다.


리제에 대해선 일화가 몇 개 있다.

예를 들어, 캘베로스와 같이 산책을 하다가 사령관님 너무 좋아요! 라고 말하자 멘탈이 나간 리제가 캘베로스의 가슴을 잡고 양옆으로 땅에 처박다가 날려버린 일화라던지.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정말로 가슴을 잡아서 이리저리 던지는걸 보고는 어이가 나가서 말릴 생각도 못하고 ‘저러다 젖탱이 뽑히는거 아냐?’를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설명하려면.... 3일 밤낮이 부족하리라.

‘그보다 더 그 리제의 괴력을 막은 레아의 괴력은 얼마나 강하단거야?’

그때의 리제를 생각하면 나 따위는 머리통을 잡고 투포환 날리듯 날려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레아라면 얼마나 멀리 날 날릴 수 있을까?

왠지 레아에게 삼대 몇 칠 수 있나요? 라고 물었다간 내가 삼 대 오백으로 쪼개질지도 모른다.

“다프네씨와 아쿠아는요?”

“둘 다 잘 지내요. 다만, 자신들이 할 일 없이 지내는 것에 아쉬워해요.”

그러고보니. 다프네는 굉장히 이타적인 친구였다.

“그 둘에게는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요. 전투용으로 생산된 아이들이 아니라서 전투 투입도 불가능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프네양은 굉장히 이타적이고 희생심이 강해서 어떤 일이든 도맡아 하려고 하더군요. 얼마 전에는 시키지도 않은 함내 청소를 하고 있는걸 봤었어요.”

“주인님도, 저희 자매들을 눈여겨보고 계시는군요?”

후훗, 감동이에요. 하고는 레아는 눈을 감았다.

“항상,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좋은 삶을 줄 수 있는데. 제가 하는거라곤 그들을 사지로 내몰거나, 멸망전처럼 노동을 시키는 것 밖에는 없죠.”

멸망전에 바이오로이드들이 학대받은 것은 기정사실이다.

폭행부터 시작한 여러 끔찍한 사건들. 그 사건들을 단편적인 기록으로 봤을때는 눈앞이 캄캄해졌었다.

이렇게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지내는 그녀들을, 단지 물건이라고 규명할 수 있으면 그딴 짓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단건가.

“너무 자신을 미워하지 마세요. 주인님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계신거에요.”

레아는 드론을 띄우더니 양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온기가 너무나 따스했지만, 그 말이 너무 달콤했지만 나는 받을 수 없다.

오르카호에 온 뒤로 항상 생각했다.

내가 무리하고, 내가 마음 상할까봐 바이오로이드는 항상 내게 모질게 대할 수가 없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은 항상 나 자신을 몰아세우게 했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게 하였다.

설령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그럼으로서 그들이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다면. 난 그걸로 만족하니까.

“아뇨. 어떤걸로도 절 합리화해선 안돼요. 전, 그저 그들에게 좋은 말만 하면서 사지로 나갈 것을 강요해요. 과거 인간이 그랬던 것 처럼요.”

과거의 전쟁에서, 기업과, 정부와, 철충들과 싸울때처럼.

“그리고 전투를 위해서 전투모듈을 땐 이들에게는 노동을 시키죠. 머리만 바뀌었을 뿐이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더치걸이 광부에서 삐닥 꼴은채로 드릴질을 하던게 아직도 머리에 남는다.

그들에게 다시 광부질을 시키지는 않지만, 과거 인간이 그랬을 것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도저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젠가, 만약 저희가 승리하고서, 그들이 제게 처벌받을 것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교수대에 올라가줄 수 있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기꺼이, 갈 의향이 있습니다.”

레아는 한숨을 들리지않게 쉬고는, 입을 열었다.

“주인님. 한 가지 기억해주셨으면 하는게 있어요.”

“어떤거죠?”

“저희 모두가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명령에 굴복해 전쟁터에 끌려가는게 아니라, 저희 모두가 각오하고 결의를 다져 스스로 그 곳으로 향하는거에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주인님은 저희 모두에게 구세주 같은 분이세요.”

“....저같은게.”

“주인님은 멸망전 인간님들하고는 다르게 저희를 사람으로서 존중해주세요. 강요한다고 하셨지만 강요하지 않으셨고, 항상 저희를 걱정하고 배려해주시고 신경써주셨죠. 그리고 전투에서는 언제나 죽는 아이들이 없이, 있더라도 최소한으로서 작전을 짜고, 그마저도 죽는다면 묘비에서 꽤 오랜시간동안 자리를 지켜주셨어요.”

“......보신적 없으실텐데요.”

“작전중에 마리양이 제게 말해주셨던 말이에요.”

그럴수도 있겠구나. 기댄 머리에서 올라오는 체취에 정신이 풀어져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주인님. 다른 인간님이 저희를 이끌었다면, 이렇게 올 수 있었을까요? 저희들이 웃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저, 머리만 바뀐채로 똑같이 움직이고 있겠죠.”

한없이 긍정해주는 그녀에게 나는 어째선가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의심해야만 더 나아질 생활을 생각하면, 결코 내 자신을 긍정하고 믿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해야지만, 나를 끊임없이 몰아세워야지만 그들이 편해질 수 있다.

나를 깎아내려 그들을 구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리라.

“아니에요. 주인님. 저희들은 설령 주인님이 이끄는 목적지가 지옥이라 하더라도 의심없이 갈거에요. 주인님이 인간으로서 명령을 내려서가 아니라, 주인님이 이끌어줌으로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주인님이 설령 우리를 모두 죽인다면, 기꺼이 죽...”

