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1169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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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밤에 잠들기 직전의 리앤이 패널로부터 알림을 받았다. 씻기도 귀찮고, 누굴 만날 일도 없었기에 대충 몸에 물만 묻히고 자려했던 리앤은 알림을 받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령관의 호출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리앤. 이렇게 문자로 보낸 건 오랜 만이네.]

 

그 동안 둘은 이런 통신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닥터가 만든 오르카 호 내부 통신망을 이용하는 이상 통신 로그가 서버망에 기록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흔적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지휘관들이 전부 나서서 리앤과의 통신을 막아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휘관들이 사령관에 대한 분노는 잠재웠을지언정, 리앤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은 아직까지도 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령관이 그 모든 위험을 무릎 쓰고 리앤에게 말을 걸었다.

 

[긴 말 하지 않을게.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줘.]

 

거진 열 달 만이었다. 무려 3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사령관과 철저히 분리되어 살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령관이, 왓슨이 자신을 불렀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당장’. 저 한 마디가 리앤을 미칠 듯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모습을 본 리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펑퍼짐한 잠옷에 아무렇게나 산발이 된 머리카락까지. 아무리 사령관이 당장 오라고 했지만 이 꼴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리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다. 사령관이 이상하리 만큼 좋아하던 와이셔츠, 몸매가 부각되서 좋다고 했던 멜빵에, 검은색 바지, 또 왠지 모르게 어울린다고 꼭 허리에 두르고 오라고 했던 시티가드 저지까지. 자신에게 있어 그저 평범한 옷들이었을 뿐인데도 사령관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좋아해 주었다. 산발인 머리카락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사령관실로 뛰어가면서 대충이라도 땋을 수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우고 있던 반지. 그 반짝이는 반지를 끼고 곧장 사령관실로 달렸다. 그곳에서 사령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리앤의 머리는 가득 찼다. 가슴 한 켠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있었지만, 리앤은 그것을 의식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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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의 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 너머에서는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숨이 차서 나는 숨소리 반, 기대되고 긴장돼서 심호흡하는 숨소리 반. 절묘한 균형을 이루면서 달콤한 숨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리앤이 틀림없다. 나는 조용히 방 문을 열었다.

 

“리앤…”

 

리앤은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내 품에 안겼다. 어찌나 열심히 달려왔는지 머리는 땋다 말았고, 매끈하고 하얗던 피부는 조금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눈에는 꼭 나만큼 짙은 다크 서클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래도 언제나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초록색 눈은 변함 없이 이쁘다.

 

“왓슨, 보고 싶어서… 정말 너무 보고 싶어서…

… 내 얼굴 엉망이지..? 너무 급하게 왔나 봐…”

 

“아니. 여전히 이쁜 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좀 쉴래?”

 

“아니… 그냥 계속 안고 있어줘…

어딜 가도 내 남편 품이 제일 편하더라고…. 왜 그걸 이제 알았을까…”

 

“남편… 그래. 내가 리앤의 남편이었지…”

 

자꾸 내 품 속으로 파고 들려는 리앤을 보면서 가슴이 찟어질 것 같다. 그 동안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또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리앤의 체취는 여전히 향기로웠다. 

 

 

“왓슨…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 너무… 너무…”

 

벙어리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리앤을 보면 나도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을 참고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유일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지금, 그냥 사랑하는 남녀 단 둘이 있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

 

“미안… 그 동안 너무 못 챙겨 줬지?

앞으로는 좀 잘 챙겨 달라고 말해야겠네…”

 

“아냐아냐아냐, 나 괜찮아. 괜찮아.

그냥 왓슨만 옆에 있어줘… 그거 하나면 충분하니까… 제발…

여기에 있는 누구도, 어느 누구도 왓슨이랑 있었던 일을 함께 기억할 수는 없단 말이야…

왓슨 한 명이면 다 돼… 그니까 제발…”

 

내 품에 안겨서 계속 내 체취를 가져갈 듯이 맡고 있던 리앤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리앤의 눈물이 내 옷을 적시고 땅에 흘러내렸다. 그런 리앤의 모습을 보면서 한 팔로는 리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다른 팔로는 리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리앤… 그 반지, 아직도 껴주고 있구나.”

 

“훌쩍… 반지..?

당연하지… 왓슨이 준 선물이니까…

그리고… 내가 왓슨의 아내라는 증거니까….”

