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헤헤…”

 

거창한 서약식이 마무리된 직후, 나와 리앤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나의 개인 휴식실에 도착했다. 나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헤실헤실 웃는 순박한 얼굴은 없던 애정까지 샘솟게 하는 것 같다. 물론 리앤에 대한 애정은 넘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지만.

 

“그렇게나 좋아?”

 

“그럼 안 좋아하면 좋겠어? 왓슨?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왓슨한테 받은 반지인데 어떻게 안 좋을 수가 있겠어.”

 

“그래도 그렇게까지 좋아해줄 줄은 몰랐는데…”

 

“그만. 거기까지.

왓슨, 한 마디만 더 하면 진짜 수갑 채워버릴 거야.”

 

“… 이미 채우고 있잖아.”

 

“그건 우리 왓슨이 어디 도망 못 가게 하려고 그런 거지.

오늘은 쭈우욱 나랑 같이 있어줘야 되니까.”

 

“수갑 없어도 어디 안 갈꺼거든?”

 

“우리 왓슨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인지 모르나 봐?

오르카 호에 왓슨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리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저런… 우리 왓슨은 어쩜 이렇게 나를 모를까아?

그 VR 세계에서 내가 누구였는지 다 까먹은거야?”

 

“하긴, 초천재 미소녀 형사님이라면 이정도는 다 알 수 있는 건가?”

 

“으… 

서약까지 했는데 굳이 그런 부끄러운 수식어를 붙여야 되는 거야?”

 

조금은 장난끼 있게 한 내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리앤이 대답했다. 나와 처음 만난 순간 들었던 프라이드 넘치는 자기 소개는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안되겠어. 

이런 왓슨한테는 수갑 하나로 안심할 수 없어.”

 

갑자기 자신의 허리춤에서 수갑을 하나 더 꺼내 자기 손목과 내 손목을 같이 체포해 버렸다. 이미 내 팔과 자신의 팔을 하나씩 수갑으로 사이 좋게 연결해 놓았으면서 남은 팔마저 무자비하게 가져가 버렸다.

 

“히히히. 잡았다~

장난치는 사령관한테는 리앤이 특별감시를 해야겠어.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나한테서 도망 못 칠 거야. 왓슨.”

 

“도망칠 생각 안 했다니까…”

 

솜씨 좋은 리앤이 하나 남은 팔로 요령 있게 수갑을 채웠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했던 모양인지, 수갑을 채우면서 리앤의 무게 중심이 내 쪽으로 쏠려버렸다. 결국 우리 둘 다 침대 위에 눕는 모양새가 됐다. 그러다 보니 나를 덮치는 꼴을 하고 있는 리앤과 함께 신혼 부부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양 팔과 리앤의 양 팔이 서로 하나씩 수갑으로 채워져 있었고, 수갑만 채우고 있기에 어색했던 우리 둘은 서로 동시에 서로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런데 리앤. 언제까지 왓슨이라고 할 거야?

이제 결혼도 했는데 나를 불러줄 다른 호칭이 있지 않아?”

 

 

“… 헷?!

버… 벌써 그런 호칭을 하기에는 조금…

… 이르지 않나?

 

“이르기는? 이미 우린 부부잖아.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 않은가 한데?”

 

“부… 부부라니…”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리앤은 나를 쳐다보던 고개를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내 손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리앤의 온기가 조금 더 잘 전해지게 되었다.

 

“그… 그럼 왓슨이 먼저 말해줘 봐…

부부라면… 여자한테도 호칭이 있잖아…”

 

 

부끄러워도 나를 열심히 올려다 보면서 말 하는 리앤을 보고 나도 답했다.

 

“사랑해요. 자기.”

 

 

… 리앤 얼굴이 펑 터져버렸다. 전에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얼굴이 정말 병 난 거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빨개지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뒤 조금 있다가 자기 팔을 버둥거리면서 부끄러움을 온 몸으로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놓지 않았다.

 

“… 엩?!

자… 자기라니… 그… 그런 거….

 

 

왓슨은… 이런 상황 익숙… 한가 봐?...”

 

 

“으… 안 익숙해!

나도 지금 엄청 부끄럽거든? 리앤?

그래도 리앤이 원한다니까 열심히 한 건데 그렇게 반응하면 나도 섭하다고.”

 

“아… 알았어.

그럼… 한다…”

 

 

리앤은 입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오물거리면서 뱉을 말을 속에서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녀의 땋은 갈색 머리가 유난히 찰랑거린다.

