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호칭을 계속 혼용해서 미안. 앞으로 오르카 호 시점으로 서술될 땐 전 사령관, 로크와 사령관의 시점으로 서술될 땐 철남으로 표기될거야.



06-3


'음, 이번엔 내가 뭘 하려는지, 한 번 맞춰볼래?'


로크는, 전 사령관의 갑작스러운 퀴즈에 답하기 위해, 최대한 머릴 굴려보았지만, 속뜻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한 행동을 자신이 끝맺는다. 사령관이 무슨 일을 벌였고, 무슨 일을 끝맺을지, 로크는 아직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럼 힌트를 하나 줄게. 저 인간은 내가 찾아서, 내가 데려온 인간이자, 지금은 사령관의 위치에 올라서있지.'


15


"뭐..라?"


불굴의 마리는, 그 소식을 듣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전 사령관의 흔적을 찾아, 그가 머물러있던 벙커를 찾았지만, 그곳은 이미 피칠갑이 되어있었고, 같이 있어야 할 로크조차 그곳을 지키지 않고있었다. 마리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전 사령관께선 어디로 가신걸까, 이미 너무 늦었나, 주변에 철충들이라도 있었나, 전 사령관을 그렇게 만든 자는.. 대체 누구일까.


"..당장 그곳의 위치를 말하라, 내가..내가 직접 찾아가보겠다..."



마리는, 힘없이 걸으며 피칠갑이 되어있는 벙커쪽으로 움직였다. 마리는 눈 앞에 닥쳐올, 잔인한 현실을 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괴롭더라도 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벙커가 있는 곳에 거의 근접했을 때 즈음, 브라우니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듣고싶지 않은 비명소리들이 들려오자, 마리는 점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잡고 미친듯이 뒤흔드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 이제 발걸음을 힘겹게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다리야.. 움직여라.'


아, 혹시 브라우니들이 내지르는 저 비명소리는.. 사령관 각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이다 라는 뜻의 비명소리가 아닐까?

그저 피를 흘렸던 것은 산짐승이 달려들어 조그마한 상처가 나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저... 그저, 사령관 각하께서 브라우니들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있어서... 브라우니들이 기쁨의 비명소리를 지른게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다면, 사령관 각하를 다시 모셔야겠다 다짐했다.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노라고.


 

그리고, 마리는 곧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그 광경은, 지옥도가 다름없었다. 수많은 브라우니들의 통곡소리가 들려오는 잠긴 벙커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문 앞의 바닥은.. 질질 끌려가다 끊긴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마리는, 덜덜 떨며 그 핏자국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말라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대로, 마리는 핏자국 앞으로 엎어지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리석었다.

내가 어리석어서, 이 지옥도를 만들었다.

전 사령관 각하를 죽인 것은 철충이였겠지만, 사령관 각하가 죽게 내버려둔 것은, 다름아닌 나였다.


추했다.

자신이 너무나도 추했다.

자신이 매몰차게 내쫓은 그 전 사령관이 그리워, 그의 냄새라도 맡고싶어하는 그녀만이 남았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곤, 다시 한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사령관..각ㄱ흡..사령간...으흑.."


마리는, 겉옷을 벗어서, 그걸 뭉치고 전 사령관의 냄새를 단 한번이라도 맡고싶어, 얼굴쪽으로 가져다댔다. 하지만, 말라붙어있는 핏자국은 옷에 잘 묻지 않았고, 그저 사령관의 냄새만이 났다. 자신이 그렇게나 역겨워하는 전 인류에 가장 가깝고, 다름아닌 자신이 사령관의 자리에 올려준 그 인간의 냄새만이 났다.


그리고, 하늘에서 거대한, 검독수리와도 같은 자가 나타났다.


키이이잉.


그 소리에 소름이 끼친 모든 스틸라인 부대원들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보인 것은.. 


RF87 로크, 전 사령관님과 함께 나갔던 그 로크가 나타났다.