 

 

… 나는 이제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준 사랑의 표증이라 생각했던 것이 리앤에게는 끔찍하게도 들러붙는 저주가 되고 있었구나. 리앤과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서로 웃고 떠들고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내가 나의 위치를,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잊고 살았구나. 나는 그냥 리앤에 대한 사랑을 아무렇게나 던진 거였구나. 지금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 자원이 풍부했다면? 리앤 말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서약 반지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다른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조용히 서약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창한 사령관 같은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저 리앤과 행복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준 리앤에게도, 또 그 만큼 나를 아껴주던 다른 아이들에게도, 무엇보다 리앤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나에게도 되돌릴 수 없는 멍청하고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리앤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리앤… 그 반지…

이제 버리자.”

 

“… … 어?”

 

“그 반지. 그거 때문에 힘들어 하지마.

그냥… 버리자.”

 

“…뭐? 아냐아냐아냐아냐아냐아냐아냐

하나도 안 힘들었어. 왜 그러는 거야. 나 때문이야? 내가 잘못했던 거야? 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 제발 그러지 마. 제발제발제발제발….”

 

“리앤… 제발… 부탁하고 싶은 건 나야…”

 

 

“왜 그러는 거야 왓슨, 내가 싫어진 거야? 갑자기 그… 그러면 내가 뭐라고 말 해야 하는 거야…

나… 왓슨만 생각하면서 거의 일 년을 보냈어. 누구한테도 주기 싫은 내 남편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버틴 건데…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리앤은 거의 빌다시피 하는 자세로 나를 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리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나 때문에 너도 고통 받았던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내 손으로 끝내게 해줘.”

 

“아냐아냐아냐. 나 안 힘들었어. 힘들어도 왓슨 얼굴만 생각하면 힘이 났는 걸

그래서 버틴 거야… 그래서… 그래서… 

…. 제발… 왓슨… 날 버리지 마…”

 

리앤은 자신의 팔로 내 목을 감싸 안으며 울었다. 안고 있다기 보다는 매달려 있다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내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리앤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리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조금은 편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난 너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그냥… 조금 힘들었을 테니까 짐을 내려 놓으라는 뜻이었어…”

 

 

“…안 돼… 왓슨. 나… 제발…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 미안해. 그 동안 너무 힘들었지.”

 

“… 왓슨..”

 

“이제 우리 둘 다 그만 하자.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 거. 이젠 그만 보고 싶어.”

 

“…”

 

리앤은 계속 내 품에 얼굴을 숙인 채로 훌쩍이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디 선가 고요한 고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다. 최신식 잠수함과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 시계의 시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만 고요하게 방 안을 채우고 있다. 리앤의 온기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이제 그 온기를 내게 전해줄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리앤은 자신의 손으로 내 옷을 붙잡으면서 간신히 버티며 서있었다. 그렇게 절박하게 잡고 있는 손을 쥐어줄 용기가 없었다. 내게 셀 수 없이 많은 행복을 주었지만, 정작 나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다.

 

“… 리앤. 

어쩌면 이렇게 끝날 거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

 

 

 

 

“아… 안… 아니야…

난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왓슨… 아니, 사령관님… 제발…”

 

그녀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을까…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저릴 듯이 아프다. 내가 조금만 더 고민했더라면, 하다 못해 조금이라도 늦게 서약을 했다면 이런 결말은 아니지 않았을까. 

 

내 옷자락을 찢을 것처럼 붙잡고 있던 리앤의 왼손을 잡았다.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직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리앤은 나를 계속 붙들고 있었다. 팔에 착 달라 붙는 와이셔츠. 몸의 물기를 아직 다 닦지 못했던 까닭인지 와이셔츠 너머의 리앤의 하얀 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리앤이 팔에 얼마나 강한 힘을 쥐고 있었는지도, 얼마나 떨고 있는 지도 전부 보였다.

 

 

“리앤… 놔줘.

나도…

… … 아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줘. 제발.”

 

“사령관님… 이… 이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거에요…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저도 부관할 수 있을 거에요… 아니면…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 지금이 지나면 나는 또 아득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리앤을 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스틸라인의 말단 브라우니보다도 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서약을 취소한다면, 그렇다면 어쩌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편애로 일어난 것이니까.