“사지로 내모는 입장도 아니면서 그렇게 쉽게 뱉어내지 마십쇼.”

정신차려보니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중간에 말을 끊고 어깨를 쳐 기댄 그녀를 일으켜 세워선, 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항상 마음에 걸렸었다.

내 실수로 인해, 내 명령으로 인해 죽어가는 시체를 보면서, 왜 저기에 있는게 내가 아닌지. 그 부분에 항상 괴로워했다.

그녀의 말에 상당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이건 내가 참아야했던 부분이다.

내 값싼 감정에, 그녀를 상처줄 수는 없다.

“죄, 죄송해요. 역린을 건드릴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빗물에 온기를 잃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손에 실린 냉기는, 갈 곳을 잃어 금세 식어버린 내 분노같았다.

레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죄송합니다. 아이들의 죽음에 상당히 민감하실텐데.”

괜찮다고 몇 번 더 말했지만, 서로 자신들의 실수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나는 말없이 다시 그녀의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게하고, 내 머리도 다시 그녀의 머리에 기댔다.

아... 하며 짧게 신음하는 그녀 손 위에 내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방금전에, 친해지길 바라에 보냈던 리제씨와 리리스를 보는 것 같았어요.”

“네?”

창피했던 기억이지만, 어색해진 분위기를 푸는데는 이게 제격이겠지.

“예전에, 왜 둘이 사이가 나쁜지를 몰랐을 때에 둘을 친해지길 바라에 보낸적이 있었어요.”

“스프리건양이 운영하는 주간 오르카요?”

“네. 거기에 서로 올라가니까 한 30분동안 칭찬하는걸 가장한 딜교환을 하더라고요. 머릿속이 꽃밭인 년부터 시작해서. 사지분신 마조년까지. 내가 알지도 못한 사실을 폭로하더라고요. 끝에는 리제양이 자신의 개인기를 보여주겠다며 리리스양의 손을 책상위로 올리더니 자신의 가위를 뽑아서 손가락 사이를 가위로 찍었어요. 엄지 끝에서 엄지 검지 사이. 다시 엄지. 검지 중지 사이. 다시 엄지. 이걸 굉장히 빠르게 찍었죠.”

“후훗, 어떻게 됐나요?”

“고의로 리제씨가 리리스양의 새끼손가락을 찍어서 머리 끝까지 화가난 리리스양이 리제의 턱에 고무탄을 전부 박아버렸어요.”

그 말을 듣자 레아는 정말 재밌던건지 쿡쿡하며 웃었다.

분위기가 풀려서 다행이다.

“.....섬 어딘가에 AGS가 인류의 재건을 위해 경비하는 절대수호구역이 있어요.”

“음, 네.”

“저는 마지막 인간으로서 그 곳으로 가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엘븐 포레스트 메이커를 포함한 여러사람으로 하여금, 과수원이나 농장같은걸 만들 생각이에요. 그러면, 페어리시리즈 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생길거고, 어느정도 식량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보급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죠.” 메이의 격납고가 생각났다.

지금도 유효하게 철충에게 타격을 주는 화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생산이 중단된 상태라 계속해서 폭격을 가할 수는 없다.

그 격납고가 동나기전에 그 곳으로 가 자동화 시설을 세워야한다.

“후훗, 그렇군요.”

레아가 힘을 빼더니 내 몸에 무게를 실었다.

“주인님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거에요. 그리고 저희를 승리로, 내일로 이끌어 주실 거에요."

“그건, 근거없는 희망이에요.”

레아는 예상했다는 듯이 웃고는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주인님. 그러면 저랑 내기하실래요?”

“....내기요?”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레파토리로, 레아는 요망하게 내 팔을 간지럽혔다.

“주인님은 어차피 주인님이 실패하시는대에 거실거죠? 저는 주인님이 성공하시는데에 걸게요. 절 믿어도 좋아요.”

왜냐면 저는, 운이 강하거든요.

라고 말한 레아의 손가락 끝에는




나를 찾으러 온 마리가 있었다.





02










"꽤 훌륭했어 사령관. 어떠한 피해도 발생하지 않고 주요거점을 확보하다니. 좀 더 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었네."


"레아씨가 많이 수고하셨죠."


마리가 나를 찾은 뒤 나는 급하게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못 말린 채로 작전실 안에 들어왔다.


작전결과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와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 디테일하게 주고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젖은 머리가 신경 쓰이는 것인지 레오나는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다 시선이 마주칠 것 같으면 고개를 돌리고 만다.


".....혹시 머리를 못 말린 게 불만이신가요? 칠칠치 못하거나...."


"음,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색달라 보여서."


"네?"


"그.러.니.까. 좀 그, 섹시해보인다는거야. 두 번 말하게 하지마."


라고 말하고는 레오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레오나씨는 윈스턴 처칠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멸망 전의 전쟁 기록에서 읽었어. 먼 옛날, 영국이란 나라의 수상이었다고 하지."


"맞아요. 세계 1차 대전에서 소련으로부터 영국을 수호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갑자기 왜?"


레오나가 손으로 턱을 괸 채 나에게 물었다.


그녀라면 그녀답다고 하는 포즈일지,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에서 근엄함이 느껴진다.


"윈스턴 처칠은 분명 소련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켜냈어요. 하지만 멸망하기 전까지도 그의 생은 항상 평론가들의 입에 오르내렸죠. 주로, 그의 자질에 관해서였어요."