 

“나도… 사랑해요. 여보…”

 

 

 

 

… 날아갈 뻔한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리앤은 말을 하자마자 내 품 위로 드러누워버렸다. 그러면서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부끄러워서 좌우로 막 흔드는데, 그러면서 흔들리는 리앤의 머리카락이 달콤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진짜 고문이 따로 없다. 너무 행복한 고문.

 

“저… 리앤?

그래서 수갑은 언제쯤 풀어줄래…?”

 

 

“으… 왓슨. 진짜 분위기 깨는 건 수준급이야.

 

… 그거… 한 번만 더 말해주면 풀어줄게…”

 

“그거?”

 

“… 방금 말한 거…

한 번만 더 말해줘…”

 

 

“알았어…

… 자기야… 으엑!”

 

‘자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리앤이 다시 자신의 팔을 버둥거리면서 내 몸 위에서 난동을 피운다. 난동… 이라기에는 귀여운 난동이지만 자기 팔이랑 내 팔이 연결되어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리앤의 팔에 따라 내 팔도 같이 흔들리니까 조금 아팠다.

 

“후우… 후우…

그럼 조금만 기다려. 왓슨.”

 

어떻게 하는 건지, 두 손 다 수갑에 채워져 있으면서 어떻게든 수갑을 풀어냈다. 덕분에 내 손이 좀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수갑에서 풀려나는 그 순간 리앤이 다시 내 손에 깍지를 껴서 결국에는 아까랑 별로 다를 게 없어졌다. 그러면서 내 몸에 얼굴을 부비대고 있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리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3분은 더 이러고 있을래.”

 

“3분… 애매하네…

왜 그런 지 말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니까.”

 

“응?”

 

 

 

“… 너무 좋으니까!

부끄러울 만큼 좋은 걸 어떡해!

왓슨이 반지를 준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계속 상상했는데,

그게 얼마나 좋을 지도 열심히 머리 굴려서 생각했는데,

그거보다 더 좋은 걸 나보고 어떡해!”

 

갑자기 날 쳐다보면서 듣기에 부끄러운 말들을 마구 쏟아낸다. 이걸 좋아해야 되나, 당황스러워 해야 되나, 갈피를 못 잡겠다.

 

“으… 나 같은 천재 형사님의 머리를 쓰게 만든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왓슨은 모르지?

게다가… 내 예상을 훨씬 웃도는 행복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주다니…

이런 건… 상상도 못했다고…”

 

 

리앤의 말이 너무 귀여워서 팔로 리앤을 꽉 끌어 안을 수 밖에 없었다. 리앤의 멜빵 사이로 손을 집어 넣어 팔 전체의 리앤의 몸을 만질 수 있었다. 서약식 때 긴장했었는지, 와이셔츠가 온통 땀으로 젖어 있다. 리앤의 와이셔츠에 닿고 있던 내 몸이 전부 리앤의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간다. 그런데도 그리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 뻗어버리면 곤란한데요? 초천재 형사님?

그 동안 못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정말이지… 사령관은 나쁜 남편이란 말이야…

… 말은 그렇게 해도 다른 애들이랑 엄~청 하고 다녔지?

왓슨하고 하룻밤 잔 여자만 해도 여기 수두룩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 알고 있었어?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애들이 워낙 열심히 해주니까 포상 같은 거로 해줬던 것도 있고… 또 그… 나도 열심히 해주면 애들이 좋아해주니까 기뻐서…”

 

“알아. 나도 왓슨이 다른 애들 좋아해주는 거 고맙고 그래.

나 혼자만 왓슨을 독차지 하는 건 욕심인 거 나도 다 알지.

 

그치만, 유일하게 서약까지 해준 여자를 그냥 넘어가는 건 아무리 마음씨 넓은 이 천재 형사님도 못 참겠는 걸?

 

리앤이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동시에 귀여운 분위기를 품으며 나를 따뜻하게 감싸준다. 팔로는 내 목을 지그시 누르면서 두르고, 다리로는 내 허리를 힘있게 안는다. 리앤의 땀이 내 몸까지 적시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야…?”

 

“뭐… 어제도 다른 애들이랑 놀았었지? 대충… 8명 정도?”

 

“그… 그건 어떻게 안 거야…”

 

“후훗,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는 거야. 

그러니, 날 9명분 만큼 사랑해주면, 용서 해줄께.”

 

그러면서 내게 키스를 했다. 그것도 아주 진한 딥키스를. 갑자기 들어오는 리앤의 혀에 당황스러웠지만, 9명분 만큼 사랑해줘야 하는 내가 고작 이 정도로 당할 수는 없다. 나도 리앤의 이 위를 혀로 핥으면서 공격했다. 서로의 숨이 입과 혀를 통해 빠짐 없이 왕복하기를 1분. 이젠 리앤의 입에서 들어오는 축축한 숨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진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다. 숨쉬는 것이 불편해질 정도의 딥키스가 더 진행될수록 나도, 리앤도 표정이 몽롱해졌다. 그렇게 내가 항복하기 직전에, 리앤이 먼저 손을 들었다.