 

“사령관님… 제발…

저… 저는 더 버틸 수 있어요. 앞으로 며칠이고, 몇 달이고 더 버텨볼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것만은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왓슨이라고도 부르지 못하는 처량한 모습. 언제나 내게 친구였던 그녀에게도 이젠 내가 사령관으로 보이는 것 같다. 

… 다행이다. 나는 사령관이고, 너는 내 부하. 그 정도 관계여야만 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관계. 늘 흘러가는 일상처럼 무미건조한 관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이상적인 관계. 내가 모두를 품을 수는 없기에 나는 아무도 품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리앤. 하지만 이제 ‘가장’ 사랑해줄 수는 없었다. 모두를 똑같이 아껴주어야 했으니까.

 

“저… 지금까지 아파도 계속 버텼어요…

식당에서 누군가가 저한테 물을 뿌렸을 때도, 복도에서 계속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 때도…

그 때마다 계속 반지를 보면서 버틴 건데… 근데… 그렇게 가져가버리면…”

 

그 고통도 이제는 끝날 것이다. 사령관에게 꼬리치는 굴러온 돌이란 누명도 이제 벗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통의 근원은 내 사랑이었으니까, 그 사랑만 모두의 눈 앞에서 치워준다면 그걸로 될 것이다.

 

“… 미안해. 리앤.

여기서 끝내줘….

이젠 버티지 않아도 돼.”

 

“사령관님…

… 그럴 거면 왜 저를 만드신 거에요?

그 기억들은 왜 남아있게 한 거에요?

왜… 왜 그렇게 사랑해준 거에요…

왜… 왜 나였어야 한 거에요? 그냥… 그냥 전부 잊어버리게 만들었으면 …

그랬으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을 텐데…”

 

“…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리앤.”

 

“사령관님이 떠날 때까지 함께 했었던 모든 순간들이 전부, 전부 메모리에 남아 있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그 때 기억만 떠올리면 참을 수 있었는데…

이젠… 이젠… 그것도 안 되는 거에요?”

 

 

내가 눈물이 날 정도로 구슬프게 매달리는 리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어색해질 정도로 거리감이 드는 말투, 처량하게 떨리는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동시에 서스럼 없이 나를 남편이라 말해주었던 예전의 모습들이 투영되고 있었다. 그 이질감에서 또 다시 상처의 쓰라림이 올라서와 견딜 수가 없었다.

 

아픈 곳을 손으로 가리면 조금은 아픔이 진정되는 것처럼, 내 마음의 공허함을 가리고 싶어 리앤을 안아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으로 안아주었지만, 그리 강하게 안을 수는 없었다. 더 강하게 상처를 누르면 상처가 덧나면서 더 벌어질 것만 같았다.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꽉 안아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나도, 리앤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추억들… 내게도 소중한 추억들. 그것들까지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 리앤에게 반지의 의미가 그런 것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냥 반지일 뿐인데, 그냥 평범한 보석 조각이었을 뿐인데, 리앤이 그것에 이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나는 그냥 리앤을 방치해두고 있었던 건가? 

… 나도 조금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리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VR 세계에서 처음 만난 날이나...

… 현실에서 처음 만난 날.”

 

 

 

 

“…”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조금 어안이 벙벙했어, 

즐거운 토모가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너가 나를 알아봐 주었던 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

VR 속에서 너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이 허사가 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기억을 함께 해준 친구를 잃지 않은 거였으니까.”

 

“… 왓슨…”

 

“나도 너처럼 그 추억들이 소중해.

나도 너가 보고 싶었을 때마다 너를 만난 그 날을 계속 떠올리면서 참을 수 있었어.

너가 나와 VR에서 헤어지기 전에 건내줬던 유전자 정보가 내게는 어떤 것보다 소중했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그랬…었지…”

 

“닥터가 말해주지 않았었나? 그 때는 널 다시 보지 못할 줄 알고 엄청 우울해있었는데.

그래서 너가 내 목을 볼펜으로 찔러줬을 때, 그 때 너무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어.”

 

 

“… 그 얘기는 왜 하는 거야…”

 

“… 그러게. 그냥 그 때 생각이 나네.

의자를 돌려서 너를 봤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안기고 싶었던 걸 겨우 참았던 거, 알고 있어?

천채 형사님이니까 내 표정을 봤으면 그 정도는 알고 있었을려나?”