멸망 전의 전쟁 기록들에서 유효한 전략을 받아낼 수 있나, 하고 마리와 함께 정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전쟁 뒤로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꽤나 구설수에 오르내렸어요. 주로 자질에 대해서요. 그는 확실히 영국을 수호했어요. 맞아요. 하지만 과연 그가 아니었다면 막아내지 못했을까? 그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많이 던졌었죠."


"흠,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거야 사령관?"


"이번 작전은 물론 만족스럽게 끝났지만, 그 사람같이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요. 오베로니아 레아라는 카드를 쥐고 있는 입장에서, 이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 말을 마치고 조금 정적이 흘렀다.


나는 머리에 물기가 남았나, 고개를 돌려 물기를 탁탁탁 털어내곤 다시 자세를 편 채로 팔짱을 껴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해는 해. 실제로 수많은 전쟁에서도 그런 의문들이 올라왔지."


레오나는 내 자세를 보더니 괸 턱을 내리고 똑같이 팔짱을 끼었다.


내심 그 자세가 가슴을 어필하는 것 같아 살짝 눈길이 갔다.


"난 거기에 관해선 쓸데없는 의심이라고 생각해. 그게 누가 되었든, 어찌 되었든, 그 사람이 해냈다는 것은 사실이야. 사령관도 마찬가지고."


레오나의 억양이 마지막에서 강해졌다. 내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라면 나 자체를 긍정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턱이 없다.


"그, 사령관은, 음. 이번 건으로 좀, 많이 특별해진 것 같아. 자신을 가지고 지금처럼만 해줘. 내 상관에 어울리도록, 특별하게."


말을 주춤주춤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레오나는 말을 이었다.


"특별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은 다해볼게요."


"하아.... 안되겠네."


레오나는 또각또각, 요염하게 걷더니 내 앞에 서서 내 멱살을 잡았다.


"너무 자신에게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자신을 가지도록 상을 줘야겠네."


설마 과거처럼 신발로 밟아주는 게 포상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건가? 나는 기겁하며 그건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쪽.


레오나가 잡은 멱살을 끌어 내 뺨에 키스한 것을 알고는 그 말은 다시 입안으로 들어갔다.


"자, 상이야. 사령관에게 어울리는 포상. 난 이런 거 잘 안하니까. 그러니까, 사령관한테만 하는 거니까. 좀 더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내게서 등졌다.


평정해 보이려고 하지만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피곤하지? 오늘은 들어가 쉬어. 당직은 내가 대신 설게."


"괜찮아요. 저녁만 먹고 와서 제가 당직 설게요."


"응?"


"미녀는 잠꾸러기래요. 괜히 저 때문에 밤잠을 놓치면, 관리하는 피부가 망가지잖아요?"


"......정말, 능글맞긴."


그래도 그게 싫진 않은지 내게 곁눈질을 하려 살짝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입가가 약간 씰룩씰룩한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아니면 미소를 참고 있는 걸까.


"알았어, 저녁 먹고와. 좀, 천천히 먹어도 괜찮아."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레오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자리를 떴다.




"바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관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살짝 지친 걸까. 눈 밑이 뜨거우면서 기운이 빠진다.


밥 먹고 커피를 내리면 좀 편해지려나. 밥 먹고 마리에게 커피를 좀 나누어 받아야겠다. 생각하면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소완."


이번 전투에서 구출한 바이오로이드 중 하나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직 레오나에게 듣지 못했지만, 그간 이 지역에서 홀로 중식도 같은 흉기를 사용해 혈혈단신으로 철혈들을 찢어버렸다고 했었다.


이번 작전은 장장 1달 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간 나는 항상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소완에 대한 얘기는 잘 듣지 못했지만, 요리에 능통한 바이오로이드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곳에 사령관을 맡고있는 사람이라고 해요."


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걸어두고, 늘상 요리할 때 입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요리는 오르카 호에 와서 근근히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몸은 요리하는 방법이나 상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 기억에 있던 요리를 오드리에게 대접하자, 요리를 먹은 오드리는 눈에 불이 들어오더니 '요리하는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섹시해요!' 라는 말을 하곤 셰프복이라고 하는 옷을 만들어주었다.


셰프라는게 뭐지, 먹는 거 이름인가?


"평온하셨사옵니까 주인. 소첩은 소완이라고 하옵니다. 주인께선 이미 소첩의 이름을 알고 계신 듯 하군요."


"네. 레오나씨에게 전달받았거든요. 혹시, 저녁 준비하시는 건가요?"


"예, 그전에 이번에 들어온 식자재를 검토하고 있었사옵니다. 혹 주인께서는 요리를 하실 줄 아시는지요?"


"그렇게 잘하지는 않고, 취미로 좋아하는 정도에요. 사실, 이곳에서 저말고 요리를 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들이 얼마 안되서 잘 모르겠네요."


멋쩍게 웃으며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소완은 그런 나를 옷을 벗는 것부터 입는 것까지 세부적으로 관찰하더니 흐음, 하고 납득하는 듯했다.


무엇을 납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입고보니, 소완씨하고 저는 입은 옷이 똑같은 것 같네요."


"예. 셰프복이라고 하지요."


소완은 자신이 아는 분야가 나와서인가, 흡족한 듯 웃으며 몸을 돌렸다.


"소첩은 하던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따 뵙도록 하지요."


"아, 네. 수고하세요 소완씨."






"으아아앙! 언니 미워!"


옷을 갈아입고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누군가 목놓아 울고 있었다.


"어머, 어떡해.. 미안해 아쿠아. 다시 해줄게. 어떡하지, 어떡해..."


"레아씨?"


"주인님?"


주방 너머로는 레아와 아쿠아. 그리고 아무래도 음식이었던 것이 보인다.