 

“켁켁… 항복, 항복이야.

정말이지… 왜 이렇게 잘하는 거냐고… 왓슨…

이 정도면 반칙 수준이야…”

 

리앤과 내 혀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타액이 실처럼 들어졌다. 그것이 서로의 입 주변을 적셨지만, 우리 둘 다 굳이 그것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저 날 공격한 건 리앤인데 그러기야?

그리고 이제 9명분의 사랑을 주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야지.

이제부턴 리앤이 각오할 차례야.”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리앤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한 쪽엔 리앤의 팔을, 또 다른 쪽엔 내 팔을.

 

“사… 사령관… 아, 아니… 왓슨?

눈빛이 조금 무섭… 꺄앗?!”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귀엽게 날 도발했던 리앤을 봐줄 생각은 없다. 이미 다리로 내 허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을 때부터 내 아랫도리는 터질 듯이 커져 있었다. 이젠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왓슨..? 그렇게 큰 건….

꺄윽!....”

 

리앤의 옷 너머로 질척거리던 것이 땀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서약까지 했겠다. 그녀와 나를 방해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사라졌다. 이 해방감이 나를 더욱 흥분시켰다. 아마 오늘은 밤이 굉장히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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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좋겠어.

그나저나 사령관. 그 형사와 너무 꽉 붙어 다니는 거 아니야?”

 

“레오나? 갑자기? 여기서?”

 

“갑자기가 아닙니다. 각하.

요즘 각하의 모습은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리앤이라는 분만 너무 편애하시는 것 아닌지…”

 

나와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레오나와 마리가 갑자기 리앤에 관해 물었다. 지금 회의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지라 간단하게 메이, 아스널, 칸, 레오나, 마리, 무용,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 명만 모여 의논하는 자리였다. 우리들이 부관들이나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의견도 무시한 채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무자비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이런 자리에서는 간단하게 부식 보급이나 소탕된 철충 등의 정보만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리앤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것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사령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부하들도 요즘 들어 사령관이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어진 것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페더가 특히 더 그러더군.”

 

“그래.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의견을 좀 말해보도록 하지.

그대도 이제 자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야 그대가 어찌 하든 별로 상관 없다만, 그대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이 여기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았나?

그리고, 나도 상관 없을 뿐이지, 요즘 들어 그대가 나를 상대해준 날이 거의 없지 않았나.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은 조금 슬프다네.”

 

“흐음, 사령관. 지금 대충 분위기 보면 알겠어?

이 멸망의 메이 님이야 사령관이 어찌 하든 별로 관심 없지만, 조금은 상황에 대해서 냉철하게 판단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애들 얼굴에 그늘지는 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구.

 

… 다시 말하지만 난 별로 신경 안 써. 그냥 부하들이 걱정돼서 한 소리야.”

 

 

“그런가… 내가 요즘 너무 심했나…”

 

“… 소관도 한 마디 해야겠소. 

그대가 기뻐하는 것 같아 아무 말 없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어떤 위치에 있는 지는 생각해주면 좋겠소.

최근 몇 달 동안 부관직을 그 리앤이라는 자 이외의 바이오로이드에게 맡긴 적이 있소?”

 

“어…

없었어…”

 

“그럼 잠자리는 어떻소?”

 

“그것도… 좀… 그랬지…”

 

“후우… 그대가 그 자에게 하사한 서약 반지가 유일한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오?”

 

“알기는… 알지…”

 

“그럼 그 서약이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해보았소?”

 

“아뇨… 안 해봤습니다…”

 

“하아… 무릇 서약이라는 것은 그대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명예와 같은 것이오. 

그대가 가장 사랑하는 자, 그대가 가장 함께 하고픈 자. 

그리고, 그대가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자.

서약이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심지어 여러 명도 아닌 단 한 명에게 서약을 했다니,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 알겠소?”

 

“넵… 잘 알겠습니다.”

 

“그 리앤이라는 자가 그대에게 귀한 존재라는 것은 이제 여기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요.

그러니 이제 이전처럼 우리 모두를 동등하게 사랑해주면 좋겠소.

그것이 사령관 된 자의 의무이자, 내 주군된 사람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대가 알아주길 바라오.”