 

 

“… 몰라. 어땠는지 나도 모른다고…”

 

“그래… 몰라도 상관없어.

그 때 너는 누구보다 리앤 같이 대답해줬으니까.

날 보고 왓슨이라 불러줄 수 있던 사람은 너 뿐이었으니까 너가 누군지는 나도 다 알 수 있었어.

그러니까 몰랐어도 난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금 리앤이 나와 함께 했던 그 리앤이란 사실이니까. 내 소중한 리앤.”

 

“… 그래서…?”

 

“… 그냥… 그렇다고.

너도 그랬고, 나에게도 그랬고. 둘 모두에게 소중한 기억이 있는 거잖아?

그럼 우리 둘에게는 서로만의 비밀이 있는 셈인 거지.

안 그래?”

 

“…”

 

“… 리앤은 서약할 때 ‘약’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약속’할 때에 ‘약’이래.

그럼 우리에겐 이미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약속이 있는 거 아니야?

서로의 추억을 소중히 하자는 약속 말이야.

그거 하나면 반지가 없어도 충분한 데, 그걸 왜 몰랐을까?”

 

 

“사령관…

…”

 

 

“… 너가 내게 유전자를 건내주었을 때 내겐 그것이 우리 둘만의 서약식이었어.

반지도, 분위기도 없었지만… 

그래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장 소중했던 서약식 말이야.”

 

 

 

“…정말이지…

왓슨은… 말만 잘해…”

 

리앤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표정을 보니 나도 조금은 편안해졌다.

 

“… 너무 내 생각만 말한 건가..?

리앤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 바보…”

 

 

잔인할 정도로 긴 침묵 끝에 리앤은 손끝에서 힘을 뺐다. 이젠 아무런 저항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손에 달려 나오는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반지를 끼고 있었던 흔적이 리앤의 손가락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반지의 라인을 따라 유독 빨개진 피부는 이젠 보기만 해도 쓰라려 보였다.

 

 

 

 

“… 사령관…

… 아니지. 

… 왓슨.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리앤이 나를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여전히 볼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었다. 빨갛게 부어버린 코와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 입이 리앤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그래도 그 눈만큼은 여전히 아름다운 초록빛이었다.

 

“… 그래. 뭐든지.

… 어?”

 

리앤은 작게 숨을 들이 마시더니, 이내 나를 침대 위로 밀쳤다. 푹신한 침대 위로 내가 쓰러졌고, 리앤은 내 위로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지고 왔는지 수갑을 들고 한 쪽에 자신의 팔을, 반대 쪽에 내 팔을 채웠다. 꼭 서약했던 그 날처럼 리앤과 내는 서로의 몸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겹쳤다. 리앤의 가슴이 나를 조심스럽게 누를 때 리앤의 심장 고동 소리가 내게까지 들리는 듯 했다. 전보다는 조금 느린 박동이었다.

 

한참을 얼굴을 내게 묻고 숨을 쉬던 리앤은,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러다가 진정이 되었는지 나를 올려다 보면서 물었다.

 

 

“왓슨은… 날 사랑해…?”

 

서로의 몸을 겹치고 있었기 때문에 리앤이 얼마나 떨면서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파르르 떠는 목소리와 함께 힘겹게 들고 있는 리앤의 고개도 떨렸다. 그런 안쓰러운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리앤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사랑해.”

 

 

“…

… 정말이지…?

나... 내 기억을 함께 해줄 사람이 왓슨 말고는 없어…

왓슨이 날 버리면…”

 

“안 버려.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어…

너가 싫어해도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줄 거니까.”

 

“나… 전투에도 별로 도움 안 될 거야…

평소에 다른 애들이 막 손가락질도 할 거고…”

 

“그건 리앤 때문이 아니라

리앤만 사랑했던 나 때문이지.

그리고 리앤은 전투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이 도와주고 있잖아. 그거면 난 충분해.”

 

“그리고… 나, 왓슨 많이 못 보면 땡깡 피울 수도 있어.

막 울고, 버둥거리면서 왓슨 귀찮게 할 수도 있는데…”

 

“부탁이니까 제발 그렇게 해줘.

나도 리앤이 없으면 사령관 그만 둘 거니까.

그 때가 되면 리앤이랑 같이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난 좋은데.”

 

 

“… 진짜… 말만 잘해…

그래… 오늘이 마지막인 거지?