".....우와아."


"주인님! 쭈인님! 이거 봐봐! 언니가 돌아오면 볶음밥 해준다고 했는데, 볶음밥이 코코같이 되어버렸어!"


"아,아니. 그 말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요.."


입력된 언어모듈이 싼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순수함 때문인지. 조금 전 말은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작전 기간 내내 기후를 조절하였던 탓에 상당히 피곤할 텐데, 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들을 챙기는구나.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낮에 비해서 레아의 눈이 풀려있었다. 아무래도 나와같이 피곤하기 때문이겠지.


"아쿠아. 볶음밥은 저와 언니가 다시 만들어줄 거에요."


"주인님이 해준다구?"


아쿠아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나와 레아를 번갈아 보았다.


레아는 말없이 눈으로 미안하고 고맙다는 뜻을 보내는 것 같았다.




"칼 잡는 법부터 배워야겠네요. 뒷 손가락 세 개로 손잡이를 잡고, 검지와 엄지로 칼등을 꼬집듯 집어야 해요."


아쿠아는 의자에 앉아 발을 젓고 있고, 레아는 주방 안으로 들어와 나와 같이 다시 볶음밥을 만들기로 했다.


다행히 요리에 아주 소질이 없는 건 아닌지, 감자 살을 벗겨내는 건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껍질을 깎고 나서 어느 정도 살을 남길 줄 알았다.


"이, 이렇게요?"


"이렇게요."


레아가 위태롭게 칼을 집고 보여주자 나는 레아의 등 뒤로 가서 백허그 하듯 품에 안아 그녀의 양손을 잡아 교정해주었다.


나처럼 레아도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인지 머리에서 달콤한 향과 체취가 진동했다.


이건, 약간 위험하다.


"앗, 아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 자세를 잡자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반댓손은 페로손으로 쥐어서 칼 몸 부분에 계속 닫게 해야 해요. 이렇게."


말을 내뱉으면서 숨이 그녀의 뒷목에 닫자 숨이 닫을 때마다 레아가 살짝살짝 움찔거렸다.


간지럽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자세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필히 다칠 테니까.


예로부터 칼과 가위는 다루기 나름이라고 했다.


"이대로 칼몸이 페로손에서 떨어지지 않게 한 다음 빠르게 쳐내야 하는 거예요. 이걸 능숙하게 자르면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칼에서 레아의 손을 떼게 한 다음 내가 칼을 잡아 능숙하게 양파를 쳐냈다.


탕탕탕탕탕탕탕탕탕탕.


사실 칼질하기 가장 편하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건 양파인지라, 요리를 가르쳐줄 때 유세 떨기도 가장 좋은게 이 재료다.


"어떻게 하시는지 알 것 같나요?"


"으음, 네."


"그러면 이대로 하ㅅ..."


"아,아뇨! 모르겠어요! 한 번만 더 알려주시지 않을래요?"


내가 레아에게서 벗어나려 하자 황급히 레아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고개를 저을 때 머리카락이 살짝 눈을 찔러서 아프지만, 그것보다 체취와 샴푸 냄새가 정말로 위험하다.


"네. 다시 알려드릴게요. 감자는 면이 울퉁불퉁하니까 우선 지지할 부분을 살짝 잘라내서 평평하게 만들고...."


그 뒤로 볶음밥에 쓸 재료들을 다질 때까지 레아는 계속해서 모르겠다고만 했다.


....이거 짬 맞은 건가?




그 뒤로 나도 살짝 기합이 들어가 여러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이를테면 술을 약간 넣고 불을 넣어 불 쇼를 한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


아무래도 여태까지 누군가에게 대접하거나 알려준 적이 없어서 살짝 외로웠는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게 내심 기뻤다.


"쨘. 언니와 주인님의 정성이 들어간 볶음밥이에요."


"우와아아아! 주인님 고마워! 사랑해!"


"얼마 만큼요?"


"으으음, 언니 가슴만큼!"


풋. 그 말을 듣자 레아는 물을 뿜더니 사레가 들렸고, 나는 순수하게 웃는 아쿠아를 보면서 아빠 미소를 지었다.


"아쿠아는 가끔 제 딸 같아 보일 때가 있어요."


아마 딸을 키운다면 이런 느낌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입 크게 볶음밥을 입에 넣은 아쿠아를 바라보았다.


"딸 같다고요?"


"네. 아, 아 잠시만요 딸 같다고 해서 좀 문제 될 만한 딸 같다는 게 아니라 진짜 딸 같다고요. 진짜로. 사심은 없어요."


혹시 그 점에 걸려서 되 물었던 건가. 내가 황급하게 몸을 뒤로 빼며 손사래를 치자 레아는 기침을 하면서도 웃었다.


"알아요. 주인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주인님. 아쿠아는 주인님의 딸이야?"


"네. 그런 느낌이죠?"


"그러면 엄마는 누구야?"


아쿠아가 볼을 우물우물 움직이며 물었다.


엄마? 엄마.. 함 내에 엄마 같은 사람이 누가 있었지...


"여기 있네?"


지금은 딱히 레아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콘스탄챠가 엄마 같다고 하기에는 자신을 낮추어 배려하는 모습이 강해서 엄마보다는 메이드에 가까운 이미지였지.


레아가 내 시선을 마주 보자 잠깐 멈칫하다가 방금전 나처럼 손사래를 치며 제, 제가요? 라고 했다.


"언니! 주인님 같애!"


"어머, 어머. 아니에요. 어떻게 저 같은게 주인님에게 부인 같은..."