 

“…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리앤을 보러 갈 생각에 가득 차있었던 나는 갑작스러운 지휘관들의 공세에 맥을 못 추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논리 정연한 말들을 들으며 혼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손이 공손하게 앞으로 모아진다. 이미 회의는 끝나고도 남았을 시각. 거의 1시간 가량을 붙잡혀서 혼나고 있었다. 특히나 레오나와 무적의 용이 내게 큰 실망감을 비췄다. 서약이란 것이 이 아이들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었던가… 지휘관들이 저렇게까지 분노하고, 또 슬퍼하는 모습에서 차마 몰랐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계속 혼나고 있던 찰나에 회의실 문이 조금 슬쩍 열렸다. 우리들 중 아무도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지휘관님들…? 괜찮으신 가요…?”

 

리앤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신나게 뛰어가 안아주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 회의가 너무 오래 걸리시길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해서… 헤헤”

 

우리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리앤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특유의 순박한 웃음으로 지금의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지휘관 회의 시간인 거 몰라?”

 

메이가 사납게 쏘아 붙이며 말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아니라는 애가 뭘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어?

머리 똑똑하다는 애가 상황 파악이 안 돼?”

 

“저… 메이.

너무 그러지는 마.”

 

가만히 두면 계속 쪼아댈 것 같아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물론…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

 

“후우… 사령관.

사령관도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이 안 되나 봐?

지금 상황에서도 쟤만 감쌀 셈이야?

그래, 쟤만 중요하다 이거지?”

 

… 평소에 메이가 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 붙인 적은 없었다. 리앤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가 직접 리앤의 얼굴을 보니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지금 지휘관급 회의 하는 걸 쟤가 몰랐을까?

아니, 몰랐다고 해도 지금 여기 들어오는 게 말이 돼?

사령관이 맨날 쟤만 감싸고 도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어?”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냥 내가 좋으니까 냅두라고 말하면 다 해결될 문제지만, 그랬다간 리앤만 편애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레오나가 메이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쯤 해. 메이. 사령관한테 무슨 예의야. 그게.

그리고 사령관. 지금 리앤의 태도는 우리가 나중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겠어.

아무리 사령관과 서약한 자라고 해도 지휘관급 회의에 이렇게 마구 나타난 건 그냥 두고 갈 사항이 아니야.

심지어 긴급 상황이었던 것도 아니고, 단순히 사령관이 걱정돼서 그랬다는 개인적인 사유라니.

말도 안 되지.

아무튼 또 사령관에게 맡기면 솜방망이 처벌로 끝날 것이 뻔하니 그래도 되겠지?”

 

“그… 그래. 허락할게.”

 

“그럼 이쯤에서 회의는 마칠게.

나부터 먼저 일어나도 되지? 사령관?”

 

“굳이 내 허락 받지 않아도 되잖아…”

 

“글쎄? 우린 누구랑 다르게 서약을 못 받아서 말이야.”

 

레오나는 나를 차갑게 쏘아 보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아스널 만큼은 아니지만, 여장부로서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수많은 전투에서 의지가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였다. 어깨를 피고 멋드러지게 팔짱을 낀 채로 회의실 문 밖을 나가는 레오나는 그와 상반되게 어깨를 수그린 채로 덜덜 떨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리앤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어찌나 새게 쳤는지 리앤이 복도에 나뒹굴 정도였다.

 

“그럼. 각하. 저도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저희 이야기를 간청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마리는 말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악의가 느껴졌다. 아마 리앤이 다시 일어났다면 마리는 또 다시 어깨로 리앤을 쳤을 것이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이는 비단 레오나와 마리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호탕하던 아스널도, 무뚝뚝하게 나를 좋아해주던 칸도, 메이도, 무적의 용도, 전부 소름 끼치는 분위기로 회의실을 나갔다. 그녀들의 태도는 분명 사령관에 대한 위협이었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질투… 같은 감정이었던 것일까? 나에 대한 적개심 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왓슨… 괜찮아?”

 

그녀들이 모두 나간 후, 복도에 넘어져 있었던 리앤은 다리를 털며 일어나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저 회의가 너무 오래 걸려 걱정되었던 마음에 왔을 그녀였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나였어도, 차마 리앤을 지켜줄 수가 없었다. 지휘관들의 행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도 리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아… 리앤이구나.

미안. 갑자기 너무 큰 일을 당하게 했네…”

 

“아냐아냐… 나도 잘못한 게 있는 걸.

회의 시간에 문을 연 건 월권 행위로도 이어질 수 있는 거니까 지휘관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어.”

 

“… 그럼 리앤.”

 

“응? 왜, 왓슨?”

 

“지휘관들이 왜 저런 건지 혹시 짐작 가는 거 있어?”

 

 

리앤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내 얼굴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말 없이 있었던 리앤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천재 형사님도 모르는 게 있구나.”