왓슨한테 남편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은…”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럼, 마지막으로 말해야겠어.

… 사랑해줘서 고마워. 

사랑하는 내 남편.”

 

리앤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키스했다. 그 동안 내가 바래 왔던 것처럼 진하게, 세상 어떤 키스보다 달콤하게 리앤은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혀로 서로의 입을 핥으면서 서로의 타액으로 여러 은빛 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리앤의 초록색 눈동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웃고 있었다. 그런 리앤의 얼굴을 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꼭 처음 함께 잤던 서약식의 그 날처럼 서로가 내뱉는 숨으로 숨을 쉬며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못할 키스를 나눴다. 수갑이 채워져 있는 팔로도, 그렇지 않은 팔로도 서로의 손을 애정이 넘칠 듯이 꽉 쥐면서 오직 혀로만 나누는 대화를 몇 십 분 동안이나 계속했다.

 

 

 

“..! 푸하아… 하아… 하아…

왓슨… 날 숨 막혀 죽게 할 셈이야?”

 

“그치만 리앤을 보니까 참을 수가 없는 걸 어떻게

혹시 싫은 거야?”

 

“... 으… 왓슨은 이럴 때 꼭 짓궂은 질문을 한다니까.”

 

“그럼 싫어하지는 않는 걸로 알면 되겠지?”

 

“… 그래… 그러면…

…읍!”

 

리앤이 말을 마저 마치기도 전에 입에 혀를 집어 넣었다. 함께 말하며 오순도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렇기에는 오늘 밤이 너무 짧다. 내일이 되면 또 헤어져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수록 리앤을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마음이 자라났다.

 

조금 무례하게 리앤에게 혀를 넣었지만 리앤은 자비롭다는 이명답게 천천히 나를 받아주었다. 그런 리앤이 사랑스러워서 더 꽉 안으며 키스를 했고, 그럴 때마다 리앤은 계속 내게 자신을 허락했다. 나는 리앤을 안고, 리앤은 그런 나를 받아주고, 그러면 또 다시 더 세게 안고, 이런 것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아마 오늘 밤은 굉장히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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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각하, 괜찮으십니까…?”

 

“나? 멀쩡한데?

마리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것 보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흠흠… 아닙니다. 평소랑 똑같으십니다. 각하.

그냥 오늘이 파혼식이라 그러신지 조금 얼굴에 그늘이 지신 것 같아서…”

 

“내가 뭐 이런 걸로 그러겠어…

너희들도 똑같이 사랑해주고 싶다는 내 표현일 뿐인데.”

 

“그러시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까지야.

내 말대로 지휘관들 몇 명만 부른 거 맞지?

괜히 이런 일 크게 소문 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그건 명령하신 대로 진행했습니다.

오르카 호 내부의 중요 인사 몇 명만 소식을 알렸으니 알아서 참석할 것입니다.

… 저… 각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응? 뭔데?”

 

“그 반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반지는 파혼식에서 부숴버릴 거야.

이거 때문에 너희들도 마음 고생 심했을 거니까, 그냥 내가 나서서 부숴버려야지.

탐색에서 이걸 찾아온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군요… 조금은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현명한 결정이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후우… 나도 고민 많이 한 거야.”

 

“…

각하.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그… 리앤이라는 자도 이 결정에 동의한 겁니까?”

 

“… 그걸 파혼식하는 당일 날에 물어봐서 어쩌려고…

그래. 동의해줬어.

내가 직접 설득했으니까.”

 

“각하께서 직접?

…힘드신 결정을 하셨군요.

그래도 어쩌면 그게 가장 효과적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랬지.

너희들이 직접 가면 걔한테서 반지를 뺏는 것과 다름 없었을 테니까.”

 

“저희들 때문에 괜한 일을 하시게 만들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죄송할 것까지야…

그리고, 이 일은 결국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거였잖아. 그래야 좋게 끝나겠지.”

 

“알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이럴 때도 참 영민하시군요.

저는 그 점이 좋습니다.”

 

“칭찬 고마워, 마리.

그럼… 나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말씀만 하시죠.

제가 가능한 거라면 뭐든 못 해드리겠습니까?”

 

“그.. 별건 아니고,

그냥… 파혼식 하기 전까지만 리앤이랑 같이 있을 수는 없을까?

좀 미안한 것도 있고… 뭐… 그냥 그런 거 있잖아.”