"레아씨. 좀 전에는 저보고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더니, 지금은 자신을 자책하고 계시네요."


"에? 아, 이건 조금 달라요! 어떡해. 그러니까, 그..."


그렇게 느긋했던 레아의 페이스가 무너지더니 당황하여 영문 모를 손짓을 이리저리 했다.


"자신을 가져요. 느긋하면서도 사려 깊고, 다정한 레아씨는, 누나 같아서 저도 좋아해요."


내가 눈웃음을 지어주자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같이 눈웃음 지었다.


마치, 내가 그녀의 미소를 보고 따라 웃었던 것처럼.


"누나, 같은 거죠?"


"네?"


"누나는 아닌 거죠?"


"네 뭐, 생년 순으론 전 노인네고 레아씨는 갓난아이니까.."


"다행이다..."


레아는 숨을 쓸어내리더니 그대로 만든 볶음밥을 우아하게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조금 머뭇거리며 수저를 그릇에 이리저리 돌린다.


"누나는 안돼요. 정말 누나가 되어버리면, 그건 조금 곤란하니까."


나이가 민감해서인가. 레아는 시선을 밥에 둔 채로 계속 수저를 그릇에 긁었고.


나는 내심, 그 이유가 나이 때문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 같다.



03




"주인님, 주무세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레아는 아쿠아를 잠깐 마중하러 다녀온다고 했다.


사령관은 지쳐있던 터도 있고, 아쿠아를 숙소까지 바래다준 다음 작전실로 가는 것보다 여기서 작전실로 바로 가는 것이 훨씬 빨랐기 때문에 아쿠아를 데려다주고 온 뒤까지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레아가 다녀오자 텅텅 빈 식당은 적막하고, 주방 역시 정리가 끝난 것인지, 식당에는 사령관과 레아 둘밖에 없었다.


"........."


피곤했던 탓일까. 사령관은 눈을 감은 채로 의자에 걸터 졸고 있었다.


"주무시는,거죠?"


가까이 온 레아가 손을 사령관 눈앞에 휘적거렸지만, 사령관은 눈을 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음, 어떡하지..."


하면서도 레아는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사령관의 옆에 앉아 의자를 당겨 거리를 밀착시켰다.


자면서 뿜는 규칙적인 호흡. 그 숨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머리 한 켠이 아찔해지고 만다.


'조금 전은 위험했어.'


평소에는 느긋하면서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남들과 대화하던 레아였지만, 어째선가 유독 사령관 앞에서는 감정의 변화가 클 때가 많다.


주로 그가 기뻐하거나, 괴로워할 때.


다른 이들이 그럴 때도 공감하며 같이 아파하고 기뻐하던 그녀였지만, 유독 사령관의 변화에는 더 민감하고 크게 공감하게 된다.


'주인님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야.'


사령관 앞에 앉아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한다.


라비아타에 의해서 재생산이 되었지만, 이내 습격을 받아 자매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자매들은 서로 미래를 기약하며 철충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려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2할이 채 남지 않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일말의 희망은 남아있었다.


사람과 바이오로이드가 무너질 때는 언제일까.


큰 고비를 겪을 때? 절망적인 내일이 기다릴 때?


정답은 다 다르겠지만, 레아는 희망을 잃었을 때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재집결한 포인트에서 철충은 다시금 습격을 가했고, 그때 사령관이 그녀들을 수호하며 호위했다.


하지만, 레아의 판단에는 절대로 자매들을 전부 데려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자신이 시간을 벌 테니 자매들을 구해달라고 했다.


선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


레아는 자신을 버리고 자매들을 선택하려 했다.


자신과 자매들을 저울질하여 무게가 실린 그들을 구하려 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거면 됐다고 생각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내내 샌님같이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던 때였다.


"여긴 지옥이에요. 포화가 가득하고 몇 분 뒤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요! 이런 지옥에서, 저를 버림 패로 자매들을 구할 수 있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해요."


"만족한다고요? 버리고 버려서 차악을 선택한게?"


폭격이 비처럼 내리는 상황을 따라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렬해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잃어가고, 선택의 연속을 강요받아요. 그 생각에 점철되고, 익숙해져서 계속 버리기만 한다면 파국에 버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겠죠!'


사령관은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면서도 굳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포기를 거듭해 도달한 결과가 자신을 내치는거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서 수도없이 그가 고뇌했던 것을 느꼈다.


'당신의 힘이 부족해서, 능력이 달려서 포기할 수 밖에 없다면.‘


그 말에서 결론적으로 그가 내린 결론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포화 속에서 강하한 타이탄이 역장으로 자매들을 보호했다.


"........."


’그 선택은 제가 하겠습니다. 모두를 구하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로.‘


사령관은 상냥하면서도 강하게 그녀를 감싸주었다.


열망이 섞인 그의 말이 내심 싫지는 않았다. 아니, 조금은, 아니, 많이 두근거렸다.


'앨리스!!!!!!'


그의 말이 맞다. 말 하나하나에서 많은 생각이 담겼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말을 마치자 그녀는 기후를 조작해 폭격을 하러 오는 철충들에게 낙뢰를 꽂았고.


다음 연계를 생각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무수히 많은 폭죽놀이가 펼쳐졌다.


'그렇게 강하던 사람이, 자고 있을 때는 한없이 순해 보이는구나.'


그 날 이후로 오르카호에 합류한 뒤로 정신 차려보면 눈은 언제나 사령관을 쫒고 있었다.


좀 더 그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말을 걸어보고 어필해보고, 그에게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일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매력적이면서 대단한 인물이다.