 

“…히히. 나도 전부 아는 건 아니야. 왓슨.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분위기가 이렇게 험악했던 거야?”

 

 

“…그러게 말이야.

미안해…”

 

 

“어머? 갑자기 그렇게 껴안으면서 말하면 반칙이야, 왓슨.

하여간 애정행각이 과한 남편이라니까.”

 

 

 

“…”

 

“... 진짜 무슨 일 있던 거야?

왜 그래? 말도 없고…”

 

“아니… 그냥. 그냥 피곤해서.”

 

리앤의 품 안은 따뜻했다.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던 감정들이 리앤과 함께라면 느껴질 수 있었다. 친구와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는 포근함. 순수함. 그런 것들을 사령관이란 자리에서 있으면서 너무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리앤은 내게 그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는 리앤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 너무도 많이. 그게 독이 되어버린 걸까?

 

“…리앤?”

 

“… 왜 불러, 여보…”

 

“이젠 그 말도 자연스럽게 해주는구나…”

 

“여보가 힘이 없을 때 이렇게 말해주면 좋다고 했잖아.

… 그냥… 그래서 그랬던 거야.”

 

“그래? 고맙네…

오늘은 그냥 이러고 안고 있으면 안돼?”

 

“그래. 그냥 이러고 있자.

나도 오늘따라 이러고 싶네…”

 

리앤도, 나도, 오늘따라 힘이 없다. 그냥 말없이 불 꺼진 회의실에서 서로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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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만 사랑 받아? 왜? 왜 너만 사령관을 독차지 하는 거야?”

 

‘아냐… 난…’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리랑 똑 같은 토모였으면서! 나도 토모고, 너도 토모였는데,

대체 왜! 왜 너만 사랑 받는 거냐고!’

 

‘아니야… 아니야… 나만 사랑 받는 건 아니야…’

 

‘… 그래, 계속 그렇게 발버둥 쳐봐. 그럴수록 너만 힘들어질 테니까.’

 

‘제발… 난 아니라고…. 허억!”

 

리앤은 요즘 들어 자꾸 때 아닌 악몽을 꾸었다. 유독 사령관이 힘들어 보였던 그 날, 사령관은 갑자기 당분간 서로 각방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며 제시했다. 사랑하던 사람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리앤이었기에 처음에는 극구 거부했지만, 이상하리 만치 슬픔에 찬 사령관의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기를 감싸주던 사령관이 없어져서 그랬던 것일까, 그 날 리앤은 유독 이불을 두껍게 하고 잤다. 분명 창문을 닫고 잤을 텐데 왠지 모르게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굳이 사령관과 거사를 치루지 않더라도 언제나 자신을 안아주며 잠을 잤던 사령관. 리앤은 그 사령관이 얼마나 찬 바람을 맞으면서 잤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아, 하아, … 지금 몇 시지?”

 

시계는 늦은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깜깜한 밤. 간만에 물 위로 올라온 오르카 호여서 창 밖으로는 밝은 달이 빛나고 있었다. 

 

“… 다시 자야겠지… 

춥다… 

왓슨… 괜찮은 거 맞지...?”

 

잠들기 전에도 속으로 몇 번이나 사령관을 걱정하던 리앤이다. 갑자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지휘관들이 사령관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인 건 아닌지, 온갖 걱정거리들이 생겨났다. 몸도 춥고, 걱정까지 가득한 상황에서 그녀가 잠들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결국 한 숨도 못 잔거야?

내 꼴이 말이 아니네…”

 

결국 리앤은 밤을 지새웠다. 잠에 들려고 하면 사령관이 생각나고, 왜 각방을 쓰자고 한 건지 걱정되고, 혹시 자신이 싫어진 것 아닌지 생각이 들고, 이러니 잠에 들지 못할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좋은 머리는 그녀의 걱정거리들을 더 생생하고 사실감 넘치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녀도 답답할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밤을 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리앤은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건가…?

일단 씻어야…

아, 나 아직 부관 아니지… 헤헤…”

 

사령관과 각방 쓰는 것은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부관까지 다른 바이오로이드에게 넘기는 것은 리앤도 싫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 사령관을 빼앗기는 느낌. 그 느낌이 자신의 등골을 소름 돋게 타고 흐를 때 그 감정이 리앤은 너무나 싫었다. 사령관이 다른 아이들과 밤을 보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 때는 누구나 사령관에게 동등한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껴있는 반지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택 받았다는 기쁨, 그 고양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보물이었지만, 지금은 선택 받은 자신이 버려졌다는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요물이 되었다. 사령관과 함께 밤을 지새웠던 그 수많은 기쁨의 나날들이 생각날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가 원망스러웠다.

 

“… 남편… 그렇게 불러주면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그래줄까?...”