16


"철남님, 잠시 바깥 구경을 조금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오랜만에 석양을 보고싶군요."


철남은, 발광체가 꺼진 로크를 보았다. 로크의 발광체가 꺼졌다는 건, 두가지 뜻을 나타낸다. 각오를 다지고 있거나, 정말로 화가 나있단 말이였다. 철남은 최근 로크가 화날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으므로, 각오를 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로크가 각오를 다질만한 일은, 단 하나의 뜻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르카 호 부대가 찾아왔구나. 며칠 전에 떠난 그 벙커에."


"......"


로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갔다오렴. 그리고, 하고싶은 말을 모조리 뱉어내고 와도 좋아."


로크는, 곧 발광체를 다시금 빛내며 엔진을 가동했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RF87... 로크..."


마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로크가 다시 찾아왔다.


"어디서 추잡하고 더럽고 역겨운 소리가 난다 했더니만은, 역시 너희 더러운 바이오로이드 짐승들이였군."


로크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근엄해졌다. 그의 날개와 몸체는 칠흑처럼 빛났고, 그의 전류는 강하게 주변으로 빠직거리며 번개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심판을 하러 내려온 신과도 같았다. 그의 말투는 한번 더 적대적이게 변했고, 이젠 암컷이 아닌, 짐승으로 격하되었다.

모든 스틸라인 부대원들은, 로크를 목도하고 있었다.


심판을 하러 내려온 번개의 신을.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희 바이오로이드는 대체 어째서, 왜 그랬느냐.. 대체, 사령관 각하께서 무엇을 했다고. 너희는 전장에서 명예를 외치며 죽어간다고들 하던데, 그 명예는 대체 어디에 집어던졌느냐."


"......."


"대답해라."


마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이 열개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로크는 마리에게 다가왔다. 위협적으로 빛나는 날개를 마리의 눈 앞에 들이대며.


"불굴의 마리 4호, 너라면 답할 수 있겠지. 왜 사령관 각하를 내쫓은게냐. 그에 대한 합당한 답을 제시하라."


그러나, 로크에게 돌아온 답은, 침묵 뿐이였다. 마리는 그저 로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었군."


모든게 시원찮다는 듯이, 로크는 하늘로 다시 떠오르며 외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오르카호의 인원들 중 귀가 좋은 자들은, 약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너희 바이오로이드 짐승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스스로의 명예를 내버리곤, 사령관 각하의 흔적을 찾자마자, 개처럼 달려들어 수색하는군! 그 광경이 역겨워 당장이라도 너희들을 태워 마땅하도다! 너희들이 정말 명예를 안다면, 조금이라도 발버둥쳐보아라! 이 죽음의 무도에서 살아남는다면, 너희의 사령관과 함께 순장을 당할 영광을주마.."


로크는, 순식간에 자신의 몸에 전류를 끌어들였고, 곧이어 그 전류들은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거대한 구체가 되었다. 그러자, 마리를 포함한 그 자리의 모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로크를 올려다보았다. 허나, 아무도 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브라우니의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울려퍼졌다.


"저희가.. 이딴식이라 죄송함다..."


하나의 목소리는 열의 목소리가, 열의 목소리는 수십의 목소리가 되어 큰 목소리를 만들어 우는 소리와 함께 넓게 울려퍼졌다. 그러자, 로크는 그 모습을 보곤, 더이상 재미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치며 이제껏 모은 전류를 주변으로 흩뿌렸다.


"..왜,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거지..?"


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로크를 올려다보았다. 로크는, 대답도 아깝다는 듯이 뒤를 돌아 그 자리를 떠났다.

피칠갑이 되어있는 벙커엔, 그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분량이 작다 느껴지면 놀랍게도 맞음. 평소엔 4000자에서 5000자인데 이번껀 3500자야

다음편에 로크가 다녀간 뒤의 오르카호 내 상황을 표현할거라 분량 엄청 뽑힐거같음