멸망전의 인간과 다르게 바이오로이드 누구 한 명에게 매몰차게 대하지 않고, 항상 이름을 기억하고 관심을 써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어내고, 자신의 한계를 부러뜨리며 허투로 희생을 내지 않는다.


아는 지식도 많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아, 그가 책을 읽거나, 요리를 하거나, 지휘를 하는 모든 순간에 매력이 흘러 넘쳐 보였다.


콩깍지라는걸까. 설령 콩깍지라고 해도, 지금은 그게 너무 좋았다.


"음..."


그렇기 때문에 그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얘기할때는 내심 질투심이 났다. 리리스같은 당돌한 아이들이 사령관에게 들이댈때면 겉으론 온화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조바심이 올랐다.


나는 장녀이기 때문에, 자매들을 이끄는 입장이기에 그들과 같이 사령관을 뺏으려하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단념시킬때마다, 가슴은 조금 더 아파왔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낮에 고뇌하고 괴로워보이던 사령관에게서 이 사람은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가 약점을 자신에게 보여주자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사령관이, 자신의 남자가 되어주길 내심 바랬다.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녀가 눈을 슬며시 감으며 자고있는 사령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안다. 이래선 안되는 것도 알고있다.


하지만 고개를 들이밀수록 느껴지는 배덕감과 희열감 사이의 쾌락이 너무 중독될 것 같아. 사령관의 숨냄새에 취한 것만 같아. 평소에 강하던 자제심이 깨져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


"음..."


서로의 입술이 포개진 채로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지 자신은 알 방법이 없다.


그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며, 그녀는 그대로 멈추어있다.


찰칵.


"헛!"


인기척과 함께 어떤 소리가 나자 레아는 황급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인기척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깨워줘서 고마워요."


사령관은 졸린눈을 끔뻑거리며 레아와 같이 작전실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식사하러간지 1시간밖에 되지 않아 레오나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후훗, 아니에요.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게 제 기쁨인걸요."


그게 사령관이라면 더더욱. 이라는 말은 뱉지 않은채로 레아는 사령관 옆에 걷고 있었다.


"하아, 피곤하네요. 차마 한달 반동안 작전한 바이오로이드에게 당직을 세울수는 없어서 제가 하겠다곤 했지만, 역시 힘든건 힘든가봅니다."


"다른 바이오로이드는 없나요?"


"마리씨는 수색작전에 파견되서 못해도 이틀은 바깥에 있을거고, 레오나씨는 한달 반동안 작전에 투입되다가 막 복귀했어요. 메이도 스틸라인의 제공권 확보를 위해서 나가있고요. 저도 한달 반동안 자는둥 마는둥하면서 있었지만, 그래도 바깥에 있는사람보단 안에 있는 사람이 서는게 맞겠죠."


"어머, 어떡해.. 그러면 당직이라는건 주인님만 서시는 건가요?"


"아뇨. 부관하고 둘이서 서는데... 아마 오늘 당직은 이프리트 163번 이었을거에요."


"으음, 부관을 하는데는 어떤 조건이 있나요?"


"아뇨. 누구나 할 수 있죠."


"저, 그러면 오늘 부관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네?"


의아한듯 사령관이 걸음을 멈추곤 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레아는 그런 사령관을 똘망똘망 쳐다보면서 왜? 라는 물음을 띄고 있었다.


"레아씨도 한달 반 내내 투입되셨는데,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 그렇긴 하죠. 네. 그렇긴한데."


그녀는 윙크를 하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주인님하고 잠깐 하고싶은 얘기가 있어서요."











04 /








일은 순조로웠다.


레오나에게는 레아의 투입 경험과 향후 작전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하고, 이프리트에게는 깜짝 포상이라고 둘러대자 레오나는 살짝 의심하듯 수긍했고, 이프리트는 개꿀이라며, 무르기는 없다며 가장 빠른 걸음으로 작전실을 빠져나갔다.


레오나가 빠져나가자 사령관은 마리에게 연락해 원두를 빌렸고, 능숙하게 원두를 갈아 뜨거운물을 부어 커피를 만들어 레아에게 내밀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커피도 내릴줄 아세요?"


"네. 마리씨에게 배웠어요."


"주인님은 못하시는게 없으시네요."


"배운게 도둑질이죠, 뭐."


멋쩍게 웃으면서 사령관은 자리에 앉아 레아와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후드집업 안에 간편하게 입은 탱크탑 가슴골에 눈길이 갔지만, 그래도 얘기에 몰입하다보니 시간가는줄 모르고 얘기를 했다.


서로 누군가를 지도하고 이끄는 입장이었던지라 대화의 리드도 서로서로 술술 넘어갔고, 일상적인 얘기부터 취미 얘기까지 꽤나 즐겁게 얘기했다.


"주인님은 참 대단하세요. 제가 못하는건 모두 잘하시고, 잘 생기시고, 목소리도 좋고. 언제나 승리를 가져오고, 그 누구하나 버리지않고 구해내시고."


"생긴거나 목소리야 신체를 다시 만들때 콘스탄챠양이 사심을 넣어서 만들어서 그렇고, 취미는 지루해서 뭐라도 하게 되버려요. 잘하는게 많은건, 음. 혹시 역사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네? 아뇨. 그렇게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사령관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더니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얘기를 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정조라는 왕이 있었어요. 그 왕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에게 광기어린 핍박을 받았고, 정신병으로 미쳐버리죠. 그런 정조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상자에 갇혀 죽는걸 지켜보았어요."


"저런... 가여워서 어떡해."