 

사령관과 떨어진 지 벌써 몇 달은 되었을 것이다. 그 동안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의 주인에게 가 그간 받지 못했던 사랑을 한 번에 받고 있다는 사실은 리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차례가 오기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몇 개월간 사령관을 독점한 죄, 그 죄의 값은 너무나 무거웠다. 함께하던 그 순간들은 너무나 쏜살같이 지나갔지만, 그 후유증은 끈질길 정도로 오래 갔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할까? 여섯 달? 아홉 달? 아니, 일 년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부관으로나마 사령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령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리앤은 충분했다.

 

“잠깐만… 잠깐만 나갔다 와야겠다...”

 

리앤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깔끔한 와이셔츠에 몸매를 부각시켜주는 정갈한 멜빵, 시티가드 표식이 새겨진 옷을 허리에 두르고 검은색 바지를 입던 시절은 꽤나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옷은 나름 정장인 셈이라 회의 같은 것이 아니라면 리앤도 그렇게 입고 다니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꽉 끼는 옷은 자신도 싫었던 것이라. 하지만 사령관이 그렇게 입는 걸 너무 좋아했던 터라 내색하지 않고 입고 다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도 없게 되었다.

 

 

 

 

“어머? 저 분이라면서요? 사령관님을 혼자 좋다고 독차지 했다는 분이?”

 

“그러게. 원래는 토모였대요. 어쩌다가 생긴 돌연변이면서 사령관한테 서약이나 받고, 좋았겠어요.”

 

“조용히 해! 듣겠다. 듣겠어.”

 

 

리앤은 어디서 누가 하는지 모를 험담을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런 것이 딱히 상처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왓슨은 왜 나를 선택한 거야? 다른 이쁜 애들 많은데?’

 

‘글쎄… VR 세계 속에서 같이 있던 게 너무 좋았거든.’

 

‘그게? 어째서?’

 

‘그러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나도 몰르겠다.’

 

 

 

사령관과 단둘이 속닥거리던 것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던 때에, 그 때 사령관과 이야기했던 것을 리앤은 떠올렸다. VR 세계 속에서의 기억. 그것은 사령관과 자신. 둘 만이 공유하고 있던 기억이자 추억이었다. 어쩌면, 그 추억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사령관에게 서약 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추억이 이제는 고통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령관과의 비밀이라는 이야기는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이 모른다는 뜻이고, 그런 배경 지식이 없을 때, 원래 오르카 호를 지키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리앤은 뜬금 없이 들어와 자신들의 소중한 사령관을 빼앗아간 자로 보였을 것이다. 비록 자신들이 서약 반지를 받을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지라도 리앤에게 반지를 주는 선택은 그리 현명한 것은 아니었다. 통찰력이 있는 리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사령관과 함께 했던 추억이, 사령관이 주었던 사랑이 너무나 달콤해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리앤은 오르카 호 내부의 구내 식당으로 갔다. 사령관과 떨어진 기간 동안 처음에는 슬픔으로, 그 다음에는 좌절감으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기에 그녀가 식당에 가는 것은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그랬던 것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까닭도 있었다.

 

 

“… 고마워요. 소완 씨”

 

“그만하면 되었사옵니다. 그냥 밥이나 잘 챙기시지요.”

 

오늘은 왠 일인지 그 비싼 소완이 직접 자신의 밥을 챙겨주었다. 딱히 친했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나와서 만나는 몇 안 되는 바이오로이드였다. 

 

“소완 씨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어머, 그게 눈에 보이셨습니까?

역시 형사 역할을 하시던 분의 눈을 속이지는 못하는 군요.”

 

어쩐지 소완이 유난히 친절해 보이더라. 뭔가 좋은 일이 있어 저러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는 리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소첩이 주인을 독대하는 아주 귀중한 날인지라 얼굴이 좀 풀어진 모양입니다.

그럼 아무쪼록 식사를 잘 즐기시고 가시길.”

 

 