 

“… 후우… 각하께서 원하신다면 못할 건 아니겠습니다.

파혼식이 진행되기까지 30분도 안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면 난 충분해.”

 

“…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마리는 패널로 리앤을 호출한 다음 사령관실 밖으로 나갔다. 예전에는 리앤 이름만 들어도 섬뜩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마리였는데, 이제는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파혼식을 진행하겠다는 내 의견을 들었을 때 모두가 찬성했었다. 누구 한 명만을 편애한다고 오해할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겠다는 내 결정이었고, 이를 들은 지휘관들은 모두 적극 지지했다. 그 때부터 리앤에 대한 여론도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좋아졌다기 보다는 동정의 여론이 조금씩 생겼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까. 평소의 활기찼던 리앤의 모습도 눈에 띄게 자주 보이게 되었다. 아직은 그리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가끔씩이라도 시티가드의 회의에서도 볼 수 있었고, 운이 좋은 날에는 복도에서도 마주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애정 표현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사령관. 안에 있어?

들어가도 될까?”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리앤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우울하지만, 그래도 당찬 목소리. 아니면 힘이 들어가 있지만, 조금 우울해하는 목소리. 둘 중 어느 것이 더 어울릴 지 모르겠다.

 

“그래. 들어와.”

 

리앤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딱히 복장 같은 것이 따로 있지는 않아서 파혼식을 한다고 했지만, 처음 보았던 리앤의 옷 그대로였다. 와이셔츠에 검은색 바지. 그래도 여전히 이쁘다. 

 

리앤의 왼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었던 서약 반지가 리앤의 약지에 얌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리앤에게 반지를 주었던 그 날, 그 순간과 지금 같은 것은 여전히 빛나는 저 반지의 보석뿐일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왓슨…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슬프네… 헤헤”

 

내 얼굴을 보자 또 울먹이기 시작하는 리앤. 아무리 좋은 말과 행동으로 덮어주려고 해도 나의 미숙함이 만든 상처를 전부 아물게 하지는 못한 것 같다.

 

“… 이리 와서 앉아.

사령관실 소파는 꽤 커서 옆구리가 많이 시리더라.”

 

“… 고마워.”

 

리앤은 짧게 대답하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내 어깨에 기댄 채 몸을 붙일 수 있는 만큼 붙였다. 

 

“왓슨… 숨결이 너무 거센 거 아니야?

다 느껴진다고.”

 

“너만 옆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걸.”

 

“진짜. 말은 잘해. 우리 왓슨은.

… 이 반지랑은 이제 진짜 안녕이네.”

 

“그러게… 기념품으로라도 놔두게 할 걸 그랬나..?”

 

“아냐. 괜히 보면 마음만 더 붕 뜰 테니까.

이 반지는 나를 위해서라도 없애줘. 왓슨.”

 

“그러자. 그럼….

손… 내밀어 볼래?”

 

리앤은 나를 보고 웃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상태로. 나는 오른손으로는 리앤의 손을 지그시 잡았고, 왼손으로는 리앤의 손에 걸려있는 반지를 빼냈다. 마치 서약식 때의 장면을 반대로 돌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들어왔던 반지를 이제 다시 부드럽게 빼내고 있었다. 그 자리엔 아직도 아물지 않은 빨간 피부가 반지의 위치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빼낸 반지를 조용히 탁자 위에 두었다. 그 반지가 있던 자리는 오랜 만에 시원한 공기를 맛보았을 것이다.

 

“…왓슨은 지금 기분이 어때?

나는 조금 심숭생숭하네… 히히…”

 

“나도… 마음이 막 편하고 그렇지는 않네.

… 피부는 또 왜 이렇게 빨개…

설마 진짜로 하루 종일 끼고 다녔던 거야..?”

 

“… 그랬었지. 울고 있을 때도, 웃고 있을 때도, 전부 이 반지랑 같이 있었는데…

… 이제는 못 그러겠네…”

 

“그러면 안 아파? 아팠겠는데…

왜 그렇게 미련하게 끼고만 있었던 거야…

하다 못해 목걸이로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좀 편했을 텐데.”

 

 

 

“왓슨.”

 

“응?”

 

“왜 사람들이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지 알아?”

 

“… 왜 그런 건데?”

 

“그건 왼손 약지가 자기 심장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 거래.