"정조는 그에대한 트라우마와 각종 살해 협박에 시달려서 잠을 줄이게 되었어요. 잠을 줄이면 무언가를 해야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공부를 했다고 해요. 사람들은 그런 정조를 후천적인 천재라고 말했었죠."


"그렇군요. 그런데, 그 얘기는 왜요?"


"사실 저도 크게 다를게 없어요. 항상 악몽에 시달려서 잠을 자고싶지 않게되고, 잠을 자지 않는 시간동안 필사적으로 역사나 전쟁기록, 상식이나 요리같은걸 하게돼요."


"......악몽이요?"


레아의 표정이 굳었다. 숨을 삼키는 그녀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네. 아, 다른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에요?"


사령관은 자신의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며 애써 분위기를 환기 시키려 했지만 레아는 난생 처음 듣는 심각함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얘기, 조금 더 자세하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음... 글쎄요."


"주인님. 오베로니아 레아는 한 달 반동안 작전의 중요 유닛으로서 철충들을 효과적으로 섬멸했어요. 맞죠?"


레아가 상체를 사령관에게 내밀며 시선을 맞추었다.


사령관은 시선을 피하더니 한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포상을 주세요. 포상은.” 제가 모르는 주인님의 모든걸 알려주세요. 라는 이해못할 요구였다.


" 좋아요. 대신,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중요해서 두 번 말하는 거에요."














나는 항상 같은 꿈을 꾼다.




나의 기억이지만, 내가 들쳐내어 볼 수 없는 기억. 내가 장막을 들춘다면 현기증과 수면욕에 무너져 버리기에, 난 한 번도 그 기억을 들여다 볼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무너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고통받아왔고, 잃어가기만 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생은 마치 소설과 같아서, 살며 단 한 번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 이타심은 때어놓고 싶어서, 항상 자신조차 챙기지 못하는 내가 괴로워서 나 자신과 싸워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은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니까, 남이 행복하길 바란다며.


설령 내가 일회용 소모품으로서 남을 구원하고 버려진다고 해도. 내가 하염없이 상처받는다 해도 나는 남을 탓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등신같이 착했기 때문에. 나보다 더 남을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자신이 싫으면서도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자신조차 버려버린다면, 정말로 내 안에 아무것도 남을지 않을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다.




내가 너무 무겁다며 이해하길 거부하며 떠나가는 사람들.


계속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면상에 죽빵을 꽂을 세상.


무슨일이 있던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원인조차 찾아내지 못한 채로, 해결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고통받아야만 하는 과거.




사람은 내리는 비를 그칠 수 없다. 그래서 우산으로, 건물안에 들어가 비를 피하고 막아낸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산도 피할 장소도 없어서 그저 걷는다.




내 소원은,




내 구원은,






.... 그 소원을 이뤄낼 수 없어서 가진 차선책의 소원과 구원은.




누군가의 소원을 이뤄주고, 누군가를 구원해주고.


그 댓가로 내가 죽는 것.




그저, 그렇게 해서 이 고통을 끊어내고 싶었다.










"아프다. 괴롭다. 가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다. 라니."


사령관이 얘기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레아는 울고 있었다.


그 큰 눈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을 것 같던 그녀가.


"나라면 너무나 무서워서, 괴로워서 세상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아요."


꿈 얘기부터 시작한, 그동안 품고 있었던 사령관의 넋두리.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만 같았는데, 이상하게 레아는 그 이야기에 아파했다.


그녀가 동경한 그이며, 그녀가 사랑한 그이기에.


공감을 잘하는 그녀에게 그의 이야기는 그녀의 가슴에 수 많은 연민을 꽃피웠다.


"....모두를 구해내서 대단하다고 했죠?"


".............."


"전, 대단한게 아니에요. 그저, 선택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에요. 더이상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더이상 누군가를 잃어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선택하기를 거부했어요. 그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저 자신을 좀 더 몰아 넣어서 둘 다 가져가는 욕심쟁이일 뿐이에요."


".............."


"항상 다른사람을 배려하고 생각하고 공감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결국 저 자신만을 생각했어요. 누군가에게 미움받고싶지 않아서, 누군가를 잃고싶지 않아서."


".............."


"내가 지키고 싶었던건, 결국 나 자신이었어."


수 없이 쏟아지는 정보에서, 이상하리만치 레아는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았다.


유리처럼 부셔지는 그에게서 자신이 비추어졌다.


수 없이 고민하고 고뇌해서 내놓은 철학적인 견해들을, 모두 다 알 것 같았다.


알 것 만, 같았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해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라며, 결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며.


그렇다면, 이 감정은, 레아가 느끼는 것은 공감이 아닌걸까. 연민이 아닌걸까.


"사실, 사실 저도 주인님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사령관은 우는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두려웠어요. 태어나자마자 내 기억 속에 있는 자매들을 잃어야만 했고, 항상 선택을 강요받았고, 어디를 선택해도 아파서, 아파서..."


울다 호흡이 곤란해져 숨을 헐떡이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말을 뱉어냈다.


사령관은,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던 것 처럼.


사실은 투정부리고 싶어서,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해냈던 것 처럼.


그러면서도 자신하곤 다르게 그녀는 상냥하게 말하는구나. 왜 나는 그녀에게 그러지 못했을까 하며, 사령관은 자책감을 속으로 삭혔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그걸 바라는게 그렇게 어려웠던 건지, 과분했던건지, 끝내는 우리 모둘 죽이려 했던 상황까지 세상은 몰아갔죠."


여림풋 그때의 기억이 났다.