소완은 앙칼진 눈으로 자랑하듯이 말하며 리앤에게 밥을 주고 떠나갔다. 오늘은 소완이 사령관의 부관을 하는 날이다. 그리고 내일은 리리스가 할 것이다. 그 다음 날은 레오나가, 그 다음은 아스널이… 굳이 탐정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리앤이 부관에서 내려온 이후부터 사령관의 부관 스케줄은 지휘관과 일부 바이오로이드들이 조절하고 이를 공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관 역할을 지휘관들과 콘스탄챠 같은 바이오로이드들이 돌아가며 진행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결국 이들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까지 포함하여 부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했고 이를 공식적으로 함 내에 알리기 시작했다.. 사령관의 부관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수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자신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마다 사령관은 그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리앤은 그 칭찬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스케줄 표에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몇 달이나 사령관의 부관을 독차지 했던 과거의 업보 때문에 그 누구도 스케줄 표에 리앤의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리앤의 이름을 올리는 것을 공식적으로 반대하기도 했다. 메이와 일부 바이오로이드들이 혼자 몇 달이나 사령관을 독차지했다는 것을 문제 삼아 부관 자격을 영구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나, 사령관이 기지를 발휘해 그것까지는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리앤은 건너 건너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리앤은 사령관을 만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사령관의 직속 명령을 받는 개체 중 하나였기에 간간히 얼굴을 회의 시간에나마 볼 수 있었지만, 그조차 보기 싫었던 바이오로이드들 때문에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신도 그녀들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웃으며 받아들이긴 했지만, 사령관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자신의 방에 돌아가 하루 종일 울음으로 침대를 적셨다. 정말로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알 수 있다면, 리앤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찟기고 찟겨서 그저 움직이는 기계가 된 느낌이었다. 좋아하던 일도 손에서 땐지 오래였다. 그녀의 소원은 그저 딱 하나. 사령관을 다시 한 번 보는 것이었다.

 

“미안해, 왓슨…. 내가 잘못했어…

제발… 다시 한 번만 보게 해줘…. 제발….”

 

울컥거리며 밥을 넘기는 느낌이 싫어 오늘도 리앤은 밥을 남겼다. 아마 소완이 싫어했을 것이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뺀 적 없었던 반지가 유난히 빼고 싶었다. 그것을 끼고 있던 네 번째 손가락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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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 이제 좀 기운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응? 레오나? 왜? 나 멀쩡하잖아?”

 

“멀쩡하긴… 얼굴 좀 봐.

다크 서클이 아주 볼까지 내려왔구만…”

 

“아… 이거?

그냥 밤에 잠을 좀 못 자서…”

 

“어떤 인간이 잠 좀 못 잤다고 그렇게 되겠어?

뭐가 문제길래 그래?”

 

“아… 아냐. 그냥… 요새 좀 피곤한가 봐…”

 

“으이구… 일도 내가 거의 처리해주는데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 몰라.

좀 쉬고 있어. 일은 내가 마무리 지을게.”

 

“… 언제나 고마워. 레오나.”

 

“어머?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시네? 우리 사령관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

 

“무슨…. 내가 말도 못한다. 진짜.

그냥 고마워서 그래.”

 

“…사령관은 이미 내게 충분히 어울리는 남자야.

굳이 그런 말 안 해줘도 돼.”

 

“… 그래? 나도 많이 컸네… 진짜…”

 

“후우… 내가 이렇게까지 칭찬을 해주는데 왜 이리 기운이 없어?

어쩔 수 없지…”

 

“… 응?”

 

“사령관. 내가 사령관이 원하는 거 하나만 들어줄게. 어때?

이거만 좀 기운이 날까?”

 

“… 어?! 소원?”

 

“그래, 이제야 얼굴이 좀 피는구나?

뭘 그리 원했길래 그래? 우리 사령관?”

 

“그…. 아냐.

나중에. 지금 말고 나중에 쓸 수 있을까?”

 

“뭐, 원한다면.

대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잘 판단해 주면 좋겠네.”

 

 

내 얼굴이 펴지는 것을 본 레오나는 다시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소원권이라… 순간 리앤과 부관 역할을 바꿔줄 수 있겠냐고 물어볼 뻔 했지만… 그랬다간 레오나가 세상 차가운 눈빛으로 날 쳐다볼 것이 뻔했다. 그런 소원… 안 비느니만 못하다. 

 

그래도… 리앤이 너무 보고 싶었다. 그 때 지휘관들과 회의를 하던 그 때, 내가 좀 더 강하게 나갔어야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부관 자리를 바꾸겠다고 했을 때 명령권이라도 써야 하지 않았을까? … 모르겠다. 난 이 아이들 모두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리앤을 너무, 진짜 너무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버텨야만 했다. 리앤의 연인으로서의 나보다 사령관으로서의 내가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으니까. 리앤 한 명을 위해 오르카 호 전체를, 나아가 인류 재건이라는 희망 자체를 짓밟을 수는 없었다.

 

“… 레오나.”

 

“응? 왜, 사령관?”

 

“혹시…

잊고 싶은 기억 같은 게 있었어?”

 

“흠… 이거 진지한 거야? 아니면 장난이야?”

 

“진지하게 묻는 거야.”

 

“… 있지. 왜 없겠어.