이 심장은… 왓슨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거였단 거…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반지만큼은 내 심장이랑 가장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싶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피부가 짓무를 때까지 끼고만 다니면 어떡해…”

 

“… 그러게… 왜 내 손가락이 이렇게 될 때까지 끼고만 다녔을까…

리앤은 바보라서 그런 거 모르겠어… 헤헤”

 

리앤은 자신의 시원해진 손가락을 천장의 전등에 비춰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마치 거기에 반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 반지가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오르카 호에 있는 모두에게 해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손가락의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없을 것이다.

 

“안 되겠다. 잠깐만 기다려 봐.”

 

“어? 왓슨? 어디가?”

 

“구급약 좀 찾아보려고.

계속 그렇게 두면 보는 내가 힘들어.

아, 찾았다.”

 

사령관실에 있는 서랍에서 구급 상자를 찾았다. 이것도 어디서 얼기설기 어설프게 주워온 것이라 그런지 약이나 그런 것들은 없었다. 그냥 깨끗한 거즈 몇 장과 식염수 정도. 그래도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구급상자를 가지고 와 리앤 앞에서 거즈 몇 장을 겹친 다음에 거기에 식염수를 충분히 뿌렸다. 그리고는 리앤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리앤의 손가락 사이는 내 손이 들어가기엔 조금 좁아서 내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 하나만으로 열심히 닦을 수 밖에 없었다. 거즈를 손가락에 쥐고 리앤의 손가락을 반지의 흔적에 따라 닦았다. 빨갰던 흔적이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다.

 

 

“… 이러니까 꼭 왓슨의 손가락이 반지가 된 거 같아.”

 

내 손가락 하나가 리앤의 반지 자국을 온전히 감싸게 되니 리앤이 그걸 보고 반지 같다고 했다. 원래 반지보다 두껍긴 하지만… 그래도 리앤의 얇은 손가락 하나는 내 손가락으로 감쌀 수 있었다.

 

“… 반지 치고는 내 손가락이 너무 두꺼운데?”

 

“조금 두꺼운 반지도 난 맘에 들어.

…”

 

우리 둘 다 말이 없었다. 나는 말없이 리앤의 손가락을 닦아주고 있었고, 리앤은 그걸 자비롭게 받아주었다.

 

 

 

“… 만약에 말이야… 

내가 앞으로 다시 반지가 생각나면…

… 그 때 왓슨이 이거 다시 한 번 해줄래…?”

 

 

리앤이 손가락을 닦고 있던 내 손을 잡아 멈추게 하고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거즈를 치우고 내 손가락으로만 자신의 손가락을 감쌌다. 식염수의 서늘한 기운이 아직 남아있어서 처음에는 약간 차가웠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따뜻해졌다.

 

“…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왓슨?”

 

이 손가락이 리앤의 심장이랑 연결되어 있다고 했었나. 어쩐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얼마든지 해줄게.

반지 자국 또 날 정도로.”

 

 

“고마워. 왓슨…

… 아니. 내 남편.”

 

내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웠는지, 리앤은 정말 환하게 웃었다. 얼마만일까? 이렇게나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는 리앤의 얼굴을 보았던 건. 내가 그 반지의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줄 것이다. 나를 통해 리앤이 그 추억에 다시 잠길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함께 해줄 것이었다. 

…이런 각오는 서약식에서나 어울리지 않을까? 잠깐 든 생각이다. 

 

 

 

 

 

“(각하,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문 너머에서 마리가 말을 걸었다.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지난 건가.

 

“아, 그래. 이제 갈게. 먼저 가있어.

… 리앤. 이제 우리도 가자.”

 

“알았어… 왓슨.

이제 가야지.”

 

우리 둘 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반지는 리앤의 손에서 떠났고, 부부였던 우리 사이는 다시 사령관과 부하의 사이로 변할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래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슬프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다른 모든 아이들과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사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단 한 가지. 그 세계에서 온전히 나와 리앤만이 남아있던 그 순간에 했던 약속만을 가지고서 우리는 방 밖으로 나갔다. 이 길의 끝에는 파혼이 있고, 반지의 끝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서약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파혼식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서약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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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이라고 매운맛만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만든 애호 파혼 문학이빈다.


아무튼 반지 부수고 파혼하면 그게 파혼이지. 그래도 되겠죠?


트루 여친 리앤 애 호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