사실, 사령관은 그때의 그녀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그렇기에,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제가 사라지고 싶었어요. 그렇게 거칠게 내모는 세상에서, 더이상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 그때 주인님이 나타나 주셨고, 그럼으로서 저는 구원받았어요."


"........."


"그 날 이후로부터 제 머리 속에는 주인님밖에 가득차질 않아서 항상 주인님을 따라가고 있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주인님의 시선을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어요."


눈치채고 난 뒤로는 항상 마음이 복잡했다.


내가 이 행복을 가져가도 될까, 내가 차지해도 되는 행복일까. 하고.


“당신이 웃고 있다면, 그 미소의 모든 이유가 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당신이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의 이유마저도 내가 이유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며 바라게 돼요.”


“...........”


"주인님을 좋아해요. 주인님의 모든 이유가, 다 제가 되길 바래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


"제가 주인님을 구원해드릴게요. 그래서, 제가 주인님의 모든 이유가 되어드릴게요."


울면서, 너무나 애틋하게 숨을 내쉬면서도 레아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그녀의 진심이 그에게 통하길 바라면서, 그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것 처럼, 그도 그녀로 하여금 구원받을 수 있길 원하면서.


“그러니, 주인님의 소원을 말씀해주세요.”


사령관이 눈을 감고는 이내 미소지었다.


'왜 나는 부딫히지 않았던걸까. 가능성은 가장 가까운데 있었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그 말을 들으면서 사령관은 자신의 이상을 눈치챘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어떠한 부정도, 의심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에서 진심을 보았으니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봐주었다는것.


평생동안 끌어안았던 트라우마에 대한 답을 이렇게 쉽게 찾아낼줄은 몰랐다.


"소원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네?"


"소원을 말하게 되면, 더이상 저는 소원을 이룰 수 없거든요."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주세요.












05 /





비가 내렸다.


예전처럼 거칠게 내리는 장대비가 아니라, 맑은 하늘에서 상냥하게 내리는 여우비가.


"주인님. 무슨 생각하세요?"


"당신 생각이요."


"어머."


"장난이에요. 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건 장난이 아니라도 괜찮은데요.."


언젠가 걸었던 능선을, 나는 레아와 같이 우산을 쓴 채로 거닐고 있었다.


"있죠. 저는 항상 봄비가 내릴 때 길을 거닐고 싶었어요. 이렇게, 주인님하고 둘이서만요."


"그렇군요."


"주인님은 그래서, 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비하면 저는 항상 거칠게 쏟아지는 소나기나 장대비만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렇게 상냥하게 내리는 비는, 머리속에 들어있지도 않았죠."


멸망전 사람들은 비를 문학에서 굉장히 많이 다루었고, 많은 의미를 부여했었다.


돌맹이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령관 자신 역시, 그 부여된 의미를 많이 사용했다.


"언젠가, 제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기억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비에 비유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비에 비유한다고요?"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받는건 비와 같대요. 사람이 비를 그치는건 불가항력이라, 그 모습이 마치 인생과 비슷하다 했죠. 그래서 비가 내리면 비를 그치려하지 말고 우산을 쓰거나 비를 피할 장소로 가라고 했죠."


"으음, 어려운데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여태 살면서 그럴 장소나 도구가 없어서 그저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을 걷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렇게 우산을 주울줄은 몰랐네요. 라고 마치자 레아는 눈을 말똥말똥. 몇 번 끔뻑이다가 이내 확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아, 스프리건의 주간 오르카 할 시간이네요."


사령관이 손에서 단말기를 꺼내 어플을 실행하자 화면에 스프리건이 가득 채워졌다.


'아,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간 오르카! 한달 반동안 작전으로 인해서 주간 오르카가 휴재였었죠! 하지마안~ 휴재한 만큼 더 알차고 꿀잼보장인 소식들이 있다는거!'


처음에는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전부 좋아하고, 스프리건 본인도 좋아하는 것 같아 안심이었다.


유흥거리가 얼마 없는 오르카호에서 이런 방송은 마른 가뭄에 단비같다. 어떤 브라우니는 이 방송을 '이 방송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렷!'이라고 말한다.


코너는 돌고돌아 가장 큰 관심을 얻는 주간 오르카로 향해 가고 있었다.


방송 제목이랑 똑같은데, 한 주간 오르카호에서 가장 큰 이슈를 top 5로 소개하는 영상이었다.


'대상의 1위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죠! 자는 사령관에게 키스하고 서로 잠든 오베로니아 레아와 사령관!'


""..................""


라면서 공개된 사진은 식당에서 잠든 사령관에게 입을 맞춘 레아의 사진과, 작전실에서 레아는 사령관의 어깨에, 사령관은 레아의 머리를 베고 잠 든 사진이었다.


".................이거, 밥먹고난 다음에 하셨던거에요?"


"에? 아니, 저, 어머, 그게 아니라."


"여태까지 날 이런 시선으로 보았던 거에요..?"


"아,아니. 그게 아니라, 어머 어떡해. 어떡해.."


"장난이에요."


사령관이 해맑게 웃자 레아는 우산을 든 사령관의 팔을 톡톡 쳤다.


자신은 힘을 빼고 쳤지만, 사령관에게는 은근히 아팠다.


과연, 광분한 리제를 제압한 괴력. 어쩌면 레아는 마음만 먹으면 사령관도 투포환던지듯 던져버릴 수 있지 않을까.


"잠든 사진이라..."


사령관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웃었다.


"제 소원은 이루어졌네요."


"네?"


"그 말대로, 이루어졌어요."


"그 소원이... 뭐였는데요?"


"제 소원은."








내 구원은, 그저 비를 피하는 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것.






내 소원은,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잠에 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