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7일


 망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일단 차분하게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깊게 한 모금 빨자 어제 일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분명, 사령관이랑 상반기 재무재표 마감 작업을 하고, 고생했다고 맥주를 마시고, 후…..




 머릿속이 복잡한데 뒤에서 칠칠맞은 사령관이 허둥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디 쏘아붙여주니 조용해졌다. 이 완벽한 내가 저런 팔푼이랑 한 침대에서 굴렀다니,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의 이름에 먹칠을 했군.




 한창 상념에 빠져 있는데 사령관이 은근슬쩍 가운을 가져왔다. 감기 걸린대나 뭐래나, 참 태평한 남자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음?”




 뭐지, 이런 말은 전에 들은 기억이 없는데. 애초에 이런 실없는 말을 할 놈은, 뒤에서 얼빠진 얼굴로 내게 커피잔을 건네는 저 얼뜨기 뿐인데.


그리고 인스턴트 커피라니, 미친 거 아냐? 설탕물이랑 다를 게 없잖아!




뭐, 제법 따뜻하고 달달해서 좋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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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


 어제도 사령관과 밤을 보냈다. 별 일은 아니었다. 그냥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부대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그냥, 몸을 섞었다. 딱히 절륜한 것도 아니고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닌데 왠지 자꾸 찾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레오나는 열심히 해 주니까 괜찮다고, 전부 완벽하게 해낼 필요는 없다고,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알비스와 베라가 보급계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받아 왔다.




 역시나 커피는 너무 달았다. 전형적인 싸구려 커피믹스의 맛이다.




 그래도 가끔은, 싸구려도 나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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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사령관에게 내가 마시는 커피 블렌딩 몇 잔을 맛보여 주었다. 이 칠푼이는 커피에서 왜 시큼한 맛이 나냐며 자신이 느낀 생경함을 감추지 못했다. 커피의 산미조차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니, 역시 이래저래 아쉬운 점이 많은 남자다. 그러니 제발, 그 사람 좋은 미소로 속 편하게 날 칭찬하는 것도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이것저것 커피에 대해 가르치다 보니 둘 다 생각 외로 커피를 많이 마셨다. 잠 안 오는 밤을 또 함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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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1일


 오드리에게 부탁한 옷이 완성되었다는 메시지를 받고 찾아갔다. 그녀는 다른 시스터즈라면 몰라도 내 옷을 디자인할 줄은 몰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안 그래도 사복이 필요한 참이긴 했다.




 얼떨결에 주문한 원피스 외에도 구두랑 액세서리까지 덤으로 받았다. 우아한 절제미가 내 패션 코드에도 잘 맞는 것 같다. 마음에 든다.




 내일은 사령관이랑 저녁을 먹기로 했다. 조금은 기대가 된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발키리한테 최근 내가 인스턴트 커피를 많이 먹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 머리 굴릴 일이 많아 당이 떨어져서라고 말해줬다. 뭐, 사실이니까. 그래, 그것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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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기분이 더럽다. 이 내가 직접 사령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발키리랑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발키리 그 녀석도 왠지 나를 슬슬 피하는 눈치다. 짜증나……




 오늘 저녁은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데리야키 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다. 소완은 모처럼 화이트 와인이 잘 숙성되었다며 내게 한 잔을 권했다. 하지만 저번 식사 때 먹은 것보다 살짝 바디감이 과했다. 아니면 내 미각이 날카로워져 있거나.




 식사를 마치고 몰래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의외로 뒷맛이 쌉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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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그래, 솔직히 내가 사령관에게 너무 심한 말을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사령관의 제안은 놀랍도록 멍청하고 비효율적이었다. 물론 사령관이 내 힐난에 눌려 울 듯한 얼굴이 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지휘관들이 뭐라고 내게 고함쳤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머리 아파……




탕비실에 비치된 인스턴트 커피도 모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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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그 동안 사령관과는 업무 외적으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즐거웠던 커피도, 음악 감상도, 전과 달리 큰 감흥이 없다. Ai 스피커의 추천 목록에 언제부턴가 멍청할 정도로 하늘하늘한 노래들이 섞여 있었다.




 보급계에 인스턴트 커피에 대해 문의했더니 소완이 감미료 대신 사용하느라 배급이 지체될 것 같다고 했다.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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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난 바보 천치 머저리 같은 년이야.




 발키리에게 모든 설명을 들었다. 그녀는 근 40일 동안 사령관의 부탁을 받고 이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커피 원두를 수급하러 간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사령관, 미안해……내가 너무했어……용서해줘…..(눈물자국)




드립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넣어보았다. 달달하고 부드럽지만, 그 특유의 저렴한 맛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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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사령관은 업무 외적인 시간에 도저히 만날 방법이 없었다. 일이 끝나도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다른 애들 증언으로는 툭하면 식당으로 간다던데……




 소완에게 물어봐도 묘하게 언짢은 표정으로 자기도 잘 모르는 일이라고만 한다.




 인스턴트커피 재보급은 기약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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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사령관에게 내일 저녁에 식당으로 와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조만간 인스턴트 커피 재보급이 시작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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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오전.


 오드리에게 긴히 부탁해서 작정하고 세팅을 받았다. 그녀가 이유를 궁금해 하기에 사령관을 혼내주러 간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부티끄에 보관하던 드레스와 구두에 메이크업까지 무상으로 지원을 받았다.




“Bonne chance”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내게 저 말을 건넸다.




보급계 요청 목록에 인스턴트 커피가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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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야심차게 식당으로 들어간 날 맞이했던 건 다름아닌 사령관이었다. 그것도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바리스타 복장도 차려 입은 채였다. 잔뜩 폼을 잡으며 내 자리 앞에 놓인 커피잔에 커피 비슷한 무언가를 부었다. 나는 우유도, 설탕도 붓지 않고 그대로 한 모금 마셨다.




“어, 어때….?”




“쓴맛 60 향 60, 산미 50. 흙탕물 수준은 간신히 넘겼네.”




“아, 그, 그래?”




“못 믿겠으면 한 번 직접 마셔보든가.”




“응? 으,응.”




 커피잔에 손을 대려는 사령관의 넥타이를 잡아 끌고, 내가 머금고 있던 커피를 맛 보여 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커피란 원래 온도가 조금만 변해도 그 풍미가 달라지는걸.




“으, 으흣….”




“어때?”




“달다……”




“한심하긴….”




“원래는 진짜 완벽한 커피를 만들어서, 평생 내가 끓여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대실패네.”




“우우우……”




“나한테 이런 걸 먹이다니, 어떻게 책임질거야?”




“아으으으…..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끓여줘, 커피.”




“으, 응?”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앞으로 평생, 나만을 위한 모닝커피를 끓여줘. 또, 직접 갖다줘. 그리고,”




 사령관의 손목을 잡고, 내 방으로 달려갔다.




“보통 커피는 식후 디저트라지만, 내가 배가 고파서 말이야. 메인 디쉬는 내 방에서 먹어야겠어.”




“?!?!?!”




그 날의 만찬은, 무려 3코스까지 이어졌다.


 


새벽중에 일어나서 폰을 보니, 탕비실에 인스턴트 커피를 채워 놓았다는 알비스의 보고가 날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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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잠수함도 계절의 변화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나 보다. 미묘하게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커피도 점점 더 빨리 식어버리네.




“추워, 감기 걸릴라.”




 그 사람이 커피를 건넸다. 적어도 식품의 영역에는 도달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