알비스가 하얀 눈밭에서 피를 쏟았던 기억이나, 어디선가 날아온 저격에 눈 앞에서 발키리의 머리가 터져버린 기억이나…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무참히 져버렸던 기억. 

그런 것들을 잊을 수 있다면 좋겠네.”

 

“그럼,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어?”

 

“글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잊고 싶을수록, 잊겠다고 생각할수록 기억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거니까.”

 

“그런가…

어떻게 해야 그걸 버틸 수 있을까?”

 

 

 

레오나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낸 것인지 대충이라도 감을 잡았기 때문이겠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반응할 힘도 없어진 느낌이다. 

레오나는 대뜸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후우… 기억을 없앨 수는 없었어. 그건 그들의 지휘관으로서도, 평범한 바이오로이드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니까.

그래서 그냥 다른 기억들을 만들었어. 알비스가 무슨 초코바를 좋아했더라, 안드바리는 창고에 얼마나 자원이 쌓여 있어야 안심했던가, 그렘린이 기계에 무슨 별명을 붙여주던가… 뭐 이런 것들 말이야.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은 사령관이랑 함께 했던 기억이야. 사령관과 같이 지휘하고, 차를 마시고, 밤을 보냈던 그런 기억들. 그 기억들이랑 함께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었어.

어때, 답이 좀 됐어?”

 

“…그래. 고마워…”

 

“전혀 답이 안 된 것 같은 얼굴인데…?

사령관은 나랑 함께 있는 게 별로인 모양이지?”

 

“아..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레오나 같은 미인이랑 함께 있으면 아직도 떨리는 걸…”

 

“흐음…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네.

아무튼, 나중에라도 소원이 생기면 말해. 내가 들어줄 테니까.”

 

“그래… 고마워.”

 

기억을 덮어 씌우는 기억이라… 내게 그럴 만한 기억이 있을까? 리앤과의 기억을 잊을 만큼 커다란 기억이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른 모든 것들은 잘 하는 것 같지만, 리앤에 대한 생각만 나면 유독 머리가 하얘진다. 아무것도 못할 만큼 하얗게 변해간다. 다시 한 번만 만나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조금 쉬다 보니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아무리 레오나가 일을 처리해준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내 일을 전부 맡길 수는 없었다. 기지개를 쭉 펴고 내 할 일을 마무리 했다. 레오나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조금은 안심한 표정이다. 

 

 

 

 

 

 

몇 시간이 지나고, 레오나의 일일 부관 업무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 동안 많이 친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레오나와의 관계도 많이 호전되었다. 비단 레오나뿐만이 아니었다. 마리나, 메이나, 여러 지휘관 및 부관들과의 사이도 좋아질 수 있었다. 정말 그 동안 리앤만 편애했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일을 마무리한 레오나가 내가 가벼운 키스를 건내고 사령관실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레오나?”

 

“응? 왜?”

 

“나, 그 소원권 한 번 쓸 수 있을까?”

 

“뭔데? 드디어 내용을 정했어?”

 

“그… 오늘 밤에는 나 혼자 보낼 수 있을까…?”

 

“흐으음…? 내용이 심히 맘에 안 드는데? 사령관?

왜 그런 소원을 택한 건지 이유는 알아도 되겠지?”

 

“그… 그냥 요즘 너무 많이 상대하고 있어서 좀 힘들기도 하고…

대신 다음에 레오나 차례가 되면 원하는 대로 해줄게. 와인도 좀 가지고 오고.”

 

“…뭐, 그런 이유라면 됐어.

대신, 나중에 할 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사령관.”

 

“그래. 기대하고 있어도 돼.”

 

레오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령관실을 나갔다. 밤에 혼자 보내고 싶다라… 하나 빼고는 전부 사실이었다. 요즘 들어 상대하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져서 힘들긴 하다. 닥터가 보내주는 초강력 정력제(실제 이름이 이렇단다. 닥터의 네이밍 센스는 참 신기할 따름이다.)를 먹고는 있지만, 포이나 앨리스나… 이런 애들이랑 하기 시작하면 이길 수는 있어도 점점 감당이 안 된다. 다음 레오나 차례가 되면 잘 해줄 수 있다. 자원 탐색에서 꽤 커다란 와인 창고도 발견되었다고 했고, 그러면 다음 번에는 분위기 좋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딱 하나. 밤에 혼자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리앤이랑 같이 몰래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지금까지는 타이밍도 그렇고, 차마 밤에 아이들을 거절할 수 없었다. 리앤이랑 단 둘이서만 보낸 밤이 족히 세 자리가 넘어갈 테니, 이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가 지금까지 온 것이다. 나도 레오나에게 부탁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 했지만 잘 넘어가서 다행이다.

 

… 리앤이 부디 잘 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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